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카이브 시집 ‘살았으니, 말해야 해요’ 내달 초 출간
한베평화재단이 수집한 사진과 증언, 시로 재탄생
4·3처럼 마을 합동제사 다룬 시 절절해서 더 아파
가해의 역사 성찰없이 사과·화해 가능한지 되물어
“우리는 아직 빈안(平安)에 도착하지 못하였다/ 우리는 아직 빈호아(平和)에 도착하지 못하였다/ 우리는 아직 호아지아이(和解)에 도착하지 못하였다// (…)// 60여년이 흘러/ 총탄에 바수어진 뼈가 녹아내려/ 흙의 일부가 되어 스러질 때까지/ 그들의 혼백은 가해자의 사과를 받아본 적 없다”(도종환, ‘빈안으로 가는 길’)
“‘미안해요 베트남’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입니다/ 우리는 함께 빈안으로 나아갑니다/(…)/ ‘용서를 빕니다! 백 번이고 천 번이고 용서를 빕니다!’/ 오늘의 세상에도 이 말들은 필요합니다/ 폭격이 쏟아지고 흐르는 피 멈추지 않을 때”(탄타오, ‘우리는 함께 빈안으로 나아갑니다’)

한국 시인이 가해국의 사과 부재를 안타까워하자 베트남 시인은 한국 시민들이 사과하고 용서를 구해 온 노력을 높이 평가한다. 도종환 시인과 베트남 시인 탄타오(타인타오)가 한시의 창화(唱和) 형식을 좇아 주고받은 이 시들은 시집 ‘살았으니, 말해야 해요’(사회평론)의 맨 앞에 실려 책의 기조를 알려준다. 다음달 초에 나오는 이 책은 ‘한베평화재단’(이사장 강우일 주교, 이하 재단)이 수집하고 정리한 자료들을 활용한 아카이브 시집이다. 한여진·송경동·김현아 등 시인 9명이 재단이 제공한 사진과 증언 등 자료를 바탕으로 시를 창작했다. 여기에다가 김명인·송기원·김태수 등 베트남전쟁에 참전했거나 베트남 기행을 다녀온 시인들의 기존 작품 가운데 16편을 추려 실었고, 재단의 워크숍을 거쳐 나온 ‘블랙아웃 포에트리’ ‘파운드 포에트리’ ‘비주얼 포에트리’ 같은 실험적인 작업도 덧붙였다.

