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 마당, 해방 공간에서 유신까지, 교원 동원의 역사

[편집자주] 대한민국은 혐오와 배제, 차별의 풍조가 만연하고, 각종 극우적 정치 문화가 학생들 사이에 퍼져 가고 있는 위험한 상황이다. 그럼에도 교사들은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한다는 제약으로 교육자로서, 어른으로서 해야 할 말을 하지 못하고 침묵을 강요당하고 있다. 대체 왜 교사들은 이렇게 ‘중립’이라는 미명 아래 입을 닫고 있어야 할까? 정치 기본권 없는 교사들의 삶의 궤적을 좇아가기 위해 한국 현대사 박사 1호인 서중석 성균관대학교 사학과 명예교수를 만났다. 서 교수는 최근의 12.3 비상계엄, 6.3 지방선거, 배재고 사태 등의 일련의 사회 현상을 보면서 이런 시대에 뭐라도 역할을 해야겠다는 마음으로 인터뷰를 수락했다고 밝혔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①] 민주 시민 교육, 현대사에서 길을 찾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②] 쿠데타에 짓밟힌 교원노조와 학교를 삼킨 혐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③] 연속인가 단절인가, 3공과 유신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④] 침묵하는 교실, 역사 왜곡 바로잡을 교권이 필요하다
서중석 교수(서중석): 전교조 교사들은 어떤지 모르겠는데 한국의 지식인들은 현대사는 옛날에 한두 번 내가 읽은 걸로 다 되었다고 여겨요. 이승만, 박정희 나쁜 놈이라고 하면 되고 뭐 더 자세하게 알 필요가 없다는 상당히 희한한 착각을 하고 있어요. 유럽의 사회주의자나 진보주의자들이 갖고 있는 지적 욕구라고 할까. 역사와 철학은 기본적으로 갖춰야 한다는 관념이 우리의 경우는 거의 없어요.
예컨대 지난 12.3 비상계엄 같은 게 닥쳤을 때도 국회 해산 문제가 왜 그렇게 중요하냐, 1972년 10.17 유신 쿠데타나 1980년 5.17 쿠데타 때는 어떤 식으로 진행됐느냐 하는 것을 방송에서도 제대로 다루지 못했어요. 아무것도 모르니까. 한 지상파 방송사가 열흘쯤 지나니까 기본적인 걸 갖춘 얘기를 하더군요. 기자도 어둡고 지식인도 어둡고 다 현대사는 몰라도 되는 걸로 알고 있고 우리가 그 정도로 어두워요.
참 희한한 나라라고 난 항상 생각하는데요. 지금 살고 있는 현대의 역사에 대해서 잘 몰라도 된다는 이상한 생각을 갖고 있어요.
유준선: 보통 ‘한국 현대사’라면 해방부터 다루는데요. 해방 직후 이 땅에서 좌우를 막론한 정치 세력들이 공통적으로 미래 세대에게 바란 것은 무엇이었다고 보시는지요? 다시 말해 이른바 해방 공간에서 조선 사람들은 무엇을 열망했다고 생각하시나요?
서중석: 해방은 혁명적 시대였어요. 정치 혁명 또는 시민 혁명적인 성격도 강했지만 경제적·사회적 혁명이자 문화적 혁명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많은 진보 인사들이 내가 <한국 현대 민족운동 연구2>를 쓰기 전까지는, 또는 그걸 안 봤으니까 그런지 ‘제헌국회가 문제가 많다’, ‘그것은 단정 세력이 만든거다’ 하는 식의 규정을 하는 것을 봤어요.
그러나 실제로는 국회의원 숫자로 따질 때도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아요. 제헌국회에서 만든 헌법에서도 해방이라는 혁명적인 분위기를 상당히 담으려고 한 거예요. 그러니까 북한이라든가 조선공산당, 남조선로동당 쪽만 혁명적인 주장을 한 게 아니라 사실은 한국민주당조차도 토지 개혁에 반대는 안 한 거예요. 그건 놀라운 일이죠. 다른 사회에서는 있을 수가 없는 드문 일이죠. 이렇게 참 엄청난 시대를 우리가 맞이한 것이죠.
그 시대를 요약해서 얘기하면 일제 강점기에 독립운동한 분들이 계속해서 주장했던 것의 연장선상에 있는 건데 “자유, 평등의 사회를 건설하겠다.”는 거예요. 실제로 독립운동가들은 자유보다도 평등을 훨씬 더 많이 얘기했고, 그 점은 해방후도 비슷했어요. 제헌국회 헌법의 전문에는 그것이 ‘기회 균등’으로 나오고 구체적으로 경제와 교육란에 가보면 어떤 식으로 평등 사회를 건설할 건가 이걸 나름대로 얘기하고 있어요.

