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기사

“달마야 동경가자! 조선왕조실록 찾으러”

590































 


 


 


문만기 경기동북지부장


 










조선왕조실록환수위원회 실행위원장인 문만기 경기동북지부장 일행은 3월14일부터 2박 3일간의 일정으로 동경대측에 조선왕조실록 반환을 요청하기 위해 일본을 다녀왔다. 회원들을 위해 방문 뒷이야기를 보내왔다. / 편집자주


 


 


100년 가까이 볼모로 잡혀있는 비운의 실록을 구출시키기 위해 우리 일행은 2006년 3월 14일 일본으로 출발하였다. 3월 3일 환수위원회를 출범시키고 일본대사관에 공문을 전달한 이후 12일 만에 실록이 유폐되어있는 동경대 측과 실록반환에 관한 협상을 위해서였다. 동경대. 일제강점기 한반도 지배의 이론 개발의 산실인 동경제국대학이 지금의 동경대가 아니던가. 일본 하네다로 가는 비행기 안. 나를 포함한 조선왕조실록환수위원회 실행위원 네 명(혜문 스님, 법상 스님, 송영한 회원 등)은 내내 아무 말이 없었다. 3월 3일 기세 좋게 기자회견까지 하며 언론과 국민들의 과분한 호응과 지지를 받으며 조선왕조실록을 찾아오겠다고 기세 좋게 출발했지만 환수 여부는 그 누구도 장담하지 못한다는 것을 동경대로 향하는 우리들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왕조실록은 조선 태조에서부터 철종 때까지 25대 472년간(1392∼1863)의 역사를 기록, 1,893권 888책으로 만든 방대한 역사서로 현재 국보 154호이자 유네스코등록 세계 문화유산이다. 조선왕조실록은 임진왜란 이후 태백산 사고, 적상산 사고, 오대산 사고, 강화도 사고의 4곳에 분산되어 보관되어 20세기 초까지 전래되었으나, 일본의 조선점령 이후인 1913년 조선총독 데라우찌에 의하여, 오대산 사고본 일체가 도쿄대학으로 강탈당했다.

현재 월정사 성보박물관에 보관중인 <오대산사적>에 보면  ‘총독부 관원 및 평창군 서무주임 오께구찌그리고 고용원 조병선 등이 와서 월정사에 머무르며 사고와 선원보각에 있던 사책(史冊) 150짐을 강릉군 주문진으로 운반하여 일본 도쿄대학교로 직행시켰다’라고 적혀있으며 또한 일본에서 발행된 사학잡지(史學雜誌) 제25편 2호에 보면 ‘1913년 조선총독 데라우찌와 도쿄대 교수 시라토리에 의하여 일본 도쿄제국대학으로 반출되었다고 기록 되어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1923년 9월 1일 오전 11시 58분 44초에 발생한 관동 대지진때 대부분 소실되고 46책만이 도쿄제국대학 도서관 지하 특별 수장고에 있다는 기록(문화재청 공문으로도 확인)으로만 전해지고 있으니 조선의 역사만큼이나 비운을 담은 세계문화유산인 것이다.

이번의 실록 환수 운동의 시작은 작년 11월로 거슬러 울라 간다. 2005년 3월 경기도 남양주시 봉선사의 작은 암자인 내원암을 상대로 친일파 이해창의 후손이 친일의 대가로 받은 땅을 돌려달라는 소송을 낸 후, 민족문제연구소와 조계종은 단순히 내원암을 지키는 것에 그치지 말고 내친 김에 민족정기를 확립하기 위해 함께 노력하자는 데에 뜻을 같이하고 단숨에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환수특별법을 통과시킨 경험이 있던 터라 일본에 유폐되어 있는 조선왕조실록을 찾아오자는 봉선사 혜문 스님의 제안을 나는 민족정기 확립을 위한 또 한번의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였다. 몇 차례의 내부 논의 끝에 봉선사가 위치한 남양주 지역을 담당하고 있는 경기 동북지부장인 나는 조선왕조실록환수위원회의 심부름을 담당할 실행위원회 위원장이라는 중책을 맡았다. 물론 봉선사 혜문 스님과 오대산 월정사 법상 스님이 간사를 맡아 함께 호흡을 맞추고 있고, 우리들 뒤에는 임헌영 소장님, 이이화 선생님, 조계종 총무원 자승 스님, 월정사 주지 정렴 스님, 봉선사 주지 철안 스님과 더불어 국회에서는 김원웅, 김영춘, 노회찬, 이광재 의원 등이 지원을 약속하고 2006년 3월 3일 조계종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어느 정도의 조직 구성을 마치고 환수위원회를 출범시켰다. 그러나 실록 환수는 일본 대사관 앞에서 일장기를 태우는 식의 대응으로는 전혀 해결될 일이 아니기에 우리들은 더욱 신중의 신중을 기해야 했다. 동경대 측에서 우리의 선의를 이해하고 돌려주면 두 말할 필요도 없이 좋으련만 최악의 경우 일본 땅에서 극우의 선봉장 격인 일본 총리와 도쿄대 총장을 상대로 반환소송까지 감수해야 하는 것이다. 승리를 장담하지 못하는 소송에 들어 갈 시간과 비용은 또 어찌할까.

