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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들의 의로운 죽음, 선생도 나라도 바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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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다섯 번째 이야기 주제는 4월혁명이다. <편집자>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4월혁명, 여섯 번째 마당] 국민 죽이고 ‘야당 탓’ 대통령, 미국도 안 지켜줬다


[4월혁명, 일곱 번째 마당] ‘참변은 너희 탓’ 떠넘긴 대통령, 결국 쫓겨났다


[4월혁명, 여덟 번째 마당] ‘일본과 일전불사’ 대통령, 속셈은 따로 있었다


프레시안 : 4월혁명에서 교수단 시위(1960년 4월 25일)는 이승만 하야 국면으로 넘어가는 분수령으로 꼽힌다. 이 시위마저 없었으면 지식인들은 정말 할 말이 없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아울러 그 의의를 깎아내릴 의도는 없지만, 제자들을 비롯한 숱한 시민이 거리에서 죽어간 것을 떠올리면 교수들의 움직임이 조금 굼뜬 것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든다.


 


서중석 : 교수 시위를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물어봐야 할 게 있다. 어째서 대학생들이 4월 18일 전에는 시위에 (거의) 안 나섰느냐 (하는 것이다). 그 점이 우선 중요하다. (4월 13일) 마산 해인대학(오늘날 경남대)에서 시위를 하긴 했지만 큰 규모는 아니었다. 4월혁명은 학생 혁명이라고도 하는데 사실 4월 17일까지는 고등학생 중심이었다. (서울에서 최초로 대학생 시위가 전개되는) 4월 18일, 그리고 19일에도 중·고등학생이 참 많이 나온다. 대학생들이 안 나오니까 ‘언니는 나빠요’, 이런 플래카드를 들고 시위를 했다고도 한다. 왜 대학생 언니, 오빠, 형들은 시위를 안 하느냐는 것이었다.


 


이때 대학생이 나오지 않은 건 학기가 4월에 시작했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또 일부 대학생은 ‘우리가 다 하려고 했다. 그래서 4월 18일에 시작한 것이다’, 그런 얘기도 하고 그런다. (그중엔) 맞는 얘기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당시 <사상계>를 보면 ‘대학생은 무기력하고 악정에 체념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런 지적도 나오고 그런다. 우선 당시 대학생은 특권 의식이나 선민 의식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뭔가 중·고등학생하고는 다른 것이 있었다.


 


프레시안 : 어떤 점에서 그러한가.


 


서중석 : 우선 숫자가 참 적었다. 1945년에 7819명이던 대학생이 1960년에 9만2930명으로 늘어났다. 무지하게 늘어난 것 아니냐고 하겠지만, 한 학년에 2만5000명도 안 됐다. 요즘 큰 대학교 두 개 정도밖에 안 되는 것이다. 그때는 대학생이 그렇게 귀한 존재였다. 또 대학생 가운데엔 부모가 (자식을) 군대에 안 보내기 위해 소를 팔아 대학에 보낸 경우도 있었다. 그래서 대학을 상아탑이라고 하지 않고 우골탑(牛骨塔)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1950년대에는 병역 기피 풍조가 만연했다. 1950년대 중반 서울 지역 대학생의 입대율은 10퍼센트 정도였다고 한다. 군대에 보내지 않기 위해 유학을 보내는 부유층도 적지 않았다. <편집자>)


 


대학생 가운데엔 이렇게 해서 대학에 온 사람도 있었다. 1950년대 그 피폐한 사회에서 부모가 굉장히 힘들어하면서 대학까지 보낸 것이기 때문에 그런 부모의 기대를 무시할 수 없는 측면도 있었다. 말하자면 출세해야 한다는 생각을 안 할 수 없었다. 또 당시 ‘명문 여대엔 결혼 때문에 간다’는 얘기도 있었다.


 


이렇게 여러 얘기가 있지만, 많은 대학생이 3.15 부정 선거에 분노하고 있었고 4월 18일, 더더군다나 19일 시위는 대학생이 주도했다는 것을 우리가 잘 알고 있지 않나. 대학생들이 막 나오면서 국면을 결정적으로 바꿔놓은 것 아니냐. 그만큼 대학생들이 큰 역할을 한 것이다.


