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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슬픔과 연민 (Le Monde, 4월 1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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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 Monde Philippe Pons 기자


 


 


다음은 4월 13일자 ‘르 몽드(Le Monde)’에 실린 ‘한국의 친일청산에 관한 특집기사’ 전문을 번역한 것이다. 조중동은 이 기사를 연합기사로 받아 가볍게 처리하면서 자신들과 관련된 사항은 의도적으로 배제했다. 이 기사는 주불 한국대사관의 협조로 번역된 것을 연구소 주섭일 지도위원이 입수, 연구소에 보내온 것이다.


 










     여자와 돌 그리고 바람이 많다고 해서 ‘三多島’라 명명되는 한국남단의 제주도는, 무엇보다도 그 화려한 경관으로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 곳은,  비극적 한국역사를 축약해서 보여 주는 깊은 상흔이 남아 있는 땅이기도 하다. 매년 4월3일이 되면, 제주시민의 절반은 1948년 봄의 무장봉기사건 (일본의 식민통치 멍에를 벗어낸 후, 미국에 의해 배치된 집권당에 대항) 당시에 학살당한 인척들을 기리며 눈물짓는다. 그 해 몇 주만에 학살된 주민들의 수는  3-4만명에 이르는데, 남자나 여자나 어린아이까지 마구잡이로 처형되었고 마을들은 약탈당하고 불태워져 버렸다. 하지만 그후 연이어진 독재정권들은, 이러한 유혈의 역사를 명백히 밝혀내는 일을 철저히 거부했다.


          제주도의 이 비극적 사건을 비롯한 상처들은 세월이 지나면서 아물기는 커녕 오히려 골이 깊어지고 있는 까닭에, 한국은 중국의 경우와 같이 역사의 암울한 장들을 다시 들추어보기로 결정한 것이다. 한국인들은, 일본이 군국주의적 과거와 그에 동반된 잔혹한 행태들을 단순하고 간편하게 그저 자신들 좋을대로 해석하며 스스로 그 죄의 짐에서 벗어나려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분개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자국 역사의 어두운 측면들을 그들 스스로 다시 조명해보고 있다. 일본 점령세력과의 협력,  그후 수십년 동안의 독재체제 아래 행해진 참혹한 수탈과 고문, 암살 등.


          1905년, 수천년 역사의 주권국가였던 한국의 작은 왕국은 일본의 보호령 아래 들어갔다. 5년 후 일본에 합병된 한반도는 1945년이 되어서야 독립을 되찾았지만, 초강국들에 의해 둘로 나뉘어지고 국경 양쪽의 독재정권 아래 동족상잔 비극을 겪기도 했다. 한반도 남쪽 한국에서는, 냉전 이데올로기의 절대적 필요성에 의해 모든 사실들은 은폐, 위조되었으며, 집권층의 인물들이 직접 일본과 협력했거나 일본인들을 위해 일한 가정 출신이라는 ‘國是’가 연유가 되어 비밀에 붙여졌다.


          일본의 식민통치는 한국을 착취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일본어 및 일본에서 도입된 풍습과 가치관들을 한국인들에게 강요함으로써 한국의 문화적 정체성을 말살시키려고까지 했다. 저항하는 한국인들도 있었지만, 일부 한국인들은 동족을 지옥과 같은 일본의 광산으로 보내는 징집활동과 탄압에도 가담하고, 심지어는 일본군의 매음굴에서 매춘을 강요당한 20만명의 ‘위안부’를 모집하는 일까지 도울 정도로 매우 적극적인 협력을 했다. 일본인들의 책임이 크지만, 그들에게 매수당해 있던 한국 관료들과 징집요원들의 책임도 크다.


