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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대 전정임 교수, “나는 안익태의 친일을 이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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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말 김재중 기자


 



 


애국가의 작곡가 안익태 선생이 1942년 독일에서 일제의 괴뢰국인 만주국을 찬양하는 노래를 작곡하고 직접 지휘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친일논란이 불거짐과 동시에 “새 애국가를 제정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제기되고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은 논란의 한 가운데서 “안익태 선생의 음악은 오히려 민족적인 색채가 짙다”며  세간의 여론과는 사뭇 다른 주장을 펼치고 있는 한 학자가 있다. 국내에서 몇 안되는 ‘안익태 전문가’로 손꼽히는 충남대학교 음악학과 전정임 교수를 만나 그의 ‘안익태론’에 귀를 기울였다.


 


사실 모두들 말을 아끼려고 했다. 이번에 불거진 안익태 선생의 친일논란은 그저 주장 수준으로 펼쳐진 것이 아니라, 그가 일장기 아래에서 악단을 지휘하는 모습이 담긴 영상물이 직접 증거로 제시되면서 일파만파 커졌다. 때문에 친일파 논란이 벌어질 때마다 ‘소모적’이라며 목청을 높이던 학자들도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런 분위기에서 과감하게 ‘안익태 옹호론’을 들고 나온 인물이 전정임 교수였다. 『안익태』라는 제목의 연구서를 저술하기도 한 전 교수는 최근 언론 인터뷰 등을 통해 “안익태 선생에 대한 친일논란은 성급하다”며 “오히려 그의 음악에서 조국애가 차지하는 비율이 크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사실 사회적 분위기로 볼 때, 친일논란의 한 가운데 선 인물을 옹호하려면 정확한 근거가 있거나, 혹은 일부 우익인사들처럼 매우 용감(?)해야만 한다. 물론 전 교수에게는 전자의 모습을 기대했다.

“안익태 음악의 모티브는 ‘조국애’였다”  


– 안익태 선생이 1942년 독일에서 만주국 창립 10주년 기념음악회를 통해 자신이 작곡한 만주국 축전음악을 지휘했다는 증거가 제시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익태 선생에 대한 친일논란은 섣부르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사실 자체의 신빙성을 의심하는 것인가.

“사건을 부정하자는 것이 아니라 ‘왜 그랬나’를 밝히자는 게 내 주장이다. 세인들은 동양인으로서 세계무대에 서고 싶었을 음악가의 욕망이라는 것을 그리 쉽게 이해하려 들지 않는 것 같다. 예술가의 내면을 바라보지 않고, 그가 남긴 특정한 행적에 초점을 맞춰 그 사람이 남긴 음악 전부를 매도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스럽지 않아 보인다. 유럽 쪽 사료를 더 뒤져서 안 선생의 친일행적이 명백하게 가려진 뒤에 친일의 과오를 물어도 늦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 사실 자체를 명백하게 가리자는데 반대할 사람은 없을 것 같다. 다만 그의 친일 행적과는 별개로 “그의 음악에 민족적 정서가 짙게 깔려 있다”거나 “조국애가 담겨 있다”는 주장도 펼치고 있다. 이런 주장을 뒷받침할 근거는 무엇인가.

“안익태 선생은 교향시라는 장르를 즐겨 사용했는데, 쉽게 말해 줄거리가 있는 여러 개의 테마로 구성했다는 이야기다. 그가 작곡한 ‘한국환상곡’에는 일제침략과 3․1운동, 해방, 6․25 전쟁 등 그야말로 우리의 역사가 함축되어 있다. 1962년에 작곡한 ‘논개’ 역시 민족의 의인을 찬양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아마 더 오래 살아계셨더라면 훨씬 더 많은 민족적 정서를 담은 음악이 탄생했을 것이다. 가령 그가 작품을 구상한 메모를 보면, 국토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등 기본적으로 ‘조국애’라는 모티브를 떠나지 않고 있다.”

– 해방 이후의 음악활동에 대한 설명 아닌가. 그런 활동은 어떻게 보면 1940년대의 친일행적에 대한 반성이나 회한 때문일 것이라 추측할 수도 있지 않나.

