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기사

일본에 짓밟히고,조국에 외면당한 재일동포들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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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쿠라 조선인교회 주문홍 목사가 들려주는 재일교포 실상


이윤옥·김영조







▲ 윤극영의 동요 “반달”을 묘사 ⓒ 이무성 


푸른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에
계수나무 한 나무 토끼 한 마리
돛대도 아니 달고 삿대도 없이
가기도 잘도 간다 서쪽 나라로


약속시간보다 15분이나 늦게 나타난 답사단 일행을 반긴 것은 기타큐슈 고쿠라(小倉)교회 의 주문홍 목사였다. 기타큐슈 생애학습종합센터 31호실에는 주 목사와 답사 이틀째 안내를 맡아 줄 배동록 할아버지 등이 마침 이 지역의 야간 마츠리 행렬에 걸려 일행이 탄 버스가 늦어지고 있음에도 많은 자료를 준비한 채 목이 빠지라 기다리고 있었다. 생애학습종합센터에는 지역주민을 위한 음악, 미술, 외국어 공부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준비하여 평생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60여 명 정도 들어갈 만한 제법 큰 강연실에서 답사단을 기다리던 주 목사는 우리가 도착하자 공손한 인사와 함께 칠판에 큼지막하게 자신의 이름 석 자를 썼다.

그리고는 이내 책상 위에 미리 준비한 윤극영의 <반달> 노래를 함께 부르자고 했다. 뜻밖에 일본 땅에서 오랜만에 불러보는 동요 <반달>은 피로에 지친 답사단의 마음을 편안케 했다. 모두 동심으로 돌아가 정감 어린 목소리로 2절까지 부르고 나자 주 목사의 ‘재일조선인의 현황’이란 강연이 시작되었다.







▲ 반달, 오빠생각을 다 같이 부르는 답사단 


주 목사는 28년간 일본 땅에 살면서 재일조선인의 권익에 힘쓰는 한편 기타큐슈 한글 웅변대회 실행위원회를 이끄는 등 우리말 운동에도 관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이날 강연 후 주 목사를 만난 것은 이틀 후인 8월 9일 나가사키에서였는데 조선인 원폭희생자추도집회에 참석하려고 승합차에 교포들을 가득 태워 고쿠라(小倉)에서 3시간 넘게 달려 추도모임에 참석할 만큼 재일동포사회의 크고 작은 일에 발 벗고 나서는 모습이 가슴을 뭉클케 했다.

우리가 부른 ‘반달’을 작곡한 윤극영(1903~1990) 선생은 한국 최초의 어린이 문화단체인 색동회를 조직하고 동요를 작곡하면서 어린이운동을 이끌었다. 동경유학 중인 1923년 9월 동경대지진이 일어나자 일본인들의 조선인 학살 현장을 목격한 이후 고국으로 돌아와 조선소년운동협회를 만들어 한국 최초의 노래단체인 ‘달리아회’를 통해 당시 일본 창가 말고는 부를 노래가 없던 조선의 어린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었다. 이때만든 <반달>을 비롯하여 <까치까치 설날은>·〈꼬부랑 할머니〉·〈소금쟁이〉·〈고드름〉·〈파랑새를 찾아서〉등 400여 곡은 남녀노소 아랑곳하지 않고 우리 겨레에게 큰 사랑을 받았다. <반달> 노래로 분위기가무르익자 주 목사는 꼼꼼한 자료집을 통해 답사단에게 재일조선인의 현주소를 소상히 들려주었다.

이날 강연 제목인 ‘조선인 강제 연행의 역사와 재일조선인의 현황’이란 제목에서처럼 답사 기간 내내 우리는 가는 곳마다 <재일조선인>이란 말을 들었다. 생각해보면 <재미조선인>이라거나 <재프랑스조선인> 같은 말은 없는데 유독 <재일조선인>만 있다. 그것은 <재일한국인>이란 말과 차별화된 것으로 시대적으로는 ‘일제강점기’임을 암묵적으로 말해준다. 일제강점기에 왜, 무엇을 하려고 조선인은 일본 땅에서 거주하게 된 것일까? 주 목사는 나눠준 자료에서 <재일조선인> 역사를 1875년 강화도사건(운양호)사건으로부터 짚어갔다.