          한국을 발전궤도에 올려 놓은 군장성 출신의  박정희 대통령 (1961년에서 1979년까지 한국 통치)은, 이러한 연속사슬의 상징적 인물이다. 만주 군관학교를 거쳐 일본군대에서 근무했던 그는, (항일 투쟁을 하던) 유격대원(빨치산)들을 공격했다(본인은 한결같이 이를 不認)는 비난받기도 했는데, 미국 점령세력에 의해 집권한 이승만 독재정권을 학생들이 전복시킨 지 1년 후에 권력을 쥐게 되었다. 40년 일본 식민통치 기간 중 권력층에 있다가 여전히 정치 및 경제계를 장악하게된 엘리트 계층은, 적극적인 반공주의를 내세워 자신들의 대일 협력 과거를 ‘씻어내는’ 일에 전념했다. 이와 같이 과거를 억눌러 묻어두고 외면함으로써 일제 식민통치의 과거가 청산되지 않았고, 그로 인해, 식민통치의 폐해에 대한 유일한 피고인 일본 뿐 아니라 그야말로 가차없는 숙청작업을 과시할 수 있었던 북한에 대해서도, 한국은 난감한 입장에 처하게 되었다. 한국에서의 ‘숙청’은 매우 상징적인 수준이었다. 겨우 682건이 공개되었고, 그 중 38건에 관련된 판결이 내려지고 7건에 대한 刑이 주어졌으며 7건은 사면처리되었다. 이는 점령세력 미국이 한국을 통제하기 위해 일본인들에 의해 배치된 행정 및 치안 구조를 그대로 유지했기 때문인데, 그 결과, 자신들의 고통스러운 과거가 외면되고 강탈 당했다고 느끼는 사람들에게 원한과 적대심 그리고 저항감을 불러 일으켰다.


          2002년 12월 선출된 노무현 신임 대통령과 함께, 15년전 독재정권을 물러나게 하고 한국을 아시아에서 가장 역동적 민주국가의 일원이 되도록 만든 개혁주의 일파를 대표하는 인물들로 구성된 한 군단이 한국의 지도층을 이루게 되었다. 법령들이 가결되고 전문가들로 이루어진 위원회가 구성이 되어 한국역사 1백년에  대한 ‘재검토’가 시작되었다.


          제주 출신인 강창일(여당 국회위원)씨는 진행 중에 있는 이 작업에 대해 설명한다. “우리는 책임의 소재를 명백히 밝혀서, 식민통치 시대부터 독재정권들에 이르기까지 권력을 유지했던 일부 엘리트 계층에게 희생된 이들의 우롱당한 명예를 회복시켜 주려는 것이다. 징계를 하려는 것이 아니라, 나라를 한데 모으려는 것이다.” “1940년대 말부터 휴전이 체결된 1953년에 이르기까지, 1백만의 민간인들이 학살되었다. 그 중 다수는 공산주의라고 몰려서 죽은 것이다. 그들의 자녀들까지 차별대우의 희생자가 되었었다”라고 그는 말을 잇는다. 역사를 전공했으며 1970년대 말 사상범으로 투옥되었던 강씨는, 반공주의나 일본에 대한 원한이 아니라, 민족역사의 어두운 측면들까지 국민들의 역사의식 속에 통합되어 받아들여져서, 민족 정체성의 ‘분석과 재정립’에 기반을 두고 민족적 화합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반도에서 전례 없는 이러한 역사 재정립 작업은, 남아프리카의 ‘진실과 화해 위원회’ 사례를 본받은 것인데, 이는 한국이 일본에게 역사에 대해 숙고해 볼 것을 요구할 때 훨씬 더 당당한 입장이 되도록 해 줄 것이다.


          노무현대통령은 국민들에게 이와 같은 내적 성찰을 거듭 촉구하고 있다. 일본의 패전을 기념하던 2004년 8월15일 그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투쟁한 가정들은 3세대에 걸쳐 차별대우의 희생자가 되고 빈궁한 삶을 사는 반면, 일본과 협력했던 가정들은 특혜를 입었던 터무니 없는 현실에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사실, 과거에 대한 조사는 이미 10여년 전에 ‘민중’이라는 급진적 史料 편찬 세력권 비정부단체들이 고생스럽게 수행한 연구활동을 통해 시작되었다. 연구욕이 왕성한 이들의 활동 덕분에 진상들이 밝혀지고 일제와 협력한 이들의 명단들이 작성되었다.


