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음반이 담은 시대의 여운, 한국 근현대사 50장면 50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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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과 가요]

음반이 담은 시대의 여운,
한국 근현대사 50장면 50곡

이준희 대중음악연구자

3. 안창남 고국 방문 비행과 <이팔청춘가>

근대를 실감케 했던 새로운 문물들 가운데 실로 경이로웠던 것이 비행기다. 사람이 하늘에서 자유로이 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비행기의 우렁찬 굉음은, 종래의 통념을 깨뜨리고 새로운 세상이 왔음을 알려 주는 신호이기도 했다. 1903년 이래 신문기사로만 접하며 많은 이들이 그 실체를 궁금해했던 비행기는, 1913년 4월 3일 드디어 그 모습을 조선 하늘에 처음 드러냈다.

4월 3일 오전 11시 반쯤, 6만 관중이 운집한 경성 용산 연병장에서 조선 초유의 비행은 시작되었다. 일본 항공의 선구자로 꼽히는 나라하라 산지(奈良原三次)가 제작한 비행기를 조종한 이는 일본인 비행사 시라토 에이노스케(白戶榮之助)였다. 오늘날 화려한 에어쇼에 비하면 소박하기 그지없는 간단한 비행이었지만, 기계를 움직여 사람이 하늘을 나는 모습을 실제로 접한 이들은 그만으로도 찬탄을 금할 수 없었다.

그런 감동을 표현하고 싶었던 것인지, 이틀 뒤 4월 5일자 『매일신보』에는 ‘서봉산인(瑞峰山人)’이라는 이가 쓴 <비행기> 노랫말이 다음과 같이 실리기도 했다. 가사 형식으로 보아 시조창을 염두에 두고 지은 것이라 보이는데, 시조를 노래로 부를 때에는 대개 종장(終章) 마지막 음보 세 글자를 생략한다.

님 계신 곳 가 볼 마음 주야로 간절하나 / 산 높고 물 깊어서 하릴없이 단념터니
지금에 비행기 온다니 그것을 타고

조선 하늘에 비행기가 처음 나는 광경을 지켜보았던 많은 관중 속에는 어쩌면 열두 살 소년 안창남(安昌男)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훗날 조선에서 가장 유명한 비행사가 된 안창남은 어린 시절 보았던 외국인의 비행 모습에 큰 영향을 받았다고 했는데, 1917년 9월에 역시 용산 연병장에서 열린 미국 비행사 아트 스미스(Art Smith)의 비행 공연을 보았을 것이라고 알려져 있기도 하다. 하지만 ‘열한 살’ 때 비행을 처음 목격하고 “그까짓 것을 우리 조선 사람도 배우면 하지.”라고 장담했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안창남이 하늘을 날고 싶은 꿈을 갖게 된 계기는 아무래도 1913년 시라토의 비행이었던 듯하다.

안창남의 활약과 노래 가사를 소개한 『매일신보』 1936년 1월 5일자 기사

9년 뒤 1922년, 이제 청년이 된 안창남은 일본에서 비행학교를 졸업한 뒤 실제로 비행사가 되었고, 역사적인 고국 방문 비행의 주인공이 되어 전국적으로 큰 화제를 모았다. 앞서 보았듯 안창남이 조선 하늘을 처음 날지는 않았고, 비행사가 된 첫 조선인도 아니었지만, 조선인 비행사가 직접 비행기를 몰아 조선 하늘에서 날기는 확실히 그가 처음이었다.

1922년 12월 10일 오후 12시 25분, 연료가 얼 정도의 추위와 제법 세찬 바람을 무릅쓰고 안창남이 조종하는 비행기 금강호(金剛號)는 여의도 비행장 활주로를 달려 하늘로 날아올랐다. 운집한 관중의 환호 속에 15분 동안 경성 상공을 누빈 안창남은 고국 방문 첫 비행을 무사히 마무리했다. 원래는 인천까지도 다녀올 계획이었으나, 날씨 문제로 연기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사실 금강호는 성능이 썩 좋은 비행기가 아니었으므로, 그로써 장거리 운항을 할 수는 없었다. 안창남이 고국 방문 비행을 준비하기 위해 일본에서 귀국한 때에도 금강호를 타고 오지는 않았고, 분해한 기체를 미리 인천까지 배편으로 나른 뒤 다시 여의도로 옮겨 비행장에서 재조립하는 과정을 거쳤다.