또 해방 직후에 제일 많이 주장한 것은 민주주의예요. 자유·평등의 사회 건설이라는 게 너무나도 당연하게 받아들여진 것과 함께 다들 민주주의 사회로 가야 한다는 점에는 의견이 일치되었죠. 그건 가장 우익적인 한민당조차도, 그중에서도 송진우조차도 부인을 안 했어요. 좌·우 모두 우리 사회는 민주주의로 가야 한다, 이 점에서도 일치한 것이지요. 다만 내용이 상당히 차이가 나긴 했어요. 좌익은 우익을 조롱하면서 우익들의 민주주의는 “그게 무슨 민주주의냐?” 하면서 자기들 민주주의만이 “진짜 민주주의다.” 이런 주장을 하고 그랬지만 민주주의 사회로 가야한다는 점에서는 모두 일치했어요. 이런 점에서 해방은 인민 또는 민중 또는 국민이 주체가 되는 그런 사회를 건설한다, 이 점에서도 대개 의견을 같이 했다고 봐요.
이것 말고도 모든 사람이 “꼭 이건 이루어져야 한다.”라고 본 것 중 하나가 친일파 청산이에요. 일제 36년, 그때는 36년이라고 했죠. 그때 친일파들이 못된 짓을 너무 많이 했는데 새로운 나라를 세우는데 친일파 문제는 깨끗이 하고 가야 한다는 거죠. 그걸 우파에서는 민족정기라는 말로 표현하고 그랬어요. 결국은 참 어려운 일이었지요. 미군정이 적극적으로 친일파들을 옹호했기 때문에 친일파가 너무 강해졌어요.
다음으로는 토지 문제가 있죠. 한국인 주요 산업은 그때까지는 토지, 농업이라고 볼 수 있거든요. 한국인 대다수가 종사하고 있는 농업이 이제는 경자유전(耕者有田)의 원리대로 가야 한다. 농사짓는 사람이 거기서 나오는 소득을 차지해야지 지주가 또는 다른 사람이 그걸 차지한다는 건 말이 안 된다 하는게 토지개혁이죠.
북쪽에서는 1946년 3월에 토지 혁명에 가까운 급진적인 방식으로 시행을 했어요. 남쪽에서는 논란이 무지하게 많이 됐지만 토지 개혁 자체를 반대하지는 않았어요. 토지를 가진 사람들의 입장을 존중하려는 거였던 거죠.
이승만 정권 초기, 1949년에 이 토지 개혁 문제가 농지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국회에서 아주 활발하게 논의가 됐는데 국회에서 통과시킨 <농지개혁법>은 상당히 농민적인 거예요. 그것이 무서워서 지주들이 굉장히 많은 자기 땅을 팔았어요. 그 당시 방매라고 불렀지요. 남한은 어떤 면에서 저절로 농지 개혁이 된 부분들이 있어요.
그러나 이승만은 이 농지개혁안을 거부했죠. 그러다가 국회 프락치 사건으로 국회가 이제 이승만 손아귀에 들어갔다고 볼 수가 있는 1950년 3월에 <농지개혁법> 개정 법률안을 공포하고 농지 개혁을 실시했는데 아슬아슬했어요. 한국전쟁이 나기 직전이었지. 그러나 남쪽에서도 농지 개혁, 지주의 토지 방매 이 부분은 다른 나라에 비할 때는 상당히 진전된 거라 할 수 있어요. 그런데 그전에는 진보적 학자들이 농지 개혁이 잘못됐다고만 했지, 농지 개혁이 잘된 점에 대해선 이야기하지 않았어요.
유준선: 저도 조봉암이 이승만 정부에서 초대 농림부 장관을 했다는 걸 새삼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이때 토지 개혁이라는 것이 일정하게 진보 세력들의 의견도 많이 반영된 토지 개혁이었다고 볼 수 있겠네요.
서중석: 이승만이 나중에 조봉암을 갈아치우죠. 조봉암은 참 부지런한 사람이에요. 농민들 의견을 듣는다고 전국을 다니면서 농민적인 농지 개혁을 해야 한다고 주장해요. 국회에서도 그렇게 나오고 하니까 ‘이거는 위험하다’ 해서 이승만이 조봉암을 갈아치우죠. 한민당은 또 한민당대로 조봉암을 아주 미워했으니까 갈아치우자는 데 앞장서죠.
