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한국역사연구회와 함께 11월 21일 프레스센터 19층 기자회견장에서 관련 전문가들을 한 자리에 모시고 “언론 매체를 통해 본 친일의 논리”라는 주제로 학술대회를 개최한다.
▣ “언론 매체를 통해 본 친일의 논리”를 주제로 한 이번 학술대회는
1) ‘친일’의 내적 논리를 분석하여 한국 현대사에서 문화 양식으로 작동하고 있는 식민 잔재를 청산하고, 식민지 근대화의 부정적 유산을 극복하기 위한 작업의 일환으로 기획되었으며,
2) 친일 지식인들이 주도한 신문과 잡지 등의 언론 매체를 대상으로 그들이 생산하고 사회적으로 유포시킨 친일 논리를 분석함으로써 친일이 단지 일방적인 강요가 아니라 일정한 ‘내적 논리’에 의해 일어났으며, 그것이 식민지배를 합리화하고 나아가 일제의 침략전쟁마저 정당화하는 논리로 발전함으로써 민족뿐만 아니라 인간의 자유와 존엄성을 억압하는 체제와 사상에 복무한 ‘타락한 이데올로기’로 한국 지성사에 커다란 상흔을 남겨놓았음을 밝혀내고자 한다.
▣ 이번 학술대회는 특히 일제의 식민지배 담론을 수용하여 유포시켰던 친일매체에 초점을 맞춰 그들이 주장했던 논리의 구조와 그 역사적 의미를 검토한다는 데 의의가 있다. 친일의 논리가 형성되는 역사적 흐름과 각 시기별 同異性을 고찰하기 위해 계몽운동기의 대표적인 친일단체인 일진회의 기관지 「국민신보」와 3·1운동을 전후한 시기 조선총독부의 기관지 「매일신보」, 그리고 1920년대 전반기 대표적인 지방 친일단체인 대동동지회의 기관지 「공영」과 참정권청원운동을 주도한 국민협회의 기관지 「시사평론」, 1930년대와 1940년대를 대표하는 친일잡지 「삼천리」를 각각 분석하였다.
발표문 요지
「국민신보」를 통해 본 일진회의 친일논리
◆ 서영희(한국산업기술대 교수) 발표문 요지
일진회의 친일행각이 단순히 기회주의적 정치 모리배의 행위 차원이 아니라 어느 정도는 강한 자기확신에 근거한 집단적 행동이었다. 이 연구는 일진회 회원들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일진회 활동에 참여하였는지 알아볼 수 있는 방편으로 일진회가 발간한 국민신보의 기사와 잡보 등을 분석하였다.
일진회의 친일논리를 이완용 친일내각의 그것과 비교해봄으로써 식민지 병합을 목전에 둔 대한제국 각 정치세력의 균열의 실상과 인식의 편차를 밝혀 보고자 한다. 이완용이 기존의 양반관료 중심의 정권 운영을 지향했다면, 일진회는 보다 광범위한 하층세력의 정치참여, 즉 지방 일진회원들의 정치 참여 기회 확대를 구상했다.
대한협회, 서북학회 등과 함께 소위 3파 연합을 결성하였다가 결렬되고 1909년 12월 마침내 합방추진 청원서 제출하게 되는 시기에 일진회는 이완용 내각 타도라는 목적에서 대한협회, 서북학회 등과 연합하였지만 결국 일본과의 관계 설정 및 政體 구상, 합방에 대한 견해 차이로 헤어지는데, 이 과정에서 ‘政합방론’으로 대표되는 일진회의 政體 구상이 등장하였다. 애초에 民會를 표방한 진보회 세력을 포괄하고 기존의 양반관료 지배체제에 대한 대체 권력으로서 자임한 이용구, 송병준 등 일진회 지도부가 결국 자진 합방을 청원하기까지의 정치적 과정은 한국 근대 정치사 출발점을 왜곡시키고 나아가 일제하 친일정치론의 모태가 되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매일신보」를 통해 본 친일의 논리와 심리-3·1운동기를 중심으로
◆ 임경석(성균관대 교수) 발표문 요지
이 글은 3·1운동기에 친일 행위자들이 어떻게 행동하고 무엇을 생각했는지를 추적하고 있다. 일본의 식민통치에 협력했던 사람들에게는 3·1운동은 참으로 당혹스런 일이었다. 자신의 사회적 존재의 기반을 뒤흔든 위험한 사태였다. 그에 임하여 친일 행위자들이 무엇을 했는지 재현했다.
