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문제연구소 보도자료
국치일은 1910년 일제의 강압에 의해 치욕적인 ‘한일합방(韓日合邦)’ 조약이 조인된 날로 역사는 이를 경술국치(庚戌國恥)로 기록하고 있다. 치밀한 계획아래 조선의 병합을 계획하였던 일제의 강경파들은 기울어져 가는 한말의 매국대신들을 매수하여 1910년 8월 22일 오후에 총리대신 이완용(李完用)과 통감부(統監府)의 3대 통감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사이에 한일합병조약(韓日合倂條約) 전 8 조(全八條)를 체결하였고, 조인이 성립된 후에도 그 사실을 극비에 부쳤다가 8월 29일에 순종황제의 한일합병에 관한 조서(詔書) 칙유(勅諭) 및 합병조약문을 공포하기에 이르렀다. 이로써 한국민의 의사와 무관하게 한국은 일본제국주의의 완전한 식민지로 전락, 세계사상 유례없이 가혹한 수탈과 억압을 겪게 되었다.
국치일 복원 중명전 친일역사자료관 전환 촉구 영화 ‘도마 안중근’ 무료 시사회
민족문제연구소는 8월 29일 오후 2시 중명전에서 국치일(한일합병 체결일) 복원 촉구 집회를 가진다. 이 날은 1910년 일제가 한국을 강제로 병탄한 경술국치 94주년이 되는 날이다. 8 15 광복이 우리 민족에게 감격스런 이유는 8 29 치욕의 역사를 지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타국에 망명 중이었던 임시정부 요인들을 비롯한 해외의 항일운동가들은 이 날이 오면 어김없이 국치기념 행사를 가지고 독립의 의지를 다졌다고 한다.
최근 우리 주변을 둘러싼 강대국들의 역사 침략이 노골화하고 있는 가운데 민족사를 지키고 바로잡으려는 노력도 우리 사회 전반에 확산되고 있다.
우리의 부끄러운 역사를 솔직하고 용기 있게 드러내고자 하는 것은 다시는 지난 날의 치욕을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우리 모두의 다짐이기도 하다.
국치일은 본래 국가기념일로 지정되어 있었으나 명확한 이유 없이 삭제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행사 장소인 중명전(서울 중구 정동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53호)은 1905년 을사조약의 체결장소로 역시 국치의 현장이기도 하다. 실제 한일합방조약이 체결된 장소는 통감부 공관(중앙대의대부속병원 뒤편) 이었으나 현재 건물은 사라지고 없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정부에 8월 29일 국치일을 국가 공식 기념일로 지정할 것과 현재 폐가처럼 방치돼 정동극장 주차장으로 사용되고 있는 치욕의 현장인 중명전을, 부끄러운 역사를 영원히 기억하는 박물관이나 역사관으로 활용할 것을 촉구할 예정이다. 한편, 국치행사 이후에는 2부 행사로 영화 「도마 안중근」 무료 시사회를 정동극장에서 진행한다. 이 날 행사장에는 민족문제연구소가 소장하고 있는 일제강점기 사료와 유물 3,000여점 중 을사륵약과 경술국치에 관련된 일부가 공개 전시된다.
<식순>
(1926년 임시정부 요인들의 국치기념 행사 순서를 기본으로 하여 진행하며, 문화행사는 주최측에서 추가한 것임)
1부 (14:00 ~15:00, 장소 중명전-위치는 아래 행사 상세사항 참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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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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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가 제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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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에 최경례(最敬禮)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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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빈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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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는 말씀 (조문기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 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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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감 말씀 1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 소장 중앙대 국문과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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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1 (가수 김영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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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감 말씀 2 (최병모 변호사: 친일진상규명시민연대 대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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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2 (춤패 열림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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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감 말씀 3 (국회의원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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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 3 (테너 김동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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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만세 (장병화 : 가락전자 회장 민족문제연구소 이사 독립 운동가 후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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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회 |
2부 (15:10 ~ 16:40) |
영화 「도마 안중근」무료 시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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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 : 2004년 8월 29일(일) 오후 3시 10분~ 4시 4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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곳 : 정동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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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
자료명 :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 (1926년 9월 6일자 제192호) 上海國恥紀念 上海在留同胞一同은 僑民團의 召集으로 八月二十九日 下午三時에 三一堂에 會同하야 左記 節次로 國恥紀念式을 擧行하엿다 一.開式 一.愛國歌 一.國旗에 最敬禮 一.式辭 司會 康代理 團長 一.?想 一.所感演說 洪國務領 一.同 安島山 一.獨立萬歲 一.閉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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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합방 조약문 |
일본국 황제폐하 및 한국 황제폐하는 양국간에 특수하고도 친밀한 관계를 고려하여 상호의 행복을 증진하며 동양 평화를 영구히 확보하고자 하며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한국을 일본제국에 병합함이 선책이라고 확신하고 이에 양국간에 병합조약을 체결하기로 결정하고 이를 위하여 일본국 황제 폐하는 통감 테라우치 마사타케 자작을, 한국 황제폐하는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을 각각의 전권위원으로 임명하였다.