          “史料를 다시 뒤적이고 직책에 부적합한 인물들을 퇴출시키는 작업을 하는 것은 현재에 남아 있는 일제의 유물을 밝혀내기 위함이다. 이는 민족분단과 50년간의 권위주의적 정치 습관의 저변에 있는 불행한 역사의식의 원천이다”라고 Alain Delissen은 평한다. 그는 현대 한국사 전문가로서 Ecole des hautes ?tudes en sciences sociales (인문과학고등연구원)에서 강의를 맡고 있다. “분단의 심한 충격 이외에도, 인정받는 것에 대한 가시지 않는 갈증 또한 한국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원인이다”라고 그는 설명한다.


     “Marcel Ophuls의 기록영화 Le Chagrin et la Piti’ 로 인해 프랑스 국민들이 각성을 하게 된 사실은 우리들에게 하나의 본보기가 된다”고 Chu Joo-supil씨는 말한다. 그는 1999년에 한국어로, 프랑스의 역사청산에 관한 최초의 저서를 썼다. 중앙일보의 파리 특파원을 지낸 그는, 1980년에 군부 출신의 전두환대통령 정권의 지시에 의해 해고되었다가 7년이 지난 다음에야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Barbie, Touvier, Papon의 소송을 지켜 본 덕택에 그는, 한국 국회의원들에게 긴 시간에 걸쳐 진전된 프랑스의 여론을 알리는 일에 기여했다. “프랑스와 한국의 경우에는 큰 차이점이 있다. 프랑스인들은 4년동안 겪은 고통이었지만, 한국인들에게는 35년 동안이나 지속되는 암흑 기간이었다.”라고 그는 설명한다.


          바로 이 점은, 역사진상 규명 작업의 여러 가지 위험 요소들 중의 하나이다. 즉, 거의 40년 동안 지속된 식민통치 아래 놓여 있었던 상황에서, 과연 ‘일제에 협력한 사람들’ 등을 운운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문제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있어 ‘어려운 상황을 타개하며 살아남기’ 위한 유일한 길은, ‘평범한 협력’을 하는 것이었다. 재벌로부터 시작해서 정치, 관료 시스템에 이르기까지, 현대 한국에는 식민 유산의 자취가 뿌리깊게 남아 있다. 제국주의의 잔재를 청산하는 일은, 억눌러 놓았던 고통스런 과거를 다시 들추어내고 한국이 스스로를 희생자로서만 인식하는 것을 포기함을 전제로 한다. 한국이 희생자였다는 사실은 명백하지만, 한국의 책임인 부분도 있다. 한국은, 북한 공산주의 독재자 김일성이 항일 투쟁을 했다는 당혹스러운 역사적 사실 또한 인정해야 한다. 반공 프로파간다에 의해 수십년 동안 외면되고 비하되었던 김일성의 ‘武功’들이 이제는 교과서 내용에 포함되어 있다.


          여론은 오랜 冬眠에서 빠져나오고 있는 중이며, 이와 함께 막연한 불안감 내지 거북해하는 분위기가 감지된다. 아이들이 어른들(부모와 조부모)에게 난감한 질문들을 하는 것이다. 예전에 프랑스에서 젊은 세대들이 이해하려고 애쓰던 것과 마찬가지 상황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격렬한 상처들도 그럭저럭 희미해져 버린 노년 세대는, ‘잊고 용서’하는 것이 낫다는 입장이다. 서울의 동대문시장에서 장사를 하는 한 할머니는, “그 진흙탕을 뭐하러 휘젖는 것인가”라고 말을 내뱉았다. 그녀는 시련을 겪은 얼굴에 새들해진 사과처럼 주름진 모습이었다. 일제시대에 강요된 언어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아직도 일본어를 구사하는 이 할머니는, “식민통치 동안에도 우리는 살아야 했다…”고 말한다. 이는 당시의 많은 소시민들이 취했던 굴종적 태도를 반영해 주는 말이지만, 수치심과 원한이 섞인 어렴풋한 감정을 느끼게 하기도 한다. 소설가 조정래의 아리랑, 우리의 땅은 우리의 삶이다(L’Harmattan출판사)에서는 이와 같은 감정이 잘 표현되어 있다. 이 작품은, 고통의 가치를 추구하는 정신이 깃든 대하소설이다.


