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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근대화? 배부른 소 돼지 정책에 불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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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식민주의 청산과 평화 공존의 새시대를 향해










이 글은 4월 25일 서울 명동 향린교회에서 열린 [진실과미래 국치100년공동사업추진위원회] 창립대회에서 발표된 이만열 전 국사편찬위원장의 기조 강연문 원고 전문이다. – 엮은이


이만열 전 국사편찬위원장








이만열 전 국사편찬위원장


내년 2010년은 일제가 대한제국을 강점한, 국치 100주년이 된다. 이 100주년을 맞아 뜻있는 단체들이 ‘국치100년사업공동추진위원회’를 설립하고 제국주의의 산물인 식민주의를 청산하고 동북아 평화공존의 새시대를 열기 위해 노력하는 데 대해 깊이 공감하며 감사의 뜻을 표한다. 이런 기회에 국치(國恥)를 전후한 시기의 역사를 돌아보며 이 사업의 의미를 새겨보자는 것이 저에게 강연을 요청한 의도라고 생각하고 관련하여 간단히 언급하겠다.

일제의 침략과정: 일본은 1876년 강제로 병자수호조약을 체결한 이래 그들의 야욕을 숨긴 채, 1882년의 제물포조약과 1885년의 한성조약을 통해 한국의 심장부에서 조약을 체결하는 대담성을 보였고, 1894년 동학혁명과 청일전쟁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군사개입을 통해 한국 경영에 본격적으로 나서게 되었다. 1904년 러일전쟁 때 일제는 한일협약을 늑결하여 한국의 중립 선포


를 묵살하고 한국으로 하여금 러시아와의 관계를 끊게 하고 일본에 대한 협력을 강요하였다.

1905년에 들어서서 일제는 봉천 점령(3.10)과 발트함대의 격파(5.28) 등 러시아에 대한 승기를 활용하여 미국과 가쯔라-태프트밀약(7.29)을 맺고 영국과는 제2회 영일동맹을 조인(8.12)했다. 

이어서 루즈벨트 대통령의 중재로 러시아와 포츠머스 조약를 체결하게 되었다.(9.5) 이로써 일본은 한국에 대한 배타적인 지배권을 당시 강대국으로부터 거의 약속받게 되었다. 일제가 한국의 외교권을 강제로 빼앗은 ‘을사조약’을 늑결(11.17)한 것은 바로 이러한 강대국의 묵시적인 동의와 지원하에 이뤄진 것이었다.

일제는 ‘을사늑약’에 근거하여 1906년에 통감부를 설치하고 외교는 물론 내정에도 간섭하였다. 1905년이 외교권이 빼앗긴 해라면, 1907년은 한국의 내치권이 빼앗기고 국방권이 해체되고 국왕권이 허물어진 해다. 헤에그 밀사파견(4.20)을 계기로 이토오(伊藤博文)는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7.20), 일본의 행정권 관여를 골자로 하는 한일신협약(정미7조약)을 강제(7.24)했으며, 군대해산조칙에 이어 군대를 해산(8.1)했다. 한국군의 저항과 의병의 항쟁이 완강했지만 일제는 일사천리로 강점을 추진했다. 1910년 8월 22일 이완용과 테라우찌(寺內正毅) 사이에 소위 ‘한일합병조약’이 조인되고 8월 29일에 한일합병조약문을 공포함에 따라 그나마 형식적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던 한국황제는 물러나고 대한제국 국호를 폐지하고 조선으로 개칭하게 되었다.

여기서 최근까지 일본의 정치인들과 지식인들이 자주 말해온, 한말에 체결된 이같은 조약이 합법적이었다고 성언(聲言)하는 것과 관련해서 몇 마디 언급하겠다. 그걸 흔히 ‘망언(妄言)’이라고 지적해 왔다. 그들이 근대한일관계사와 관련하여 쏟아낸 망언의 패턴은 이같이 체결된 한일간의 조약이 합법적으로 이뤄졌다는 것과, 일제 35년간의 통치는 한국의 근대화를 위해 시혜를 베풀었다는 것, 그리고 한국과의 관계에 꼭 해당되는 것은 아니지만, 일본이 일으킨 전쟁이 아시아를 구미제국의 지배로부터 구출하기 위한 전쟁이었다는, 소위 ‘거룩한 전쟁’이었다고 주장하는 성전론(聖戰論)이라고 할 것이다.

