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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매일] 최부잣집 곳간에 간직된 ‘국채보상운동’ 이끈 생생한 증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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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신돌석과 국채보상운동

명성황후 왕릉 축조 참여하게 된 최현식
아들 최준이 약관 20세에 만석 살림 맡아
대소사 두서있게 처리하며 가주노릇 톡톡

교촌마을서 머물던 ‘항일 의병장’ 신돌석’
최부잣집에도 남다른 괴력 전설 남기기도

1907년 3월 경주로 전파된 국채보상운동
최현식·경주향교가 앞장서 의연금 모아
2018년 여름 발견된 고문서 2만여 점엔
광고문·명단·기록 장부 등 총 33점 포함

남천(南川) 전경. 바로 옆에 교촌마을이 보인다.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 문천(蚊川)과 사천(沙川)으로 자주 등장하는 시내다. 신돌석이 홀로 최부잣집 목재 뗏목을 건져냈다는 전설이 있다. /이용선기자

아버지 최현식이 아들 최준에게 가사 일체를 맡긴 때는 언제일까.

‘교동의 얼’은 1904년경부터라고 했다. “(최준은) 약관 20세에 큰살림을 맡아 대소사 모두를 두서 있고 조리 있게 잘 처리하였다.” 한데 1910년 이후라고도 했다. “선친(최현식)께서는 나라를 일본에게 빼앗긴 경술(1910년) 후부터는 세상사를 싫어하고 가사 일체를 모두 공(최준)에게 맡겼다.”

최준은 1904년엔 20세였고, 1910년엔 26세였다.

필자의 견해로는 최준이 가사일체를 맡은 것은 더 일찍인 듯하다. 이러지 않았을까.

1895년, 어처구니없는 참변이 벌어졌다. 일본 정부가 경복궁 건청궁에 자객을 침투시켜 조선의 국모(명성황후)를 시해한 뒤 불태웠다. 전대미문의 만행이었다. 이른바 을미사변(乙未事變)이다.

1901년, 최현식은 명성황후(明成皇后·1851~1895) 왕릉 축조에 참여하라는 명을 받았다. 경릉 참봉 재직 때 보여주었던 뛰어난 실무 능력 때문이었다. 명성황후의 홍릉(洪陵) 위치는 경기도 남양주였다. 아직 기차가 없던 시절이었다. 많은 사람이 염려했다. “만석꾼 살림을 어찌하고 그 멀리 떠난단 말입니까? 마음만 먹으면 아니 갈 수도 있잖습니까?”

최현식은 주저 없이 황명을 받들었다. “황제께서 쓸모가 있다 하여 부르시는데, 내 어찌 딴 속셈을 갖겠는가.” 집안일은 최준에게 맡겼다. “열일곱이 뭣이 적으냐. 네가 다 알아서 처리하여라. 번거롭게 사람을 오고 가게 하여 물을 것 없다.”

그렇게 일찌감치 최준은 가주 노릇을 했다.

최현식은 산릉감조(山陵監造) 소임을 맡아 현장 감독관으로서 책임을 다하고 돌아왔다.

최준이 가주 노릇을 반납하려 했다.

최현식은 호탕하게 말했다. “아니다. 네가 계속 하여라. 내가 귀담아 들은 바도 있고, 와서 보니 다 알겠노라. 네가 나보다 못한 게 없다. 겸양하지 말고 계속 네가 가문을 관장하여라.”

1903년, 최준은 또 하나의 전설적인 인물을 만난다. 평민 의병장으로 이름이 높던 신돌석(申乭石·1878~1908)이다.

신돌석은 1895년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에 분노하여, 1896년 19세의 나이로 경북 영덕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당시 을미의병장들은 양반 일색이었다. 평민 신돌석은 주도적인 싸움을 벌일 수 없었다. 의병대를 해산하고 말았지만, 그의 명성은 널리 퍼졌다.

신돌석의 항일 의병 투쟁 행적을 기록한 유일한 사료가 있다. ‘신돌석장군실기(申乭石將軍實記)’. 신돌석 장군의 애국적 발언, 유격전의 전말, 그리고 비극적인 순국 과정 등을 담고 있다. 누가 언제 썼는지는 알 수 없다. 과한 표현이 숱하여 실록보다는 소설 같다.

신돌석이 피신 생활 중에 남긴 통쾌한 전설 같은 이야기가 꽤 들어 있다.

