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세 뛰어들어 ‘깨달음’ 실천해야 불교”
조계종 불학연구소 ‘근대 고승의 깨달음의 사회화’ 세미나
만해·한암·용성·만공 스님
격변기 살며 수행·사회 구제
나름의 고뇌·행동 통해 해결
“불교는 염세적(厭世的)으로 고립독행(孤立獨行)하는 것이 아니라, 구세적(救世的)으로 입니입수(入泥
入水)하는 것!”
만해(萬海, 1879~1944) 스님은 1931년 발표한 ‘조선불교 개혁안’에서 그렇게 말했다. 세상을 등지고 고고하게 도만 닦을 게 아니라 진흙탕의 속세에 뛰어들어 만민을 구해야 진정한 불교라는 이야기다. 비승비속(非僧非俗)으로까지 일컬어지는 만해의 행적을 이해할 수 있는 핵심 단초가 될 듯하다.
김광식 부천대 교수는 이런 만해의 불교를 두고 ‘대중불교’라고 단언했다. “승려만의 불교가 아니라 전 중생을 위주로 하는 불교가 돼야 한다는 것이 만해의 지론”이라는 것이다. 실제 만해는 1933년 서울 성북동에 자신의 거처인 심우장을 마련하고는 아예 결혼까지 해버렸다. 그의 이런 파격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만해는 선(禪)이라는 것은 사선(死禪)이 아니라 활선(活禪)이며, 따라서 총탄이 빗발치는 전쟁터에서도 가능하다는 입장을 보였다. 그는 말했다.
“요즘 참선하는 사람들은 참 이상하다. 옛사람들은 마음을 고요히 가졌는데 요즘 사람들은 처소를 고요하게 가지고 있다. 옛사람들은 마음을 움직이지 않았는데, 요즘 사람들은 몸을 움직이지 않고 있다. 처소를 고요하게 가지면 염세가 되는 것뿐이며, 몸을 움직이지 않으면 독선이 안될 수 없을 것이다. 불교는 구세의 가르침인데, 부처의 제자로서 염세와 독선에 빠져 있을 따름이라면 잘못된 것이 아니겠는가.”
결국 만해에게 있어 세상에 나오지 않는 수행자는 불교의 근본을 알지 못하는 우매한 불교도일 뿐이었던 것이다. 김광식 교수는 이를 두고 “백담사 오세암에서의 깨달음, 3·1운동 주도, 심우장에서의 결혼생활 등 만해의 행적은 인간사회의 현실을 여의치 않고 번뇌 중에 깨달음을 얻고 실천하고자 했던 그의 일관된 불교관이 그대로 반영된 것”이라고 평가했다.
만해가 살았던 시기는 구한말에서 일제강점기를 관통하는 한반도의 격변기였다. 어찌보면 만해의 불교관은 그런 세간의 현실을 반영한 것일 수도 있다. 이는 동시대를 살았던 다른 주요 스님들에게서도 엿보이는 부분이다.
우선 한암(漢岩, 1876~1951) 스님이 그렇다. 박재현 서울불교대학원대학교 교수에 따르면 한암은 의례에 능숙하고 계행을 실천하는 모범적인 승려를 양산하는 일이 선적 진리를 통찰한 선수행자를 길러내는 일보다 더 시급하다고 생각했다. 간화선 위주의 수행을 거부하고 비구와 대처, 이판과 사판이 서로 연대하는 개혁노선을 지향했다. “선을 하더라도 불공을 해서 탁자 위에 밥을 내려 먹을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그는 또 평소 깨달음과 깨달음의 사회화를 별개로 파악했다. 깨달음이 순수하게 개인적 차원의 종교의식이라면, 깨달음의 사회화는 깨달음을 사회 속에서 체험할 수 있도록 하는 과정이나 절차라는 것이다.
이를 두고 박 교수는 “한암의 그런 태도는 선수행을 통한 깨달음이 사회화되지 못하고 끝내 한 사람의 성취로만 남을 수도 있다는 문제점을 스승인 경허 선사를 통해 목도한 데서 비롯됐을 것”이라고 밝혔다.
만해와 함께 3·1운동에 직접 참여했던 용성(龍城, 1864~1940) 스님은 일제의 불교정책에 반발해 대각교를 창립해 한국 정통불교의 수호에 나서는 한편 불교의 대중화에 힘쓴 인물이다. 특히 포교의 현대화에 앞장서 삼장역회(三藏譯會)의 설립을 통해 경전의 번역활동, 의식집의 한글화, 한글 찬불가의 제정 등에 매진했다. 이덕진 창원전문대 교수는 그에 대해 “기왕의 전통불교가 지닌 대중과의 소통부재라는 측면을 뛰어넘어 다양한 개혁불교의 행적을 남겨놓은 스님”이라고 결론지었다.
근대 선불교 중흥조로 추앙받은 경허 스님의 법제자인 만공(滿空, 1871~1946) 스님은 만해나 한암, 용성과는 또 다른 의미에서 시대의 흐름에 적극 대응한 수행승이었다. 그는 조선 불교를 장악하려는 일제의 사찰령에 반대하며 선학원을 설립하는 등 전통불교의 맥을 잇기 위한 바탕을 마련했다. 특히 1931년 조선총독부가 주최한 31본산 주지회의에서 조·일 불교의 통합을 논하는 참석자들을 꾸짖고 떨쳐나온 일화는 유명하다. 박해당 서울대 규장각 책임연구원은 “일제 식민치하 상황에서도 불교적으로는 결코 지배당할 수 없다는 종교적 독립정신을 표출하며 선사로서의 길을 흔들림 없이 걸어갔다”고 평가했다.
결국 만해나 한암, 용성, 만공 스님 등은 격변기 속에서 수행과 사회적 현실이라는 두 가치의 균형과 통합을 나름의 고뇌와 실천을 통해 해결하려 했던 셈이다. 그들의 삶과 사상을 조명한 학술세미나가 8일 서울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에서 대한불교조계종 불학연구소 주최로 열렸다. 주제는 ‘근대 고승의 깨달음의 사회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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