조약들의 불법성: 일제가 한국에 대해 맺은 조약, 특히 20세기에 맺은 조약은 모두 강제성을 띠고 있었다. 1904년 2월 23일 체결된 ‘한일의정서’는 국외중립을 선언한 한국을 협박하여 군략상 필요한 지점을 언제나 수용할 수 있도록 만든 조약이었다. 노일전쟁에서 전황이 유리해지면서 8월 22일자로 강제체결한 ‘한일협약’은 일제가 한국에 대해 고문정치를 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이는 한국의 외교권을 빼앗아가는 ‘을사조약’의 전단계의 것으로 한국 황제와 정부의 완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군사적인 위협하에 일본의 야욕대로 진행시켰다. 위의 두 조약은 “서울을 군사적으로 완전히 장악한” 상태에서 “일본측의 일방적 입장이 시종 작용한” 불법적인 것으로 쌍방교환도 이뤄지지 않았으며 체결당시에는 제3국 언어(영어)로 작성하지도 않았다. 따라서 국제 조약법상으로 볼 때에도 두 개의 협정들은 법적 효력을 발생할 수 없다.

조약의 강제성과 절차상의 불법성은 1905년 11월 17일에 늑약된 ‘을사조약’에서 한층 노골화되었다. 일제는 ‘을사조약’을 통해 한국의 외교권을 강탈해 갔는데, 이 조약이 일본군의 무력시위와 이토오(伊藤博文)의 협박에 의해 이뤄졌다는 것은 언급할 필요가 없다. 국제법을 엄격하게 적용한다면, 이것 하나만으로도 그 조약은 무효에 해당된다. 거기에다 이 조약은 조약의 형식과 체결과정에서도 불법 투성이다. 첫째, 이 조약은 조약의 명칭이 없다. 우리가 ‘을사조약’, ‘을사오조약’ 혹은 ‘을사보호조약’이라 하지만 그것은 정식 명칭이 아니고 편법으로 붙여놓은 이름에 불과하다. 둘째, ‘을사조약’이 협정(Convention)으로 되어 있고 정식 조약(Treaty)의 형식을 빌리지 않은 것은 한 나라의 외교권을 이양하는 조약으로서는 마땅한 격(수준)을 갖고 있지 못했다. 셋째, 이 협정은 협상을 맡은 대표에 대한 위임(장)이 없었고, 작성된 협정문에 날인이 없었으며, 가장 눈여겨봐야 할 것은 협정문에 대한 비준 절차가 없었다는 것이다. 이같은 문제로 ‘을사조약’은 조약 직후에 발표된 프란시스 레이(Francis Rey)의 ‘대한제국의 국제법적 지위’라는 논문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원천적으로 효력을 발할 수 없는 조약이었다.

1910년 8월 29일에 공포된 소위 ‘한일합병조약’도 조약비준에 하자가 있었다. 1907년 11월 18일 이후 한국 황제가 재가하는 조칙과 모든 공문서에는 황제의 공식적인 인감인 어새(御璽)와 황제의 이름자 서명이 함께 있어야 유효했는데 병합조약은 그렇지 않다. 다시 말하면 일제가 1910년 8월부터 35년간 한국을 지배한 법적 근거였던 ‘병합조약’도 1905년 외교권을 빼앗아간 ‘을사조약’ 못지않게 조약비준상의 하자를 갖고 있다. ‘병합조약’에서는 대표위임장과 조약문 서명은 있으나, 비준서에 해당하는 한국 황제의 조칙에 하자가 있다. ‘병합조약’의 경우, 조약의 공포와 함께 한 나라가 없어짐으로 비준은 양국 황제의 조칙으로 대신하기로 했는데, 한국측 조칙에는 국새(國璽) 대신 어새가 찍혀 있고 황제의 이름자 서명이 빠져 있다. 당시의 공문서법에 따르면 황제의 서명이 빠진 이 서류는 가짜이거나 황제가 비준을 거부한 것으로밖에는 볼 수 없다. 따라서 일제가 조약을 통해서 정당하게 한국의 외교권을 포함한 주권을 이양해 갔다는 것은 국제접적으로 말한다면 거짓이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일본 정치인들의 망언에는 거의 예외없이 일본이 정당한 절차를 밟아 한국을 식민지화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국사학계에서 ‘일제 강점기’라고 부르는 것은 이 때문이다.