강화도사건이란 익히 알다시피 1875년(고종 12) 9월 20일 일본 군함 운양호가 조선의 강화해협에 불법 침입하여 포격을 가하고 살육·방화·약탈을 자행한 사건을 말한다. 당시 일본의 정세는 1873년 무렵부터 조선 문제를 둘러싼 이른바 정한론(征韓論)이 크게 일어나고 있던 때였다. 이것은 ‘탈아외교’(脫亞外交)를 주장하던 세력이 서구열강에 먹혀들지 않자 일본 안에 팽배해있던 유신과 개혁에 대한 불평·불만을 조선을 포함한 아시아 정복의 흉계로 삼는 계기를 말한다.




이로부터 시작된 일본의 흉계는 1910년 8월 29일 조선 병합으로 이어졌고 이듬해 착수한 대대적인 토지조사로 인해 조선인은 땅을 빼앗긴 채 긴 유랑의 길을 걷게 된다. 이를 입증하는 것이 조선인의 일본행이었다. <재일조선인>의 인구 추이를 살펴보면 1910년에는 2,600명이던 것이 1920년에는 40,775명 1930년에는 419,009명으로 늘었으며 1945년에는 자그마치 230만 명이나 되는 엄청난 사람들이 일본 땅으로 건너가게 된다.

주 목사의 자료에는 이들 230만 명을 모두 ‘강제연행자’라고 표시하고 있다. 토지를 빼앗고 인적자원을 수탈하는 게 식민지 경영자들의 중요 목표일진대 ‘강제연행’을 가리켜 일본인 학자들의 ‘도항자(渡航者)’라는 표현은 적절치 못한 것이라고 본다. 도항은 단순히 “바다를 건너간 자”란 뜻으로 강제성을 느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용어 하나라도 바르게 정립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조상 대대로 지켜오던 땅은 얼마나 빼앗긴 것일까? 1920년대 토지소유 변화를 보면 1920년대 일본인의 토지는 3,674정보(조선인 4,181정보)이던 것이 1930년대로 오면 일본인이 8,999정보(조선인 3,545정보)로 한반도 토지의 3분의 2를 일본인이 가로채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악랄한 일이다. 오늘날 일본에 거주하는 60여만 명의 <재일조선인>의 뿌리는 국권 강제침탈과 토지착취, 강제연행이란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음을분명히 인식해야 이후 <재일조선인>문제가 풀릴 것이다. <재일조선인>들은 오늘날 미국으로 이민 가듯이그렇게 건너간 사람들이 아님을 일본정부는 똑똑히 인식해야만 한다.

강연시간 ‘2시간’ 동안 주 목사가 들려주고자 한 <재일조선인>이야기는 애초부터 어려운 주제였다. 조선인거주의 역사를 1910년으로만 잡아도 벌써 100년 세월이 흘렀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 목사는 휴식 시간 없이 꼼꼼하게 <재일조선인>의 현주소를 들려주었다.







▲ 주문홍 목사의 강연을 열심히 듣는 답사단 


그중 한 가지가 ‘외국인 등록법’이다. 일제는 1945년 12월 25일 재일조선인과 대만인의 참정권을 박탈하였다. 일본에 거주하되 사람다운 행사나 권리를 할 수 없게 만든 것이다. 다만, 세금은 꼬박꼬박 물게 했다. ‘인권국가’를 자처하는 일본의 이중적인 모습이 흉악하다.

그뿐 아니라 2008년 11월에는 외국인 입국자 16세 이상 ‘지문채취제도’를 법제화하여 이에 불응하는 사람의입국을 엄격히 막고 있다. 지문만 찍는 게 아니다. 범인 다루듯 사진기로 우리의 얼굴도 찍어 두고 있다. 기타큐슈 모지항에 도착하여 입국심사 때 우리는 양손의 집게손가락을 지문기계에 올려놓아야 했으며 얼굴을 반듯하게 들어 콩알만 한 카메라 구멍에 맞춰줘야 했다. 수모의 역사는 아직도 진행형이다.