복잡한 생각을 뒤로 하고 우리를 실은 비행기는 여지없이 하네다 공항에 철새가 강 위에 내려앉듯 미끄러지며 내려앉았다. 이틀 전 MBC 시사매거진 2580에 방영된 조선왕조실록에 관한 슬픈 내용이 같은 날 방영된 이른바 ‘개 지옥 사건’ 보도 때문에 묻혀 버렸다며 이것이 조선의 운명과 닮았다며 농담을 던지는 혜문 스님의 유머에 긴장된 마음을 잠시 잊을 수 있었다. 공항에 내려 일본을 잠시나마 체험해 보자는 생각에 우리 일행은 하네다에서 나의 고모님이 살고 있는 도쿄 분쿄쿠(文京區) 근처의 도쿄돔 호텔로 가기 위해 지하철을 탔으나 중간에 바꿔 타는 것을 모르고 요코하마까지 가서야 사태가 심각성을 깨닫고 차에서 내려 우에노행 열차를 갈아타고 무사히 고모님이 경영하는 음식점에 도착하여 고모님이 만들어놓으신 따뜻한 한국 음식을 맛있게 먹을 수 있었다. 그러나 맛있는 식사 후 걸어서 3분 거리인 도쿄돔 호텔에 가서 이내 사태가 발생하였다. 한국에서 예약을 하지 않고 출발한 우리도 문제거니와 남루한 복장과 이상한 배낭을 멘 스님 두 분이 앞장서서 호텔 카운터에서 방을 구하려고 하자 호텔 직원이 방은 빌려줄 수 있지만 가지고 있는 모든 돈(여행자수표 포함)을 담보물로 맡기라는 것이 아닌가. 화가 나신 우리의 ‘과격한’ 혜문 스님이 작성했던 체크인 서류를 과감하게 찢어버리고 ‘밖으로 나가 도쿄돔 옆이라도 가서 노숙을 할지언정 이런 수모를 겪고는 이 호텔에서 편하게 잠자지 않겠다’고 하신다.

기세 좋게 과감하게 나온 것은 잘한 일일지라도 당장 하루 밤 눈 붙일 곳이 걱정이 되었다. 쌀쌀한 도쿄의 밤거리를 스님 두 분과 민간인 두 사람이 헤매고 있는 모습을 일본인들은 힐끗힐끗 쳐다보며 지나갔다. 얼마나 걸었을까 작은 호텔이 우리 눈에 들어왔다. 우리는 얼른 호텔 로비에 들어갔으나 카운터에서는 우리를 더욱 이상하게 보는 게 아닌가. 그곳은 바로 연인들이 주요 이용하는 러브호텔이었던 것이다. 아마도 우리들은 동성 연예자로 생각했던 모양이다. 결국 우리는 호텔 찾는 것을 포기하고 고모님께 부탁을 하였다.

고모님은 우리가 있는 위치를 파악하고 그 근처에 있는 다다미방을 전화로 예약해주셨다. 졸지에 우리는 일본식 다다미방에서 하룻밤을 잤다. 일본식 유카타를 입고 다다미방에서 일본 문화를 체험할 그 시간에 동경대학교 도서관장의 모친이 세상을 떠났음을 다음 날 오전 동경대학교를 방문한 후에야 알게 될 줄이야.