국권상실의 원인론: 한국이 국권을 상실하게 된 데에는 굳이 구분해보자면 종래 외인론(外因論)과 내인론(內因論)으로 크게 구분해 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내외인론이 겹쳐 있었다고 할 것이다. 강력한 외세침략에 대해서 이를 막을 만큼 나라의 역량을 키우지 못했기 때문에 이런 비극을 맞은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내 외인론을 구분해서 본다는 것이 의미가 없다.

외인론은 약육강식의 제국주의 시대에 일본이 강한 군사력으로 밀어붙여 한국을 강점했다는 것이다. 한국은 일제 침략에 맞서 의병운동과 애국계몽운동으로 맞섰으나, 19세기 중엽에 이미 서양문명을 받아들여 부국강병을 이룩한 일본에 적수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이같은 외인론과 관련해서는 한편에는 당시 세계를 지배하고 있던 소위 사회진화론 사상이 있었고, 한편에서는 당시 일본을 내세워 러시아의 남진정책을 막겠다는 앵글로색슨계의 후원전략이 있었음을 상기할 수 있다. 당시 서구의 세계진출을 합리화하는 이론 치고 사회진화론만한 것이 없었다. 자연계에서 약육강식 적자생존이 불멸의 법칙이듯이, 세계사에서도 이런 법칙이 적용될 수 밖에 없다는 사회진화론이야말로 서구사회의 아시아 아프리카 정복을 정당화해준 이데올로기임과 동시에 일본의 동양제패를 정당화해주는 이론이기도 했다. 그것은 또한 한국 같이 뒤늦게 서구화에 뛰어든 나라에도 널리 보급되어 자신의 근대화와 부국강병의 논리를 뒷받침했을 뿐만 아니라 자기를 향해 침략해 오는 제국주주의 세력도 용인할 수밖에 없는 지적 풍토가 되었음도 간과할 수 없다.

지금도 그 패턴이 계속되고 있다고 할 수 있지만, 당시 세계는 남하하는 대륙세력과 이를 막으려는 해양세력의 대치 갈등 국면에 봉착하고 있었다. 대륙세력의 상징이라 할 러시아는 발트해를 통해 대서양으로, 흑해를 통해 지중해로, 아프나기스탄과 파키스탄을 통해 인도양으로 지출하려고 했다. 또 청나라를 압박하여 그 동북지역인 연해주를 확보한 러시아는 동해를 거쳐 태평양으로 진출하려고도 애를 썼다. 이러한 야심에 대해서 영국을 중심으로 한 해양세력은 러시아의 이같은 남하정책을 저지하려고 세계 곳곳에서 충돌하고 있었다. 흑해 지역과 아프가니스탄 그리고 만주와 한반도에서도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저지하려고 했다.

러시아가 연해주를 통해 태평양진출을 획책하자 영국은 1884년 한국의 거문도를 불법 점령하여 러시아의 남하정책에 대비하였다. 영국은 또한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효율적으로 저지하기 위한 방안의 하나로 1902년 1월 30일 영일공수동맹(英日攻守同盟)을 맺었다. 영국이 비백인계통의 나라와 공수동맹을 맺지 않는다는 금기사항을 깨고 일본과 이런 동맹관계를 맺은 것은 러시아 저지를 위한 대륙정책의 실익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그 뒤 영국과 일본은 1905년 다시 제2회 영일동맹체제로 들어가게 되었는데, 이는 러일전쟁이 진행되고 있었던 시기였음을 간과할 수 없다. 영국은 이런 동맹체제에 근거하여 러시아의 발틱함대에 대한 정보를 일본에 넘겨주었고 1905년 5월 27일 일본이 대한해협에서 발틱함대를 격멸한 데는 영국의 이같은 첩보가 결정적이었다.

뿐만 아니라 미국도 영국과 함께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저지하기 위해서 일본을 지원했다. 러일전쟁 때에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는 일본이 자기들을 위해 러시아와 싸우고 있다고 양언(揚言)하면서 지원에 나섰다. 당시 일본의 자원과 국력으로 봐서 러시아와 장기전을 밀고 나간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다. 루즈벨트가 미국 북동 해안에 위치한 포츠머스에서 일본과 러시아의 휴전을 주선한 것은 일본의 이런 사정을 감안했기 때문이다.

