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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애인은 인문사회과학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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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의신문 조은성 기자






한국사회에서 소위 주류기득권이란 사람들에게 친일문제는 아킬레스건이다. 여전히 청산되지 않고 있는 친일문제. 친일청산의 선봉에 서 있는 민족문제연구소의 수장, 임헌영 소장(문학평론가)을 만나 예순여섯 해에 걸친 그의 삶 속으로 들어가봤다. /편집자(시민의신문)주


방배동의 한 빌라. ‘딩동~’ 벨을 누르자 인자한 미소의 여인이 문을 연다. “어서오세요” 서재에서 급히 나온 듯 돋보기를 손에 든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이 반갑게 인사말을 건넸다. 임 소장은 그의 아내 고경숙씨를 “이름없는 여류소설가”라고 소개했다. 고경숙씨는 수줍은 듯 웃어보이며 부엌으로 총총 사라졌다.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 소장


양계탁기자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 소장 부부.


임헌영 소장의 집은 작은 도서관 수준이었다. 현관에서부터 모든 거실 벽면이 책장이다. 수많은 책들이 소설, 역사, 시 그리고 각 나라별 문학으로 가지런히 정리돼있었다. 그는 “이래야 필요한 책을 금방 찾을 수 있다”고 말했다.

푹신한 쇼파에서 시작한 인터뷰. 집회 현장에서나 토론회장에서 언제나 힘있게 ‘선동가’의 기질을 유감없이 드러내는 그인 터라, 예순여섯이란 그의 나이가 믿기지 않았다. 인생의 반을 넘어온 시간, 그는 자신의 파란만장했던 생을 펼쳐놓기 시작했다.  

네 살때 맞은 해방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 소장


양계탁기자 


임헌영 소장.


임헌영 소장은 경상북도 의성군 금성면의 한 시골에서 태어났다. 의성군은 아직까지도 거의 발전이 없는 지역이다. 그는 붉은흙의 빈약한 뒷산을 먼저 떠올렸다. 그의 고향은 낙후한 농촌의 전형이었다. 그래도 그의 집은 동네에서 부자에 속했다. 대부분 논도 없고 3~4마지기 정도를 갖고 있었으나 그의 집은 논밭을 각각 15마지기씩 갖고 있었다.    

1941년생인 그는 4살 때 8.15를 맞았다. 그는 일제 때 기억이 희미하게 남아있다고 했다. 공습경보가 울리면 메가폰을 들고 소리지르던 모습, 경찰들이 마을에 뭔가 뒤지러 오면 막 울던 기억이 난다고 했다. 그럴 때면 할머니가 자신을 달래고 했다며 잠시 허공을 바라보고회상에 잠겼다.  

그의 인생에서 첫 번째 중요한 계기는 초등학교 4학년 때 맞은 6.25였다. 6.25는 그의 집에 불행을 가져왔다. 그의 아버지는 해방후 군청서기를 했다. 아버지의 동생인 작은아버지는 일제 때 대구사범을 나와 초등학교 교사를 했다. 8.15직후엔 고등고시의 1차시험이던 예비고시도 합격했다. 그러나 해방된 지 1년 남짓한 1946년, 대구에서 10.1사건이 터졌다. 민중항쟁과 폭동이라는 극단의 호칭이 붙는 대구10.1사건은 당시 경북과 전국 각처로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그의 작은 아버지는 이 사건에 연루됐다. 그때 지식인이라는, 먹물이 든 사람은 전부 관련이 됐다.

그 사건 뒤 그의 집안에는 소용돌이가 치기 시작했다. 6.25가 발발하자 이른바 ‘보도연맹’이라는 사전검거령이 내려졌다. 그의 아버지와 작은 아버지는 미리 구속됐다. 특히 그의 아버지는 보도연맹에 가입한 적도 없었는데 연좌제로 끌려갔다. 그 뒤 임 소장은 아버지와 작은 아버지를 볼 수 없었다. 그는 차분한 목소리로 “학살됐다고 봐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막내삼촌은 아버지와 작은 아버지를 찾다가 피난을 못 간 상태에서 6.25를 맞고 인민군 치하를 겪었다. 국군이 들어와 인민군이 후퇴할 때 막내삼촌과 그의 큰형은 일단은 난을 피하기 위해 ‘피란’했다. 임 소장은 이에 대해 “월북이기도 하고 납북이기도 하고 자의반 타의반으로 사라진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자신과 열몇살 차이가 나는 큰형 임상환씨를 찾으려고 통일부에 명단을 올려놨다. 살아서 지금 북에 있을지도 모르니 말이다.