2016년 9월19일 창립총회를 열고 공식 출범한 재단은 “베트남전쟁 당시 한국군의 전시폭력 문제의 해결을 위해 노력하는 한편 베트남 피해자들에 대한 지원을 넓혀가고 아울러 한국 참전 군인의 고통도 끌어안겠”다는 취지를 내세웠다. 1999년 5월 ‘한겨레21’의 보도로 한국군의 베트남 민간인 학살 사실이 처음 알려지면서 시작된 ‘미안해요 베트남’ 운동을 계승한다고도 밝혔다.
‘여는 시’를 쓴 도종환 시인은 자신이 속한 충북민예총과 함께 2004년부터 베트남 푸옌성과 문화예술 교류를 이어 오며 학교와 도서관 건립을 지원하고 있다. 지난 7일 서울 마포구 한겨레신문사에서 만난 그는 “탄타오 시인의 시처럼 우리가 함께 화해와 용서와 평안의 내일로 갈 수 있도록 노력하자는 게 이번 시집 출간의 가장 큰 뜻일 것”이라고 말했다.
용서와 화해를 말하기 위해서는 사실을 직시하는 데에서 출발해야 한다. 시집은 3부로 이루어졌는데, 1부에 실린 기존 시들에서는 특히 베트남전 참전 당사자들이 겪은 혼란과 당혹감이 두드러진다.
“나의 심장을 향해 총을 겨누고 상처를 입힌 것은/ 얼굴이 누렇고 키가 작은 아시아인, 그러나/ 나는 아직도 알 수가 없다./ 그들이 어떻게 해서 나에게 적이 되는지,”(송기원, ‘월남에의 기억·1’)
한국 청년과 베트남 청년이 왜 서로를 향해 총구를 겨누어야 하는지 당시의 파월 장병들은 알기 어려웠다. 1975년 전쟁이 끝났고, 사회주의 나라들의 개혁·개방 흐름 속에 1992년 한국과 베트남은 외교관계를 맺었다. 1994년 소설가 김남일은 베트남을 처음 여행하고 와서 동료 문인들을 규합해 ‘베트남을 이해하려는 젊은 작가들의 모임’을 만들었다. 작가들은 틈날 때마다 베트남으로 걸음을 놓으며 그 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공부했고 문인들과 교류를 텄다. 지난 7일 도종환 시인과 함께 한겨레신문사에서 만난 그는 이렇게 말했다.
“한베평화재단이 창립되기까지는 문인들 사이의 교류도 역할을 했다고 봅니다. 저희가 베트남 여행 중에 월맹군 출신 작가 바오닌의 소설 ‘전쟁의 슬픔’ 영역본을 노점에서 발견해 읽고 큰 충격을 받았고, 그 작품이 한국어로 번역 출간되면서 이후 여러 베트남 작가들의 작품이 한국에 소개되는 물꼬를 텄죠. 이번 시집을 통해 한국인들이 여행지로서의 베트남을 넘어 한국과 베트남 관계에 대해 좀 더 생각해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재단 상임이사인 구수정은 ‘한겨레21’ 통신원이던 1999년 한국군에 의한 베트남 민간인 학살을 처음으로 보도했고, 그에 불만을 품은 참전 군인 등 2천여명이 2000년 6월27일 한겨레신문사에 몰려와 윤전기와 사무 집기, 차량 등을 파손하고 방화를 시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단순히 학살을 폭로하고 고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역사적 진실을 확인하고 한국 사회가 가해의 역사를 성찰하며 그 바탕 위에서 사과와 화해, 협력의 길을 모색하자는 것이 보도의 취지였다. 그 취지는 이번 시집으로도 고스란히 이어진다.
2부에 참여한 시인들이 보기에 베트남 민간인 학살은 일제의 한반도 침탈과 제주 4·3, 광주 5·18 같은 아픈 역사와 맥락을 같이한다. “한국은 일본 제국주의에 사과와 배상을 요구하는 것처럼/ 제주의 원혼들을 발굴하고 추념하듯/ 뇨 할아버지의 방공호에서 죽어 간 베트남 인민들에게/ 위로와 사과와 배상의 뜻을 전할 수는 없을까”(송경동, ‘만약 우리가, 우리가 아는 우리가 아니었다면’)라는 대목을 보라. “잎사귀 모자를 쓰고 당신이 왔다/ (…)/ 알뜨르 벌판 구덩이마다 켜켜이 쌓인/ 시신들을 일으켜 세우며 왔다 걸음걸음 핏물 배어 나오는 붕대,/ 다음 생을 업고 왔다 금남로의 젖가슴들을 꿰매며 왔다”(김해자, ‘이제야 응우옌티탄에게’)도 마찬가지. 김해자 시인의 시는 1968년 2월12일 한국군이 74명의 민간인을 학살한 퐁니·퐁녓 마을 사건 중 “가슴이 잘린 채 살아 있는 여자”라는 설명과 함께 미군 조사보고서에 담긴 희생자의 사진을 소재로 삼았다.

