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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족문제연구소가 공개한 위암의 친일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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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민족문제연구소 |
항일 언론인으로 알려진 위암 장지연(1864∼1920)의 친일시가 공개돼 파문이 예상된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위암이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 1916년 12월 10일자 2면에 신임 총독으로 부임하는 하세가와를 환영한다는 제목의 시 ‘환영 하세가와(長谷川) 총독’을 썼다고 1일 공개했다.
다음은 위암의 한시 내용이다.
채찍 모자 그림자 수레먼지 끼고 오니 문·무관 분분히 새로 악수 나누네. 한강의 바람과 연기가 원래 낯이 익으니 차가운 매화는 예전처럼 기쁘게 웃으며 맞이하도다.
박한용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실장은 “하세가와가 총독으로 조선에 다시 돌아온 것을 환영한다는 내용의 자발적 친일시”라며 “문학작품의 특성상 노골적 친일표현은 없지만 친일의 강도가 결코 낮지 않다”고 지적했다.
하세가와는 1905년 이등박문과 함께 고종을 협박하여 을사보호조약 체결을 강요하고 통감부의 임시통감을 지낸 인물이다. 특히 하세가와는 2대 조선총독으로 부임한 뒤 공포정치와 무단통치를 통해 3·1운동을 잔혹하게 탄압한 인물로 알려져있다.
위암, 항일 언론인에서 친일 언론인으로 변절…일제 식민통치 찬양
이번에 공개된 위암의 친일시는 강명관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가 지난 1987년 한국한문학회에 발표한 ‘장지연 시세계의 변모와 사상(1987년 한국한문학회)’에도 수록되어 있다.
강 교수는 이 글을 통해 위암의 친일행적과 친일시의 문제를 지적했다.
강 교수는 이 논문에서 “1897년부터 1910년 8월 합방 이전까지 위암의 삶은 시련과 고뇌에 찬 것이었지만 합방 이후 그 이전과 완전히 다른 행동과 의식을 보여주게 된다”며 “사망시(1920년 10월 2일)까지 술과 시, 실의와 좌절의 연속이었으며 한편으로, ‘친일’이라는 모순된 행동을 보인다”고 지적했다.
강 교수는 또한 “황성신문 사장·논객으로 그리고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의 필자로 항일 언론의 선두에 섰던 그가 침략자의 대변지에 고정필자로 등장하는 이해할 수 없는 변신을 감행한다”고 밝혔다. 위암은 1914년부터 1918년 7월까지 ‘매일신보’에 친일 시와 논설 등을 730여편을 썼다.
위암은 이 당시 매일신보 사장 아베 미쓰이에, 매일신보 감독 도쿠토미 소호 등을 비롯해 여계형, 정만조, 최영년 등 친일파와 어울렸으며 특히 아베 미쓰이에 사장과는 매우 친하게 지냈다고 강 교수는 주장했다.
위암은 매일신보 1918년 1월 1일자에 ‘대정육년시사(大正六年詩史)’란 제목의 시를 썼다. 1917년 6월 순종이 일본왕 ‘대정(大正)’을 만나러 간 사실을 소재로 한 이 시는 일제 식민통치를 기정사실로 인정하고 찬양한 내용으로 되어 있다.
“李王 전하 동해를 건너시니 관민이 길을 쓸고 전송했네. 오늘같은 성대한 일은 예전에 드물던 바 일선융화(日鮮融化-일본과 조선의 융화)의 서광이 빛나리라.”
또한 위암은 1910년 10월 일본이 홍수로 재난을 겪고 있는 가운데 일본왕이 수재지원금을 내리자 “전에 없던 호우·폭풍 많아/ 홍수 지나가자 곳곳에 재해 입었네./하사금 내리심은 구휼하는 은전이라/ 조선 인민 한 가지로 파도 같은 그 은혜에 젖었네”라고 찬양했다.
한편 김경현 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은 장지연 선생의 후손에 의해 명예훼손 및 허위사실 유포혐의로 검찰에 고발됐다. 김 위원은 연구활동을 통해 위암의 친일행적을 공개한 적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