          물론, 역사의 진실을 밝히려는 현재의 움지임에 정치적 책동이 없지 않다. 우파에 의해 공산주의를 지지한다는 비난을 받고 있는 중도좌파는, 우파는 일제 협력세력 출신이라고 비난함으로써 이에 응수하고 있다. 지난 여름 조선일보는 한국사 재검토에 대해 항변하며, “한국을 수치스런 국가로 만들어야 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전통적 보수파 엘리트를 대변하는 한나라당 역시 이에 반대하고 나섰다. 한나라당은, 역사진상규명은 한나라 黨首인 박근혜(독재자 박정희대통령의 딸)씨의 평판을 깍아내리기 위한  음모라고 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싸움 중에, 집권당에서도 黨首였던 신기남(부친이 일본 군경에서 근무)씨를 비롯한 여러 명이 직책을 잃게 되었다.


          아버지가 일본에서 헌병이었다는 사실로 인해 죄인 公示臺에 매달리게 된 이미경 국회의원의 경우를 보면, 과거라는 실타래가 얼마나 복잡하게 얽혀 있는지를 알 수 있다. 학생시절 독재정권에 대항해 투쟁했던 그녀가, 父親의 행적에 대해서도 책임이 있는 것일까?? 삼촌 중 한 명이 월북했다는 것 때문에 온 가족이 ‘낙인’ 찍힌 것인가?? 이와 같은 사가는, 일제에 협력했다는 비난과 함께 공산주의를 지지한다는 비난을 동시에 받을 수 많은 가정들의 고통을 보여 준다.


          受難의 섬 제주도에 대한 역사소설 한라산의 노을(10여년 전 출간)을 쓴 한림화씨는, “제주도 사람들의 기질과 사고양식은 그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고서는 이해할 수 없다”고 설명한다. 이 소설의 주인공 이덕구는 (4.3 무장투쟁 당시) 제주 유격대를 지휘했다. 그는 체포되고 고문받은 후 처형되었으며, 십자가형 나무틀에 묶인 그의 시신은 대중들이 볼 수 있는 공공장소에 공개되었다. 이 학살에서 살아남은 이들은, 남자들이 투쟁을 하는 동안 마을에 남아있던 여인네들이 대부분이다.  배척당한 이 여인들은 침묵 속에 격리된 삶을 살았으며, 오랜 세월 동안, ‘공산주의자들’이었을 것이라는 이유 때문에 조국의 기억에서 추방된 死者들의 혼을 무당들만이 불러내어 주었다. 이제는 그들을 기리는 기념비 설립에 관한 일이 과제로 있다. 한국은, 역사 푸닥거리의 고통스러운 과정을 시작하는 단계에 있다.


     


동아시아 강국간의 경쟁관계를 배경으로 한 원한


– 프랑스 Le Monde, 4. 12, 국제 4면, Philippe Pons, 동경發 –


  일본과의 역사 및 영토(영해) 관련 이견들로 인해 중국과 한국에서 반일감정이 급등하고 있다. 일본의 팽창주의적 과거에 대한 논쟁들을 넘어서서 현재 크게 관심사가 되고 있는 쟁점들을 둘러싼 동아시아 강국들간의 대립이 명백해지고 있다. 이 대립은 동아시아에서 중국의 영향력을 억제하기 위한 미국의 전략적, 군사적 장치에 대한 일본의 적극적 참여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최근 타이완을 동경과 워싱턴의 공동 전략 목표에 포함시킨 것은 일본의 적극적 개입을 입증하는 것이다. 한국 역시 점점 더 맹렬한 기세의 우익이 이끄는 일본 일부에서 군의 역할을 재 규정하고 평화주의적 헌법을 개정하려는 태세가 되어 있는 상황을 우려의 눈길로 바라보고 있다. 일본에 대한 이러한 불신과 경계심이 또 다시 높아지면서 한국에서는 노골적으로, 중국에서는 보다 신중하게 일본의 유엔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을 반대하는 캠페인이 벌어지고 있다.