외인론의 또 한 요소로서 에도(江戶) 시대부터 해방론(海防論)을 내세우며 대륙진출을 꿈꿔왔던 일본 자신의 대륙진출의 야심을 지적할 수 있다. 그들은 19세기 후반에 들어서서 정한론(征韓論)을 내세우며 한국 침략을 노골화했으나 실력을 쌓아 때를 보자는 일종의 소위 양무파(洋務派)의 반대로 그들은 뜻을 접어야 했다. 그러나 한반도 흉기(凶器)론을 내세우며 일본의 대륙진출의 꿈은 끊임없이 전개되어 청나라와 러시아, 영국과 미국의 동의를 얻어 한국을 보호국화하고 나아가 강점하는 단계에 이른 것이다.

여기까지가 외인론의 대강이라면 내인론은 이러한 일본의 침략야욕과 국제관계 상황에서 한국이 무엇을 했는가, 결국 한국이 자신을 제대로 근대사회로 개혁하여 이러한 국제적인 변화, 요즘말로 하면 세계화에 민첩하게 대응하지 못한 것이 식민지화의 단계로 전락한 원인이 아니었는가 하는 것이 내인론의 골자라고 할 것이다.

한말 서세동점의 파고가 일자 한국에서는 민족주의운동이 일게 되었다. 양반 지배계층을 중심으로 소위 위정척사운동(衛正斥邪運動)과 개화운동, 그리고 민중들을 중심으로 한 반봉건반외세 운동이 그것이다. 보수적이었으나 반외세적 성격을 가진 위정척사운동, 개혁적이었으나 반외세적 성격에는 한계를 가졌던 개화운동, 반봉건·반외세의 성격이 강했으나 근대적인 성격에는 역시 한계를 보였던 민중운동, 이 세 운동은 외세의 침략을 앞두고 주관적으로는 민족주의운동을 벌였으나 객관적인 관점에서는 적전의 분열을 면치 못했다. 항일의병운동에서 위정척사운동과 민중운동이 제휴했고 애국계몽운동에서 개화운동과 민중운동이 일부 제휴했으나 외세의 침략을 저지하는 총체적인 운동에서는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것은 침략세력의 이간책에 말려든 결과이기도 했다.

내인론에 무게를 둔 주장 가운데는 한국이 19세기 개항 이래 근대화를 위해 노력했으나 인민평등과 주권재민의 근대국가 건설에 성공하지 못했기 때문에 외세의 침략을 저지하는 데에 한계를 보이게 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독립협회 운동을 전후하여 군민동치(君民同治)이론이 소개되고 입헌군주국이 소개되기는 했으나 주권재민의 근대국가 단계에 진입하는 것은 쉽지가 않았다. 재외국민 가운데서 신한민보 등을 통해 황제권을 부정하는 국민혁명론을 부르짖기도 했으나 한말 우리 사회는 이런 근대국가를 이루지 못한 채 외세에 강점당하고 말았다. 이것은 자유민주체제의 시련을 걱정해야 하는 오늘날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나라를 제대로 세우고 지키는 데는 국민 각자가 이 나라가 바로 내 나라라는 자각과 거기에 따른 책임적인 행동이 필수적이다. 그것이 없고서는 사회발전은 물론이고 나라를 제대로 지킬 수 없다는 교훈이다.

