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기사

경술국치 터, 표지석 하나 없이 공터로…

895

 

 

코리아포커스 안진걸
기자

 

 

 

 

"경술국치, 그 치욕의 현장을 가다"

8월 29일 경술국치 95주년을 맞이해 민족문제연구소가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할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 3천90명을 발표했다. 발표를 3일 앞둔 26일 오후 친일유산 전문가인 이순우씨와 경술국치 조인 터를 찾았다. 해방후 최초로 제대로 된 검증을 거친 친일파 1차 명단 발표에 앞서 대한민국 최대 ‘국치일’의 현장을 찾은 것이다.

95년전 8월 29일 일본이 한국을 강제로 합병한 경술국치가 있었다. 이 치욕의 날을 그동안 한국사회는 국치일로 부르지도 기념하지도 않고 ‘한일합방’이라는 용어로 불러왔다. 이는 역대 정권들의 친일성향과 무관하지 않다. 이승만은 반민특위를 친일경찰을 동원하여 해산시키고, 일본군 장교출신인 박정희 또한 그런 것이 당연했다.

충무로역에서 남산 쪽으로 10여분 걸어가면 옛 안기부 남산청사 길이 나온다. 현재 남산 유스호스텔로 공사 중인 옛 남산청사로 가는 길에 보면 도로 옆 오른쪽에 다목적구장이 나오는데, 바로 여기가 95년전 이완용(당시 한국 총리대신)과 테라우치 마사타케(당시 한국 통감, 이후 초대 조선총독)가 일본의 한국에 대한 강제합병에 서명한 경술국치 터이다.

당시 경술국치 터는 통감관저(강제 합병 후 총독관저)가 있던 자리로, 이를 고증해 찾아낸 이가 친일문제 연구가인 이순우씨다. 이순우씨는 친일유산 전문가로 ‘을사늑약 조인 터인 덕수궁의 중명전은 널리 알려졌는데, 왜 경술국치 터는 알려지지 않았을까’라는 의문으로 찾아 나서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많은 문서 검증과 스스로의 현장 답사를 통해 경술국치 조인은 통감관저에서 있었다는 것을 확인했다. ‘동아일보’ 1920년 8월 29일자 기사를 보자. “오늘! 십주년전의 금월 금일이 한국이 일본에 합병되던 날이올시다. 금년 팔월 이십구일이 일한합병의 십주년기념일이올시다. 사진은 일한합병조약에 양국편에서 도장을 찍던 곳이니 지금 총독관저 안에 있는 처소이오. 그 방에 서 있는 사람은 당시 일본대표자되는 한국통감으로 합병조약을 체결한 테라우치 마사타게요, 왼편의 인물은 한국편으로 조약에 도장을 찍은 당시 한국총리대신 이완용”

여기서 말하는 통감관저는 원래 갑신정변의 결과로 체결된 한성조약(1885년)에 따라 조선정부가 대체부지로 제공한 땅에다 일본공사관의 용도로 지어올린 건물로, 흔히 왜성대(倭城臺)라는 지명으로 불렸던 곳으로 지금의 중구 예장동 일대에 포함된 지역이었다. 이 건물은 1893년 또는 1894년에 도쿄에서 온 목수 나카무라 신고(中村辰吾)에 의해 신축됐고 그 규모는 2층짜리 목조건물이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그 후에 부분적인 수리와 증축은 거듭되었지만,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도 기본골격만큼은 그대로 유지됐다. 일본공사관이었던 이곳이 ‘통감관저’로 바꿔진 것은 이른바 ‘을사늑약’에 따라 일본공사관이 폐지되고 한국통감부가 설치된 1906년 2월의 일이었다.

이 때에 통감부 청사는 통감관저와 이웃하는 남산줄기의 언덕위(지금의 서울애니매이션 센터 자리)에 따로 지어졌다. 즉 원래는 일본공사관이던 것이 1906년 통감관저로 바뀌었고, 그곳에서 치욕적인 경술국치 조인이 있었으며, 1910년 8월 29일 이후 통감관저는 총독관저가 된 것이다. (이순우씨 설명)

문제는 통감관저 터가 어디냐는 것이었다. 이씨는 옛 사진들과 문헌들을 찾고, 지금의 통감부 터(지금의 서울소방방재본부 뒤쪽, 남산타워로 가는 길에 있는 서울 애니매이션 센터 자리. 현재 2003년에 세운 ‘통감부터’라는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와 가까운 곳을 답사하다가 결국 지금의 남산 옛 안기부 청사 진입도로에서 `갑자기’ 펼쳐지는 공터(현재 다목적 구장)가 옛 통감관저 터인 것을 확인했다고 한다.

