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에서 겨울로 분주히 접어드는 이 계절, 한 인터넷매체의 여행 섹션을 훑다 우연히 만난 이름, 박도.국내외 이 곳 저 곳의 여행담들을 쏟아내는 여러 시민기자들 가운데 유독 그의 이름에 눈길이 가는 이유는 뭘까. 교직에 있던 1980, 90년대 서정성 짙은 소설과 수필로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낸 그는 언제부턴가 항일투쟁전적지 등 현대사의 숨결이 살아있는 곳을 누비며 글을 쓰기 시작해 지금까지 ‘현대사전문작가’로 활약하고 있다. 예순 셋의 나이에도 아랑곳없이 길을 걷고 또 걸으며 작가적 소임을 다하고있는 그를 강원도 안흥에서 만났다.
산 속 여러 갈래의 굽이길을 돌아 찾아간 강원도 횡성군 안흥면. 찐빵이 유명하다는 마을 구석구석엔밀가루 내음과 같은 온기가 짙게 배어있다. 작가 박도의 글에서 이미 여러 차례 만나던 그 풍경과 오롯이 겹쳐진다.
‘겨울 햇살이 솜털처럼 따사하게 살갗에 닿았다. 날씨가 추울수록 햇살은 더 좋다. 겨울 하늘이 유리알처럼 맑았다. 내가 몇 번이나 하늘을 보면서 거듭 감탄하자 아내는 아직도 철없는 10대 소년 같다고 한마디 했다.’
‘철없는 10대 소년’으로 그가 이 마을에 둥지를 튼 지도 벌써 4년째. “산골 허름한 집에서 낮이면 텃밭을가꾸다가 뒷산에서 삭정이를 주워 군불을 지피고는 밤이면 원고지를 메우고 있다”는 그는 이곳에서 누구보다 소박한, 그러나 따뜻한 삶을 꾸리고 있다.
소비적인 도시 생활에 염증… 안흥 산골에 터 잡아
처음, 그에게 연락을 하기로 마음먹은 것은 가을날 홀연히 떠날 수 있는 경치 좋은 여행지나 몇 곳 추천받았으면 하는 가벼운 마음에서였다. 그러나 메일을 보내고, 어렵지 않게 통화가 된 후에도 이상하게약속을 정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수화기 저편에서 간간이 달력을 넘기는 소리가 들리는 듯도 했으나그는 쉽게 날을 잡지 못했다. 그리고 그 상태로 지지부진 한 달이 지났다.
후에 안 사실이지만, 그는 당시 호남 의병전적지 대장정을 준비하는 중이었고 곧 어디론가 떠날 채비를하고 있었다. 내색하진 않았으나 그 시기 인터뷰 요청이란 것이 그에겐 뜻밖의 짐이었으리라. 실제로얼마 지나지 않아 전화를 통해 “이곳 저곳을 떠돌며 열심히 취재하고 있다”며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나 기분이 좋다”는 등의 이야기를 전하기도 했다. 시계를 보면 대체로 늦은 시각. 그 시각까지 길을 걷고 있을 그의 모습을 떠올리자니, 어쩐지 한가로이 가을여행 타령이나 하려던 마음이 조금은 부끄러워졌다. |
일련의 곡절 끝에 그를 만난 건 10월 말. 그것은 뜻밖의 사고 ‘덕분’이었다. 이번 대장정에 함께 하며‘‘든든한 안내자’를 자처했던, 구한말 호남의병장 고광순 선생의 후손이 자동차 사고를 당하면서 잠시 대장정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경미한 사고라 해도 사람에겐 휴식이, 자동차에겐 정비가 필요했던터라 그 같은 결정을 내렸다고.
어지간히 심란했을 그 속내도 헤아리지 못한 채, 기회랍시고 기자는 서둘러 안흥으로 향했다. 집 앞 큰길까지 마중나온 그는 다행히도, ‘마치 옛 제자 같기도 하고 먼 이국 땅에서 유학 중인 딸 같기도 하다’며 반갑게 맞아주었다. 장독이 옹기종기 놓인 아담한 마당으로 들어서자 낮은 슬레이트 지붕의 소박한안채와 별채가 대번에 시선을 사로잡는다.