 


다만 4월 25일, 26일 시위에 대학생들이 조직적으로, 집단적으로 나왔다고 볼 만한 게 많지는 않다. 그때도 더 많은 대학생이 4.19 날처럼 조직적으로, 집단적으로 나왔으면 하는 아쉬움은 있다. 그러나 대학생이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건 거듭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 1960년 4월 19일, 시민을 향해 발포하는 경찰. 4월혁명 전체 희생자(186명)의 약 3분의 2(123명)가 이날 목숨을 잃었다. ⓒ연합뉴스

▲ 1960년 4월 19일, 시민을 향해 발포하는 경찰. 4월혁명 전체 희생자(186명)의 약 3분의 2(123명)가 이날 목숨을 잃었다. ⓒ연합뉴스



용감한 학생들의 양심은 독재의 총구보다 강했다


프레시안 : 1950년대에 지식인들은 무기력하고 비겁했다는 지적이 많다.


 


서중석 : 그런 비판을 참 많이 받았다. ‘도대체가, 1950년대 이승만 정권을 봐라. 비리, 부정부패, 선거 부정, 악정, 폭정, 모든 게 다 있지 않나. 그렇게 문제가 심각했는데 그런 정권에 대해 지식인이, 대학 교수가 얼마만큼 발언했느냐. 통탄하지 않을 수 없다.’ 4.19 이후에 주로 나온 얘기다. 좌담회 같은 걸 보면 1950년대에 지식인들이 너무나 무력한 존재였다고 얘기하는 게 나온다.


 


사실 당시 문화인들 중에서 문단을 좌지우지했다고 얘기되는 사람들 중 일부는 ‘만송족’이라고도 불렸다. 만송은 이기붕의 호다. 김동리, 박종화, 모윤숙, 김말봉 같은 사람들이 ‘이승만과 이기붕이 당선돼야 한다’, 이렇게 신문 같은 데다 글을 쓰고 이 사람들의 당선을 위해 적극 나섰다. 도대체가 이럴 수가 있느냐 해서 사람들이 ‘만송족’이라고까지 부르고 그랬다. 나중에 유신 체제, 전두환 신군부 체제 때 보니까 이 사람들 일부가 또 나서더라. 참, 한국 문단에서 영향력이 있다는 사람들이 이럴 수가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이 안 들 수가 없었다.


 


그리고 자유당 정부통령 선거대책위원회 지도위원이란 게 있었는데, 고려대 총장 유진오를 빼고 주요 대학 총장이 이 지도위원으로 거의 망라돼 있었다. 고려대는 김성수와 관련된 학교이니 민주당 쪽을 지지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얘기할 수 있다. 맥이 그쪽으로 이어지지 않나. 어쨌든 유진오는 빠져 있다. 그렇지만 서울대를 포함해, 김활란을 비롯한 주요 대학 총장들이 다 자유당 정부통령 선거대책위원회에 들어가 있었다. 문인이나 지식인도 들어가 있었다.


 


프레시안 : 언제 봐도 낯 뜨거운, 한국 지식인 주류의 민낯이다.


 


서중석 : 심지어 모 여대 총장은 ‘우리가 학생 지도를 잘못해서 이런 사태가 일어났으니 이승만 대통령에게 사과해야 한다’고까지 얘기했다고 한다. 이 여대는 4.19 시위에 학교 이름으로 참가하지 않았다. (이승만 하야 후) 한 학부모가 ‘우리 딸이 다니는 대학에서 이럴 수가 있느냐’는 항의 편지를 신문사에 보내고 그랬다.


 


하여튼 ‘지식인들이 너무 썩은 것 아니냐’, 그런 이야기가 많았다. 우리나라는 세대 갈등이 아주 심한 나라라고 하는데, 일제 때건 해방 후건 세대 갈등이 그렇게 심했던 데엔 나이 먹을수록 너무 빨리, 너무 심하게 보수화되는 측면 때문에 그런 면이 있다.


 


낯 뜨거운 ‘만송족’, “학생의 피에 보답”한 스승들


 


프레시안 : 4월 25일, 일부 교수들이 떨쳐나섰다.