또한, 문제가 되는 것이 ‘재류허가문제’이다. 1952년 거주권을 인정한다면서도 1965년 한일국교정상화 때 <국적란>에 ‘한국기재’를 강요하여 ‘재일조선인’과 ‘재일한국인’ 사회를 분열시켰다. 생각해보면 ‘재일조선인’들은 조국이 일제 수하에 있을 때 건너간 사람들로 6·25 한국전쟁 이후 갈라진 남한과 북한이라는 체재 이전의 동포들이다.

이념과 사상을 갖지 않은 순수한 ‘조선인’들은 조국의 분단만으로도 가슴 아픈 판에 ‘남’ 또는 ‘북’을 선택하도록 강요당했으니 어느 쪽을 선택하던 그 피해는 고스란히 재일조선인 몫이었다. 1991년 5월 새로운 재류권이 만들어졌다고는 하나 조선인의 강제퇴거제도를 남겨두어 언제든지 ‘일본을 떠나라.’라고 할 근거를 남겨두는 치밀함을 보이는 게 현재 <재일조선인>에 대한 일본의 현주소이다.

더 가관인 것은 ‘국적’에 의한 제도적 차별에 있다고 주 목사는 힘주어 말했다. 1961년 이른바 국민연금제도를 만들어 일본인과 조선인을 차별 적용하였으며 1986년 국적조항이 철폐되었다고는 해도 여전히 차별은 남아 있다고 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참정권이다. 이를 두고 주 목사는 ‘의무는 부과하되 권리를 안 주는 악법’이라고 단언했다. 인간의 권리를 주지 않겠다는 말이다. 그뿐만 아니라 강제노역에 대한 정당한 보상, 피폭자 치료와 보상, 민족학교에 대한 차별 등이 존재하는 한 일본은 ‘인권의 사각지대’임이 틀림없다.

민족교육이 이뤄지는 조선인학교만 해도 그렇다. 학교건물과 교사월급을 모두 학부모 돈으로 충당해야 할뿐더러 정식 학교로도 인정하지 않는 현행 일본의 태도는 비난받아 마땅하다는 것이 사태를 정확히 보는 사람들의 말이다. 낡은 건물에서 학생 수마저 감소하는 조선인학교에 비해 으리으리한 현대식 건물을 지어놓고 있는 일본인 학교를 보면 일본정부가 얼마나 조선인을 차별하고 있는지 극명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시모노세키 일명 똥굴동네(神田)의 초라한 조선학교, 학부모 돈으로 교실을 짓고 공부를 가르친다.(왼쪽) / 일본인 어린이들이 공부하는 하카다소학교, 정부지원으로 번듯한 교실에서 공부한다. 


주 목사는 일본에서 목회를 하는 사람으로 한국인들이 일본 사회에서 겪어야 하는 불평등과 차별로 말미암은 고통을 누구보다도 피부로 느끼며 봐 왔을 터였다. 그래서인지 재일조선인에 대한 이야기 끝에 잊을 수 없는 일본인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하야시에이다이(77살) 씨가 바로 그 사람이다. 조선인의 일제 징용관계 글을 많이 쓴 하야시 씨는 후쿠오카 타가와(田川)사람으로 답사일지 <1편>에서 잠시 언급한 바 있으며 큐슈일대를 안내한 요코가와 씨의 동향 선배이다.

그의 아버지는 탄광에서 탈출하던 조선인을 이주시켰다는 죄목으로 잡혀가 심한 고문 끝에 죽게 되는데 하야시 씨는 이때 11살의 소년이었다. 이후 와세다대학을 중퇴하고 조선인 징용과 관계가 있다면 어디든 달려가 집요하게 취재하여 일본의 만행을 세상에 알리는 일을 계속해왔다. 반민족문제연구소가 1992년 펴낸<사할린은 통곡한다, 계명출판사>도 하야시 씨의 ≪증언, 사할린조선인학살사건≫이란 원제목의 번역본인데 여기서 하야시 씨가 한 말이 귓전에 아직도 생생하다.