3·1운동기에 주목하는 이유가 있다. 친일의 행위와 사유는 민족적 저항이 고조된 조건 속에서 더욱 단호해지고 치밀해지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3·1운동기 정세 변동의 추이를 두 국면으로 나눠서 보았다. 하나는 ‘대중시위운동 국면’(1919년 3월 – 6월)이고, 다른 하나는 ‘정책 전환 국면’(1919년 7월 이후)이다. 분기점은 그해 6월 23일 베르사유 강화회의에서 패전국 독일이 조인한 날이었다. 그때 이전과 이후에는 식민 지배에 저항하는 조선인 대중의 행동 양상도, 일제의 식민지 통치 방법도 달라지는 경향을 보인다.
「매일신보」는 조선총독부의 기관지였다. 당시 조선에서 간행되던 유일한 조선어 신문이기도 했다. 따라서 이 신문에는 3·1운동에 임하는 총독부의 정책과 태도가 잘 반영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친일 조선인들의 언행도 상세히 수록되어 있다. 조선인들의 저항을 무력화하자면 조선인 유력자를 동원하는 것이 효과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는 그 지면에 주목했다. 그것을 분석함으로써 친일 행위자들의 논리와 심리를 재구성했다.
「공영」을 통해 본 대동동지회의 현실인식과 친일논리
◆ 박종린(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연구교수) 발표문 요지
본 연구는 1920년대 10월 26일 평양지역을 중심으로 조직된 친일정치운동단체인 대동동지회(大東同志會)의 현실 인식과 친일 논리를 기관지인 「공영(共榮)」을 중심으로 검토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대동동지회는 두 가지 점에서 삼일운동 이후 우후죽순처럼 조직된 다른 정치운동단체들과 구별되는 친일정치운동단체였다. 첫째 대부분의 친일정치운동단체들이 경성에서 조직되었던 것과는 달리 대동동지회는 평양의 친일정치세력을 중심으로 조직된 대표적인 지방중심의 친일정치운동단체였다. 평양은 한말 이래 부르주아 민족주의세력과 그 운동의 강력한 지역적 기반이었다는 점에서 매우 흥미있는 사실이다. 둘째 대동동지회는 조선인의 배일사상을 선도하고, 동양 민족의 공존공영을 목적으로 한다는 친일노선을 공공연하게 표방하고 행동하였다. 그러나 참정권운동을 전개한 국민협회나 내정독립기성운동을 전개했던 동광회가 자신들의 언론매체를 통해 정치문제에 대한 관심과 견해를 표출한 것과는 달리 대동동지회는 기관지를 통해서는 정치문제에 대한 직접적인 견해 표출보다는 삼일운동 이후 새롭게 전개되고 있던 세계와 새로운 사조에 대해 자신들의 인식과 사상적 편린을 표출하였다. 따라서 1920년대 친일파의 현실 인식과 그 인식의 기반이 된 세계관을 고찰할 수 있는 매우 유용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공영」의 편집인 겸 발행인은 대동동지회의 회장인 선우순(鮮于金筍)이 담당하였다. 선우순은 1919년부터 1926까지 조선총독을 가장 많이 면담한 인물로, 이러한 친일활동을 인정받아 1921년에는 중추원 참의에 오른 인물이었다.
「시사평론」을 통해 본 국민협회의 근대국가 인식과 참정권청원론
◆ 이태훈(연세대 강사) 발표문 요지
제국주의 침략과 억압의 상황 속에서 집단적 정치행위로서 지배세력에 협력한다는 행위가 어떻게 가능하게 된 것인지를 사회구조적 차원에서 해명할 때 친일은 도덕적 비판의 대상이 아닌 근현대 역사과정의 일부로서 정당하게 설명되고 또 비판될 수 있다.
