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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미우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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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년 전통의 일본 3대 일간지 중 하나인 <요미우리신문>이 3월 3일 2개면에 걸쳐 ‘검증-전쟁책임’ 언론편을 싣고 일본의 침략전쟁 시기 언론의 책임을 검증하면서, 동시에 자사의 과거 보도 내용을 신랄하게 비판하며 반성했다. 이는 <요미우리신문>의 와타나베 쓰네오 회장 겸 주필이 2월 11일 <뉴욕타임즈>와의 인터뷰에서 야스쿠니 신사참배와 관련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를 강하게 비판하면서 전후 60년의 사건들에 대해 연중 기획시리즈를 지시한 결과이기도 하다. 와타나베 회장은 일본이 전시행동에 대해 스스로 진단하지 않는다면 절대로 성숙한 나라가 될 수 없을 것이라고 확신한다고 한다. 일본 최고의 프로야구팀인 <요미우리 자이안츠>을 소유하면서 다른 신문들에 비해 상업성 짙은 편집방식을 취하고 있는 <요미우리신문>의 변화에 주목하는 이유는 친일과 독재 권력에 야합했던 한국의 ‘1등 신문’이라는 <조선일보>나 <동아일보>는 언제쯤 이 같은 성숙한 모습을 보여줄지 자못 궁금하기 때문이다. 3월 17일 <동아일보> 앞에서는 31년 전 해직된 <동아투위> 전직 기자들의 메아리 없는 집회가 열렸다. 아래는 ‘검증-전쟁책임’ 언론편 전문을 번역한 것이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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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하 미디어는 전황을 바르게 전하고 있었나. 국민에게 알려야 하는 책무를 다하고 있지 않았던 것은 아닌가. ‘정보통제’에 저항하는 일은 가능하지 않았던가. 패전이란 엄중한 현실을 앞에 두고 그 책임을 어떻게 생각했던가. 만주사변에서 태평양전쟁의 終局까지의 미디어 실상을 검증했다.
만주사변을 분기점으로
신문, 출판, 방송 등 미디에 대한 언론통제는 만주사변(1931년), 일중전쟁(1937년), 태평양전쟁(1941년) 등 전쟁 확대에 따라 강화되어갔다.
“포악한 중국군이 滿鐵線을 폭파, 일본의 철도수비대와의 전투가 시작되다.” 중국 봉천 교외의 柳條湖에서 발발한 만주사변(1931년 9월 18일)의 제1보를 신문 각지는 이렇게 전했다. 관동군이 모략에 의해서 만철선을 폭파한 것이 확인된 것은 전후의 일이다. 당시 관동군의 음모설이 일부 흘러나왔지만 중국군의 소행이라고 한 군부의 발표을 의문시한 보도는 없었다.
차차 전선을 확대해가던 관동군의 움직임을 신문은 요란하게 전하고 不擴 대방침을 취하는 若槻내각의 ‘소극적인 태도’를 밀어올렸다. 예를 들어 요미우리신문의 사설(1931년 11월 26일)은 외교관의 滿蒙(만주⋅몽고) 권익에 대한 인식 부족을 비판하면서 정부의 외교교섭이 “얼마만큼 日支(일본과 중국)분쟁의 해결에 도움이 될 지 아직 의심스럽다”고 논평했다. 다른 신문도 “지키자 만몽=제국의 생명선”이라고 특집면에서 호소하거나 위문금을 모집하기도 했다.
1932년 10월, 일본의 만주에서의 권익을 인정하는 한편, 관동군의 행동을 비판하기도 하고 리튼 보고서가 발표되자 각 신문은 이것을 일제히 비난했다. 齊藤實 수상은 각의에서 각료가 분개했다고 전한 보도를 부정하면서 “논조가 너무 지나치고 무책임한 기사를 싣고 있는데 이와 같은 것은 재미없다”(『西園寺公과 政局』제2권)라고 강한 불만을 내비쳤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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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사가 실린 2006년 3월 3일치 요미우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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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 12월 19일이 되자 요미우리신문, 도쿄아사히신문, 東京日日新聞(현재의 마이니찌신문) 등 전국 132사가 “만주국의 엄연한 존립을 위협할 만한 해결책”은 “단호히 수락해서는 안된다”라고 하는 공동선언을 발표했다. 국제연맹 탈퇴에 최후까지 異論을 계속 제기한 주요 신문은 時事新聞 한 신문뿐이었다.