임 소장은 그때부터 자신의 고생이 시작됐다고 말했다. 남자로 가장 큰 애가 되면서 어린나이에 가장이 된 것이다. 그에겐 어머니와 누나 세명이 있었다. 어렸던 그는 초상집 같은 집안분위기에 울고 있는 어머니와 누나를 보면서, 세상이 싫어지고 사람이 무서워지고 염세주의적인 경향까지 생겼다. 그나마 땅이 좀 있었기에 농사를 지으며 살 순 있었다. 그는 “어머니가 굉장히 고생하셨다”며 눈시울을 적셨다.

임 소장은 중·고까지 거기서 나왔다. 중고 시절의 그는 염세주의자의 표본이었다. 친구들과도 잘 안어울리고 집안 얘기도 안하고 학교공부는 싫고 혼자서 다른 독서에만 전념했다. 심지어는 성명철학, 손금 등의 동양철학과 신비주의에도 빠졌다. 그야말로 정신적인 방황을 하던 시기였다.

그는 중학교때엔 아무 책이나 닥치는대로 읽었다. 그러다가 고교 때부터 사회과학 책을 보기 시작했다. 50년대 직후였던 당시는 책의 ‘이적성’을 구분 못하던 시대였다. 그런 책들을 흔히 볼 수 있었다. 그의 집에는 중학교 4학년(지금의 고1)이던 형이 보던 책 중에 그런 책이 꽤 있었다. 임 소장은 그때 사회과학을 엄청나게 봤다고 했다. 그러다 소련과학아카데미에서 펴낸 ‘세계사교정’이란 책을 보게 됐는데 학교에서 배우던 역사와는 너무나 달랐다.

그는 ‘세계사교정’ 등의 책을 재밌게 읽으면서 더욱 염세적이 되어갔다. 임 소장은 한때 스님이 될까 생각한 적도 있었다고 털어놨다. 그러나 집안을 먹여살려야 하는 가장의 현실을 무시할 수 없었다. 안동사범학교를 나온 그는 자신의 모교인 조문초교에서 교사를 했다. 당시는 사범학교를 나오면 초교교사가 되는 것이었다.

“참 외로운 시절이었다.” 그는 교사생활을 이렇게 회고했다. 하지만 그 시간은 그에게 변화를 가져다준 계기로 작용했다. 교사시절인 1960년 4.19를 만난 것이다. 그는 ‘내가 여기 있을 게 아니라 대학을 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염세적이던 사고도 이런 세상을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만들까 하는 건설적인 고민으로 한발짝 나아갔다. 그는 문학을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4.19가 있던 해, 그는 2년간의 교사생활을 정리하고 서울로 올라왔다.

하지만 그에겐 돈이 없었다. 그는 할아버지뻘 되는 일가 어른 중 미군을 상대로 그림을 팔던 분을 찾아가 같이 일 좀 하게 해달라고 떼를 썼다. 화가가 사진을 보고 스카프에 초상화를 그리면 그것을 파는 일이었는데 수입이 많은 장사였다. 화가한테 그림 그린 값만 주고 미군에게 이문을 붙여 팔면 나머지 이익은 모두 그에게 떨어지는 것이었다(박완서의 소설 ‘나목’에 나오는 일과 똑같은 일이다).  

미군부대에 드나들기 위해서는 출입증이 있어야 했다. 출입증을 사는데는 큰 돈이 들었다. 지금으로 말할 것 같으면 몇천만원일 것이다. 그는 출입증 없이 몰래 들어갈 수 있는 부대만 찾아다녔다. 평택의 미군부대는 출입이 손쉬워 자주 갔다. 그는 담장에 몰래 숨어있다가 미군들이 근무를 마치고 돌아오면 막사로 들어가 상품을 보여주고 장사를 했다. 운이 나쁘면 경비원에게 걸렸다. 걸리면 경찰서에서 3일 구금이었다. 죄목은 미군부대 무단침입.  

그는 “큰 애는 안먹었지만 쫓겨날 때는 많았다”고 말했다. 그때 느낀 것은 ‘미군보다 한국인이 더 나쁘다’는 것이었다고 한다. 미군헌병한테 잡히면 학생이고 아르바이트중이라고 얘기했을 때 대부분 봐주고 정문까지 ‘추방’할 뿐이었다. 하지만 한국인은 아무리 사정해도 반드시 경찰서로 넘겼다고 했다. 임 소장은 “아마도 미군에게 충실성을 보이기 위해 우리나라 사람이 더 가혹했던 것 같다”고 추측했다. 그는 “일제 때도 이랬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덧붙였다.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 소장


양계탁기자


그는 이 알바를 하면서 대학시험을 봤고 중앙대 국문과에 들어갔다. 당시 중대 총장은 임명선 총장으로 임 소장의 일가 어른이었다. 임 소장은 “대학에 갔지만 별로 들을 강의가 없었다”고 말했다. 재미도 없었거니와 돈벌이를 해야 했던 관계로 강의는 잘 못들었다. 당시는 결석해도 점수가 다 나왔다고 한다. 그는 1학년 때 돈이 아까워서 교과서도 사지 않았다. 하지만 외국어는 해야겠다는 생각에 영어와 불어 교과서는 샀다. 그는 고교때 이미 독학으로 일어는 웬만한 책을 읽을 수준은 됐다.