1919년 3‧1운동의 열기를 직접 보고 느낀 뒤 나도 뭔가를 해 봐야겠다는 생각으로 일본 유학을 결행한 안창남은, 몇 해 뒤 결국 조선 제일의 비행사가 되어 금의환향을 했으나, 이후 간단치 않은 풍파에 여러 차례 휘말리기도 했다. 1923년 9월 간토(關東)대지진 당시에는 도쿄(東京)에서 사망했다는 오보의 대상이 되었고, 실제로도 화재와 해일, 자경단의 위협 속에 죽을 고비를 겨우 넘겼다고 한다. 1924년 9월에는 일본에서 협박 편지를 받고 습격을 당하는 일도 있었는데, 중국으로 가서 일본에 적대적인 군벌 우페이푸(吳佩孚) 진영에 가담할 것이라는 풍문 때문이었다.

1929년에 발매된 <이팔청춘가> SP음반 가사지 사본.

사실 풍문이 그냥 풍문이기만 했던 것은 아니어서, 안창남은 몇 달 뒤 12월에 정말 중국으로 망명했다. 중국에서 역시 비행사로 활동하며 이국의 하늘을 누비는 한편, 일본이나 조선에서는 자유롭게 할 수 없었던 독립운동에도 참여했다. 1930년 4월에 추락 사고로 사망한 안창남에게 2001년 8월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된 이유는 그러한 그의 공적이 인정되었기 때문이다.

고국 방문 비행 이후 한 시대의 영웅으로 떠올랐던 안창남의 인기는 노래로 만들어져 불리기도 했다. 기존 민요 가락에 가사만 새로 얹은 안창남 노래는 사람들 회자 속에 자연스럽게 다듬어진, 그야말로 민중의 노래였다. 작가가 따로 없고 구전으로 유통되다 보니 가사에도 다양한 변형이 있었는데, 어떤 경우이든 ‘자전거왕’이라 불리며 먼저 스타덤에 올랐던 엄복동(嚴福童)과 안창남을 나란히 언급하는 형식이 기본이었다.

1920년대 중후반 최고의 유행가 중 하나로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듣고 불렀던 안창남 노래는 1929년에 음반에도 담겼다. 2월 첫 음반 공식 발매를 앞두고 콜럼비아(Columbia)레코드에서 제작한 견본 음반에 수록된 이일선(李日善)의 가야금병창 <이팔청춘가>로, 안창남 노래를 당대 녹음으로 들을 수 있는 유일한 자료다.

<이팔청춘가>
이일선 가야금병창, 1929년 콜럼비아 K1

오동동추야에 달이 동동 밝은데 / 님의 동동 생각이 저리 동동 나누나
오르며 내리며 잔기침 소리에 / 물 말아 놓은 밥이 쓸 데가 이오나
너는 누구며 나는 누군데 / 상산 땅에도 조자룡이로다
청천 하늘엔 잔별도 많구요 / 이내 가슴엔 수심도 많았네
이팔청춘의 소년 몸 되구요 / 문명의 학문을 닦아를 봅시다
치어다보느냐 안창남 비행기 / 굽어살피니 엄복동이로다

<이팔청춘가> 곡조에 맞춰 부른 <거북선타령> 가사를 소개한 『조선일보』 1929년 8월 21일자 광고.

<이팔청춘가>는 안창남 노래 외에 다른 가사의 곡조로 활용된 예도 확인되는데, 대표적인 작품이 이일선 음반 발매 반년쯤 뒤에 발표된 <거북선타령>이다. 서울고무공사에서 자사 제품 거북선표 고무신을 홍보할 목적으로 가사를 공모해 만든 광고 노래였다. <거북선타령> 가사가 실린 신문 광고에 ‘곡조는 오동동추야와 같음’이라는 표기가 보이므로 <이팔청춘가> 곡조에 맞춰 부르도록 했음을 알 수 있으며, 실제 불러 보아도 가사가 당연히 잘 맞는다.

4.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 결성과 <유랑의 노래>

1925년 8월 22일 경성 관수동 소재 변호사 이인(李仁)의 집에서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 즉 카프(KAPF)가 발족했다. 에스페란토어 ‘Korea Artista Proleta Federacio’의 약칭인 카프는, 1935년 5월 해산 때까지 식민지 조선의 문예 각 분야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카프 활동의 산물인 다양한 논쟁과 작품은 주로 문학 분야에서 나왔는데, 이는 박영희(朴英熙)를 비롯한 발기인이나 동맹 가입자 중 다수가 문인이었기 때문에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했다. 다른 예술 분야 활동에 대한 고려가 없지 않았으므로 문학부 외에 연극부‧영화부‧미술부와 함께 음악부가 산하 부서로 설치되기는 했으나, 음악부에는 마땅한 담당자가 배치되지 못했다.

조선과 달리 일본에서는 카프 도쿄(東京)지부 음악부에 소속 동맹원이 있었던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 1927년 10월 지부 창립 당시에는 가수 채규엽(蔡奎燁)이 음악부장을 맡았고, 1928년 1월에는 작곡가 이종태(李鍾泰)가 후임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들이 무산대중을 위한 음악을 만들고 부르는 활동을 당시에 구체적으로 했는지는 알 수 없다. 오히려 10여 년 뒤 두 사람이 일본제국의 승리를 위한 군국가요 제작에 참여했던 흔적은 뚜렷하다.