하나, 경북 청도 경부선 철도공사장을 지나던 중이었다. 일본인 관원이 못 가게 금지하고 포착코자 했다. 전신주를 뽑아 일본인 수 명을 타살하였다.

둘, 울산 송정 박상진 집에 투숙하던 때였다. 일본병참소(日本兵站所) 왜병 10여 명이 알고 습격해왔다. 도망하던 신돌석에게 부딪친 담장이 무너져 왜병 7, 8명이 몰사했다.

셋, 부산에서 배를 수리하는 일본인을 죽이고 배를 뒤집어 버렸다.

최윤고택(요석궁)은 신돌석 장군이 홀로 건져낸 목재로 지었다고 전해지는 최준의 첫째 동생 최윤의 집이었다. 요석궁의 정문. /이용선기자
요석궁 항공 사진. /이용선기자

그리고 경주의 최부잣집에 머문 이야기가 있다. 신돌석은 최부잣집에도 두 가지 흥미로운 전설을 남겨놓았다.

첫 번째, 최준의 동생 최윤의 집을 지을 때 얘기다. 목재를 경주 내남면 박달리에서 벌채하여 뗏목으로 엮어 운송해왔다. 남천까지 이동해온 목재들을 강둑에 올리는 게 큰일이었다. 최부잣집 일꾼 여러 명이 붙어도 실패한 아주 큰 목재들이 있었다. 그것을 신돌석 혼자서 끌어 올렸다. 그 목재로 지은 집이 현재의 교촌마을의 요석궁이다. 요석궁 상량문을 통해 신돌석 장군이 머물렀던 시기를 알 수 있다.

두 번째, 힘세지만 비겁한 장정이 신돌석이 딴생각할 때 갑자기 밀쳤다. 신돌석은 밀려 넘어지면서도 상대 소매를 붙잡으며 중심을 되찾았다. 되치기로 장정을 집어던져 버렸는데 그 장정의 발은 부러진 것도 모자라 뒤로 돌아가 버렸다. 최준과 신돌석이 만났다는 기록이나 증거는 없다. 하지만 최준의 보살핌 없이는 교촌마을에 머무를 수 없었다. 평민 출신 의병장도 마음 놓고 체류할 수 있던 최부잣집이었다. 대한제국의 관헌과 일제 헌병도 최부잣집 문턱만큼은 감히 넘어서지 못했다.

일제의 노골적인 침략은 무한질주 같았다. 1905년 11월17일,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체결되었다. 일본이 대한제국에 총칼로 강요한 조약이다. 한마디로 외교권을 빼앗겼다. 옛날에는 을사보호조약이 대중적인 표현이었다.

최준이 소년기 때 자주 뵈었던 최익현이 1906년 전북 태인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600명을 모았지만, 대한제국군과 전투를 회피했다. 같은 조선 민족과 싸울 수 없다는 이유였다. 일본군과 관군의 협공에 해산되었다. 최익현은 대마도로 끌려갔다가 순국했다.

또 괴력의 전설을 남기고 간 평민 장군 신돌석도 경북 영해에서 창의했다. 신돌석 부대는 달랐다. 태백산 일대를 중심으로 일본군을 괴롭혔다. 요즘 말로 게릴라전으로 이름을 떨쳤다.

최준은 의병전쟁을 지켜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가문의 대소사를 도맡은 최준의 마음은 들끓었다.

증거는 없지만, 최준이 두 의병장에게 군자금을 댔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의병을 일으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일단 무기와 식량이 필요하다. 최익현과 신돌석은 최준과 남다른 인연이 있었다. 최준에게 얼마든지 군자금을 요청할 수 있었다. 훗날 상해임시정부의 운영자금 60퍼센트를 댄 최준이다. 그가 두 의병장에게 재물을 아꼈을 리가 없다.

국채보상운동 취지문. /‘경주최부잣집 이야기’(경주최부자민족정신선양회)
1907년 6월 작성한 경주군의 국채보상운동 의연금 납부자 성명성책(姓名成冊) 표지. / ‘경주최부잣집 이야기’(경주최부자민족정신선양회)
국채보상운동 광고문. / ‘경주최부잣집 이야기’(경주최부자민족정신선양회)
교촌마을 납부자 성명 나온 쪽. /‘경주최부잣집 이야기’(경주최부자민족정신선양회)

1907년 2월,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이 일어났다. 대구의 서상돈과 김광제가 중심이 되어 일으켰다. “담배를 끊어 그 돈으로 국채를 갚자!” 이런 취지서를 발표하며 운동을 시작했다. 당시 대한제국이 일본에 진 빚이 약 1300만원이었다고 한다. 일제는 외채를 빌미로 조선 경제를 예속하고 있었다.