아니나 다를까 옛 통감관저 사진과 문서들에 나오는 통감관저 터 앞의 수백여년 된, 서울시 보호수로 지정된 은행나무(서울시 설치 팻말에는 수령 400년)와 느티나무(서울시 설치 팻말에는 수령 450년)가 지금의 다목적구장 진입로 양쪽에 자리 잡고 있었다. 흔치않은 수백년 된 나무가, 그것도 드물게 양쪽에 대칭해서 자리 잡고 있는 은행나무와 느티나무가 그대로 자리잡고 있어 이곳이 옛 통감관저라는 사실이 더욱 확실해 진 것이다.

실제 예전 통감관저 사진을 보면 지금의 다목적구장과 같은 곳임을 어렵지 않게 알아챌 수 있다. 도로의 곡선, 나무들 자리와 가지가 뻗은 방향, 터의 넓이와 자리 등이 옛 통감관저 터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수 백년된 ‘은행나무’와 ‘느티나무’ 만큼은 경술국치 그 치욕의 현장을 보았고, 기억하고 있을 것이며 또 그 현장을 증명해주고 있었다.

 

 

통감관저 앞의 큰 은행나무에 대한 기록은 지금도 많이 남아 있다. 1926년에 나온 ‘경성의 광화’라는 책에는 이 나무에 대해 다음과 같은 구체적인 설명이 있다. "…또 녹천정(綠泉亭) 부근에는 전설의 명목(名木)인 대공손수(大公孫樹, 은행나무)가 있다. 수령 500년이 넘고, 나무둘레가 네발(양팔 길이)로도 모자라며, 높이는 (총독)관저의 옥상에 닿아있고, 가지는 남산 기슭을 덮고 있는데, 이 정정한 고목은 문록의 역(즉 임진왜란)에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가등청정)가 말을 매어두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이 치욕의 현장, 천세만세가 가도록 잊어서는 안되는 식민침략 역사의 가장 중요한 부분중의 하나인 경술국치의 현장엔 표지석 하나 세워져 있지 않았다. 이곳이 옛 통감관저터라는 사실, 이곳에서 치욕의 경술국치가 조인되었다는 사실도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다행히 민족문제연구소(소장 : 임헌영)에서 이 곳에 표지석을 세우는 일을 추진하고 있다. 표지석 건립을 제안, 추진 중인 민족문제연구소의 방학진 사무국장은“치욕의 현장에 대한 기록도 필요하며 표지석이라도 꼭 세워야 한다"며 "이런 중요한 터가 이렇게 오랫동안 방치된 것은 분명 문제가 있으며, 현재 관할당국과 협의중으로 (표지석을 세우는 데는) 시간이 좀 걸릴 것 같다”고 밝히면서 시민들의 관심을 호소했다.

표지석 설치 비용 마련은 당국에 맡기는 것이 아니라 연구소 회원들과 시민들의 자발적인 후원금을 통해서 마련할 계획이라고 한다. 자발적인 시민운동을 통해 역사를 바로 세우는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겠다는 것이다.

한편 열린우리당의 김영춘 의원은 경술국치일을 국가기념일로 해서‘기억과 경계’를 공식화하자는 국회결의안을 준비중이다. 그를 통해 다시는 식민침략을 당하지 않을 민족의 의지를 다지고, 일제 식민침략의 만행을 똑똑히 기억해내자는 것에 목적이 있다고 한다.

"암울했던 역사의 흔적을 기억하고 들춰내는 일이 그리 달가울 리는 없겠지만, 그래도 이곳이 ‘경술국치’의 현장이었으며 이땅을 지배했던 역대 통감과 총독의 소굴이었다는 사실을 담은 표지석 하나 정도는 마땅이 남겨두어야 한다."

이순우씨의 설명이다. 아무리 잊고 싶은 역사라 하더라도 떠올리고, 기억함으로서 오히려 후세에 약이 된다고 이씨는 강조했다. 경술국치 터 그 치욕의 현장에 표지석이라도 세워야 하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코리아포커스,
05.08.29>

안진걸 기자 true@coreafocus.com


NO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