한편 그와 함께 어울려 다니며 미군부대에 그림을 팔던 일가 어른 및 동료들은 오늘날로 치면 반미주의자였다. 임 소장은 “이들은 미군을 맨날 대하면서 그들의 본성을 잘 알게 됐고 오락자체가 미국을 비판하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들의 이야기가 어린시절 미국의 실체를 이애하는데 도움이 됐다”고 밝혔다.

학업보다는 돈벌이에 관심을 뒀던 1학년 때 그는 5.16쿠데타를 겪는다. 어느날 학교를 가는데 헌병들이 쭉 서서 거리 교통정리를 하고 있었다. 거리에서는 행진곡이 울려퍼졌다. 라디오도 없고 돈이 없어 신문도 못봤던 때여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때 미군부대를 함께 다녔던 선배들이 겁도 없이 ‘야, 우리 시청 앞에 가보자’고 했다. 임 소장은 “현실비판자였던 이들은 가만히 있을 사람들이 아니었다”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선배들과 함께 돌아다니면서 시청과 국회의사당 앞에 탱크가 있는 것을 보았다. 당시 전차정류장이던 남대문지하도에 박정희가 있다는 풍문도 들었다. 그와 선배들은 이것저것 살펴본 뒤 나름대로 분석을 했다.  

임 소장은 “지금 생각하면 참 가소로운 분석이었다”고 말했다. “난 그때 박정희를 지지했다. 친일파인 장면정권은 너무나 현실을 모르는 느낌이었다. 1~2년 뒤 박정희가 민족적 민주주의를 얘기할 때는 쾌감도 느꼈다.”

그는 1963년 민정이양 때 윤보선 후보가 대선과정서 발언했던 ‘서울양반이 시골촌놈 무시한다’, ‘박정희는 가난한 농민의 아들이다’는 말을 듣고 5.16을 지지했었다고 밝혔다. “가난한 농민의 아들, 민족적 민주주의라는 말 자체가 기분이 좋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박정희정권의 실체를 깨닫는 데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는 61학번이다. 농담으로 그는 자신이 ‘5.16학번’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5.16쿠데타가 일어나면서 모든 미군들에게는 금정령이 내려졌다. 한국인의 미군부대 출입도 모두 금지됐고출입증도 없어졌다. 이에 따라 그의 돈벌이는 타격을 받게 됐다. 말하자면 실직상태에 빠진 것이다. 그는 생계가 막히자 학교를 다니면서 가정교사를 하기 시작했다. 그때는 가정교사가 대유행이었다. 그의 어려웠던 생활은 대학 때만 이사를 16번 했다는 것에서도 엿볼 수 있다, 한계절마다 집을 바꾼 셈이다. 그는 “거의 철새였다”고 설명했다.

2학년때부터는 가정교사 아르바이트와 함께 재정에 도움이 되는 중대 신문사 기자를 했다. 그리고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곧장 대학원에 진학했다. 대학원에 가서는 현대문학을 전공하며 본격적으로 문학수업을 시작했다. 그는 중대 도서관에 특별한 장점이 있었다고 밝혔다. 총장이 친미파여서 미8군 도서관에서 폐기되는 많은 책들이 중대 도서관으로 왔다는 것이다. 물론 모두 영어책이었다. 그는 “여기엔 좌우 이데올로기 구분이 없었다”고 말했다. 맑스, 스탈린전집 등 보기 힘든 책들을 그는 학교 도서관에서 맘껏 볼 수 있었다. 더군다나 대출담당자가 국문과 선배여서 그는 대출기록을 작성치 않고 보았다. 임 소장은 “60년대만 해도 그런 제한이 별로 없었다”고 했다.  

임헌영 소장은 1966년 평론가로 등단했다. 그런데 등단해보니 한국문단이라는 게 참 허망했다. 그는 “서구문학에는 부르주아문학 체계가 있지만 우리문학에는 이것도 저것도 아닌 게 난립하는 등 어중이떠중이 느낌이었다”고 털어놨다. 전후문학파가 있는 데도 말이다. 그는 “몇몇 분들은 내게 큰 영향을 주기도 했지만 또 일부의 경우 저런 분들도 평론가라는, 시인이라는 직함을 달아야 하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고 덧붙였다. 그는 “지금은 그런 숫자가 더 많다”면서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에겐 아직도 염세적인 경향이 남아있다. 그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염세적인 것은 내게 깔려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염세적인 속에서 반작용이랄까 이상주의적인 부분이 강하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 “이상주의에 가깝지만 현실적 감각이 없는 것은 아니다”고 부연했다.

