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기사

[논쟁으로 읽는 70년](19) 청년문화 논쟁

1380


ㆍ‘통·블·생’ 청년문화, 저항정신 잃고 한때 ‘생활문화’에 그쳐


▲ 최인호·이장희·양희은 등

1970년대판 ‘아이돌’ 등장

청년들 통기타·청바지 열풍


▲ “청년들 만나서 밤 새워 보라”

최인호, 상향식 청년문화 선언

한완상, 분단·유교 영향 아래

‘대항문화’로서 성립에 회의


▲ 강압적 유신체제와 맞물려

삶에서의 의미 부여 못하고

생활양식으로서 문화에 그쳐


광복 70년 동안 진행된 문화 논쟁 중 가장 큰 논란을 빚은 것은 1970년대 초반 ‘청년문화 논쟁’이었다. 학술 영역에선 이보다 더 중요하고 생산적인 논쟁도 많았지만, 대중적 관심에서 청년문화 논쟁만큼 파장이 컸던 논쟁도 드물다. 논쟁의 출발점을 제공한 것은 1974년 3월29일자 동아일보 기획기사인 ‘오늘날의 젊은 우상들’이었다. 이 기사는 당시 대중들의 관심이 높았던 최인호, 이장희, 양희은, 김민기, 서봉수, 이상룡 등 6명을 젊은 우상으로 선정했다. 이들의 대표자 격인 소설가 최인호는 1945년생이니 당시 스물아홉 살이었고, 코미디언 이상룡은 1944년생이니 서른 살이었다. 20대 청년들이 새로운 아이돌로 급부상했고, 이들의 활동과 문화를 놓고 일대 논쟁이 벌어졌다.


어떤 논쟁이든 가장 중요한 것은 구도와 메시지다. 동아일보 기사는 곧바로 대학 안과 대학 밖의 서로 다른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먼저 대학 밖에선 청년문화를 다각도로 다룬 기사들이 쏟아졌다. 6명의 대중적 인기가 하늘을 찌르던 시절이었기에 신문과 방송은 청년문화에 대한 호의적인 보도들을 연달아 내놓았다. 하지만 대학 안에서는 청년문화에 대한 거센 비판이 이뤄졌다. “딴따라가 우리의 영웅이 될 순 없다”는 주장이었다. 당시 대학 진학률이 20%대였음을 생각하면 자연스러운 문제의식이었다.


▲ 한완상 전 서울대 교수·문학평론가 김병익·소설가 고(故) 최인호(왼쪽부터)

■ 청년문화에 대한 옹호와 비판


청년문화는 흔히 ‘통·블·생’ 문화로 불렸다. 통기타, 블루진(청바지), 생맥주가 청년문화를 상징한다는 의미에서 주조된 말이다. 당시 중학교 3학년이었던 필자의 기억을 돌아봐도, 통기타와 청바지 열풍은 정말 대단했다. 영화로 만들어진 최인호의 소설 <별들의 고향>도 큰 화제를 모았다. 이런 청년문화 논쟁에서 주목할 네 텍스트는 최인호, 한완상, 서울대 ‘대학신문’, 김병익의 글이다.


최인호의 ‘청년문화 선언’(한국일보 1974년 4월24일자)은 청년문화 논쟁의 주인공이 직접 자신의 의견을 표명한 글이다. 이 글에서 최인호는 문화가 선택된 개념이 아니라 생활 그 자체이며, 청년문화는 침묵의 다수로부터 위로 올라가는 상향식 문화라고 주장했다. 그는 고전·권위·위선·남녀차별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우리 사회 청년문화가 태동기에 놓여 있다고 진단하고, 기성세대에게 “그들을 욕하기 전에 한번 가서 밤을 새워 보라”고 충고했다.


