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 화창한 가을날씨에 경기동부지부 9월 정기모임으로 민족일보 조용수선생님 묘소참배를 위한 남한산성 검복리 주차장으로 가족과 같이 서둘러 도착했습니다. 지금 살고 있는 아주 가까운 곳에 그분의묘소가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으며, 동생 되시는 조용준선생님께서 참석하신다니 역사 속의 인물과 마주한다는 마음이 들어 들뜨기까지 했습니다.
일행이 모두 도착하기를 기다리는 동안 조용준선생님께서 재심결정이 내려지기까지 과정과 당시 민족일보 기획실장을 맡으시며 겪으셨던 역사적 사실에 대해 말씀해주셨으며, 위원장님께서 이번 모임의취지에 대한 설명이 있었습니다.
김하욱위원장님, 서울북부지부 김일송님, 광복회 광주지회장 송재복님, 광복회 성남지회장 이용위님,류정일님, 문종현님 내외분, 정태경님, 저희 가족들 모두 조용준 선생님의 안내로 묘소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얼마 걷지 않아 묘소에 도착하니 조용준선생님 사모님과 며느님께서 미리 오셔서 참배준비를 해 놓으셨습니다. 조용준선생님께서 큰절을 올리시기전에 “형님, 여기 여러 동지들께서 형님께인사 드리러 왔습니다.” 말씀하시는데 새삼 동지란 말의 의미가 가슴에 깊게 박혀왔습니다.
세월의 간극을 뛰어넘어 역사 속의 인물과 하나가 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어렸을 적에 숱하게 본 반공영화 속에서는 살벌한 느낌을 주던 동무, 동지란 표현이 원래는 좋은 의미를 지닌 것이었는 데 라는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모두들 큰절을 올리고 나서 음복을 한 후, 잠시 묘소 주변을 둘러보았습니다. 32세의 젊은 나이에 돌아가셔서 묘비에 약력조차 없는 것이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후손이 사산했다는 말씀을 들으니 마음이 더욱 아팠습니다. 1961년 일본에서 귀국하셔서 민족일보를 창간하시고, 5.16 이후 구속되어 그 해12월 사형을 당하신 그 모든 것이 1년 안에 일어났다는 사실이 한편의 드라마 같았습니다.
당시 가판 1위를 기록하며 폭발적인 민중의 사랑을 받은 민족일보는 통일문제를 강도 높게 제기하였으며 “이 땅이 뉘 땅인데 오도가도 못하느냐 ,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라는 기사를 게재하기도 하였습니다. 당시 조용수선생님께서 직접 기사문구를 작성하기도 하셨다는 말씀을 전해 들었습니다. 재심결정이 받아들여졌으니, 재판이 열리게 되면, 많은 분들께서 참석하셔서 진실규명에 힘을 보태달라는 부탁이 있었습니다.
참배를 마친 회원 모두는 성경에 나오는 “열두 광주리”라는 식당에서 푸짐한 웰빙 점심식사를 하였으며남한산성 기념관에서 지도사로 계신 송재복 선생님으로부터 남한산성의 역사에 대한 설명을 들었습니다. 모두들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하며, 인사를 나눈 후 원희복 경향신문 기자가 쓴 <조용수와 민족일보>라는 책을 빌려 보기위해 시립도서관으로 향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