 


서중석 : 이상은(고려대)·정석해(연세대) 이런 교수들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시기에도 훌륭한 분이 많이 있었다. 4월 25일 오후 3시, 서울대 교수 회관이던 함춘원에 교수 258명이 모였다. 서울대 교수들 월급날이어서 이날로 정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 교수 회의는 아주 중요한 두 가지 역할을 한다. 하나는 거기서 시국 선언문을 채택했다(는 것이다). 시국 선언문에서 학생 데모를 “부정과 불의에 항거하는 민족정기의 표현”으로 규정했다. 상당히 큰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그다음에 대통령 하야를 촉구했다. 정부통령 선거 재실시, 부정 선거 원흉 처단도 요구했다. 대통령 하야를 촉구하는 것이 교수 회의에서 나왔다는 것도 의미가 크다. 이렇게 시국 선언문에는 대단히 중요한 내용이 들어가 있었다. 또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시위를 했다는 것도 아주 중요하다.


 


프레시안 : 이 시위를 거치면서 ‘이승만 물러가라’는 구호가 전면에 등장한다.


 


서중석 : 시위를 처음부터 계획한 건 아니라고 한다. 그런데 회의를 하면서 일각에서 ‘우리가 가만히 있을 수 없지 않느냐’고 하면서 시위가 결정됐다. 그래 가지고 ‘재경 각 대학 교수단’이라는 큰 글씨를 써 붙인 현수막을 앞세우고 시위를 하는데, 그 밑에 성균관대 임창순 교수가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는 아주 유명한 문구를 작은 글씨로 써 놓았다. 굉장히 큰 의미가 있다. 임창순 선생은 5.16쿠데타 나고 (학교에서) 쫓겨난다.


 


이 시위가 이승만 정권을 무너뜨린 마지막 결정타였다고 볼 수 있다. 시위를 한 교수는 300명이 채 안 됐으니 숫자가 많은 건 아니다. 그런데 당시 중고생을 포함한 많은 사람이 ‘계엄령 기간 동안 어디서 시위가 있나’ 하고 주시하며 기다리고 있었다. 거기엔 ‘부랑아’로 불리던 사람들도 많았을 텐데, 어쨌건 교수들이 시위를 하니까 이 사람들이 이리로 확 몰렸다. 그러면서 시위대가 부쩍부쩍 커지고 저녁, 밤이 되면서 규모가 더 커졌다. 그러고는 앞에서 얘기한 것처럼 26일 새벽부터 시위대가 막 모여들고 그랬다.


 


교수들의 시국 선언문과 시위가 너무 늦게 나온 것 아니냐는 얘기를 들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상은·정석해 선생을 비롯해 이 시위에서 주도적 역할을 한 여러 선생들은 그전에도 이승만 정권에 비판적이었고 시위를 조직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해야 한다. 이 시위에 참석한 교수들은 한국의 모든 지식인, 교수가 얼굴에 먹칠할 뻔한 상황에서 그분들을 구해줬다. (그러면서) 지식인이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됐고 이승만 정권에 결정타를 먹였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그 이후에도 지식인들의 궐기를 촉구할 때 ‘4.25 교수 시위를 본받자’, 이런 얘기를 빠지지 않고 하지 않나.


 



▲ 1960년 4월 25일, 이승만 대통령 하야를 촉구하며 거리에 선 교수들. ⓒ연합뉴스

▲ 1960년 4월 25일, 이승만 대통령 하야를 촉구하며 거리에 선 교수들. ⓒ연합뉴스



민중의 힘에 눈뜬 시인 “썩어빠진 어제와 결별하자”


프레시안 : 4월혁명은 한국의 민주화 대장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세계사 차원에서도 의미가 크다. 제2차 대전 후 세계에서 4월혁명 같은 사례는 그리 많지 않다. 한국과 비슷한 처지에 놓여 있던 다른 친미 반공 국가들과 비교해도 그렇다. 그럼에도 4월혁명의 역사적 의의를 사회 전반적으로 충분히 공유하지는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서중석 : 4월혁명이 우리 역사에서 어떤 의의가 있는가. 이건 지금까지 충분히 논의되지 않았다. 그렇게 된 데엔 무엇보다 심지어 3.15 부정 선거조차 연구가 거의 안 됐고 3~4월 시위, 4월혁명에 대해서도 연구가 아주 적기 때문이다. 그리고 4월혁명 이후 한국 사회 변화에 대해서도 별로 주목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부분에 관해 제대로 관심을 갖지 못 하고 민주주의, 이승만 정권 붕괴, 통일 운동 같은 몇 가지를 갖고 의의를 얘기하고 그랬다.


