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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직후 재일조선인의 경제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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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지난 8월 서강대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박미아 회원이 학위논문 <해방 직후 재일조선인의 경제활동 ; 1945~1950년 암시장을 중심으로>를 직접 요약한 것으로 해방 직후 재일조선인의 생활상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 엮은이


 
해방 직후 재일조선인의 경제활동 

박미아 서울서부지부 회원

오늘날 일본에 거주하고 있는 한반도 출신의 동포들은 ‘재일동포’ ‘재일교포’ 등의 일반적 호칭 외에도 식민지기와 분단 역사를 반영한 ‘재일조선인’ ‘재일한국인’이 정치를 함의를 지닌 채 사용되고 있고, 복잡하고 다양한 존재의 방식을 수렴하고자 하는 의도로 ‘자이니치(在日)’ ‘재일코리안’ 등이 보편적인 용어로 대체되고 있는 실정이다.

본 논문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에 거주하기 시작해 해방 이후에도 귀국하지 못한 채 일본에 정주하게 된 이들의 경제활동을 ‘암시장’이라는 특수공간을 중심으로 살펴본 것이다.

해방 이전부터 일본 사회에서 최말단의 직업에 종사하거나 강제연행으로 인해 전쟁산업에 종사했던 조선인들은 이러한 일본 경제의 중심축이 붕괴되면서 전면적인 실업상태를 맞이했다. 실업 문제는 일본인에게도 동일한 상황이었으나 조선인 대부분은 해방 이전부터 불안정한 직업을 전전하는 상태였으므로 실업과 해고의 비중은 더욱 높아진 것이다.

국가의 역량을 전쟁에 총동원했던 군수산업 중심의 경제구조가 패전으로 인해 괴멸되면서 암시장은 자연발생적으로 나타났던 특이한 장이었다.

일부 자산가 및 엘리트를 제외하면 조선인들 중에서 특별한 기술을 지니거나 교육을 받은 이들은 드물었다. 이들은 암시장에서 식량통제에 나선 경찰과 쌀 몇 말 때문에 사투를 벌였고, 밀조 막걸리를 비롯한 다양한 물자를 판매하면서 귀국과 정주의 전망 사이에서 고심하였다. 재일조선인은 부족한 배급식량의 보충, 귀국을 염두에 둔 임시 생계방편, 혹은 전후 혼란상황을 이용한 일확천금을 노리면서 일본인과 함께 암시장으로 흘러들었다. 암시장은 재일조선인이 정치·사회·경제·문화 전반에서 체감하는 변화를 직접적으로 반영하였고, 향후 재일조선인 생활 전면에 깊은 영향을 끼치는 주요 인자로 작용했다.

해방 직후 단기간 동안 암시장을 둘러싼 재일조선인의 일탈 행동, 민족단체의 이름으로 행한 사리사욕의 충족과 호가호위, 이를 둘러싼 이전투구 등은 실재하였지만 이는 일본인이 선택적으로 강조한 일부의 모습이었다. 암시장은 선악의 경계가 불분명하고, 포장된 명분과는 다른 실리로 작동하는 곳이었다. 암시장의 구조와 활동 인원을 보더라도 재일조선인이 암시장의 주요 세력이 될 수는 없었다. 식민지 역사에 대한 사과나 패전 책임표명의 회피 기제로서, 혹은 선전선동의 대상으로서 암시장이 차용된 측면도 있었다.

해방 이전부터 존재하던 일본인의 조선인 멸시 의식은 해방 이후 암시장을 통해 더욱 강화되었다. 패전 책임을 전가하고, 일본 민중의 원성을 무마하려는 일부 정치인과 언론의 선전선동, 전후 윤리의식 붕괴 속에서 암시장은 ‘모든 사회악의 근원’이 되었다. 암시장을 규제하는 일본 정관계 인사, 경찰들조차 이를 일상적으로 이용했고, 일본인 대다수가 암시장이 없으면 생활할 수 없었다. ‘공인된 불법’이라는 모순이 용인된 곳이 암시장이었다.

이러한 ‘공동 불법’의 장소를 재일조선인이 압도적으로 지배하여 경제교란의 주역이었다는 언설을 유포하고, 그런 인식이 사실인 것처럼 형성해 가는 사회 분위기, 암시장 내 재일조선인의 존재와 역할에 대해 과도한 왜곡이 행해진 일련의 과정에 대해서 기존의 국내 연구에서는 좀처럼 주목하지 않았다. 패전의식과 생존경쟁이 결부된 상황에서 일본인들은 다양한 형태로 가공된 재일조선인의 ‘암시장 신화’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의도된 ‘조선인 때리기’에 공조했다. 이런 인식은 이후 고착화되어 반복, 재생되었다. 예를 들어 2000년, 당시 도쿄도지사였던 이시하라 신타로가 “일본 내의 범죄는 ‘제3국인’에 의해 행해지고 있다”는 발언은 암시장 시기에 생성되고 유포된 것을 그대로 답습한 것이다.

암시장의 이권다툼은 본국의 정정과 연동된 일본 내 조선인 민족 단체의 격한 대립에 숨은 이면을 반영하기도 했다. 단체의 이름으로 배급된 물자를 암시장에 판매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수익은 활동 자금원이 되었다. 표면적으로는 신조국건설의 노선 차이와 사상 대립을 내세웠으나 금전적 이익을 목적으로 반대 진영을 택하는 지도자급들도 있었다. 이런 분열상에는 강력한 반공주의를 내세우며 우파를 지원하고, 교묘하게 분열을 조장하는 일본 정부와 GHQ의 의도도 작동하였다.

한편, 재일조선인은 암시장을 통해 특유의 ‘재일산업’ 형성으로 나아가는 계기를 형성하였다. 조선인의 민족적 특질이 나타나는 물자를 취급함으로써 일본 산업계에서 새로운 분야를 창출한 것이다. 엿과 술, 내장 및 육류가 그런 물자들이었고, 이는 재일조선인이 일본 산업계에서 새롭게 창출해낸 야키니쿠(焼肉 고기구이)업 전개의 시작이 되었다. 제조업 부문에서도 해방 이전과는 다른 경제활동을 펼칠 수 있었다. 해방 이전부터 재일조선인은 고무·플라스틱·섬유·화학·유리·주물 공장 등에서 단순 노동자, 혹은 초급 기술자로 종사 비중이 높았다. 포츠담 선언에 의해 조업 중지가 된 일본인 경영의 군수 관련 공장을 인수하고, 본격적인 제조업에 진입한 것은 이러한 경험이 바탕이 되었다. 재일조선인 상공업자들의 활동은 전후 일본 경제의 회복에 일익을 담당하기도 했다.

별다른 경제활동의 장이 없었던 전후 사회에서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차별과 빈곤을 이겨내며 암시장을 통해 ‘입지전’적인 성공을 이룬 이들도 있고, 암시장 시기와 별다를 것이 없는 하층부 생활을 전전한 이들도 있었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후자에 해당하는 이들이 대다수였던 것이 해방 후의 현실이었다.

본 논문은 해방 직후 재일조선인의 정치적 활동에 중점을 둔 기존 연구들에서 결여된 생활사 부분을 보완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시작하였다. 오늘날 ‘재일산업’으로 인지되는 직업군은 해방 직후의 암시장에 그 기원을 두고 있는 한편, 이 활동의 이면에는 식민지기의 조선인 멸시의식이 악의적 이미지로 강화, 고착되었다는 점도 함께 살펴보고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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