  일본의 새 교과서 발행은 화약에 불을 붙이는 격이 되었다. 하지만 이 교과서들은 전혀 새로울 것이 없다. 즉,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는 내용은 늘 동일하다. 1937년 중국 난징 학살사건, 위안부 문제 등 현재 반일감정이 격화되는 상황은 사실 누적된 여러 요인들로 인한 현상이다.


  일본이 국제무대에서 보다 큰 역할을 하기를 원한다면 주변국가들에게 민감한 문제들에 대해 보다 더 신경을 써야 할 것이라고 아사히신문은 쓰고 있다. 그런데 고이즈미 정부는 몇 년 사이에 사회당측 무라야마 도미이치 총리의 용기 있는 선언 덕택으로 관련 지역에서 회복한 일본에 대한 긍정적 평판을 무너뜨려 버렸다.


  1995년 8월 15일, 무라야마 도미이치 총리는 일본 패전 50주년을 기하여 일본은 자국이 식민통치와 침략을 통해 고통을 겪게 한 국가들에 대해 깊은 양심의 가책을 갖고 있다고 표명했었다. 반박의 여지가 없는 명백한 사실들을 겸손하게 시인함으로 인해 오랜 세월 지연되었던 한국과의 화해가 시작되었다. 무라야마 총리는 고이즈미 총리의 정책을 비판한다. 서울측에서 현재 일본은 유엔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에 도의적으로 자격이 없는 국가라는 평을 받고 있다.


  일본과 이웃 국가들 간의 대립은 통제가 곤란한 감정적 경향을 띠게 되었다. 중국의 격한 반일 움직임들은 일본에서 인근 중국에 대한 막연한 증오심을 증폭시키고 중국의 위협에 대한 우익의 주장들을 뒷받침하는 구실을 제공할 우려가 있는 것이다.


 








‘르 몽드’ 원문


 






Reportage


Cor´ee du Sud, le chagrin et la piti´e


LE MONDE | 13.04.05 | 14h31  .  Mis `a jour le 13.04.05 | 14h31


u sud de la Cor´ee, Cheju, “l’^ile des trois abondances” ­ – femmes, pierres et vents – ­ est surtout connue pour la magnificence de ses paysages. Mais c’est aussi une terre meurtrie, un tragique raccourci de l’histoire du pays. Chaque ann´ee, le 3 avril, la moiti´e de la population de Cheju pleure ses morts, massacr´es dans l’insurrection du printemps 1948 contre le pouvoir mis en place par les Am´ericains apr`es la lib´eration du joug japonais. Cette ann´ee-l`a, en quelques semaines, trente `a quarante mille personnes furent massacr´ees par l’arm´ee et les miliciens. Hommes, femmes et enfants ex´ecut´es sommairement, villages mis `a sac et incendi´es. Les dictatures, qui se sont succ´ed´e au pouvoir dans les ann´ees suivantes, ont pourtant refus´e syst´ematiquement de faire la lumi`ere sur ce sanglant ! ´episode.


Parce qu’il est des blessures, et le drame de Cheju en est une, qui s’ulc`erent avec le temps au lieu de se cicatriser, les Cor´eens du Sud, comme les Chinois, ont d´ecid´e de rouvrir les dossiers noirs de leur histoire. Ils s’indignent surtout de ce qu’ils percoivent comme l’autoabsolution pure et simple que le Japon s’offrirait `a bon compte sur son pass´e expansionniste et les atrocit´es qui l’ont accompagn´e. Ce qui ne les emp^eche pas de rouvrir eux-m^emes les pages les plus sombres de leur propre histoire : la collaboration avec l’occupant nippon de 1910 `a 1945 puis les d´ecennies de dictatures qui s’ensuivirent avec leur cort`ege d’exactions sanglantes, tortures, assassinats.