“그럴 개연성이 충분히 있다고 생각한다. 해방 이후에도 ‘한국환상곡’에 집착했거나, 이 곡을 들고 전세계를 뛰어다닌 까닭도 거기에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 역시 안익태 선생이 ‘조국’이라는 모티브를 음악에 반영하려 했던 일관적인 맥락과 맞닿아 있다고도 할 수 있다. 가령 안익태 선생이 미국에서 음악활동을 하며 조국에 있는 학생들에게 보냈던 편지 중에 ‘예술가가 조국을 잊고 단지 예술만하면 안 된다’는 내용이 있었던 것만 봐도 남다른 조국애가 있었음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안익태 1940년대 행적, 아직도 미개척분야”


– 1997년에『안익태』라는 책을 내지 않았나. 그때는 안익태 선생의 친일 행적에 대해 전혀 몰랐던 것인가.

“이 책을 쓸 때까지만 하더라도 그의 친일행적과 관련된 자료가 없었다. 사실 친일 문제를 떠나 안익태 선생과 관련된 자료 자체가 희귀했다. 유족들이 독립기념관에 기증한 서신이나 악보들이 거의 전부였고, 최근 밝혀진 유럽행적에 대한 자료는 거의 없었던 시점이었다. 물론 안익태 선생과 관련된 일제시대의 언론보도 내용이 있기는 하지만, 정확도가 매우 떨어졌다. 가령 똑같은 사실에 대해서도 『조선일보』나 『동아일보』가 보도한 내용이 다르는 등, 신뢰하기가 무척 어려운 내용이었다. 어쨌든 이런 자료부족 때문에 사실 안익태 선생의 1940년대 유럽 행적이라는 것은 역사에서 거의 백지상태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이번에 『조선일보』가 보도한 안익태 선생의 지휘모습은 세상에 처음 소개된 내용이 아니었던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그 과정에 대해 알고 있는 바가 있다면 설명해 달라.

“사실 이번에 공개된 필름은 이미 지난 2000년에 『객석』에 발표됐던 내용으로, 그 당시에는 크게 주목받지 못했던 것이다. 한 방송사가 안익태 선생의 지휘모습이 담긴 필름이 발견됐다며 크게 보도한 적도 있었다. 다만 그때는 만주국 찬양과 관련된 내용이 밝혀지지 않았을 따름이었다. 그랬던 것이 이번에 독일에 있는 송병욱씨가 『객석』에 ‘만주국 축전음악’과 관련된 내용을 추가해 발표한 것이 『조선일보』에 의해 부각돼 큰 논란을 겪게 된 것이다. 그리고 송병욱씨와는 이번 사건 이전부터 몇 차례 이메일을 주고받았는데, 그가 안익태 선생의 독일 행적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에게 올해 11월에 있을 심포지엄에서 그 내용을 발표해 달라고 요청했는데, 이미 『객석』과 약속이 되었다며 먼저 발표를 했던 것이다.”

– ‘11월에 심포지엄을 열 것’이라고 했는데, 어떤 행사인가.


그동안 안익태 선생의 행적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았던 것이 사실이다. 때문에 안익태 기념재단이 주최하는 심포지엄을“ 11월에 열고, 그가 남긴 공과 모두를 펼쳐놓고 진지하고 깊숙하게 논의를 해보자고 합의가 되어 있었다.”

– 이번 사건 때문에 계획된 행사였나.

“아니다, 지난해 8월부터 준비해 왔던 행사였다.”

기념재단까지 나서서 안익태 선생에 대한 공과를 학술적으로 검토하려 한 것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사실 그에 대한 친일 논란은 이번에 밝혀진 ‘만주국 축전음악’ 때문만은 아니었다.

학계에서는 벌써부터 그의 친일행적이 공공연하게 거론되었으며, 특히 안익태 기념재단이 그를 독립유공자로 대우해 달라고 신청 절차를  밟았음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이를 거부했던 사례만 봐도 친일행적의 진위는 이미 더 이상 논란거리가 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친일 덮자는 게 아니라, 가혹하지 말자는 것”


– 학계에서는 이번 친일논란 이전부터 안 선생이 스승 슈트라우스가 작곡한 ‘일본축전 음악’을 동경에까지 가서 직접 지휘했다는 사실이 공공연하게 알려져 있었던 것으로 들었다.