서재 격인 별채 앞 나무 팻말에는 그가 손수 썼다는 ‘박도글방’, 정갈한 네 글자가 새겨져 있다. 그를 따라 들어선 글방엔 벽마다 역사, 종교, 문학 등 다양한 갈래의 책들이 빼곡하다. 쓰다 만 원고, 대장정에관한 문건들도 간간이 눈에 띈다. 동쪽 넓은 창으로는 강원도 산새가 그림처럼 펼쳐져 글방의 운치를더한다. 그가 왜 33년간의 교단생활을 정리한 뒤 아무 연고도 없는 이곳으로 불현듯 향했는지, 어렴풋이 알 것도 같다. 손수 길렀다는 고구마와 가을 향이 짙은 차를 앞에 두고 그는 두런두런 이야기를 시작한다.
서정적 수필가에서 ‘현대사 전문 작가’로
“책을 쓰는 데 집중하기 위해 이곳으로 왔지만 그리 부지런하진 못해요. 글을 쓰다 텃밭을 가꾸기도 하고… 우리가 먹는 야채는 거의 집 뒤 텃밭에서 재배하거든요. 생각보다 공이 많이 들죠. 풀하고 싸움할때마다 번번이 져요.”
예의 ‘10대 소년’처럼 웃는 그. 글에 보다 집중하고자 이곳으로 향했다는 그는 다른 한편으로 서울에서의 생활이 극히 고단했다고 말한다. 도시의 소비적인 생활에 시달리느니 시골에서 개나 고양이와 어울리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는 그는 이 곳으로 내려오기 직전인 2004년, 문득 자신의 내면으로부터 큰 ‘충격’을 겪는다.
“사학비리가 끊이지 않을 때였어요. 늘 그런 일들을 남의 일 이야기하듯 씹으면서도 ‘나는 아니다’라고생각했죠. 그러던 어느 날인가, 나도 주연은 아니지만 조연이나 엑스트라쯤은 되겠단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미련 없이 떠났어요.”
그것은 사회로부터 받은 충격이자 동시에 자신의 평생에 대한 깨달음이었다. 그로부터 이 사회의 비리,부정부패에 보다 근원적으로 접근하고자 하는 마음을 품게 되었다고. 글을 써서 그 같은 문제점들을 많은 이들에게 알려나가는 게 교편을 잡는 일보다 효과적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요즘도 ‘친구들이 그리워 가끔 서울나들이에 나서곤 하지만 막상 밤낮 없이 아파트 값 얘기나 하는 이들 틈에 있다보면 후회만 안고 돌아오기 십상’이라는 그는 그렇게 도시 생활을 청산하고 예순의 나이에전업작가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그 전까지 《사람은 누군가를 그리며 산다》 《비어 있는 자리》 《샘물 같은 사람》과 같은 서정적인 소설, 수필 등을 주로 써 온 그는 이후 우리 역사의 숨결이 살아있는국내외 곳곳을 누비며 이를 대중에 알려나가는 ‘현대사 전문작가’로 거듭난다. 이것은 ‘비리, 부정부패에 보다 근원적으로 접근하고자 하는 마음’의 다른 표현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어느 순간 사람들이 ‘현대사 전문작가’라고 칭하는데, 그 호칭이 저는 아직도 부끄러워요. 내가 전문적으로 한 일도 없는데, 그런 타이틀로 불린다는 게 자칫 오만해 보이지는 않을까 염려스럽기도 하고요.”
이 같은 말은 언젠가 자신의 기사 한 귀퉁이에 털어놓았던 속내와도 상통한 것이다.
“사실 나는 역사학도가 아니다. 우리 역사에 깊은 공부가 없다. 나의 취재 답사는 새로운 역사를 발굴하기보다는 이미 역사학자들이 애써 연구로 남긴 저서나 기록들을 참고로 해 역사의 현장을 찾아 확인하고 유족이나 후손을 만나 그 분들의 마음속 얘기를 듣고, 이를 내 나름대로 거른 뒤 젊은 세대를 위해가능한 쉽게 쓰려고 한다.”