En 1905, le petit royaume de Cor´ee, Etat souverain plusieurs fois mill´enaire, passe sous protectorat nippon. Annex´ee cinq ans plus tard, la p´eninsule ne retrouvera son ind´ependance qu’en 1945, scind´ee en deux par les grandes puissances et sombrant dans une guerre fratricide avec dictatu! res au pouvoir de part et d’autre de la fronti`ere. Au Sud, tou! te une m´emoire sera occult´ee, falsifi´ee par les imp´eratifs id´eologiques de la guerre froide puis tenue sous le boisseau pour “raison d’Etat” parce que ceux qui tiennent le pouvoir avaient eux-m^emes collabor´e avec les Japonais ou qu’ils ´etaient issus de familles qui avaient travaill´e pour eux.


Or la colonisation nippone ne s’´etait pas limit´ee `a l’exploitation du pays. Elle voulait aussi annihiler son identit´e culturelle en lui imposant une langue, des moeurs et des valeurs import´ees. L’objectif consistait tout simplement `a faire des Cor´eens de “bons” Japonais. Des Cor´eens r´esist`erent. D’autres pouss`erent la collaboration tr`es loin, jusqu’`a participer `a la r´epression, aux r´equisitions de compatriotes envoy´es dans l’enfer des mines du Japon et m^eme au recrutement de 200 000 “femmes de r´econfort” contraintes `a la prostitution dans les bordels de l’arm´ee nippone. La responsabilit´e des Japonais est grande, celle des bureaucrates et des agents recruteurs cor´eens `a leur! solde l’est aussi.


Le g´en´eral-pr´esident Park Chung-hee, qui dirigea le pays de 1961 `a 1979 et le placa sur les rails de l’expansion ­ aujourd’hui, la Cor´ee du Sud, 45 millions d’habitants, est la dixi`eme ´economie du monde ­, est une figure embl´ematique de cet encha^inement. Form´e `a l’acad´emie militaire de Mandchourie, colonel dans l’arm´ee japonaise, accus´e d’avoir combattu les partisans, ce qu’il a toujours ni´e, il prend le pouvoir en 1961, un an apr`es que les ´etudiants ont renvers´e une autre dictature, celle de Syngman Rhee mise en place par l’occupant am´ericain. Pendant quatre d´ecennies, l’´elite au pouvoir au temps des Japonais et qui domine encore la classe politique et le monde des affaires va s’employer `a “laver” son pass´e de collaboration dans un anticommunisme militant. Cette non-rupture avec la p´eriode coloniale, ce pass´e refoul´e ou d´eni´e, met S´eoul en porte `a faux `a la fois vis-`a-vis du Japon, seul accus´e des m´efaits de la colonisation, mais aussi de la Cor´ee! du Nord qui, elle, peut se targuer d’une ´epuration v´eritable ! et sans concession. Au Sud, l'”´epuration” fut hautement symbolique : `a peine 682 dossiers ouverts, 38 jugements, 7 condamnations, et autant d’amnisties. C’est que pour contr^oler le pays, l’occupant am´ericain a maintenu l’administration et la police mises en place par les Japonais, suscitant la rancoeur, l’opposition puis la r´evolte de ceux qui se sentaient ni´es et spoli´es de leur pass´e de douleur.


Avec le nouveau pr´esident Roh Moo-hyun, ex-avocat des droits de l’homme, ´elu en d´ecembre 2002, arrive `a la t^ete du pays toute une cohorte de repr´esentants de la frange progressiste de la population, celle qui avait r´eussi, quinze ans auparavant, `a faire reculer la dictature puis `a donner naissance `a l’une des d´emocraties les plus dynamiques d’Asie. Des lois sont vot´ees, des commissions d’experts mises en place : commence le “r´eexamen” d’un si`ecle d’histoire cor´eenne.