그러므로 위 전권위원은 합동 협의하고 아래의 제조를 협정하였다.
제1조 한국 황제폐하는 한국 전부에 관한 모든 통치권을 완전 또는 영구히 일본 황제폐하에게 양여한다.
제2조 일본국 황제폐하는 전조에 기재한 양여를 수락하고 완전히 한국을 일본제국에 병합함을 승낙한다.
제3조 일본국 황제폐하는 한국 황제폐하, 황태자 전하 및 그 후비와 후예가 각기의 지위에 적응하여 상당한 존칭과 위엄 및 명예를 향유하게 하며 또 이것을 유지하는데 충분한 세비를 공급할 것을 약속한다.
제4조 일본국 황제폐하는 전조 이외의 한국 황족 및 그 후에도 각기 상응하는 명예 및 대우를 향유하며 또 이것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자금의 공급을 약속한다
제5조 일본국 황제폐하는 훈공 있는 한국인으로서 특히 표창에 적당하다고 인정된 자에게 영작을 수여하고 또 은급을 부여한다.
제6조 일본국 정부는 전기 병합의 결과로 완전히 한국의 시정을 담당하고 동지에서 시행하는 법규를 준수하는 한인의 신체 및 재산을 충분히 보호해 주며 또 그들의 전체의 복리 증진을 도모한다.
제7조 일본국 정부는 성의로써 충실하게 신제도를 하는 한국인으로써 상당한 자격을 가진 자를 사정이 허락하는 한 한국에서의 일본제국 관리로 등용한다.
제8조 본 조약은 일본국 황제폐하 및 한국 황제폐하의 재가를 받은 것으로서 공포일로부터 시행한다. |
중명전을 역사교육 현장으로
서울시가 을사조약 체결장소인 중명전(중구 정동 소재)을 매입해 보존하기로 한 계획을 철회해 문화계와 학술계의 비판이 잇따르고 있다. 중명전은 1900년 건축돼 경운궁(덕수궁)의 부속 연회장으로 활용된 2층 벽돌건물로,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53호로 지정돼 있으며 소유권은 사기업체가 갖고 있다. 서울시는 그동안 중명전을 사들여 역사자료관 등으로 활용하는 방안을 추진해왔으나, 지난 11월 13일 ‘투자가치가 없다’는 판단 아래 매입계획을 전면 취소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서울시가 올해 중명전 매입비용으로 책정해놓은 예산 50억원도 집행되지 않은 채 소멸하게 됐다. 서울시의 이같은 방침에 대해 문화계의 여론은 매우 부정적인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기왕에 책정된 문화재 보존 예산을 투자가치라는 상업적 잣대로 백지화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며 ‘중명전은 초기 서양식 건물의 하나로 건축사적인 의미가 있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된 장소로서 치욕의 역사를 잊지 않기 위해서라도 보존과 활용대책이 시급히 세워져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중명전은 국치의 현장으로서 박제순, 이지용, 이근택, 이완용, 권중현 등 을사오적을 비롯, 나라를 팔아먹고 민족을 배신한 친일파들의 죄상과 행적을 영구히 전시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 라고 지적하고 ‘훼손이 심각한 상태이므로 매입해 보수한 뒤 친일역사자료관으로 활용해 후세에게 교훈이 될 수 있게 하는 것이 최선의 방안’이라고 견해를 밝혔다.
또한 전문가들은 한결같이 중명전이 있는 덕수궁 일대는 성공회 정동교회, 러시아 공사관 터, 정동극장, 시립미술관, 경교장, 조흥금융박물관 등이 밀집돼 있어 주변의 경희궁, 서울역사박물관, 농업박물관 등과 연계하여 역사문화벨트로 개발하면 훌륭한 교육 관광자원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한편 연구소는 내셔널트러스트운동과 덕수궁 보존운동 등에 참여하고 있는 단체들과 협력해 한국근대사의 현장인 중명전을 보존한다는 방침을 정하고 구체적인 계획을 준비하고 있다.(2002.11.30. 민족문제연구소)
* 중명전 건물은 이후 정동극장이 매입하였으며 현재 전면적인 보수공사가 예정되어 있습니다.
