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의견>독립유공자 변성현 선생
우리는 한 때 참담한 일제 통치를 경험했다.
그 암울한 세상을 철권통치 아래서 우리 민족은 착취당하면서 노예 같은 생활로 연명해야 했다. 물론 개중에는 자기만 잘살면 그만이라는 이기주의자들이나 친일로서 영화를 누리며 살아가는 반민족주의자들도 없지 않아 있었다.
그러나 많은 동포가 망국의 설움을 안은 채 중국이나 시베리아 등지로 삶을 찾아 유랑하면서 반일 투쟁을 전개했다. 한편 국내에 남아 있는 뜻있는 인사들도 탄압에 굴하지 않고 분연히 일어나 독립을 외쳤다. 이는 을사조약 때부터 의병·독립군·광복군의 대일 항쟁과 3·1운동 등 국내외의 독립운동으로 번져 나갔다. 그래서 대한민국이 다시 건국되기까지 수많은 선열과 우국지사가 나타났으니 우리 모두 엄숙하게 그 넋을 추모하고 있다. 그러는 중에 나는 국가보훈처가 광복 61년을 계기로 지난 8월 15일 서귀포시 법환동 출신인 변성현 선생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다는 기사를 읽었다. 이에 서귀포시민의 한 사람으로써 감격스러움이 남달라 그 분의 생애를 재조명해 보려고 한다.
변성현 선생은 1916년 12월 20일 서귀포시 법환마을에서 아버지 변용화씨와 어머니 곡산 강씨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릴 때부터 총명했으며 19세 때는 나름대로 사회에 봉사하는 길을 찾게 됐다.
당시는 왜정의 압박과 유린, 탄압 속에서 농촌은 찢어지도록 가난해 기아와 무지 속에서 처참한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다. 이런 현실을 직시한 변 선생은 1934년 6월부터 지역에서 독서회와 골갱이(호미)회를 조직하고 야학을 시작했으며 주경야독식으로 열심히 수눌음으로 농사일을 하니 인원이 점점 늘고 협동심도 생겨났다. 이런 단체정신으로 독서회와 골갱이회는 공고한 모임으로 성장했고 어느 새 일본의 무단통치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를 높이게 됐다. 그렇게 돼가자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고 서슬이 시퍼렇던 일제 경찰에까지 소문이 들어갔다.
일경에서는 변 선생에게 즉시 독서회와 골갱이회를 해산하도록 명령했으나 변 선생은 이에 응하지 않고 오히려 범섬으로 건너가 토론회를 열고 제국주의 폭정과 전쟁반대운동 등의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이에 일본 경찰은 변 선생을 체포한 후 엄청난 고문을 가한 후 재판에 회부했다. 변 선생은 1937년 6월 징역 1년을 선고받고 복역한 후 형기만료로 출소했지만 고문 후유증으로 인해 24세 약관에 유명을 달리했다.
참으로 비통한 최후였고 순국이었다. 보통 사람이란 안락과 평안을 추구하고 때로는 온갖 아부를 다하며 일신의 영달을 추구해 나간다. 그러나 일제으 현병과 경찰이 총칼로 통치하던 시대에 민족의식을 고양하고 조국의 독립을 부르짖는 것은 목숨을 건 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나 결행하기 어려웠다.
그러므로 독립유공자들은 선각자요 애국자였다. 그런 자유·민주·독립을 찾는 일에 변성현 선생도 앞장서 나갔으니 나라의 귀감으로 우러러보며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다. 아무튼 우리의 기억 속에서 살아져 버릴 뻔하던 변 선생이 애국한 역사적 사실이 이제 세상에 빛을 보게 됐으니 만시지탄의 감이 없지 않으나 참으로 다행스럽다.
변성현 선생의 건국포장 추서를 경하하면서 조국을 위해 장렬하게 희생된 선생의 명복을 두 손 모아 비는 바이다.
– 한국신문학인협회이사
주요기사
독립유공자 변성현 선생-제주일보(06.09.07)
By 민족문제연구소 -
326


![img-top-introduce[1]](/wp-content/uploads/2016/02/img-top-news1.pn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