Pr´ecis´ement originaire de Cheju, Kang Chang-il, d´eput´e du parti gouvernemental Uri, explique le travail ! en cours : “Nous cherchons `a ´etablir des responsabilit´es et `a restaurer l’honneur bafou´e des victimes d’une ´elite qui s’est maintenue au pouvoir, de la colonisation aux dictatures, et qui a commis des exactions. Il ne s’agit pas de punir mais de permettre au pays de se rassembler.” “Un million de civils ont ´et´e massacr´es entre la fin des ann´ees 1940 et l’armistice de 1953, mettant fin `a la guerre de Cor´ee. Une bonne partie d’entre eux ´etaient accus´es d’^etre communistes. M^eme leurs enfants ont ´et´e victimes de discriminations”, poursuit-il. Historien de formation, emprisonn´e pour ses id´ees `a la fin des ann´ees 1970, M. Kang pr^one une r´econciliation nationale qui se fonde non plus sur l’anticommunisme et le ressentiment `a l’´egard des Japonais mais sur une “d´ecomposition-recomposition” de l’identit´e nationale en int´egrant `a la m´emoire collective les pages noires de l’histoire nationale. Ce travail de m´emoire sans pr´e! c´edent dans la p´eninsule prend pour mod`ele la Commission v´erit! ´e et r´econciliation de l’Afrique du Sud, et placerait la Cor´ee en bien meilleure position pour demander au Japon de r´efl´echir sur son propre pass´e.


Le pr´esident Roh Moo-huyn multiplie les appels aux Cor´eens pour qu’ils se livrent `a cette introspection. Lors du dernier anniversaire de la d´efaite japonaise, le 15 ao^ut 2004, il lance : “Nous devons venir `a bout de cette aberration : trois g´en´erations qui ont lutt´e pour l’ind´ependance de la patrie ont ´et´e victimes de discriminations et pouss´ees dans la pauvret´e alors que les familles qui ont collabor´e avec les Japonais ont ´et´e privil´egi´ees.” En r´ealit´e, l’investigation du pass´e a commenc´e il y a d´ej`a une dizaine d’ann´ees par le biais des laborieuses recherches entreprises par des organisations non gouvernementales dans la mouvance de l’historiographie radicale dite “minjung” (d´emocratique). Ces chercheurs ont ´etabli des faits et dress´e des listes de collaborateurs.


“Le travail de r´eactivation des arc! hives et d’´epuration vise `a d´eceler dans le pr´esent les reliefs de l’imp´erialisme japonais, source d’une conscience historique malheureuse o`u se fondent la division nationale et cinquante ann´ees de pli politique autoritaire”, estime Alain Delissen, ma^itre de conf´erences `a l’Ecole des hautes ´etudes en sciences sociales et sp´ecialiste de la Cor´ee contemporaine. “Au-del`a du traumatisme de la division, la Cor´ee souffre d’une soif inextinguible de reconnaissance”, pr´ecise-t-il.


“Le r´eveil des Francais `a la suite du film de Marcel Ophuls Le Chagrin et la Piti´e (1971) est pour nous un exemple”, dit Chu Joo-supil, auteur en 1999 du premier livre en cor´een sur l’´epuration en France. Ancien correspondant `a Paris du journal JongAang Ilbo, M. Chu fut licenci´e en 1980 sur ordre du r´egime du g´en´eral-pr´esident Chun Too-whan et ne put retourner en Cor´ee que sept ans plus tard. Ayant suivi les proc`es Barbie, Touvier et Papon, il contribua `a faire conna! ^itre aux parlementaires sud-cor´eens le long cheminement de l’o! pinion francaise. “Il y a une grande diff´erence entre la France et la Cor´ee, explique-t-il, les Francais ont connu quatre ann´ees noires. Les Cor´eens trente-cinq.”


C’est l`a l’un des ´ecueils du travail entrepris : peut-on parler de “collaborateurs” dans le cas d’une population colonis´ee durant pr`es de quatre d´ecennies dont, pour la majorit´e, la seule chance de “tirer son ´epingle du jeu” ´etait de pratiquer une “collaboration ordinaire” ? Des chaebols (conglom´erats) au syst`eme politique et bureaucratique, la Cor´ee moderne est profond´ement marqu´ee par l’h´eritage colonial. Liquider les reliefs de l’imp´erialisme suppose de faire remonter un douloureux pass´e refoul´e et de renoncer `a se consid´erer uniquement comme une victime. Les Cor´eens le furent, assur´ement, mais ils eurent aussi leur part de responsabilit´e. Le Sud doit aussi reconna^itre un fait historique embarrassant : l’ancien dictateur communiste de la Cor´ee du Nord, Kim Il-sung, s’est battu contre l! e Japon. Certains de ses “faits d’armes” figurent d´esormais dans les manuels scolaires apr`es avoir ´et´e ni´es ou rabaiss´es durant des d´ecennies par la propagande anticommuniste.