“음악이 아닌 음악학을 공부해야만 판단할 수 있는 분야다. 한국의 음악학이라는 게 1980년대부터 시작됐을 뿐만 아니라, 음악학을 하는 연구자 중에서도 한국의 근대사에 관심을 가진 분들의 숫자는 한 손에 꼽힐 정도다. 그 분들 사이에 다 알려진 사실이라고 말 할 수 있다.”

– 그렇다면 안익태 선생이 일본에 가서 일본축전 음악을 지휘했으며, 독일에서는 ‘만주국 축전 음악’을 직접 만들고 지휘까지 했다는 이야기인데, 그 정도면 소극적 친일이었기보다는 적극적인 의지가 있었던 것으로 보아야 하지 않은가.

“앞서 밝혔지만, 그런 행적 이전과 이후의 음악활동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보면 그것은 다분히 예술가적 욕심 때문이었다고 해석된다. 속된 말로 큰 무대에 서고 싶었을 것이다. 물론 먹으면 안 되는 떡인데 덥석 받아든 떡이었다. 밝혀진 행위에 대한 과오는 그것대로 물어야 하겠지만, 그 때문에 한 예술가의 생애 전반을 매도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내 주장이다.”

– 그럴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이해하자는 이야기로 들린다.

“당시 예술가들은 일본에서 만든 단체를 통해 연예증을 발급받지 못하면 활동을 하지 못했다. 정말 노래를 하고 싶은데, 연예증을 발급받지 않으면 노래를 할 수 없고 그래서 연예증을 발급 받았다고 치자. 당시 일본은 연예증 발급자들을 불러모아 선전대를 꾸리기도 했다. 이런 맥락을 이해하지 않고 무조건 일본을 칭송했다고 예술가들을 몰아세우는 것이 합당하지 않다는 이야기다.”

– 인간적인 연민의 문제일 수도 있겠다. 그런데 자꾸 연민에 기대다 보면 역사를 청산하고 넘어가야 한다는 당위보다는 묻어두고 넘어가자는 쪽으로 기울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역사를 잘 알지는 못하지만 역사청산이 얼마나 중요한 과제인지는 잘 알고 있다. 일제시대에 권력에 아첨해서 권력과 부를 쌓았던 사람들이 이승만 정권으로 넘어가면서 청산되기는커녕 권력과 부를 대물림한 사례들이 있다는 것도 익히 알고 있다. 그러나 모든 친일이 다 똑같은 것은 아니지 않은가. 친일로 취한 부와 권력을 대물림한 것도 아니고, 평생 자신의 과오를 멍에처럼 짊어지고 회한에 빠졌던 사람을 또다시 청산의 대상에 올리는 것은 가혹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 지난해 음악평론가협의회 관계자들이 민족문제연구소와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를 비판하며 “친일음악은 일제의 강요에 의한 것”이라며 “음악가 중 친일파는 없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런 시각에 동의하는가.

“처음 듣는 이야기지만 문제가 있는 주장이라고 생각한다. 1997년부터 양악을 연구해본 바로는 친일을 의도적으로 즐겨서 득세한 사람들이 분명히 있는 것으로 보인다. 양악의 선구자라는 분들이 일제의 선전대 역할을 하며 돌아다닌 적도 있고, 그런 분들이 유수대학의 학장을 하고 교수를 하기도 했다. 그래서 제대로 평가하지 못한 부분도 있다. 양악 연구자들이 많아지면 언젠가 밝혀질 일이며 또 밝혀야 한다고 믿는다.”  







– 친일 논란을 떠나 음악학을 하는 사람으로서 음악가 안익태에 대한 개인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을 법하다. 어떤 평가를 내리고 있는가.