참혹하기는 김용택 시인에게 주어진 자료도 못지않았다. 태어난 지 불과 한달 만에 한국군의 공격을 받고 결국 숨진 아기의 사진을 접한 그는 “저더러/ 이런 시를 쓰라고 하지 마세요/ 시인이 어떻게 그런 일을 시로 써요” (김용택, ‘이런 시를 쓰게 하다니요?’)라며 언어도단의 참상에 전율한다. 시를 쓸 수 없다는 시인의 고백과 “살았으니, 말해야 해요”라는 피해 생존자의 증언은 사실 같은 말을 하는 셈이다. 2020년 대한민국을 상대로 국가배상소송을 제기해 1·2심에서 모두 승소한 피해 생존자의 법정 진술을 소재 삼은 허영선 시인의 시에서 책의 제목이 왔다.
“‘살았으니, 말해야 해요’/ (…)/ 어째서 그날, 당신들은 쏘았던가요// 재판장님/ 저는 진실을 말했습니다/ 할 말을 다 했어요// 여기, 이 진술은 살았으니/ 산 자가 할 일입니다”(허영선, ‘응우옌티탄’)
시인들은 이 밖에도 희생자의 신분증, 희생자의 남편이 그린 아내의 초상화, 피해자 1004명을 추모하는 붉은 비석과 모자이크 벽화 등의 자료를 시로 옮겼다. 이 가운데 베트남의 음력설(뗏)을 맞아 여섯살짜리 희생자를 기린 한여진의 시와 마을 주민들이 합동으로 올리는 제사를 다룬 허은실의 시는 특히 절절해서 아프다.
“너는 어디에도 없다/ 우리의 마당은 완전하지 못하고// 너는 무엇이든 될 수 있었던 사람/ 그리하여 너는 모든이었던 사람”(한여진, ‘뗏’)
“어떤 이름은/ 가장 짧은 유언이란다/ 간절해서 간결한// (…)// 이름을 부르는 건/ 없는 몸을 어루만지는 일이야/ 미처 지어주지 못한 획까지/ 더운 입술로”(허은실, ‘따이한 제사’)

책의 제3부에 실린 작업들은 독특한 문학적 실험으로 눈길을 끈다. ‘블랙아웃 포에트리’란 기존 텍스트의 상당 부분을 지우거나 가리고 남은 단어와 문장을 연결해 새로운 의미를 만드는 방식. 한국군 전시 성폭력 피해 생존 자매의 증언을 소재로 삼은 랑(기후활동가이자 비정규직 창작노동자)의 작업은 소녀의 뒷모습 그림과 함께 이런 비명 같은 문장으로 다시 태어났다. “불안한 눈동자/ 우리는 무서워서 그대로 굳어버렸어요/ 살아서/ 울지 못했어요”. 베트남 작가 반레의 소설 ‘그대 아직 살아 있다면’을 번역한 하재홍은 소설 주인공 빈의 목소리를 중심으로 문장을 발굴해 ‘파운드 포에트리’(기존 텍스트에서 단어나 문장을 발췌하거나 재구성해 새로운 의미를 만드는 시 형식)로 선보였다. 평화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시민들이 남긴 답변을 모아 악수하는 모양으로 형상화한 ‘비주얼 포에트리’로 시집은 마무리되는데, 역시 지난 7일 한겨레신문사를 찾은 문학평론가 고영직은 ‘연루됨의 윤리’라는 말로 그 의미를 헤아렸다.
“이번 시집은 베트남전쟁 민간인 학살 문제에 관한 한 한국인 누구나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알게 합니다. 무언가 다른 미래, 다른 시간을 생각하자면 기존과는 다른 이야기가 필요한데, 워크숍을 거쳐 창작된 작품들은 그런 다른 미래와 다른 이야기를 만드는 데 기여할 것으로 보입니다.”

한편 재단은 한국군 청룡부대에 의해 베트남 민간인 430명이 희생된 빈호아 학살 60주년을 맞아 오는 11월30일~12월4일 60인 시민평화기행을 마련한다. 도종환 시인과 탄타오 시인이 참여하는 시낭송회와 위령비 참배, 피해 생존자와의 만남 등의 순서가 이어진다. 구수정 상임이사는 지난 7일 한겨레와 만나 시집 출간 배경과 기대를 이렇게 설명했다.
“20년 남짓 쌓여 온 베트남전쟁 관련 자료를 시민들과 만나게 하고 싶다는 생각에서 시집을 기획했어요. 저는 문학 장르 중에서 운동성과 가장 가까운 게 시라고 생각하거든요. 지금 시집 출간 응원 모금을 진행 중인데 다행히 반응이 좋습니다.(베트남전쟁 아카이브 시집 ‘살았으니, 말해야 해요’ ) 책을 만들면서 저도 여러번 울컥했는데, 독자들도 비슷한 반응이더군요. 시들이 알아서 시민들에게 말을 걸겠구나 하는 믿음이 생겼어요. 내년에는 소설가들과 함께 피해자 아카이브를 활용한 논픽션 산문집도 낼 생각입니다.”
최재봉 기자
<2026-08-29>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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