그리고 해방 이후의 특징이 또 하나가 있어요. 문자 혁명 또는 문화혁명이라고 볼 수 있는데요. 세종이 훈민정음을 반포한 지 꼭 500년쯤 돼서 한글이라는 게 우리 문자, 국민 문자로 남이나 북이나 정착을 하게 돼요. 이건 굉장한 혁명이었어요. 그러면서 교육이 대거 확장되기 시작해요. ‘배워야 한다’라는 게 아주 대단한 열풍을 일으키게 되죠. 그러면서 교사도 늘리고 여러 가지 조치가 있게 되는 건데 한마디로 이 시기에서 1950년대에 걸쳐 형성된 한글 세대가 우리나라 경제 발전의 주축이 되는 거예요.
이렇게 해방이라는 것은 대단한 역사적 변화를 가져왔는데 그저 많은 사람들은 광복절, 노는 날로 알고 있죠…
또 한국은 반드시 통일정부를 세워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분단은 있을 수 없다는 거예요. 분단은 인간의 허리를 두 동강 내는 것과 같다고 생각했어요. 또 분단은 외세를 등에 업은 치명적인 동족상잔의 전쟁을 불러온다고 우려했어요. 제대로 된 경제 발전을 하기 위해서도 통일이 돼야 한다고 믿었고요.
유준선: 좌우가 공통적으로 민주주의를 주장했다고 말씀하셨는데요. 또 많은 사람들이 경로 의존성처럼 옛날 것을 선호하기도 하고, 서양사를 보면 왕당파와 같은 세력들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해방 이후 전주 이씨들이 없었던 것도 아닌데 어떻게 모든 정치 세력이 민주주의로 합치가 됐는지 궁금합니다.
서중석: 그것은 독립운동의 역사에서 명료하게 드러나요. 1911년에서 1912년에 중국에서 신해혁명이 일어나죠. 그때 한국 독립운동의 주축은 만주에 있었는데 그쪽에서 혁명을 환영하고 자유·평등을 주장하는 모습을 볼 수 있어요.
우리나라도 중화민국과 같은 ‘민국’을 생각했죠. 왕정복고라고까지 할 수는 없지만 고종을 다시 모시기 위해 소수만이 움직이는 모습을 보여요.
그거는 하나의 전략적인 것이라 볼 수 있어요. 그때는 고종을 따르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았어요. 예컨대 3.1운동에서 그 많은 사람들이 만세 운동을 부르는데 고종의 죽음이 상당한 영향을 미쳤죠. 하지만 유림 쪽에서 복벽 운동을 하는 것 외에는 주류가 되지 못했어요. 그런데 유림 세력은 독립운동에서 주축이 되질 못했고, 소수를 제외한 나머지는 고종을 다시 모시자고 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3.1운동이 일어날 때쯤에는 고종의 죽음을 슬퍼하고 ‘우리가 고종의 신민이다’, 이런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더라도 우리는 이제는 공화 체제로 가야 한다는 것이 큰 줄기였죠. 1910년대 이미 독립운동에서 그런 큰 시야가 만들어졌다면 3.1 운동 때는 그걸 구체화시킨거죠. 그래서 여러 임시정부가 세워졌는데 그 임시정부가 다 한결같이 공화정부를 주장한 거예요.
그러니까 복벽 세력이라고 할까? 왕정 회복 세력, 이것은 한국은 아주 미미했어요. 제일 큰 요인 중에 하나는 망국의 책임이 왕정 쪽에 있지 않느냐 이 점이 크게 작용을 했죠. 해방 직후에는 전혀 그건 논란조차도 되질 않았고 다만 영친왕 귀국 문제를 가지고 약간의 얘기가 있었을 뿐이에요.

유준선: 흔히 장면 내각 시절 이승만 정권에서 교원, 공무원을 관제 활동의 동원 대상으로 여긴 것에 대한 반성으로 제2공화국 헌법에서부터 교원의 정치적 중립성은 보장된다고 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승만 정권 시기 교사들은 어느 정도로 어떻게 정부에게 괴롭힘(?)을 당했는지 알고 싶습니다.