만주사변의 직전까지 신문의 다수는 군축 추진을 제창하고 군부에 비판적이었다. 1930년에 런던 해군군축조약 체결을 둘러싸고 ‘통수권 침범’문제가 발생했을 때도 신문은 조약의 성립을 지지하고 조약파를 지원했다. 만주사변 시점을 취하며 군부도 아직 “신문이 일체가 되어 저항하지 않는 것이 시종 커다란 위협”(緖方竹虎, 전 아사히신문 주필)이라고 푸념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때야말로 미디어가 전쟁을 막을 수 있었던 최후의 기회였을지 모른다.
그러나 사변 확대를 기화로 주요 신문은 전장에 많은 특파원을 파견하여 전황을 시시각각 전함으로써 부수를 비약적으로 신장시켰다. 반대로 군부에 비판적인 기사를 게재한 신문에 대해서는 재향군인 등을 중심으로 불매운동이 일어났다. 평론가 淸澤(水+列)은 당시 ‘저널리즘의 영업심리’는 밖으로 향해서는 일본의 ‘절대 정의’를 안으로는 ‘일본정신의 앙양’을 극력 설득하고 확신시켰다고 분석했다.
일미 개전의 도화선이 된 日獨伊 군사동맹 체결과 남부 佛印(프랑스령 인도지나) 진주 등의 시기에 각 신문 지면은 예찬기사로 메워졌다. 신문계의 대표도 독일, 이태리 양국 대사관에서의 축하회에서 ‘삼국동맹 성립 만세’를 삼창했다.
일중전쟁의 수습을 논하는 등 이채를 띤 자유주의자 馬場恒吾의 요미우리신문 칼럼「일요평론」도 군부의 압력에 의해 1940년 10월에는 翼贊체제를 지지하는 다른 필자의 칼럼으로 대체되었다. 신문지상에는 ‘斷乎 一蹴’ ‘無敵陸軍’ 등의 용맹스런 단어가 날뛰었다.
時事新報의 편집국장에서 평론가로 옮긴 伊藤正德은 자신의 책에서 “군부에 출입하는 젊은 기자들의 一戰論으로 몰아세우는 기세를 편집국 간부는 이미 제어할 수 없었다”(『新版新聞五十年史』)이라고 기록했다. 신문은 국민에게 진실을 전하지 않고 무모한 對美英戰으로 국민을 몰아갔다.
<포악한 미영에 대해서 선전포고>(요미우리신문 1941년 12월 9일 석간)–태평양전쟁이 개전한 이후 보도의 자유는 완전히 상실되었다. 일미개전을 계기로 정보국은 전황보도에 대해서 “대본영이 허가한 것 이외 일체 게재 금지”라고 발표했다. 신문사업을 폐지할 수 있는 권한을 규정한 국민총동원법에 기초하여 신문사업령도 발령되었다. 공식 발표에 의문이 있어도 독자적인 기사를 게재하는 데에는 폐간의 각오가 필요했다. 신문은 언론기관으로서의 사명을 잊고 나라의 선전기관으로 변해갔다.
태평양전쟁 당시 기자들은 어떠했는가.
요미우리신문의 「편집수첩」의 필자였던 高木健夫는 “보도 차압, 금지가 매일 몇 통이나 되고 정리부의 책상 앞에 매달린 신문이 가득 찼고 무엇이 금지인가를 가리는 것만 해도 골칫거리였다.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금지, 금지여서 아무것도 쓰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다”라고 당시를 회고했다.
해군성의 기자 그룹 ‘黑潮會’에 재적하고 있던 岡田聰(中外商業新報, 현 日本經濟新聞)은 戰局 보도의 거짓말을 반쯤 간파하면서 그것을 쓸 수 없었던 답답함을 자기 책에서 밝혀놓았다.
“외신 등에서 전황 악화의 뉴스를 듣고 (대본영) 보도부에 문의하면 그런 사실은 없다고 부정하여 그 뉴스의 게재를 금지한다. 미드웨이 패전의 사실은 우리 사이에서는 상식이고 국민도 조금씩 알아챘지만 보도부에서는 단호히 이것을 부정한다.”(『戰中⋅戰後』圖書出版社)
‘군부 비판’의 기사도 적지만 있었다. 1944년 2월 23일 1면에서 ‘戰局은 여기까지 온 죽창(竹槍戰術:대포와 같은 근대무기에 대하여 죽창으로 대항하는 것과 같은, 시대에 뒤떨어짐을 비유)으로는 충분치 않다’라고 군부의 정신주의를 비판했다. 이 기사를 보고 東條英機 수상은 “죽창작전은 육군의 근본작전이 아닌가. 마이니찌를 폐간시켜”라고 격노했다. 집필자는 마이니찌 黑潮會 그룹의 新名丈夫(당시 37세). 육군은 그를 丸龜연대에 ‘징벌 소집’했다.