당시 청년문화를 가장 체계적으로 연구한 이는 한완상(전 서울대 교수, 사회학)이었다. 한완상은 논쟁이 일어나기 전인 1973년 <현대사회와 청년문제>라는 저작을 내놓은 바 있다. 그는 경향신문 1974년 5월22일자에 ‘청년문화는 창조적이라야’라는 글을 기고했다. 1974년 ‘신동아’ 6월호에 발표된 그의 ‘현대 청년문화의 제문제’는 청년문화의 현실과 한계를 포괄적으로 분석한 글이었다.

한완상에 따르면, 청년문화는 대항문화(counter-culture)의 창조적 의식을 보여주는 문화다. 그는 한국 사회에서 청년문화의 존재 가능성을 회의했다. 분단을 포함한 특수한 정치 상황, 젊은 세대를 존중하지 않는 유교문화, 타율성을 내면화하는 교육제도 등의 영향으로 인해 행동적 대항문화로서의 청년문화는 성립하기 어렵다는 게 그의 판단이었다. 한국 사회에 존재하는 것은 팝송·청바지·고고춤·생맥주·통기타 등으로 대표되는 표피적 청년문화이지, 기성문화에 맞서 이를 극복하는 창조적 대항 정신의 청년문화는 부재한다고 그는 주장했다.


청년문화에 대한 가장 치열한 비판은 대학으로부터 나왔다. 서울대 학생들의 신문인 ‘대학신문’은 ‘지금은 진정한 목소리가 들려야 할 때다’(1974년 6월3일자)라는 글을 통해 청년문화를 통렬히 비판했다.

‘대학신문’은 청년문화를 한낱 말초적 신경을 자극하는 퇴폐 문화, ‘빠다에 버무린 깍두기’와도 같은 현상에 불과하다고 평가절하했다.‘대학신문’은 암울한 현실을 주목해 청년들에게 진취적인 태도와 투철한 민족주의를 가질 것을 요구했다.


이렇듯 청년문화에 대해 찬반 양론이 팽팽했다. 3월 말에 시작된 논쟁은 봄을 뜨겁게 달군 다음 여름이 되어 이내 식어버렸다. 논쟁에 불을 지폈던 문학평론가 김병익(당시 동아일보 기자)은 ‘신문평론’(1974년 11월)에 발표한 ‘청년문화와 매스컴’에서 그 이유로 세 가지를 들었다. 청년문화에 대한 학술적 연구의 부재, 분명한 관찰과 뚜렷한 확신없는 언론의 기사 남발, 그리고 제한된 언론 자유의 현실이 논쟁을 결국 맥빠지게 했다고 그는 지적했다.


▲ 한완상 전 서울대 교수가 경향신문 1974년 5월22일자에 기고한 ‘청년문화는 창조적이라야’. 그는 “청년들은 사회 부조리에 대한 비판정신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 청년문화의 명암


논쟁의 진행 과정을 돌아볼 때 김병익의 평가는 온당했다. 청년문화는 그 실체가 존재했지만, 새로운 의식과 가치관을 제시하는 데까지 나아가지 못했다. 역사사회학적 관점에서 나는 두 가지 생각을 덧붙이고 싶다.

첫째는 청년문화의 등장 배경이다. 1970년대 초반에 우리 사회는 상반된 경향을 보여줬다. 정치적으로는 군사독재인 유신체제가 등장한 반면, 경제적으로는 1960년대 산업화의 결과 성장의 가시적 성과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중산층을 중심으로 한 절대적 빈곤으로부터의 탈출과, 68혁명의 학생운동(1968) 및 우드스톡 페스티벌(1969) 등과 같은 서구 문화로부터의 영향은 청년문화를 낳게 한 경제·사회·문화의 배경적 조건을 이뤘다.