어쩌면 이 같은 마음 때문에 누구보다도 열정적으로 일에 매진할 수 있는 것인지도. 일제 치하 중국 대륙에서 조국 해방을 위해 목숨 바친 의병들의 발자취를 더듬은 여행기 《민족반역이 죄가 되지 않는 나라》《항일유적답사기》와 미국에서 발굴한 6․25전쟁기의 사진들을 엮어 펴낸 사진집 《지울 수 없는이미지》등 최근 몇 년 사이 그가 발표한 책만 자그마치 10여 권. 특히 총 3권으로 이루어진 《지울 수없는 이미지》는 ‘전쟁 직후 북의 자료를 쓸어 담듯 가져간 미국’의 국립문서기록보관청과 맥아더기념관을 샅샅이 뒤져 만든 열정의 산물이다.
“미국은 총 3번 갔어요. 갈 때마다, 아침부터 밤까지 그 기관들을 샅샅이 뒤졌죠. 그 결과 인민군 노획문서에서부터 인민군의 아내가 몸을 풀고 남편에게 보낸 편지 등 귀한 자료들을 많이 구할 수 있었어요.”
‘조국과 민족 위해 목숨 바친 이들 족적 따를 것’
그렇다면 서정적 소설이나 수필을 쓰던 그가 항일투쟁이나 6․25전쟁과 같은 현대사의 한 부분들을 전문적으로 다루어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언제부터일까. 그 시작은 교단에 있던 1997년, 당시 출간한 산문집《아버지는 언제나 너희들 편이다》를 읽고 그의 필치에 매력을 느낀 한 학부모가 중국에 거주하는 독립유공자 후손들의 취재를 권하면서 부터다. 물론, 그 권유를 선뜻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은 아이들을가르치는 교사로서 자신이 먼저 독립운동사와 같은 우리 현대사를 알아야한다는 생각을 품고 있었기때문이다.
그는 언젠가 대학 구두시험에서 ‘윤봉길 의사’에 대한 답변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한 제자에게 ‘그것도 몰랐느냐’고 이야기하다 문득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고 말한다. ‘정작 나는 독립운동사를, 독립지사를 얼마나 알고 있는가’하고.
평소 그런 생각을 품고 있던 터라, 1999년 중국 동북지방으로 떠난 첫 항일유적지 답사는 수월하게 진행되었다. 이후 2000년과 2004년에 그는 그곳을 다시 찾았다. 총 3차에 걸친 답사의 행적은 그의 저서《항일유적답사기》에 상세히 실려 있다.
첫 답사 이후, 자비를 털어서까지 그가 다시 답사를 단행하게 된 데는 항일 의병장 허형식(許亨植) 장군의 영향이 크다. 허형식 장군은 1940년대 북의 김일성 주석 등과 함께 중국에서 활동했던 저명한 ‘항일빨치산’이지만 국내에는 별로 알려져 있지 않다. 액자에 넣어 책장 한 켠에 놓아 둔 장군의 사진을 꺼내보이며 그의 행적에 대한 이야기를 덧붙이는 박 씨는 첫 방문 당시 장군의 존재에 대해 알고 단번에 그에 매료되었다고 한다.
“허형식 장군은 경북 구미 태생이에요. 항일연군 지도자들이 대부분 북쪽 출신인데 반해 그는 드물게남쪽 출신이죠. 공교롭게도 저의 고향도 구미예요. 인연이 깊죠. 그래서인지 뒤늦게 알게 된 분이지만,이 분이 내 인생에 많은 영향을 끼친 것 같아요… 젊은 나이에 조국과 민족을 위해 불꽃처럼 살다간 분.민족과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이야말로 가장 멋진 삶이잖아요. 저 자신은 그렇게 살지 못했죠. 앞으로도 그런 기회는 없을 거예요. 다만 그런 분들의 족적을 따르며 글로 쓰는 수밖에. 다행히 이렇게작가가 되었으니 앞으로 계속해서 그분들의 한을 달래는 역할을 하고 싶어요.”