1930년에 유행가 가수가 되어 한동안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채규엽은 마치 카프 이념을 일부 반영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뜬 세상>(일명 <부세(浮世)>), <누가 그를 그렇게 했나> 같은 노래를 1932년에 발표했고, 자작곡 <뜬 세상>은 ‘치안방해’ 이유로 금지곡이 되기도 했다. 그 밖에도 1930년대 초중반에 채규엽이 발표한 곡 중에는 영화 주제가 <아리랑> 등 금지곡이 여럿 있었는데, 그가 여전히 카프와 소통하고 있었는지, 그로 인해 그가 부른 노래 중 유독 많은 금지곡이 나오게 된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카프와 연계가 분명한 노래는 그러므로 오히려 영화 쪽에서 찾을 수 있으니, 1928~31년에 제작된 몇몇 카프 관련 영화의 주제가들이다. 첫 번째 카프 영화로 꼽히는 <유랑>(1928년 4월 개봉) 이후 <혼가(昏街)>(1929년 1월 개봉), <암로(暗路)>(1929년 1월 개봉), <화륜(火輪)>(1931년 1월 개봉), <지하촌>(1931년 3월 촬영 완료 후 개봉 불발) 등이 만들어졌고, 그중 <유랑>과 <혼가>, <암로>에서 주제가가 확인된다. <혼가> 주제가는 노래책에만 실리고 음반에는 담기지 못했으나, <암로> 주제가는 배우 겸 가수 김연실(金蓮實)과 경서도소리 명창 이진홍(李眞紅)의 녹음으로 두 가지 음반이 발매되었다. <유랑>은 주제가만으로는 음반이 없지만, 노래가 삽입된 ‘영화설명’ <유랑> 음반이 1931년 9월에 콜럼비아(Columbia)레코드에서 나왔다.

<유랑의 노래>
김서정(金曙汀) 작사‧작곡, 이애리수(李愛利秀) 노래, 1931년 콜럼비아 40236

흘러가는 이 신세 물에 뜬 버들잎 / 흐르고 또 흘러서 어데로 가나
정든 고향 내 집이 차마 그리워 / 해 다 지고 저문 길 눈물에 아득하네
산을 넘고 물 건너 멀고 먼 나라 / 끝없이 흘러가는 가련한 신세
어느 곳을 간대도 정든 내 고향 / 어머님의 품이여 이 밤도 그리워라

<유랑>의 주제가인 <유랑의 노래>는 첫 번째 카프 영화 노래이기도 하고, 작자가 명확하게 확인된 유일한 카프 영화 주제가이기도 하다. 가사와 곡을 모두 쓴 김서정은 본명이 김영환(金永煥)이며, 노래 작가이기 이전에 무성영화 변사로 더 유명하고 인기가 있었던 인물이다. 단성사에서 <유랑>이 개봉하고 이틀이 지난 1928년 4월 3일에는 김영환이 라디오 방송으로 영화 내용을 해설하기도 했는데, DS관현단, 즉 단성사 악대가 함께 출연해 반주를 맡았다 하므로, 아마 그때 <유랑의 노래>도 경성방송국에서 연주되었을 것이라 짐작된다. 기록이 따로 남아 있지는 않으나, 극장 개봉 때 <유랑>을 해설했던 변사도 역시 김영환이었을 것이다.

데뷔작으로 영화 <유랑>의 연출을 맡은 김유영(金幽影)은 <혼가>와 <화륜>의 감독이기도 했던 카프 영화의 핵심 인물이다. 1932년 5월부터 해산까지 카프를 이끌었던 임화(林和)가 <유랑>과 <혼가>에는 배우로 출연하기도 했다. 여러 면으로 의미가 있고 흥미롭기도 한 영화 <유랑>이지만, 필름이 사라진 것은 물론이고 주제가 말고는 이렇다 할 만한 자료가 남은 것이 거의 없다.

<화륜> 이후 김유영은 한동안 영화를 떠나 연극에 관여하다가 1934년 8월 ‘신건설사(新建設社) 사건’, 이른바 제2차 카프 검거 사건으로 체포되었고,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 형이 확정된 1935년 12월까지 한 해 넘는 시간을 형무소에서 보내야 했다. 1940년 1월에 마지막 영화 <수선화>의 개봉을 보지 못하고 김유영이 병으로 세상을 떠난 뒤, 53년이 지난 1993년 8월에는 건국훈장 애족장이 그에게 추서되었다. 국가보훈부의 독립유공자 공적정보에는 예명 김유영 대신 본명 김영득(金榮得)으로 관련 내용이 등록되어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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