조선 민중은 뭐라도 하고 싶었다. 의병들처럼 목숨을 걸고 싸우지는 못하더라도! 국채를 갚아 일제를 막아낼 수 있다고? 담배만 끊으면 된다고? 그건 우리도 할 수 있다.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각계각층이 담배를 끊는 사람들의 모임 단연회를 조직했다. 연초(담배)를 끊어 담뱃값을 기부했다.

그래서 그 많은 돈을 언제 모으나. 현금은 당연하고 패물, 비녀, 가락지 등 돈이 될 수 있는 것은 다 모았다. 학생과 어린이들도 성금을 모아 참여했다. 해외에 사는 한인들도 성금을 보내왔다.

당연히 이런 거국적인 구국운동에 경주 최부잣집이 앞장섰을 것이다. 하지만 증거가 없었다. 구체적인 물증은 2018년 8월 발견되었다.

선양회가 곳간을 대대적으로 정비하게 되었다. 곳간에는 여러 궤짝이 있었다. 겉은 열어봤어도 속까지 살펴보지는 않았던 궤짝이 많았다. 그중 한 궤짝 속에 2만여 점에 달하는 문서가 들어있었다.

조선후기의 서책, 문서는 물론이고 일제강점기 시절 문서(편지, 엽서, 명함, 서류 등등)도 잔뜩 나왔다. 아마도 1970년 대화재 당시 화재진압을 도우러 왔던 이들이 잡히는 대로 구하여 궤짝 속에 넣어둔 채 잊혔던 모양이다.

민족문제연구소와 선양회 등이 이 문서들을 최초로 대중에 공개한 것은 2019년 8월이다. 구전으로만 전해지던 최부잣집의 빛나는 전설들이 사료로 증명되기 시작했다.

햇빛을 다시 본 문서 중에, ‘단연전문기(斷煙錢文記)’가 있었다. 한두 장이 아니라 별도로 포장된 문서뭉치였다. 광고문, 통문, 편지, 명단, 호소문, 보고문, 운영규칙, 의연금 기록 장부 등등 총 33점이었다. 경주국채보상운동의 생생한 증거들이었다. 이 증거들을 통해 확증된 사실이 이러했다.

대구 지역에서 시작된 운동이 경주로 전파된 시점은 1907년 3월 초순이다.

최현식이 대구 운동가들로부터 연락을 받고 보낸 답신이다. 한문 번역문을 조금 다듬었다.

“국채보환단연맹회는 우리 동포 백성의 정성을 바치는 일이다. 회원이 모이는 자리에 요청을 기다리지 말고 참석해야 한다. 그러나 마침 오랜 병에 걸려 있고 몸을 마음대로 할 수 없다. 몹시 황송하다. 편지로 대신하고 아울러 작은 성의를 표하니 살펴봐주시기 바란다.”

최현식이 보낸 작은 성의는 100원이었다. 1908년 당시 100원은 지금의 1억원 가치로 추정된다. 경주 지역의 다른 독지가들도 금방 동의했다. 경주 독지가들은 경주국채보상운동 취지서를 작성했다. 의연금을 조직적으로 모아내기 위해 단연회사를 결성했다. 모금을 독려하는 광고문을 배포했다. 하지만 모금은 지지부진했다.

이에 경주향교의 유림세력이 앞장섰다. 4월에 향교연성회사를 설립한 것이다. 7월에 상당한 금액을 모아냈다. 성금자의 명단을 기록한 책이 3권으로 작성되었을 정도였다. 오늘날처럼 계좌로 송금하면 되는 시대가 아니었다. 현금과 패물을 서울에 설치된 중앙본부로 수송해야만 했다. 한데 일진회(친일 단체)가 전국에 걸쳐 의연금 운반을 방해했다. 경주에서도 일진회의 방해공작으로 수송을 보류했다.

그래서 이번엔 의연금을 무사히 서울로 수송하기 위한 경비를 모았다. 경주 소재 66개 문중이 708냥을 모금했다. 무사히 전달되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김종광 작가

<2026-08-19> 경제매일

☞기사원문: 최부잣집 곳간에 간직된 ‘국채보상운동’ 이끈 생생한 증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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