 


4월혁명, (1980년) 광주항쟁, (1987년) 6월항쟁과 같은 민주화 운동은 현대사에서 다 특별한 의미를 갖고 있다. (1979년) 10.26은 조금 성격이 다르긴 하지만 유신 체제를 무너뜨렸다는 데에서 의미가 대단히 큰데, 그 10.26을 부른 게 바로 부마항쟁이다.


 


(민주화 운동은) 그 자체로 특별하기도 하지만 그걸 통해 엄청난 역사적 추진력을 만들어냈다. 그런 역사적 추진력이 생기게 했다는 점에서 민주화 운동이라는 것이 우리 사회가 이렇게 변모하는 데 정말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다. 민주화 운동은 한국 사회를 크게 변화시키고 새로운 힘, 역동성을 부여했다. 그 첫 번째가 4월혁명이다. 그렇기 때문에 4월혁명을 잘 이해하는 것이 다른 부분을 잘 이해하는 데도 시사하는 바가 있다. 4월혁명은 무엇보다도 제2의 해방이라는 말에 값하게 억압으로부터 자유를 다시 갖게 했다고 얘기할 수 있다.


 


프레시안 : 4월혁명 이전, 한국 사회는 어떠했나.


 


서중석 : 1950년대는 무기력, 체념, 암울, 불안, 이런 키워드로 상징된다. 그 시대가 어떤 시대였는가를 이런 말로 나타낼 수 있다. 그야말로 희망이 안 보이는 시대였다. 4.19 선언문에 담긴 것처럼 캄캄한 밤이었다. 무엇보다도 1950년대는 보도연맹 집단 학살 사건, 거창 양민 학살 사건 등 대규모 민간인 학살이 초래한 공포 사회였다. 말을 못 하는, 입을 닫고 묵종해야 하는 사회 위에 건설된 반공 독재로 자유가 크게 억압받았고 인간의 사고, 사상이 심하게 위축됐다. 그 당시 반공 영화에 단적으로 나타나는 것처럼 저질 획일화, 도식화된 면이 컸다.


 


무슨 발언을 하려 해도 주위를 두리번거리면서 살펴야 했다. 이건 (1970년대) 유신 시대도 마찬가지이고 (1980년대) 신군부 시대에도 이와 비슷한 상황이 있었는데, 글 한 줄 쓰기도 어려운 때였다. 어떤 분 표현에 의하면 골방에 갇혀 있는 불안한 시대였다.


 


그래서 4월혁명으로 정말 꿈에도 그리던, 그렇게 갈구하던 자유가 찾아오자 그것을 특히 문화인, 지식인, 학생들이 앞질러 만끽한다고 할까, 누리는 걸 볼 수 있다. 4.19 때는 특히 시인들이 자유에 대한 갈구를 제일 먼저 느끼는 것 같았다.


 


프레시안 : 대표적으로 어떤 시인들이 그러했나.


 


서중석 : 청록파 시인 박두진 같은 사람은 3.15 부정 선거로 마산의거가 있자 마산의거를 강렬하게 지지하면서 이승만 정권을 혹독히 비판하는 글을 발표했다. 4.19가 나기 전인데도 그랬다. 그리고 4.19가 나자 4.19에 관한 시를 여러 편 썼다.


 


김수영은 4월 19일 시위대를 정신없이 따라나섰다고 한다. 제정신이 아닐 정도로, 감격이라고 할까 떨림이라고 할까, (그런 상태에서) 열정적으로 4.19에 참여했다고 그런다. 무작정 뒤쫓아 다니면서, 잡초처럼 버림받고 짓밟혔던 민중이 불끈 일어서는 장한 모습을 보게 됐다. 그러면서 다음 날 아침에 시를 썼고, (이승만이 하야를 발표한) 4월 26일 오전에도 흥분과 환희로 온몸이 떨려 어쩔 줄 모르면서 ‘우선 그놈의 사진을 떼어서 밑씻개로 하자’는 제목으로 알려진 시를 썼다. “우선 그놈의 사진을 떼어서 밑씻개로 하자 / 그 지긋지긋한 놈의 사진을 떼어서 / 조용히 개굴창에 넣고 / 썩어진 어제와 결별하자 / 그놈의 동상이 선 곳에는 / 민주주의의 첫 기둥을 세우고 / 쓰러진 성스러운 학생들의 웅장한 / 기념탑을 세우자 / 아아 어서어서 썩어빠진 어제와 결별하자”, 이런 시다.