그는 1974년 문학인사건으로 1차 징역을 살고 79년에 남민전으로 2번의 징역을 살았다. 문학인사건은 유신에 저항하는 문인들을 간첩으로 조작해 구속한 사건이었다. 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전선)은 지하에서 민주화운동을 할 수밖에 없었던 암흑같은 시기에 만든 조직이었는데 아직 민주화운동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그는 이처럼 혹독한 시련을 거치면서 신중하고 더욱 현실적이 됐다.

그는 “80~90년대 사건의 계기 때마다 실제 운동을 이끌었던 명망인사들과 자신은 견해 차가 상당히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사람들은 나를 온건하다고 하는데 원칙을 실천하는 방법은 가장 현실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임 소장은 “대중적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하면 못마땅하더라도 실천을 연기해야 한다는 게 내 철학”이라면서 하지만 이런 발언은 “양쪽으로부터 다 공격받을 수 있고 오해받을 수도 있다”고 밝혔다. 그는 “혹자가 내 철학이 틀린 게 아니냐고 물을 수 있겠지만 이는 내가 살아온 삶에서 형성된 철학이고 내가 나를 바꿀 순 없을 것 같다”고 말했다.

“나는 내 직관을 믿는다. 이게 내가 갖고 있는 내 삶의 특징이자 개성이고 색깔이다.” <시민의신문, 06.03.05>

조은성 기자 missing@ngotimes.net










“친일청산 대중화가 제 몫이죠”
박원순 변호사의 제의, 사회활동의 길로

임헌영 소장은 남민전으로 인한 2차 투옥 이후 1983년 8.15특사로 나왔다. 전두환정권독재가 포악했던 시절, 그는 ‘인생의 위기’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에게 붙은 간첩 딱지는 강단에도 설 수 없게 만들었다. 한때는 지식인대열에서 이탈해 생계만을 유지하는 삶도 좋다고까지 생각할 정도였다.

이때 그에게 손을 내민 사람이 있었다. 박원순 변호사가 역사문제연구소를 만들자는 제안을 한 것이다. 그는 자신에게 업을 부여해 준 느낌을 받았다고 회고했다. 역사문제연구소의 부소장을 하면서 그는 평생 해오던 인문사회과학에 대한 관심을 공고히 다졌다.

■ 본처는 문학, 애인은 인문사회과학= 그 연장선상에 민족문제연구소가 있다. 김봉우 소장이 초기 온갖 모략을 감수하고 힘겹게 만든 민족문제연구소는 과거청산의 씨알이 되어 한국사회 밭갈기에 큰 역할을 해오고 있다. 임헌영 소장은 창립지지회원과 연구위원, 지도위원, 부소장을 거쳐 2003년 소장이 됐다. 문학평론가인 그는 농담삼아 “본처는 문학이고 애인은 인문사회과학”이란 말을 하곤 한다. 임헌영 소장은 “사실은 문학평론가보다 인문사회 전반적인 평론가가 되고 싶었다”며 웃어보였다.

그는 친일문학 전문가는 아니다. 그는 “문학과 사회, 문학과 역사, 문학과 정치라는 문학의 변경지대가 내 전공”이라고 설명했다. 그 속에서 친일문학은 조그마한 분야일 뿐이라고 했다. 그는 포스트학문적인 지식인의 학문적 역할은 2000년대 들어 확실히 끝났다고 본다고 말했다. 각 분야에 전문가들이 많이 나왔기 때문에 문학평론가가 역사까지 할 필요가 없어졌다는 얘기다.

그는 “대신 미세화된 학문을 거시적인 눈으로 편성, 평가해주는 방향키 역할을 우리같은 연배들이 해야 한다”고 의견을 피력했다. 특히 친일문학의 경우 “젊은 후배들이 심층적인 연구를 하고 있다”면서 자신은 “이를 종합해 대중화하는 게 몫이 아닐까 생각한다”고 밝혔다.

임 소장은 문화센터 강좌와 중앙대 대학원 강의를 하고 있다. 최근에는 곧 창간될 ‘에세이 플러스’라는 월간잡지의 편집주간도 맡았다. 발행인은 범우사 사장이라고 한다. 그는 “사회문화 전반에 걸친 흐름을 대중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잡지”라고 소개했다. /조은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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