▲ 하야시에이다이의 조선인 강제연행 관련된 책들 50여 권 중 일부 


“나는 학살 현장인 사할린의 설원에 서게 되면 일본인이 저지른 뿌리 깊은 원죄를 뼈저리게 느낀다. 1923년 9월 1일 관동 지방을 강타한 미증유의 대지진이 일어났을 때 약 6천여 명에 달하는 조선인이 군대와 민간인에 의해 학살당한 사실이 떠오른다. 사할린 사건은 제2의 관동대지진 사건이다. 패전기 혼란 상태라는 상황보다도 일본군과 일본인이 조선인에 갖고 있던 차별의식과 편견이 대량학살을 낳은 것이다. 전쟁의 엄청난 비극은 병사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고 항상 일반 민중을 할퀴고 지나간다.

일본이 양심이 있다면 강제연행한 조선인을 맨 먼저 귀국시켜야 했다. 그런데 일본인만 후송하고 조선인은내버려둔 것이다. 이렇게 비인간적인 행위가 용서될 수 있을 것인가? 일본정부는 남겨진 조선인의 비통한 울부짖음을 외면한 채 그들의 귀국 대책에 눈감았다. 인간으로서 양심이 있다면 지금이라도 즉각 사죄해야할 것이다.” 하야시 씨의 격앙된 ‘일본사죄론’은 1973년에 나온 말이지만 비단 사할린에 국한된 이야기만은아니며 2010년 현재 남아있는 60만 재일조선인과도 깊은 관련이 있는 말이다.

비록 2시간이라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재일조선인의 현황을 주 목사는 소상히 들려주었다. 재일조선인 이야기는 한일평화역사기행 내내 우리의 관심과 화제였는데 때로는 강연으로 때로는 증언으로 가는 곳마다 재일동포들이 나와 일제 강점기 만행 체험이 없는 답사단을 위해 온 정성을 쏟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이날 주 목사의 강연을 통해 우리는 두 가지 사항을 정리할 수 있었는데 하나는 한일강제병합 이후 계속되고 있는 일본정부의 비인도적인 조선인 처우 문제이며 다른 하나는 한국정부의 재일조선인에 대한 무관심에 대한 것이었다.







▲ 성균관대학에서 3일간 열린 학술대회에 참석한 답사단원들 


때마침 올해는 국치100주년을 맞이하는 해로 한일 양국의 양심 있는 시민들이 나서서 ‘한일과거사 청산과 동아시아 평화’를 위한 공동 학술대회 등 뜻깊은 행사가 마련되었다. 이에 우리 답사단도 ‘경술국치100년을 맞이하여 한일평화를 여는 역사기행’의 하나로 일본 땅을 찾아 나섰던 것 인만큼 귀국해서도 ‘행동하는 사람’으로 남기를 자처하여 8월 26일~29일 까지 성균관대학에서 열린 학술세미나와 국치일인 29일 남산 통감관저 터에 세운 국치일 표석 세우기 행사에도 참석하는 등 한일간의 평화를 모색하는 일에 깊은 애정과 관심을 보였다.

고쿠라(小倉) 기타큐슈생애학습센터에서 가진 주문홍 목사의 <재일조선인의 실상>에 대한 강연은 <오빠생각>을 다 함께 부르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뜸북 뜸북 뜸북새 논에서 울고
뻐꾹 뻐꾹 뻐꾹새 숲에서 울 때
우리오빠 말 타고 서울 가시며
비단구두 사가지고 오신다더니


기럭 기럭 기러기 북에서 오고
귓들 귓들 귀뚜라미 슬피 울건만
서울 가신 오빠는 소식도 없고
나뭇잎만 우수수 떨어집니다
 







▲ 최순애 작시, 박태준 작곡 “오빠생각”은 이런 정경이었을까? ⓒ 이무성 


<오빠생각〉은 최순애 씨가 12살 때 지은 노랫말로 박태준 씨가 작곡한 동요이다. 이 노랫말은 소파 방정환이 1925년에 만든 잡지《어린이》에 실렸는데 이 시기는 일제강점기로서  ‘비단 구두 사가지고 오신다더니’를 항일 운동 떠난 오빠로 보는 사람도 있다. 어린 나이이기는 하지만 나라를 빼앗긴 소녀의 속내가 깊이 묻어나서인지 강연장은 때아닌 한국동요로 밤의 적막을 깨고 있었다.