일제의 통치방식: 일제는 한국을 강점한 후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통치방식으로 식민지 한국을 다스렸다. 강점 초기의 무단통치나 3.1운동 이후의 더 악랄한 소위 문화통치, 1930년대 이후의 황국신민화시기의 민족말살정책은 세계 식민사에서도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다. 도쿄도(東京都) 지사 이시하라 신타로(石原太郞)를 비롯한 일본의 망언론자들은 “일본의 한국식민통치는 유럽보다 공평했다”고 궤변을 늘어놓기도 하고 식민지시기에 일본은 한국의 근대화를 위해 시혜를 베풀었다고 망발을 거듭하고 있지만 그것은 자기기만에 불과한 것이다. 최근에는 한국에서도 일제의 식민지근대화론에 덩달아서 박수를 치고 그 이론에 추종하면서 내재적 발전론과 독립운동을 폄훼하는 무리들이 있다. 이들은 일제가 ‘개혁통치’라는 이름으로 남겨놓은 총독부 통계에 의거하여 수치상의 성장을 과장하고 있지만, 그것은 식민지를 비육우(肥肉牛) 비육돈(肥肉豚)으로 키우기 위해 주거환경을 깨끗이 하고 영양가 있는 음식물을 제공하며 의료시설을 제공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왜 애써 외면하려는지 이해할 수 없다. 비육우와 비육돈이 깨끗한 주거환경과 의료시설, 영양가 있는 음식물을 제공받는 것은 소와 돼지인 자기들을 위한 것이 결코 아니다. 식민지에 교육시설, 교통망 확충, 산업성장을 위한 인프라를 제공한 것은 단기적으로 보면 식민지를 위한 것으로 보이지만 그것은 궁극적으로 한국인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비육우 비육돈에서처럼 소 돼지를 키우는 업자들의 배를 불리기 위한 것이었다. 그것은 일종의 포주(抱主)의 논리에 비유되기도 한다. 포주가 거처와 침식을 제공하며 때로는 자본을 제공하며 창기의 생활을 돕는 것이 창기를 위하는 것이 아니며, 창기가 화려한 치장을 하고 일견 문화생활을 즐기는 듯하지만 결국 포주의 배를 채워주면서 자신은 파멸로 갈 수 밖에 없는 구조와 같은 것이다.

세계 식민사에서는 흔히 영국·네델란드형과 가장 악랄한 형태의 식민통치 방식으로 프랑스 형을 거론한다. 영국형이 식민지에서 경제적 수탈을 극대화하기 위해 그 외 통치에서는 유연성을 보인다. 토착인을 등용하여 간접 통치를 한다거나 식민지 통치에 필요한 교육을 시켜준다거나, 현지의 종교와 언어와 풍습을 존중한다. 그러나 프랑스식 식민통치는 경제적 수탈을 극대화하는 것은 물론 종교와 언어 생활관습까지도 제재하면서 식민지 본국의 방식을 이식하려고 한다. 일본의 통치 방식은 바로 프랑스식 방식에다가 민족말살정책을 가미한 것이다. 한국의 언어와 문자, 역사를 파기 배제하고 동방요배와 신사참배를 강요하며 창씨개명까지 요구하여 조상을 욕되게 했다. 이런 통치를 두고 유럽보다 공평했다고 한다든가 한국의 근대화를 위한 개혁통치로 위장하는 것은 진실의 호도 이상의 악랄함이 스며있다.

일제의 식민통치를 언급함에 무엇보다 간과하기 쉬운 것은 척양척왜의 기치를 들고 동학농민운동이 시작된 이래 의병운동을 거쳐 광복에 이르기까지 항일독립운동에 목숨을 잃은 수십만의 희생이다. 벌써 3년 째 동학농민혁명참여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에 관계하면서 어제도 1894년 일제에 의해 희생된 976명의 희생자를 발굴한 바가 있다. 최근 일본이 북한과의 수교문제에서 일본인 납치를 부각시키면서, 일본 외교의 최대 현안으로 몰아가고 있지만, 거기에 앞서 한국강점에 따라 이뤄진, 공권력에 의한 살인과 폭행, 인권유린, 독립군 살상 등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있다. 이렇게 일제 강점하에 희생된 수많은 한국인에 대해 상응하는 자세를 전혀 취하지 않은 것은 일본이 근대국가가 갖춰야 할 예의를 갖고 있지 않다고 밖에는 말할 수 없다.

또 한국이 해방 이후 지금까지 당하고 있는 가장 심각한 고통이 민족분단이라고 할 때, 그 원죄는 바로 일제의 한국 강점으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일본인 중에서 한국의 이 고통을 솔직히 자신의 책임으로 인지하고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이들이 얼마나 되는지 묻고 싶다. 한국전쟁을 통해 2차 대전후의 파탄에서 사회경제적인 회생의 기회를 잡은 일본은 아직도 한반도의 분단을 즐기면서 그것을 고착화하려 할 뿐 아니라 한반도의 상황을 역이용하여 평화헌법 9조를 개정하여 군사패권국으로 나아가려고 노력하고 있다. 지난번 북한의 인공위성 발사 때에 보인 일본의 신경질적인 반응은 바로 그것을 의미한다.

