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박정희 만주군 혈서 지원”…<중앙><동아> 친일 인명사전 ‘흠집내기’ <한겨레><경향> “일본에 충성 서약…명백한 친일” <조선> 보도 안 해
5일 민족문제연구소는 <친일인명사전>의 전면 공개(8일)를 앞두고, 박정희 전 대통령이 1939년 일제의 괴뢰국인 만주국의 군관에 응모하면서 지원서류와 함께 ‘충성’을 다짐하는 혈서와 청탁 편지 등을 보냈다고 보도한 당시 <만주신문> 기사를 공개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박 전 대통령의 아들 지만 씨가 ‘친일인명사전 배포금지 가처분 신청’을 내자 “이 문제가 정치쟁점화되고 있다는 판단에 따라 자료를 공개했다”며 자료 공개 이유를 밝혔다. 6일자 한겨레신문과 경향신문은 관련 내용을 보도했지만 중앙일보와 동아일보는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을 반박하는 칼럼을 실었다. 조선일보는 언급이 없었다.
<박정희 만주군관학교 지원때 “목숨바쳐 충성” 혈서 사실로> (한겨레, 1면) <일 육사 졸업 뒤 항일연합군 공격 “임정 입장서 박정희는 적군 장교”> (한겨레, 6면) <박지만 “아버지는 만주국 용병” 주장에 민족문제연구소 “일본장교가 만주군 지휘”> (한겨레, 6면)
한겨레신문은 민족문제연구소가 공개한 자료와 함께 박 전 대통령의 친일 행적을 자세히 다뤘다. 신문은 1면 기사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이 일제강점기 만주국 군관에 지원하면서 ‘죽음으로써 충성을 맹세한다’는 내용의 혈서를 써냈다는 당시 신문 기사가 발견됐다”며 당시 <만주신문> 사본을 보도했다. 그러면서 “그동안 설로만 떠돌던 박 전 대통령의 ‘혈서 지원’이 객관적 방증으로 확인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전했다.

▲ 한겨레신문 6면 기사

▲ 중앙일보 칼럼
6면 기사 <일 육사 졸업 뒤 항일연합군 공격 “임정 입장서 박정희는 적군 장교”>에서는 박 전 대통령의 친일 행각을 자세히 전했다. 기사는 그가 “두 차례나 군관학교에 떨어진 뒤 세 번째 도전으로 입학했으며,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해 만주국 ‘마지막 황제’ 푸이가 주는 금장시계도 받았다”, “그래서 일본육군사관학교에 편입할 수 있었고, 졸업 뒤 일본군 소위로 예비역에 편입됨과 동시에 만주국군 소위로 임관했다”면서 “일본군 예비역 소위는 일본군이 언제든지 마음대로 동원할 수 있는 사실상 일본 장교”라고 덧붙였다. 또, 박 전 대통령이 44년 임관해 근무한 만주국군 보병 제8단이 “일본에 대한 충성심이 높은 사람들을 따로 모아” 창설한 부대였고 “주로 동북항일연군 또는 소련과 전투를 벌였다”고 밝혔다. 항일독립운동 진영과 전투를 벌인 적국 장교라는 것이다. 같은 면 다른 기사에서 박 전 대통령의 아들 지만 씨가 <친일인명사전>의 배포를 막으려고 법원에 낸 ‘친일인명사전 배포금지 가처분 신청’ 내용(박 전 대통령이 만주국의 용병이었을 뿐 일본군이 아니었고, 만주국군의 주적이 마오쩌둥의 팔로군이었던 만큼 조선인 또는 독립군에 위해를 가한 사실이 없다)을 전하며 민족문제연구소의 반박 내용을 소개했다. 연구소 쪽은 “박 전 대통령이 만주군에 있을 때 역시 만주국이 일제의 괴뢰국으로 일본 관동군의 통제를 받았고, 만주국군은 일본군 장교의 지휘를 받는 경우도 많았다”, “팔로군도 다수의 조선 청년들이 포함된 항일 연합군의 성격을 갖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박정희, 혈서 쓰고 만주군 지원> (경향, 10면) 경향신문은 10면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이 일제시대 초등학교 교사를 그만둔 뒤 만주국 군관으로 지원하는 과정에서 ‘혈서(血書)’를 써 충성을 맹세한 것으로 드러났다”며 관련 내용을 보도했다. 기사는 1939년 3월31일자 만주신문에 실린 박 전 대통령의 친일 행각을 전했다.
<[노재현의 시시각각] ‘입맛대로’ 친일 인명사전> (중앙, 46면)
중앙일보는 친일 인명사전에 거론된 박정희, 김성수 등을 옹호하며 사전이 편향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중앙일보는 46면 칼럼에서 “두 차례에 걸쳐 맛보기로 발표된 명단에 따르면 친일파의 아들인 사위를 철저히 외면했던 인촌 김성수는 ‘친일파’로 낙인찍히게 된다”며 반면 여운형이나 북한의 친일인사들은 모레 발표될 명단에 이름이 오를지 궁금하다며 선정 기준에 ‘색깔론’을 제기했다. 이어 박정희에 대해 “(그의 부대의) 주적은 중국 팔로군”이었고 “그는 부관으로서 작전명령을 전달하고 부대 깃발을 관리”했으며 “여러 자료·증언을 종합하면 실제 전투에는 참가한 적이 없다”고 그의 친일행적을 애써 두둔했다. 그러면서 친일사전이 “과거나 미래보다 현재의 이데올로기 다툼과 정쟁(政爭)에 이바지한 꼴이 되고 말았다”며 “작업의 편향성, 자의성”이 존재한다고 친일사전에 ‘흠집내기’를 시도했다.
<[광화문에서/이진구] 우장춘과 도고 시게노리> (동아, 34면)
동아일보는 34면 칼럼에서 우장춘과 도고 시게노리의 이야기를 언급하며 친일인명사전을 비판했다. 우장춘은 명성황후를 시해한 일본인들을 경복궁에 데리고 들어간 한국인 우범선의 아들로 이후 조선총독부의 학비 지원을 받아 공부했다고 한다. 도고 시게노리는 임진왜란 때 납치된 조선 도공의 후예로 1945년 당시 일본 외무장관으로 일본의 패전협상을 이끌어 일본을 구했다고 한다. 칼럼은 “도고 시게노리가 한국 핏줄을 속이고 일본과 일왕에 부역했다고 침을 뱉을 것인가. 우장춘이 매국노의 아들인 데다 조선총독부 돈으로 공부한 친일파라고 돌을 던질 것인가”라고 따져 물으며 “한국의 근대화와 산업화를 이룬 고(故) 박정희 대통령과 우국의 절창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을 남긴 위암 장지연 선생이 포함”된 것에 대해 “친일문제에 그렇게 단세포적으로 접근해선 안 된다”고 주장했다. 아버지가 친일을 했다는 이유로 아들을 친일 인사로 몰아붙일 수는 없는 일이다. 친일인명사전은 당사자의 친일 행위를 ‘객관적 기준’에 따라 판단해 사전 등재 여부를 판단한다. 그런데도 칼럼은 우장춘의 예를 들어 친일인명사전의 취지를 훼손하고 ‘박정희의 친일’을 물타기 한 셈이다. 15세기 임진왜란 당시 일본에 끌려간 조선 도공의 후예가 20세기에 일본인으로 산 것을 두고 ‘친일이냐 아니냐’를 따지는 것 자체가 코미디다.
2009년 11월 6일
(사) 민주언론시민연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