우리 현대사에서 청년문화와 유사했던 현상은 1990년대 초반 ‘신세대 문화’다. 신세대 문화는 1980년대 후반 대량생산과 대량소비가 결합된 ‘한국적 포드주의’의 성립이 가져온 문화적 현상이었다. 이렇듯 경제성장은 문화 변동에 크고 작은 영향을 미친다. 이 점에서 1970년대 청년문화의 등장은 우리 사회의 발전 과정에서 예견할 수 있는 현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둘째는 문화의 본질에 관한 것이다. 문화사회학적 시각에서 문화는 두 형태로 존재한다. 생활양식으로서의 문화와 의미 체계로서의 문화가 그것이다. 1970년대 초반 청년문화는 ‘통·블·생’에서 볼 수 있듯 분명한 자기의 생활양식을 갖는 하위문화(subculture)였다. 당시 10대 중반이었던 필자의 경험을 돌아봐도 형님들로부터 통기타를 배우고 친구들과 함께 청바지를 입고 다녔던 게 선명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하지만 삶에 의미를 제공하는 가치 부여라는 문화의 또 다른 관점에서 청년문화는 숱한 ‘제스처들’로만 존재했지 핵심을 이룰 만한 내용들을 갖추고 있지 않았다. 젊음이 젊음다워지는 것은 청바지를 입고 통기타를 치며 생맥주를 마시는 데 있다기보다는 기성 문법과 관행에 맞서는 새로운 의미와 가치를 추구하고 제시하는 데 있다. 형식의 파괴를 넘어선 내용의 구현이라는 측면에서 당시 청년문화는 적잖이 빈곤했던 것으로 보인다.


1974년 1월에는 유신헌법을 부정·반대·비방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지한 대통령 긴급조치 제1호와 비상군법회의 설치를 규정한 제2호가 선포됐다. 그 해 4월에는 7명의 대학생에게 사형을 선고한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사건’이 일어났다. 한편에서의 유신체제 강화와 다른 한편에서의 청년문화 논쟁은 새삼 역사란 무엇이고, 문화란 무엇인지에 대해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한다.



▲ 서정적 민중가요로 1970~80년대 청년문화 이끈 김민기와 정태춘


▲ 김민기(왼쪽)·정태춘


1970년대 초반 청년문화를 이끌었던 가수들로는 조영남, 송창식, 윤형주, 양희은, 그리고 김민기를 꼽을 수 있다. 이들 가운데 1970~1980년대 학생운동에 큰 영향을 미친 이는 김민기였다. 그가 만든 ‘아침 이슬’ ‘친구’ ‘상록수’ 등은 학생운동권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들에 의해서도 많이 불렸다. ‘상록수’는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 영결식장에서 불려 많은 이들을 뭉클하게 했다.


김민기의 노래들은 민중가요의 선구적 역할을 담당했지만, 1980년대 이후에 만들어진 노동가요와 민중가요들과 비교할 때 훨씬 부드럽고 서정적이다. 학생운동에서 1970년대 긴급조치 세대와 1980년대 386세대가 달랐듯이, 김민기 노래와 민중가요 사이에도 그 내용과 분위기에서 차이가 존재했다. 예를 들어 김민기의 ‘봉우리’는 삶에 대한 심원한 통찰을, ‘철망 앞에서’는 한반도 평화에 대한 열망을 감동적으로 전달한다.

김민기와 함께 운동권과 일반 시민 모두에게 사랑을 받은 가수는 1978년 데뷔한 정태춘이었다. 데뷔곡 ‘시인의 마을’은 청년문화로부터의 영향이 느껴지지만, 그는 도시를 배경으로 한 청년문화와는 달리 ‘장서방네 노을’처럼 시골을 배경으로 하는 서정적인 노래들을 발표해 큰 공감을 얻었다. ‘92년 장마, 종로에서’와 같은 곡에선 민주화 시대의 우리 사회 현실을 생생히, 그리고 열정적으로 노래하기도 했다.


<2015-08-04> 경향신문

☞기사원문: [광복 70주년 특별기획 – 김호기·박태균의 논쟁으로 읽는 70년](19) 청년문화 논쟁


NO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