서중석: 교사들은 1950년대는 물론 아마 70년대까지도 우리나라에서 최대의 지식인 집단이라고 볼 수 있을 거예요. 군인들이 더 규모는 컸지만 군인들을 지식인 집단이라고 보기는 어려우니까요. 그런데 교사들이 말할 수 없이 수모도 당하고 어려운 일도 많이 겪고 그랬어요. 그 가운데는 선거 때 역할이 상당히 있는데 그걸 구체적으로 써놓은 교사들 증언이 잘 안 나타나요. 정확성에서 약간 문제가 있을 것 같아서 그 부분은 생략을 해야할 것 같아요.
1950년대에 교사들이 제일 괴롭힘을 당한 일이 있다면 그건 동원이에요. 이승만, 박정희는 자신들의 정치권력을 강화시키는 데 동원이란 것을 크게 활용한 인물들이에요. 이승만 때는 여러 가지 형태의 동원이 있었지만 초·중·고 학생들, 대학생까지도 부분적으로는 들어가요. 이제 교사들이 앞장서서 학생들을 데리고 또는 끌고 나와야 하니까 그 점이 이제 제일 괴롭히는 문제였을 거예요. 그런 괴롭힘은 1950년대 내내 동원이라는 형태로 실행됐어요.
제일 큰 동원은 이승만 방식 반공운동의 중심인 ‘북진통일’ 운동 때였어요. ‘북진통일’ 운동의 초기 형태는 1952년에 부분적으로 나타나고, 1953년에 대대적으로 일어나게 되는 휴전 협정 체결 반대 운동 형태로 나타나요. 그다음에는 중립국 감시위원단 축출 등 여러 가지 형태를 띠면서 또 반공·방일 운동과 연결이 돼요.
마지막으로 제일 큰 ‘북진통일’ 운동과 연결되는 것은 재일교포 북송 반대 운동이라는 것인데 이것이 1959년 1년 내내 벌어졌어요. 윤천주 교수가 주장했듯이 이승만 정권의 권력을 강화하는데 ‘북진통일’ 운동은 엄청난 기여를 했어요. 그렇기 때문에 이승만은 권력에서 쫓겨날 때까지 ‘북진통일’을 계속 그렇게 주장을 했지만 그가 물러나자마자 다시는 그 말은 역사에 나타나지를 않아요. 이승만과 함께 사라진 거죠.

또 다른 동원 운동이 있었는데 이승만 이후에도 계속된 동원 운동인데 중요 행사 기념식에 학생들을 동원하는 거예요. 일반 시민이 잘 안 오거든요. 그러니까 학생들을 동원하지요. 국경일 행사가 제일 크니까 그런 데 더 많은 학생들이 동원되는데 이 국경일 행사에서 3.1절이나 광복절에는 뜻이 있는 교사라면 가슴 아픈 문제들이 있었어요.
학생들을 데리고 기념식장으로 집합을 하면 단상에 앉아 있는 자들은 거드름을 피우고 배도 많이 나오고 했는데 그자들이 친일파들이라. 그 친일파들이 독립 정신, 민족 정신 어쩌구 저쩌구 하는 거예요. 그러니 3.1절, 8.15 광복절 기념식을 하러 여기까지 학생들 데리고 온 의미가 이게 어떻게 되느냐, 나는 어떻게 저 단상 위의 사람들을 평가하고, 학생들한테 어떤 가치관을 교육해야 하느냐 이런 어려운 문제에 부닥치고 그랬어요. 참 안타까운 일이었지요.
그리고 또 하나의 동원 행사로는 정부 요인이라고 고위층이 행차를 할 때 학생들을 연두에 서서 박수를 치게 했어요. 이게 언제부터 배운 짓인지는 모르겠는데 그 짓을 참 많이 했어요. 그래서 별거 아닌 자가 지방에 나타날 때도 또는 지방에서 상당히 고위층이라고 하는 자들에게도 이런 일이 일어나고 그랬어요. 어쨌든 간에 이런 식의 동원이 1950년대에 있었어요. 특히 ‘북진통일’ 운동은 도시의 경우에는 거대한 규모로 일어난 것이기 때문에 학생들 동원을 그만큼 많이 해야 했어요.
이거 말고 또 선생님들, 교사들을 어렵게 만든 건 선거에요. 부정선거가 1950년대에 그렇게 많았는데 그 부정선거 투·개표 용지를 세고 한 사람들 일부가 나는 교사라고 생각하는데 그렇게 써놓은 기록을 봤는지 기억이 확실하지 않아요. 그래서 내가 그걸 확정적으로 얘기하지는 못 해요.