“처음엔 작곡가 안익태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 그런데 의외로 알려진 곡이 적었다. 불과 4,5곡 정도가 전부였다. 그래서 유심히 안익태 선생의 행적을 따라 가다보니 처음엔 첼리스트로 활동한 것을 알게 됐다. 당시엔 거의 유일한 첼리스트였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미국에서 음악활동을 했던 초기에도 첼리스트로 활동했다. 그러다 작곡가로 활동하게 되는데, 대표적으로 1937년경에 ‘한국 환상곡’을 작곡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한국 환상곡’을 작곡했던 1930년대 당시 이 땅에서 작곡활동을 했던 사람들과 안익태 선생을 비교하면, 이분의 음악적 재능이 남달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먹고사는 문제 때문이었는지 이분이 곡을 많이 쓰지 못했던 점이 아쉬울 따름이다. 이후엔 주로 유럽에서 지휘자로 활동하게 되는데, 이분에게 객원지휘를 맡겼던 교향악단들이 또다시 지휘를 맡기곤 했던 것을 보면 지휘자로서 재능도 뛰어났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애국가 자체가 역사, 폐지론은 지나친 비약”


– 올해가 안익태 선생의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다. 어쨌거나 몇 안 되는 안익태 연구자로서 친일논란을 지켜보는 심정이



편치는 않을 듯하다.

“일단 올해 100주년 행사를 기획하면서, 내 목표는 안익태 선생에 대해 세상이 들썩들썩 하는 것이었다. 친일논란으로 인해 부정적인 면도 있겠지만, 안익태 선생을 학문적으로 더욱 깊게 조명할 수 있게 되었고 대중적 관심이 높아졌다는 점에서 효과도 있다고 본다. 무엇보다 그동안 발굴되지 않았던 유럽의 사료가 발굴되었고, 또 학자 한 분이 안익태 선생과 그의 스승 슈트라우스의 관계를 연구하기 위해 독일에 들어가신다고 하니 밝혀질 자료도 많을 것이라고 예상한다. 이런 점은 대단히 고무적인 일이다.”

– 그러나 일각에서는 안익태 선생의 친일행적을 지적하며, 이번 기회에 새로운 애국가를 제정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친일논란이 벌어지자마자 그런 주장이 펼쳐지는 것은 너무 성급하다. 여론의 성숙함이 절실하게 요구된다. 황우석 교수 파문도 그랬지만, 무슨 일이 벌어지면 언론이 지나치게 집중하고 사람들이 거기에 매달려서 진실을 기다리는 여유를 실종시켜 버리고 있다. 진실이 밝혀지기 이전에 이미 여론재판부터 벌이는 분위기다. 유감스러운 대목이다. 애국가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우리 애국가는 법이 제정한 산물이 아니라 역사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안익태 선생이 1935년에 작곡한 이후, 미국 동포들에게 널리 불렸으며, 상해임시정부에서도 애국가로 인정한 기록이 있다. 해방이후에도 국민들에게 애국심과 동포애를 불러일으켰다는 점에서 국가행사에서 자연스럽게 연주되면서 공식적인 국가로 정착되었다. 이런 맥락을 고려할 때, 새 애국가 제정 문제는 더 많은 학문적 자료가 나오고 검증이 이루어지고 난 뒤에 논의해도 결코 늦지 않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전정임 교수는 애국가에 얽힌 잘못된 상식 하나를 바로잡아 달라고 부탁했다. 일부 언론에도 그렇게 보도되고 있지만, 안익태 선생의 ‘한국환상곡’에서 애국가가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애국가의 원곡이 ‘한국환상곡’의 한 테마 부분”이라는 상식은 잘못된 것으로, 애국가는 1935년에 작곡되었고 이후에 작곡된 ‘한국환상곡’에 애국가 테마가 포함됐다는 이야기다. 안익태 선생의 친일 논란이 불거지면서 국민들 또한 자존심에 커다란 상처를 입게 됐다. 그러나 진짜로 자존심 상하는 이유는 다른 곳에서 찾아야 할는지 모른다. 정작 이 시대의 선량한 국민들은 애국가가 어떤 사람에 의해 어떻게 만들어졌으며 , 어떤 과정을 거쳐 오늘에 이르게 됐는지조차 모르면서 단지 애국을 강요당하기 위해 세계 유일의 4절 가사를 줄줄 외워 왔기 때문이다. 몰라도 너무 몰랐다.<월간 말, 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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