국민협회는 1920년대 가장 규모가 큰 친일정치운동단체이며, 1930년대까지 지속적으로 전개된 참정권청원운동의 중심세력이었다. 이들은 일본이란 강대국의 국민이 됨으로써 강한 근대국가의 국민으로서 사적이익과 권리를 실현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다. 이런 인식은 이미 한말 이래 형성되어온 도구적 국가관, 즉 국가나 공동체를 사적이익의 실현체로서만 바라보는 인식과 맥을 같이 하고 있었다. 이를 실현하는 방법으로 참정권 부여를 주장했고, 이를 통해 일본과 조선의 ‘국가적 융합’은 물론이고 병합의 본의의인 조선인의 근대적 권리실현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하였다. 이들이 자치제를 단호히 거부한 것은 자치라는 독자적인 정치공간에서는 자신들의 헤게모니를 만들어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이들이 주장한 참정권청원운동은 부르주아계급으로서의 성장에 근대국가로서 혜택을 줄 수 있다면, 그래서 그 구성원이 될 수 있다면 민족국가의 여부가 상관없다는 친일논리의 핵심을 보여준 운동이었다.
「삼천리」를 통해 본 친일의 논리와 정서
◆ 이지원(대림대 교수) 발표문 요지
1937년 중일전쟁 이후「삼천리」에 나타난 글에서 전쟁을 바라보는 기본 관점은 일제의 침략전쟁이 가져다주는 경제부흥과 강자화에 대한 열망이었다. 사회진화론적인 세계관과 종속적 근대화론이 결합하여 일본의 전쟁을 강자이자 근대적 문명국가로의 발전이라는 전망 속에서 받아들이게 하였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조선인들은 일본에 의지한 종속적 경제 발전, 근대화를 자기 존재감의 근원으로 내면화해갔다. 이들은 한때 일제에 대하여 협력과 저항의 양 축을 지탱하며 일제 지배 하에서 산업화와 근대적 발전을 추구했으나, 전쟁이 세계로 확대되고 일본이 주도하는 전쟁을 통해 조선인의 삶의 무대가 아시아로, 세계로 확대되는 상황을 목도하면서 저항의 축을 놓아버렸다. 종속적 근대화의 발전 속에서 패배주의적 친일론은 정당화되었던 것이다.
전쟁의 확대 속에서 친일의 명분으로 제기된 또 다른 논리는 동아협동론이었다. 그것은 19세기 이래 서양과 동양의 만남 속에서 지속되었던 대결 구도가 일본에 의해서 20세기에 지속된다는 관점에서 일본의 군국주의를 강조하는 논리였다. 동아협동론은 동양과 서양의 인종주의적 대결의 논리와 정서를 고무하는 가운데, 조선과 일본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내선일체의 논리와 연계되었다. 이 시기 내선일체의 논리는 동화주의의 관철 속에서 민족과 국가의 일체화를 의도하였다. 그것은 대동아공영권에 의한 다민족국가의 구상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러나 그 구심력은 민족이 아닌 국가였다. 파시즘, 전체주의는 민족을 강조하되 개별적인 권리나 자유보다 국가라는 전체를 통한 사회통합을 추구하였다. 내선일체 국가주의 하에서 민족의 경계를 넘어 민족과 국가를 일체화시키며 친일을 정당화하고 일상 정서로 만들어가고 있었다.
전쟁을 통해 친일을 정당화하는 논리는 파시즘의 논리와 정서를 내면화하였다. 파시즘의 국가주의는 민족의 인종주의적 기반을 전제로 하는 가운데 문화의 복고성과 향토성을 강조하였다. 특히 전쟁이 확대되고 장기화되는 가운데 1940년 8월 선포된 일제의 ‘신체제’ 방침은 내선일체를 기반으로 한 고도 국방국가 정책을 제기하였는데, 삼천리는 그와 관련하여 파시즘 문화론을 많이 거론하고 있었다. 그것은 신체제하의 국민문학, 대중문화에 관한 것으로 향토예술과 농촌오락의 장려, 향토문화의 선양 등이 주 내용이었다. 이는 파시즘적 동원 문화의 일환으로 민족정서가 왜곡 이용된 것을 보여주었다. 향토성은 일본 국가주의의 논리와 문화 속에 민족정서로 위장되어 대중을 호도하였던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