▲ 뜻밖에 만난 고쿠라의 여름 축제를 보며 빠듯한 답사길의 피로를 풀었다 


강연이 끝나고 나오니 밤 9시가 훌쩍 넘었다. 고쿠라 거리는 마침 열린 여름마츠리로 왁자지껄했다. ‘마츠리(축제)의 나라’ 일본에서 뜻밖에 만난 ‘여름 마츠리’ 행렬 속으로 젊은 답사 단원들은 빨려들어 가듯 합세해 버렸고 연로하신 분들만 일찌감치 다문화공생센터에 여장을 풀었다. 다음 날 일정이 빠듯했지만 젊은이들은 광란(?)의 밤을 보냈다는 후문이다. 역시 젊음은 어디서나 빛을 발하는 존재로 그 자체가 발광(發光)을 지닌 생물 같다. 젊은이들의 지칠 줄 모르는 기(氣)와 끼는 이후 우리 답사단에 활력과 정력의 원천 그 자체였다.


그렇게 고쿠라의 밤은 깊어갔다.

<제3편: 나가사키 조선인 희생자 기념탑과 ‘가해 역사 기록의 현장’ 오카마사하루 기념관>










< ‘반달’ 작곡가 윤극영과 ‘오빠생각’ 의 박태준에 대한 친일행적에 대하여> 


고쿠라교회 주문홍 목사가 나눠준 ‘반달’과 ‘오빠생각’을 부르면서 우리는 마음이 착잡했습니다. ‘쪽배도 아니 달고 삿대도 없이….’ 국권을 침탈당하고 갈 곳을 몰라 떠있는 한 조각 배와 같은 조국의 운명이 잘 드러난 노래와 ‘비단구두 사가지고 오신다더니….’라며 서울 간 오빠를 그리던 ‘오빠생각’을 부르면서도 안타까움은 이어졌습니다.

안타까움이란 다름 아닌 이 두 사람의 음악가가 ‘친일행적’ 논란이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2009년 민족문제연구소 발간 친일인명사전에는 이 두 사람의 이름이 올라있지 않습니다만 거론되는 이들의 친일행적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답사기 작성자 이윤옥·김영조> 


【윤극영 (尹克榮, 1903-1988)】


<한겨레 책과 사람> 2004년 4월 30일자에는 동요 ‘반달’의 작사 작곡가인 윤극영의 ‘친일행적 논란’을 다루는 기사가 있습니다. 〈현대문학〉 5월호가 마련한 작가특집에서, 그의 며느리인 시인 이향지(62) 씨가 “윤극영과 관련된 친일 논의는 불충분한 고증과 일방적인 시각에 의해 지나치게 폄하되거나 매도당한 면이 없지 않다.”라고 주장했다고 소개하는 기사입니다.

며느리 이향지 씨는 말하기를, 소설가 조정래 씨가〈만주벌기행〉에서 “윤극영이 민족을 배반하고친일한 대가로 700평 넓은 집으로 옮겨 영화를 누린 양 매도하였는데, 그 집은 친하게 지내던 일본인이 잠시 맡긴 집이었을 뿐이었다.”라고 주장하고 있으며. 아동문학가 이재철 씨의 글 ‘일제 식민잔재, 아동문학의 청산을 위하여’(〈아동문학평론〉 1992년 봄호)를 들어 <만주벌기행〉만을 구체적인 자료로 제시했을 뿐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에 조정래 씨와 이재철 씨는 “친일행적과 별개로 어린이문학에 남긴 공적이 적지 않은데, 며느리이 씨의 주장은 친일논란을 불거지게 하여 외려 고인에게 흠집을 더할 것”이라고 입을 모았으며 조정래 씨는 “(당시 윤극영 씨가 활동한) 오족협화회는 독립운동을 막고 항일의용군을 제거하는 데 앞장선 단체인데, 여기에 참여해 적극적으로 활동한 것을 단순히 일제에 동원된 것이라고 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라고 지적했고, 이재철 씨는 “친일성향의 글이 국내에 제대로 소개되지 않은 것은 그가 당시 만주에서 지냈기 때문일 뿐이며, 그의 친일행각은 연변의 작가·아동문학가들에게는 상식”이라고 주장했다는 기사가 보입니다.