현재 장군의 후손들은 모두 평양에 살고 있다고 한다. 지난 2005년 7월 평양에서 열린 ‘6․15 남북공동선언 실천을 위한 남북작가대회’에 참가했던 그는 그 곳에서 장군의 후손을 만나 자료라도 얻고 싶었으나쉽지 않았다고. ‘첫 술에 배부를 수는 없는 법’이라고 자위할 수밖에 아직은 도리가 없다.
‘북녘 땅 답사할 날 꿈 꿔…’
이후에도 그는 중국, 일본, 미국 등지를 치열하게 누비며 ‘현대사 전문작가’로서의 영역을 확대해 나갔다. 그렇지만 가슴 한 켠엔 언제나 아쉬움이 남았다고. 그 아쉬움이란 여태껏 이 땅의 항일유적지를 제대로 답사하지 못한 것에 대한 일종의 죄책감이었다.
“3차에 걸쳐 중국 대륙에 흩어진 항일유적지를 답사했는데, 그때마다 국내 항일유적지를 두고서 국외부터 더듬는 게 순서가 잘못된 일이라는 생각을 하곤 했어요. 언젠가 국내 항일유적지 답사를 시작하리라는 생각을 갖고는 있었지만 선뜻 걸음을 떼지 못했죠. 답사에 따른 여러 준비도 부족했지만, 무엇보다 열정이나 자신감이 부족했던 것 같아요.”
그러던 그가 마침내 올해 10월 말을 기점으로 국내 답사를 시작했다. 호남 의병전적지가 바로 그 출발점이다. 답사가 시작된 후, 평소 그가 연재하던 인터넷 매체 ‘여행’섹션에는 그의 기사들이 조금씩 게재되고 있다. 얼마 전 그는 지리산 피아골 연곡사에 다녀온 이야기를 썼다.
“‘피아골’하면 ‘빨치산’을 연상할 만큼 이 계곡은 빨치산의 아지트로 유명한 곳이 아닌가. 빨치산을 주제로 한 ‘피아골’이라는 영화도 있었다. 피아골의 단풍은 유난히 붉고 아름답다. …이 계곡에서 죽어간숱한 이들의 피가 골짜기를 붉게 물들였기에 ‘피아골’이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속설이 있다.”
그의 글을 읽고 있자니, 마치 피아골의 핏빛 단풍이 눈 앞에 펼쳐지는 듯 하다.
올 안으로 그는 호남지방 답사를 마무리할 예정이라고 한다. 내년 중으로는 영남, 중부지방을 돌 것이라고. 남쪽 땅 전체를 돌고 기회가 된다면 북쪽 땅까지 가보는 것이 그의 바람이다. 아직은 ‘계획’일 뿐이라고 말하는 그이지만 그 바람은 몹시 간절해 보인다. 재작년 평양 방문 당시의 감회를 아직도 잊지못한다는 그.
“순안공항에 내렸을 때 그 길가 콩잎이며 벼포기며 모두 남쪽하고 똑같아 놀랐어요. 평양이 아니라 어디 횡성이나 여수쯤에 와 있는 기분이 들더라고요. 사람들과 만나 악수를 탁 하는데, 얼굴은 검고 손은거칠한 그 사람들이 ‘반갑습니다’하는데 그 순간 기존에 갖고 있던 정치적 편견은 다 사라졌죠.”
또한 그는 ‘화려하고 깨끗한’ 금강산에 대해 한참을 ‘예찬’하며 “해외 각지를 돌아다닐수록 이 땅이 아름답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고 말한다.
“북녘 땅을 답사한다는 것은 알다시피 아직은 너무나 막연한 일이에요. 그렇지만 한 치 앞도 모르는 것이 인생이니 만큼 어느 날 문득 이 꿈이 이루어질 날도 오겠죠.”
예순 셋, 그는 여전히 꿈을 꾸고 있다. 끊임없이 길을 걷는 꿈, 민족의 역사가 그의 발길과 함께 조금씩 나아가는 꿈을 말이다.<민족21, 12월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