 


6월 15일에는, 나중에 젊은 사람들에게 널리 애송되는 ‘푸른 하늘을’을 썼다. “푸른 하늘을 제압하는 / 노고지리가 자유로웠다고 / 부러워하던 / 어느 시인의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로 시작하는 시다. 박두진이나 김수영 말고도 4월혁명에 대한 시인들의 시는 참 많다. 지식인들도 이제는 자유를 찾은 것에 대해 많은 글을 쓰는 걸 볼 수 있다.


 



역사학자 서중석의 진단
▲ “박근혜는 유신의 허깨비가 결코 아니었다”
▲ “박정희 신드롬, 박근혜가 지울 수도 있다”
▲ “<조선> 말대로면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빨갱이”


 


4월혁명이 불러일으킨 새로운 바람


 


프레시안 : 50여 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시인의 떨림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시다. 4월혁명은 그렇게 민주주의의 기틀을 마련했다.


 


서중석 : 그렇다. 박정희 군사 쿠데타 정권조차 4월혁명이 마련한 민주주의의 큰 틀, 이걸 무시할 수가 없었다. (1961년) 5.16쿠데타를 일으키고 나서 석 달이 지난 8월, (정권을 민간 정부에 넘기겠다는) 민정 이양이라는 것을 발표하게 된다. 그 발표에는 미국의 압력이 직접적으로 작용했다고 지적하지만 그와 함께 4월혁명의 큰 힘 때문에 그것을 배신할 수 없는 면이 아주 크게 작용했다고 봐야 한다. 나중에 군정에서 민정으로 이양하는 걸 보면 (민정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박정희가 공표한 1963년) 2.18 선언이니 (군정 4년 연장 문제를 국민 투표에 부치겠다고 박정희가 발표한) 3.16 성명이니 하는 것들이 또 나온다. 이렇게 군정을 장기적으로 펴려고 했지만 못 하게 되는 큰 이유 역시 미국의 압력 못지않게 4월혁명이 또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분위기가 작용한 것이다.


 


박정희는 1972년 10월에 가서야, 자신이 생각하던 강력한 국가를 만들기 위해 이른바 유신 체제를 위한 친위 쿠데타를 일으킨다. 그러니 ‘4월혁명 이념을 완전히 말살하는 데 박정희 정부로서도 무려 10년이 넘는 세월이 걸린 것이다’, 이렇게 얘기할 만큼 4월혁명이 마련한 민주주의의 큰 틀이 우리 사회에 굳건한 힘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프레시안 : 4월혁명 후 사회 곳곳에서 새로운 바람이 분다.


 


서중석 : 4월혁명은 민족 자주에 대한 관심을 강하게 갖게 했다. 그러면서 통일 운동이 강력히 전개되는 걸 볼 수 있다. 교원 노조 운동과 같은 노동 운동도 활발하게 일어난다. 이런 것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으로 법치주의가 자리 잡(기 시작하)는 걸 볼 수 있다. 한 국회의원이 국회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이승만 정권 때는 ‘탈법, 무법이 지배하는 사회다. 깡패의 권력, 주먹이 법보다 가깝다’, 그런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그런데 허정 과도 정부 수반도, 장면 총리도 모두 법에 의해 지배를 받아야 한다는 법치주의 관념이 강한 분들이었다. 법치주의가 자리 잡게 하는 데 4월혁명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공무원 공채 등 공무원 사회에 신선한 바람이 일게 한 것도 있다. 장면 정부에서 이런 바람이 나타난다. 나중에(1979년) 경제 부총리가 되는 이한빈은 ‘성취형 관리가 장면 정부 때 나타난다’, 이렇게 이야기했다. 친일파가 나눠먹는 식으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고 꽉 갇혀 있던 공무원 사회가 4월혁명 후 많이 바뀌기 시작한다. 물론 이건 시간을 필요로 하는 것이었다. 공무원 공채 같은 건 박정희 정부가 그대로 이어받는다. 1960년대 중후반을 넘으면 공무원 사회는 ‘빽’으로 들어가는 데가 아니고 공채로 들어가 능력을 평가받는 곳이 된다.