이른 아침 기상하여 우리는 식사를 간단히 하고 동경대 아카몽(붉은색 대문이라는 뜻으로 동경대의 상징)에 도착해 보니 이미 많은 한국 특파원들이 와 있었다. 우리는 일본제국주의의 상징이 아카몽에서 한국인 최초로 성명서를 낭독하였다. 성명서는 전날 저녁 회의한대로 혜문 스님이 읽어 내려갔다. ‘일제에 의해 끌려간 형제와 정신대에 끌려간 누이를 찾아오는 심정으로 우리는 조선왕조실록을 찾으러왔다’는 그 문구에서는 혜문 스님도 약간 목이 메는  것 같았다. 잠시 후 대기하고 있던 동경대 측에서 보낸 안내자를 따라 우리는 동경대 중앙도서관 2층의 회의실로 향하는데 안내자의 표정이 긴장하고 있음을 확인하고 회의장에 들어섰는데 그 회의장에 먼저 기다리고 있던 일본 측 관계자의 표정에도 긴장의 빛이 역력했다.

회의를 좀 더 부드럽게 하기위해 혜문 스님이 환수위원회의 활동과 취지를 설명하고 잠시 후 제가 일본의 우익 단체 같은 단체가 아님을 설명해 준 뒤에서야 일본 측 관계자가 약간 긴장을 푸는 듯 보였다. 이렇게 회의는 시작되고 우리는 일본 측에게 반환 요청서를 전달하였다. 바로 이 순간은 부끄럽게도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한국인이 일본 측에 전달한 최초의 문화재 반환 요청의 순간이었다.

그 자리에는 한국 측에서 우리 환수위원 4명과 다른 일정 때문에 일본에 이미 와있던 노회찬 의원, 일본 측 통역자에 의한 통역의 왜곡을 막기 위한 거류민단 간부로 계시는 나의 고모님이 배석하였고 우리측 변호사 2인, KBS 도쿄 특파원 2인이 배석하였다.

열띤 토론 끝에 우리는 조선왕조실록 환수를 강력히 주장하고 일본 측은 우리 측이 요구한 시한인 2주가 너무 짧다며 2주를 더 연장해 와 최종적으로 4월 17일 까지 반환여부를 공문으로 통보하겠다는 확답을 받았다. 이 과정에서 우리 일행은 애초 문화재청에서 확인해 준 46책 보다 1책이 더 많은 47책이 이 곳에 보관 중임을 새로이 알게 되었다. 이 짧은 만남의 성과라면 정부에서조차 모르고 있던 1책을 더 찾아내었다는 것과 함께 반환 여부를 4월 17일까지 통보하겠다는 확약을 받은 것이다.


 



      ▲ 협상에 앞서 잠시 회의 중(왼쪽부터 문만기 지부장, 혜문 스님)


 


세계는 우리의 문화유산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다.

세계적인 패션 디자이너는 고려 불교탱화의 아름다운 선과 이미지들을 이용하여 고부가가치의 상품들을 만들어 내고 있지만, 정작 우리는 ‘문화강국’을 외치면서도 서구적인 가치들을 찾아다니고 있다. 학자들마다 다르지만 현재 약 15만점의 국보급 문화재가 세계에 떠돌고 있다고 한다. 문화재 강탈 경위는 임진왜란, 구한말, 일제강점기, 6.25전쟁 등으로 나눌 수 있는데 그중 일본이 약 47%인 7만 여 점 , 미국이 22%, 영국이 11% 등 전 세계 17개국에 흩어져 있다. 이중 일본은 임진왜란과 일제강점기에 약탈해간 것이 대부분이고 미국, 영국은 625전쟁 때 강탈해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왕조실록은 세계문화유산이며 대한민국 국보 제154호이다. 우리가 실록을 찾으려하는 것은 단순한 문화재 반환의 의미가 아니라 우리의 정체성 찾기와도 깊은 관계가 있다. 조선왕조실록은 조선태조부터 철종까지 25대 472년의 역사를 세분화하여 정교하게 정리한 세계유일의 자랑스러운 기록유산이다. 그러나 실록의 마지막인 고종이후의 조선왕조실록은 일제에 의해 정리되었으며 이것은 우리 민족에게 지울 수없는 치욕이다. 우리가 이 시점에서 실록 반환에 관심을 쏟는 것은 우리나라 역사가의 손으로 조선의 역사를 마무리하여 정리하고자 함이며 아직도 일제의 그림자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우리들의 모습을 반성해 보고자 함이다. 비록 우리들의 노력이 실패한다고 해도 결코 부끄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우리가 힘이 모자라 나라와 실록을 빼앗겼고 지금도 힘이 모자라 당장 가져오지 못하는 것보다는 그러한 노력조차 하지 않은 얼빠진 조상이라는 비난이 더욱 무섭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NO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