그 시기, 新名과 함께 대정 출생의 병역면제자 250명이 소집되었다. 新名은 3개월 후 해군의 계산에 따라 종군기자가 되어 제대했지만 250명은 그후 유황도에 보내져 전원 옥쇄하였다.
애초에 이 ‘죽창사건’은 ‘해군기자의 육군 비판’이란 의미가 강하고 전쟁 자체를 직설적으로 비판한 것은 아니었다.
1944년 7월에는 사이판섬 수비대가 전멸했는데 동 19일의 讀賣報知 조간에는 ‘싸움은 이제부터 1억 결사 각오하자 東條 수상 담화’ ‘불태우자 복수에의 투혼’ ‘美鬼를 분쇄하자 무기 없이 죽창으로’라는 선정적인 헤드라인이 날뛰었다.
신문사의 간부들은 어떠했나. 전전⋅전중에 아사히신문 주필, 부사장 등을 역임한 緖方竹虎은 군부에 비판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는데 뒤에 “무방비의 신문으로는 결국 저항은 불가능하다……뭔가 한 줄을 써서 내던져 그만두는 것이 통쾌하다면 통쾌하지만……그것보다도 이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아사히신문이 살아남아 행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의식 쪽이 강하다.”(『五十人의 新聞人』電通)라고 술회하고 있다.
즉 “전쟁보도는 상품으로서의 신문으로서 최대의 호재이고 팔아먹기 좋은 때다. 대기업체라면 가능한 한 이 商戰의 기회를 놓칠 수 없는 相談”(佐佐木隆,『미디어와 권력』中央公論新社)이라고 했는데 당시의 업계의 실정이었다고 보인다.
한편 中外商業新社 사장에서 전직하여 일본신문회 회장으로 취임한 田中都吉은 “세상에는…신문에 대해서도 정부는 부당한 압박을 가했다고 맹신하는 경향도 있는 듯한데 나의 경험으로는 군부는 물론 정보국 안 내무성 등…… 진실로 우호적 협력적이었다.”(『五十人의 新聞人』)고 증언하고 있다.
신문이 반드시 ‘통제에 못이겨 협력하게 되었다’는 것만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전쟁 추진을 강구한 일면을 살필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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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을 근거로 검열, 발매금지 처분 |
일중전쟁기의 언론통제의 법적 근거는 明治 이래의 ‘신문지법’와 ‘출판법’이었다. 내무성과 검사국, 경시청 검열과, 府縣 特高課 등은 이것에 기초하여 신문 등을 검열하고 발매 금지 등의 조치를 취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내무성 警保局은 “만주에서의 자위적 군사 점거를 일제제국의 침략행위로 다룬 것” 등의 차압 기준을 열거하고 있었다.
1937년에 일중전쟁이 시작되자 정부는 군사기밀보호법을 강화하여 내무성 경보국이 각 부현의 특고과장에 대해 “주요 일간신문 통신 및 주요 잡지 발행소의 책임자와 간담회를 열도록 명했다. 매스미디어의 ‘내면 지도’를 노렸던 것이다.
1938년 제정된 국가총동원법에 의해서 각 미디어는 사실상 정부⋅군부의 하부조직으로 들어갔다. 용지 통제가 그 강력한 도구가 되었다. 1940년 5월부터 용지 할당이 내각 직할이 되고 1938~40년에 739지였던 일간지는 ‘악덕 불량지의 정리’ 등을 이유로 1941년에는 108지로까지 감소했다. 동년 9월 이후는 ‘1현 1지’ 방침에 기초하여 54지까지 줄었다.
한편 정부는 1930년대 중반부터 ‘신문 조종’과 여론 조작을 일원적으로 맡는 국가정보선전기관의 창설에 돌입했다. 1937년 9월에는 각 省廳의 연락조정기관인 ‘정보위원회’는 ‘내각정보부’로 발전적 해소, 국민정신총동원운동을 추진했다. 1940년 12월에는 ‘정보국’이 빨족되어 국가적 보도⋅선전의 일원적 통제를 하였다.