 


‘생활이 나아져야 하고 우리 경제가 자립해야 한다’, 이런 것도 4월혁명이 열어놓은 분위기 속에서 그야말로 열화와 같다고 할까, 굉장히 강렬했다. 그래서 8월 23일 장면 총리 취임 때 경제 제일주의를 첫 번째로 내세웠다. 1961년에 들어가면 국토 개발 사업을 대대적으로 벌이고 그해 4월에는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이 성안된다. 그러면서 전력을 중심으로 한 인프라 사업을 의욕적으로 벌이는 걸 볼 수 있다. 그런데 불과 한두 달 후에 5.16쿠데타가 일어나는 바람에 이걸 평가하기가 어렵게 돼 버렸다. 그러나 박정희 쿠데타 정권은 경제 제일주의, 국토 개발 사업,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은 그대로 이어받는다. 박정희 정권이 처음에 채택한 5개년 계획은 장면 정부 것을 그대로 베낀 것이라고 하지 않나. 글자 몇 자 수정해서.


 



▲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 ⓒ프레시안(최형락)

▲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 ⓒ프레시안(최형락)


민주화 운동, 한국에 생기를 불어넣다


 


프레시안 : 뒤틀린 역사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았다.


 


서중석 : 4월혁명 후 여러 언론에서 ‘반민주 행위자, 부정 축재자, 부정 선거 원흉, 그리고 마산과 서울에서 또 부산과 광주에서 발포한 자들을 처벌해야 한다. 혁명 입법을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을 강하게 계속 편다. 결국 장면 정부에 와서야 헌법을 급속히 개정해 ‘혁명 입법’을 만들어가지고 특별 검찰부, 특별 재판소도 설치하지 않나.


 


반민주 행위자 1호로 이승만이 오르고 그러지만, 장면 정권이 이걸 제대로 (수행)한 건 아니다. (1960년 10월 8일 서울지방법원은 사형이 구형된 3.15 부정 선거 사범 9명 중 1명에게만 사형을 선고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형을 줄여주거나 무죄를 선고했다. 4월혁명 부상자들은 이에 격분해 국회 본회의장 의장석을 점거하고 혁명 입법을 빨리 제정할 것을 요구했다. 여론이 들끓자, 장면 정부는 그해 말 ‘반민주 행위자 공민권 제한 법안’ 등을 만들었다. <편집자>) 그렇다 하더라도, 이것도 민주주의의 기틀을 세우는 데 역할을 많이 한 것이다. 과거사 청산이란 의미도 있고.


 


과거사 청산과 관련해 무엇보다 중요한 건 거창 양민 학살 사건을 신호로 해서, 제주 4.3 학살을 포함해 한국전쟁 전후 자행된 수많은 학살 사건이 보도된 것이었다. 보통 많이 보도된 게 아니었다. 특히 <영남일보> 같은 지방 신문이 아주 많이 보도했다. 김구 암살, 조봉암 사건 같은 의혹 사건 문제가 연이어 터지고 장면 부통령 저격 사건 문제도 다시 불거지고 그랬다.


 


이와 같이 이승만 정권에서 너무나 큰 잘못을 저지른 것을 바로잡으려는 움직임, 그래서 새로운 출발을 하려는 움직임이 (4월혁명 후) 일어난다. 박정희 정권과 신군부 정권이 이를 저지해, 이 (과거사 진상 규명) 과제는 2000년대에 와서야 구체화된다고 볼 수 있다. 어쨌건 우리 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들이다.


 


이처럼 4월혁명과 같은 민주화 운동은 우리 사회를 변모시키고 사회에 신선한 바람, 역동적인 힘을 부여하고 생기를 불어넣어 새 출발을 하게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런 점에서 4월혁명은 헌법 전문에 마땅히 들어갈 만큼 중요한 평가를 받을 수 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마흔한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프레시안 <2014-05-03>


기사원문: 제자들의 의로운 죽음, 선생도 나라도 바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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