자신의 한국 강점에 대해 반성을 보이지 않는 일본은 역사를 왜곡함으로 한일관계를 그릇된 방향으로 이끌어가고 있다. 저들 망언론자들이 구상하고 있는 한일관계사를 후세교육에 활용하고 있는 점이나, 식민주의사관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현실에서 확인된다. 2001년과 2005년 그리고 올해까지 나온 후쇼샤(扶桑社) 판은 물론이고 올해 새로 검인정으로 인정된 지유샤(自由社) 간행의 역사교과서에는 그들의 식민주의사관을 그대로 옮겨놓고 있다. 고대에서는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설을 옮겨놓았는가 하면 중세사에서는 한국이 중국의 속방(屬邦) 속국(屬國)이었음을 강조하여 독립국임을 부정하였다. 근대사에서는 앞서 망언의 패턴에서 보인 것처럼 그들의 한국강점을 정당화하고 한국의 근대화를 도왔다고 주장한다.

한국사 왜곡은 사실의 왜곡 뿐 아니라 역사 해석에서도 보인다. 소위 식민주의사관으로 대표되는 한국사 해석의 문제다. 식민주의사관은 일제가 한국의 진출과 침략 및 강점을 한국의 역사를 통해서 정당화하려는 역사관이다. 여기에는 정체성사관(停滯性史觀), 타율성사관(他律性史觀),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 당파성이론(黨派性理論) 등이 대표적이다. 한국의 사회경제가 정체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타개하고 근대화시켜주기 위해 일본이 한국에 진출했다고 주장하는 정체성사관, 한국사는 한국인의 자율적인 결단에 의해 추진된 것이 아니라 외세의 간섭과 지배에 의해 타율적으로 전개되어 왔다고 주장함으로써 일본의 지배마저도 한국사가 타율적으로 전개된 필연적인 결과라고 자신의 침략을 정당화하는 타율성사관, 일본과 조선은 같은 조상과 뿌리에서 출발했으나 본의 아니게 둘로 나눠져 불행하게 되었지만 1910년 합방은 원래 하나의 나라로 돌아가 행복을 누리게 되었다고 선전하면서 내선일체와 황국신민화운동을 정당화하는 일선동조론, 한국인은 원래 민족성으로 봐서 시기 분열 당파심이 강하여 단결하지 못하여 나라까지 잃게 되었다고 주장하는 당파성이론 등은 한국사를 왜곡해석한 식민주의사관이다. 이러한 식민주의사관을 민족성론으로 포장하여 한국민은 게으르고 의타적 사대주의적이며 당파분열심이 강하기 때문에 스스로 독립할 수 없다고 식민지교육에 원용하였다. 이것은 한국인이 스스로 독립할 수 없다는 관념을 강하게 뿌리심어줌으로 자주독립심을 말살하려고 했던 것이다. 일제가 이런 식민주의사관을 유포, 세뇌화함으로 한국민은 자기 역사에 자신감을 갖지 못하게 만들었고, 자기역사에서 자신감을 잃은 한국인을 절망적인 상황으로 몰아갔다. 식민주의가 남긴 가장 악랄한 영향이 식민지 백성들로 하여금 자신감을 상실토록 하는 것이라면 일제는 이렇게 한국사와 한국사관을 왜곡함으로 한국인에게 지우지 못할 오점을 남겼던 것이다.







▲ 국치100년사업공동추진위원회 창립대회 행사 폐회 직후


국치 100주년을 어떻게 맞을 것인가. [이 점에 대해서는 ‘진실과 미래, 국치100년사업공동추진위원회 설립 선언문’에 잘 밝혀져 있어서 여기서는 간단하게 언급하는 정도에서 그치겠다.] 한국사에서 이민족(異民族)의 지배라고 하는 가장 수치스럽고 오욕스런 시기에 대한 뼈저린 반성 위에서 국치100주년을 맞아야 한다. 그것은 곧 왜 그 시기에 우리가 외민족의 지배를 받지 않으면 안되었던가, 그 이유를 먼저 규명하고 그 발견된 요인들을 오늘의 시점에 치환시킬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당시 역사에 대한 정확한 자료 수집과 역사 연구 없이는 불가능하다. 특히 한국 쇠망과 관련한 외인론을 규명하자면 일본을 비롯한 관련국의 자료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만큼 그 점에 대한 광범위한 조사와 발굴이 필요하다고 본다. 아울러 외세에 빌붙어서 자기 나라를 능욕한 무리에 대한 역사적 정리도 필요하다고 본다. 이 점과 관련, 민간기구는 물론이고 정부가 스스로 대대적인 활동에 나서야 할 것이다.