라디오는 1926년에는 사단법인 일본방송협회가 발족하여 국책 미디어가 되고 1936년에 설립된 ‘동맹통신사’는 후에 정보국과 군부 등의 직접 지배를 받게 되었다. 잡지, 서적 등도 ‘일본출판문화협회’에 일원화되었다. 뉴스영화는 국책기관 ‘사단법인 일본뉴스영화사’에서 모두 제작되었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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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본영 발표 이외에는 발표 금지/가공의 대승리 |
정보국은 태평양전쟁 개전과 동시에 대본영이 허가한 이외의 일제 기사의 게재를 금지하는 동시에 “아군에 불리한 사항은 일반적으로 게재를 금한다. 단 전장의 실상을 인식시키고 적개심 고양에 이바지할 것은 이것을 허가한다”라고 시달하였다.
“대본영 육해군부 12월 8일 오전 6시 발표. 제국 육해군은 금 8일 새벽 서태평양에서 미영군과 전투상태에 들어가다”
이 ‘제1호’로 개전을 알린 이래 대본영 발표는 종전까지 모두 846회에 이른다. 당초 육군과 해군이 별도로 발표했으나 1942년 1월 15일까지 일원화되었다.
대본영 발표에 대해서 대본영 육해군부의 前田稔 보도부장은 “절대 걱정하지 말고 안심하고 정확한 우리 보도를 신뢰해도 좋다”(1941년 12월 9일)고 말하고 최초의 약 반년은 아주 정확한 발표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후 엉터리 발표가 시작된다. 前坂俊之 靜岡縣立대학교수에 의하면 “산호해 해전(1942년 5월)부터 이사벨島沖 해전까지 9개월은 전과가 과장되었다. 가달카날섬 철수(1943년 2월) 후의 9개월간은 전황 악화 때문에 발표가 축소되었다. 다음 8개월은 가공의 승리가 발표되었다.”(『미디어 컨트롤-일본의 전쟁보도』(旬報社)
1942년 6월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해군은 항공모함 4척, 함재기 280대를 잃고 대패했으나 대본영 발표는 피해내용을 항공모함 1척 상실, 1척 대파로 하였다. 대본영 보도부원인 富永謙吾는 전후에 저서에서 “(사실을 전하는 발표 원안은) 작전부의 강경한 반대를 받았다. 군무국도 동의하지 않았다”고 쓰고 있다.
대본영 발표가 크게 변질된 것은 1944년 10월 19일 대만沖 항공전 때다 오키나와에의 공습은 이미 시작되고 본토 결전을 외쳤고 일본해군이 미군의 항공모함 19척, 전함 4척 등 합계 45척을 격침 격파하고 대승리 했다는 발표였다. 천황은 “분전, 크게 이것을 격파했소”라는 칭찬의 칙어를 내렸고 승리를 기념하는 곡이 레코드로 만들어질 만큼 나라안이 들떴다.
하지만 격침한 적함은 제로였다. 실제 미군 항공모함은 17척이였으니 존재하지 않는 항공모함까지 침몰했다는 계산이다.
작전참모가 세운 계획이 실패해도 사전에 짜놓은 숫자를 성공한 것으로 하여 발표하였다. 昭和 천황과 小磯國昭 수상에게도 진실은 알려지지 않았고 육군은 이 발표를 기본으로 하여 필리핀 레이테섬에서의 결전을 결행하고 다수의 병사가 기아로 고생하다 죽어갔다.
대본영 보도부원은 신문기사의 헤드라인과 활자 크기까지 세부적으로 지시하고 ‘대편집장’ ‘정리부장’이라고은밀히 불리며 신문 편집에 권력을 휘둘렀다.
*대본영: 육해군이 통일적인 전략과 작전을 수행하기 위한 전시조직. 일청, 일러 전쟁에 설치되었지만 앞의 대전에서는 일중전쟁 개시후인 1937년 11월 설치되어 종전까지 이어졌다. 이때의 멤버는 육군참모본부와 해군군령부의 대부분 직원으로 ‘천황의 막료’로서 대본영 참모가 되었다. 게다가 육해군 兩省의 주요부국의 과장 이상이 隨員으로서 참가, 군령과 군정의 연대를 도모했다.
대본영 발표는 육해군 양쪽에 설치된 보도부가 발표 원안을 만들었다.(요미우리, 06.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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