윤극영의 친일 행적 문제는 이렇게 소개하며 다만 고쿠라교회 주문홍 목사와 함께부른 ‘반달’은 1924년에「어린이」창간호에 발표된 동요이며 이후 윤극영 선생은 1926년 간도로 가서 활동하다가 1946년 귀국하게 됩니다. 그날 주문홍 목사에게 왜 친일파가 지은 노래를 부르냐고 항의 하자는이야기도 나왔으나 윤극영 선생에 대한 ‘친일행적’ 논란이 있음을 아는 것과 반달 동요를 그날 부르지 말아야 했다는 이야기와는 다른 맥락으로 답사기를 쓰는 사람은 여겨졌음을 이해 바랍니다.


【박태준 (朴泰俊, 1900 – 1986)】


박태준에 대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 견해는 다음과 같습니다만, 2009년 간행된 친일인명사전에는 수록되지 않았습니다. 참고로 ‘오빠생각’은 1925년 11월에《어린이》 잡지에 실렸으며 ‘지원병 장행가’는 1938년 무렵 <가정가요>에 실린 것입니다.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 경북 대구 출생
– 작곡가, 지휘자, 합창지휘 전공


– 崇實전문 졸업(21), 미국 타스컬럼대학 졸업(33), 미국 웨스트민스터음학대학 졸업(35), 웨스트민스터대 대학원 졸업(36), 명예음악박사(미국 우스터대학, 52)

– 숭실전문학교 교수(36-38), 서울여자 의과대학 교수(46-48), 한국오라트리오협회장 겸 한국오라트리오협회 합창단지휘자(45-67.1 현), 연희대학교 교수(48-67.1 현), 한국음악가협회 고문(1962.현재). 연세대학교 음악대학장(64-66), 예술원 회원(66-67.1 현)

<작품> : <오빠생각>·<思友>외 약 150곡, <물새발자욱>(가곡집)
<상훈> : 서울특별시 문화상(1957), 예술원상 수상(61), 국민훈장 모란장(1962). 문화훈장 수상(대통령장, 62) – 朝鮮文化建設中央協議會 聲樂部 委員


「지원병 장행가(志願兵壯行歌)」 작곡


「지원병 장행가」는 1938년∼1939년무렵 사단법인 조선방송협회가 가요정화운동의 하나로 발행한『가정가요(家庭歌謠)』 제1집에 수록(작사 이광수)


– 이광수,『삼천리』1940년 12월호에 실린 전문


1. 만세 불러 그대를 보내는 이날 / 임금님의 군사로 떠나가는 길 / 우리나라 일본을 지키랍시는 / 황송합신 뜻 받어 가는 志願兵

2. 씪씩할사 끼끗한 그대의 모양 / 미더웁고 튼튼키 태산갓고나 / 내고장이 나어준 皇軍의 용사/ 임금님께 바치는 크나큰 영광

3. 총후봉공 뒷일은 우리 차지니 / 간 데마다 忠誠과 용기 있으라 / 갈지어다 凱旋날 다시 맞나자 /둘러둘러 日章旗 불러라 만세- 육군특별지원병령에 따라 전쟁터로 끌려가는 조선 청년들을 격려하고 천황의 군인으로 충성을 다할 것을 역설하는 시


–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부 제1회 문화표창 작품으로 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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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韓國演藝大鑑/成榮文化社/1962.12.5, 260쪽 ; 現代韓國人名辭典/ 合同年鑑 67年版 別冊/ 合同通信社/ 1967.1.15, 84쪽.
2) 朝鮮의 將來를 決定하는 各政黨 各團體 解說/ 輿論社出版部/ 1945.10.19.
3)『昭和 18년도 조선연감』, 경성일보사,1943년, 579쪽. 부문별로는 무용에 최승희의「武魂」, 영화에「그대와 나」(君と僕 : 감독 허영)가 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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