1952년 선거부터 아주 심한 부정이 시작되는데 가장 심한 것은 1960년 3.15 부정선거였죠. 그것에 교사들이 관련된 얘기만 약간 얘기할게요. 이승만 자유당 대통령 후보, 이기붕 자유당 부통령 후보 이 두 사람에 대해서 학교 안에서 벽이나 게시판에 사진을 건다든가 자유당을 찍게 하는 분위기를 만드는 그런 걸 하고 그랬어요.

그중에서도 제일 크게 한 것은 이승만 생일을 앞두고 이승만 찬양 글을 쓰게 한 거예요. 전국 초·중·고가 다 했는지까지는 몰라도 내가 초등학교 때 나도 당했고, 나보다 두 살 많은 노무현도 중학교 때 당했다고 해요. 노무현이 쓴 글을 보면 거기서 교사하고 싸운 게 나온다고요. 그러니까 초등학교, 중학교는 확실히 전국적으로 다 한 거예요.
그리고 이승만 생일만 되면 여러 가지 행사도 하고 찬양 활동, 이승만 우상화 활동도 1956년~1959년에 상당히 진행되고 3.15 부정선거에서 절정에 이르는 것이지요. 나중에 박정희 우상화 운동을 이야기하겠지만 이승만도 그런 게 상당히 심했어요.
그리고 드디어 학생운동의 시대가 열리는 거라고도 얘기되는데, 새로운 학생운동이 등장해요. 1950년대 내내 학생운동은 관변 관제 운동으로 학생들이 동원이 된 거거든요. 근데 1960년 2월 28일부터 시작된 학생운동은 그것과는 결별하고 이제는 오히려 권력자들을 비판하고 여러 가지 이슈를 내걸면서 새로운 사회 건설 쪽으로 주장을 하는 것이죠. 학생운동이 그렇게 되도록 만들어준 건 자유당이라고 할 수가 있어요.
예컨대 2월 28일 첫 번째 학생운동이 시작이 되는 건데 경북고가 제일 컸고 몇 개의 대구 시내 고등학교가 움직이거나 움직이려고 했는데 직접적인 계기는 장면 부통령이 대구에 유세 오면서부터에요.
2월 28일이 일요일이에요. 장면이 야당 도시인 대구 수성천에서 부통령 후보 연설하러 오는 날이거든요. 조병옥이는 이미 죽어서 민주당은 대통령 후보는 없어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장면을 얼마나 불쌍하게 생각을 해요.
그러면서 대구는 특히 ‘야당 도시니까 이제 사람들이 많이 모일 거다’ 그렇게 생각할 수 있었어요. 그 전날에 자유당이 최초의 전국 유세를 수성천에서부터 시작했어요. 그런 것도 있고 하니까 자유당에서 학생들이라든가 관리들이라든가 한 명이라도 더 못 가게 만들어야겠다 싶어 가지고, 예컨대 경북고등학교 같은 데는 일요일이었는데 갑자기 학기말 시험을 본다는 거예요. 그때는 4월 1일이 개학일이에요. 그러니까 3월에 시험을 봐야 하는 건데. 그런데 강제로 일요일에 등교를 해 시험을 보라고 한 거지요. 다른 학교도 전부 다 토끼 잡으러 간다느니 뭐 한다느니 이렇게 뭘 하나씩을 줬어요. 그래서 유세장에 못 가게끔 하니까 그걸 사전에 얘기를 듣고서 이건 참을 수가 없었던거죠. 더군다나 그때 대구는 야당 도시니까 기질도 있고 그러니 데모가 시작된 거죠.
두 번째 큰 데모는 3월 8일 대전에서 대전고 학생들이 일으킨 건데 대전에서 시위를 하게 된 것도 똑같은 이유예요. 장면이 거기서 또 후보 연설을 한다고 하니까 참석 못하게 해야 하는 거란 말이죠. 그러니까 이제 교장이 ‘어떻게 하면 참석 못하게 할까’ 하면서 뭘 좀 했는데 학생들이 그것에 반발을 한 거죠. 그러면서 두 번째 큰 시위가 대전에서 있게 된 거예요.
이렇게 윗선의 명령 때문이라고 하지만 교육청이라든가 제일 높은 데인 자유당이라든가 거기에 따라가 가지고 ‘학기 말 시험 보자’ 이러면서 교사들이 동원된 거지요. 그 밖에 3.15 부정선거에 몇 가지 형태로 동원됐다고 돼 있는데 예컨대 교실 같은 걸 이용해서 선거 운동을 하면 학부형들도 와 가지고 보게 하고 한 것들이 있어요.
유준선 편집실장
<2026-08-03> 교육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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