국치일을 기억하자! |
8월은 광복절의 달이자 국치절이 든 달이다. 그럼에도 언젠가부터 국치일은 기억하지 않는다. 아니 국치일이란 말 자체를 아예 모르는 사람도 적지 않다. 1910년 8월29일, 우리나라가 일본에 망한 날이라고 하면 ‘아 한-일 합방’ 하고 시큰둥하게 응수하곤 한다. 나는 이 말에 또 부아가 치민다. ‘한-일 합방’처럼 우스운 말은 없다. 한국과 일본이 나라를 합쳤다 마치 한국이 일본과 자발적으로 나라를 합한 양 위장된 이 용어는 이중으로 진실을 왜곡한다. 일본식 민주주의자들이 그 당시에 흔히 썼던, 아니 요즘도 일본에서 심심찮게 사용되는 ‘일-한 합방’이 오히려 진실에 더 가깝다. 일본이 주체가 되어 한국을 삼킨 것이니까. 이 말을 해방 후 ‘한-일 합방’으로 바꿨으니 정말로 가관인 ‘민족주의’다. 정명(正名:이름을 바루는 것)이 정치의 근본이라는 유가적 사유를 빌리지 않더라도, 허울뿐인 대한제국이 일본제국에 의해 종언을 고하고 식민지로 전락한 이 사건을 국치로 부르느냐, 한-일 합방으로 부르느냐, 이 호명 사이에 우리 사회의 정치적 선택이 가로놓여 있다.
내 어린 시절에는 분명히 달력에 국치일이 날짜 밑에 붉은색으로 표시되어 있었던 걸 기억한다. 공휴일이 아니기 때문에 덜 인상적이었지만 그래도 어렴풋하게 ‘우리가 나라를 일본에 빼앗긴 날이로구나’ 하는 일말의 감상을 상기시키곤 하였다. 비록 친일파를 권력의 기반으로 삼았음에도 강한 반일을 견지했던 이승만 시대의 미묘한 타협 흔적이다. 달력에서나마 희미하게 존재하던 국치일은 언제 완전히 지워졌을까 아마도 박정희 시대, 특히 1965년 한-일 협정이 비준된 이후 한-일 유착이 강화되면서 그리된 것이 아닐까 싶다. 일본 자민당 정권과 강한 고리를 맺은 친일파 장군 박정희의 개발독재 몰이 속에 국치일은 바람결에 날아갔다. 독립운동가들은 고단한 망명지에서 매년 8월29일, 국치일 기념식을 거행하곤 했다. 좋은 일만 기념하는 것이 아니다. 그이들은 나쁜 일을 기념함으로써, 그 나쁨이 다시는 반복되지 않도록 집단적으로 다짐했던 것이다.
내가 국치일을 그 이름의 회복과 함께 기억하자고 제안하는 것은 새삼 일본에 대해 단순한 증오를 재생산하자는 것이 물론 아니다. 억압당하는 자의 고통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억압하는 자도 그 속에서 왜곡된다. 한반도를 침략함으로써 한반도 분단의 원인제공자로 된 일본의 조숙한 군국주의는 결국 자신에게도 파멸적 영향을 주어 경제대국으로 올라선 지금도 일본이 여전히 미국의 눈치꾸러기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는 것을 보면 한편으로 딱한 생각도 든다. 가해자와 피해자를 함께 고통에 몰아넣은 그 악령의 과거로부터 해방되어 한반도와 일본이 화해와 협력의 새 시대로 손잡고 나아가는 출구는 어디에 있을까 일제교육을 받은 세대에서 나는 묘한 이중성을 목견하곤 한다. 입으로는 반일이로되 몸으로는 반일이 아니다. 반일과 친일이 매개 없이 결합한 이 콤플렉스의 전승 속에서 우리 사회의 기이한 반일감정이 둥지를 틀면서 일본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를 차단해 왔던 것이다. 대국의 리더십을 행사하지 못하는 일본을 탓하기 전에 피해자인 우리가 먼저 풀자.
국치일의 기억은 궁극은 우리를 위해서다. 왜 우리는 20세기 초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했는지 냉정하게 자기를 점검해야 한다. 자기 비판력이야말로 문명사회의 잣대다. 이 능력의 결여 또는 부족은 한 사회의 미성숙 또는 쇠락의 징후다. 요즘 우리 사회는 온통 남 탓이다. 여당은 야당에, 야당은 여당에, 정부는 언론에, 언론은 정부에, 시민은 국가에, 국가는 시민에 탓을 돌리느라 소란스럽기 짝이 없다. 할 일 많은 나라에서 언제까지 탓만 할 것인지. 이래서야 어찌 자기 비판력의 심각한 결여를 보여주는 조지 부시 미국 정권을 비판할 수 있을 것인가 국치절과 광복절을 함께 맞는 8월에 나라를 잃었던 고통과 나라를 찾은 환희를 반추하며 새나라 건설의 공동의제를 구축하는 데 중지를 정성스럽게 모을 때가 아닐 수 없다.
<한겨레 2003년 12월 12일치 최원식 칼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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