L’opinion sort d’un long engourdissement, et le malaise est tangible. Les enfants posent des questions embarrassantes `a leurs parents et leurs grands-parents. Comme nagu`ere en France, les jeunes g´en´erations cherchent `a comprendre. Pour les plus ^ag´es, dont les d´echirements se sont tant bien que mal estomp´es avec le temps, il vaut mieux “oublier et pardonner”. “Pourquoi remuer cette boue ?”, l^ache une marchande au visage burin´e et rid´e comme une vieille pomme rencontr´ee sur le march´e de Tong Dae-mun, `a S´eoul. H´eritage de l’enseignement obligatoire de la langue de l’occupant durant la colonisation, la vieille dame parle encore japonais. “Il fallait bien que nous vivions pendant la colonisation…” Un propos qui refl`ete bien l’attitude d’adh´esion et de soumission de nombre de petites g! ens `a l’´epoque, mais qui engendre aussi un sentiment diffus m^e! lant la honte et le ressentiment tel qu’il est ´evoqu´e par le romancier Jo Jong-nae dans Arirang, nos terres sont notre vie (L’Harmattan), un roman fleuve empreint de dolorisme.


Bien s^ur, cette campagne pour la v´erit´e historique n’est pas exempte de manoeuvres politiques. Accus´e par la droite d’^etre procommuniste, le groupe centre-gauche du pr´esident Roh Moo-hyun r´epond en accusant celle-ci d’^etre issue de la collaboration. “Faut-il faire de la Cor´ee le pays de la honte ?”, demandait cet ´et´e le quotidien conservateur Chosun Ilbo, s’insurgeant contre ce r´eexamen de l’histoire nationale. Le grand parti national qui repr´esente l’´elite conservatrice traditionnelle s’insurge aussi contre ce qu’il estime ^etre un complot visant `a discr´editer sa pr´esidente, Park Geun-hye, fille du dictateur Park Chung-hee. Dans la bataille tombent aussi des t^etes du parti gouvernemental Uri : `a commencer par celle de son pr´esident, Shin Ki-nam, dont le p`ere avait tra! vaill´e dans la police militaire nippone.


Le cas d’une d´eput´ee, Lee Mi-kyung, clou´ee au pilori parce que son p`ere avait ´et´e gendarme au Japon, est r´ev´elateur de la complexit´e de l’´echeveau du pass´e. Mme Lee, emprisonn´ee lorsqu’elle ´etait ´etudiante pour sa lutte contre la dictature, est-elle responsable des actions de son p`ere ? Toute la famille est-elle “fl´etrie” alors que l’un de ses oncles est, lui, pass´e au Nord ? Une saga r´ev´elatrice du d´echirement de nombre de familles que l’on peut accuser `a la fois d’avoir ´et´e collaboratrices et procommunistes.


“On ne peut rien saisir de la mentalit´e de Cheju sans remonter `a cette p´eriode”, explique Han Rim-wha, auteur d’un roman historique sur l’^ile martyre, Cr´epuscule sur le mont Halla, paru il y a une dizaine d’ann´ees. Lee Duk-gu, son personnage principal, ´etait le chef des partisans de l’^ile. Arr^et´e, tortur´e, ex´ecut´e, son corps fut expos´e, crucifi´e, en place publique. Les survivants du massacre sont surto! ut des femmes, rest´ees au village pendant que les hommes se ba! ttaient. Ostracis´ees, elles se sont mur´ees dans le silence et, longtemps, seuls les chamans ont ´evoqu´e les ^ames de ces morts bannis de la m´emoire nationale parce qu’ils auraient ´et´e des “communistes”. Aujourd’hui, il est question de leur ´elever un monument. La Cor´ee commence un douloureux processus d’exorcisme historique.


 


Philippe Pons


Article paru dans l’´edition du 14.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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