둘째 ‘국치100년’은 아직도 일본과의 사이에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을 해결하는 계기로 활용해야 할 것이다. 현안으로 떠오르고 있는 일본 교과서의 왜곡 및 식민주의사관의 시정은 물론이고 독도문제, 동해/일본해 표기 문제, 정신대·일본군 ‘위안부’를 비롯한 징병·징용의 문제, 원폭피해자와 한국인BC급전범 문제, 시베리아억류자와 사할린동포 및 재일동포 문제 그리고 야스쿠니(靖國) 신사 문제 등을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한다. 일제의 강제동원정책과 침략전쟁 피해자들의 진상 규명 및 명예 회복과 배상 문제 등의 해결이 1965년 6월 22일에 체결된 한일기본조약의 문제와 관련된 만큼 이 문제를 공론화하여 대안을 모색해봐야 할 것이다. 이 밖에 일제가 스스로의 법령에도 근거하지 않고 약탈해간 자원과 물자, 문화재 약탈 문제, 민족말살정책에 따른 정신적 피해 등은 ‘국치100년’을 맞아 제대로 밝혀 정리할 필요가 있다. 이 해결이 장기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국치100년’의 시점은 그것들을 제대로 정리하여 후대에 남겨야 할 중요한 시점이라고 본다.

‘국치100년’은 앞서 언급한 이같은 진실규명이라는 바탕 위에서 미래를 새롭게 설계하는 시점이기도 하다. 한일관계 뿐만 아니라 동북아의 질서가 마냥 이대로 갈 수는 없다. 세계가 지역에 따라 역내의 결속을 강화하고 경제 사회 문화 등의 교류를 활발하게 전개하고 있다. 이유(EU)와 아세안, 북미연합(NAFTA) 등이 그 사례다. 동북아도 21세기를 맞아 역내의 결속을 강화하면서 환경·금융·지역안보 등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이럴 때 가장 저해요인이 되는 것이 과거 제국주의시대에 남긴 침략적 유산과 새롭게 부각되고 있는 중화적 신패권주의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역사와 영토 문제로 나타나고 있다. ‘국치100년’은 비록 한국과 관련된 것이지만 일본과 중국도 이 문제의식에 동참하여 선린으로서 역내의 결속을 다짐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역사가 미래를 발목잡아서도 안되지만 역사적 앙금을 해결함이 없이 화해와 상생의 미래로 나아갈 수 없음도 명백하다.

‘국치100년’을 맞으면서 가장 수치스럽고 오욕의 시기에 그 전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폭넓게 세계와 소통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는 점도 잊어서는 안된다. 그것은 오늘날에 주는 교훈이기도 한다. 그 소통의 기회는 일제라는 외세에 의해 주어진 것이기도 하지만 우리들 스스로 망명이든 유학이든 해외를 경험하여 세계관을 가장 폭넓게 넓힌 기회이기도 했다. ‘국치100년사업’은 바로 수치와 오욕 저편에 있는 이같은 역사적 사실도 직시하면서 오늘을 새롭게 설계하는 계기가 되어야 할 것이다.

‘국치100년’을 맞으면서 우리는 우리의 쓰라린 경험이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제3세계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심리적 사회경제적 자산으로 활용해야 한다는 점도 강조하고 싶다. 수치와 오욕의 역사는 타기하고 싶은 역사임에 틀림없지만, 그러나 이런 부끄러운 역사도 우리의 역사로 소중하게 싸안고 그 역사를 통해 타산지석의 교훈으로 삼을 때 귀중한 미래를 열어가는 동인이 될 수 있다. 그 역사를 내 속에 녹여서 소중한 자산으로 자산화할 수 있을 때 우리 속에 있는 ‘식민지적 수치와 회상’을 떳떳하게 극복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아직도 식민지 반식민지 상태에 있는 다른 민족들의 고난에 동참하여 그들의 자주와 독립을 위해 봉사할 수 있게도 될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우리의 식민지적 경험적 자산을 세계에 공유하면서 그것을 승화시키는 것이라고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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