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도원 인혁당 사형수의 부인 배수자 선생님을 기리며

2012년 10월21일 나는 대구 2·28공원에 있었다. 그날은 4·9통일평화재단과 민족문제연구소가 공동으로 기획한 ‘유신 40년 전국순회 공동전시–유신과 인혁당’ 야외 전시 개막식이 열리는 날이었다. 그 자리에 인민혁명당(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사형당한 서도원 선생의 부인 배수자 선생님이 참석하였다. 그날 그는 1979년 남조선민족해방전선(남민전) 사건으로 공안기관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고 병치레를 한 뒤 처음으로 공개적인 행사에 참여한다고 말했다.

그는 1934년 6월19일 대구 중구 남산동에서 부친 배명학, 모친 김을선의 8남매 맏이로 출생했다. 그가 서도원과 결혼한 것은 남편의 인품에 반해버린 부친의 권유 때문이었다. 남편은 경남 창녕 출생으로 일제강점기 명문고였던 진주고보를 다녔던 인물이었다. 병마로 인해 졸업은 하지 못했지만 창녕 고향 땅에서는 ‘학고(학교)아재’로 불릴 정도로 상당한 지식을 갖춘 인재로 인정받고 있었다. 해방이 되고 대구로 건너온 서도원은 신문기자로 일하며, 청구대에서 ‘동양사’ 강의를 맡았다. 4·19혁명이 일어난 뒤에는 민주민족청년동맹 경북도맹 위원장으로 활약하다 5·16쿠데타가 일어나고 2년7개월을 복역했다. 이후에도 대구 지역의 혁신계 인사로 각종 시국사건에 연루되어 고초를 받았다. 당시 그와 함께했던 대구 지역 혁신계 인사들은 그를 ‘한국의 호 아저씨’라고 기억할 정도로 인품이 뛰어났다고 한다.
이승만 정권 치하에서 결혼한 그는 남편의 험난한 사회활동으로 인해 편안한 날이 없었다. 그러나 진짜 힘든 삶은 남편이 연행된 이후에 벌어졌다.
사형 직전 1975년 1월에는 남편의 구명운동을 했다고 남대구경찰서로 연행되어 2일간 조사를 받으며 ‘다시는 구명운동을 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강요받았고, 남편의 사망 이후 어느 지인을 통해 알게 된 남편의 진짜 유언을 종이에 적어 두었다가 경찰에게 들켜 경찰서에 끌려가 누가 알려줬냐며 강압적인 수사를 받아야 했다.

그렇게 남편을 잃은 슬픔에 하루하루를 보내던 중 남민전 사건이 터지고 난 후인 1979년 10월13일 자정께 형사들에 의해 또다시 어디론가 끌려갔다. 이번에는 남민전 깃발을 인혁당 사형수들의 내의로 만든 사실이 밝혀지면서 내의를 준 사형수들의 부인 신동숙(고 도예종), 김진생(고 송상진), 이영교(고 하재완)까지 모두 네명이 끌려갔다. 형사들은 “너희 남편 내의를 어떤 빨갱이들에게 주었느냐”며 손가락에 볼펜을 끼워서 비트는 고문을 가해 손등과 손가락이 무서울 정도로 부어올랐다. 몽둥이 구타는 예사였고 구둣발로 수시로 차는 등의 폭력으로 인해 나중에는 졸도까지 했다. 발바닥을 때리는 바람에 한동안 신발도 못 신고 다녔다.
박정희가 죽자 말없이 풀어주기에 이제 끝났나 싶었더니 한달 정도 지나자 서울에 가야 한다며 형사들이 다시 찾아왔다. 남민전 깃발에 들어간 내의 문제로 서울에 살던 사형수 부인들과 대질 신문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서울 형사들은 다른가 싶어 대구 형사들에게 당한 고문 이야기를 털어놓았더니, 서울 경찰들은 한술 더 떴다. 대구 형사들이 했던 고문을 그대로 되풀이하며 이렇게 대구에서 당한 것이 맞냐고 희롱까지 해 대며 고문을 했다. 이때의 이야기는 1987년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에서 회원들의 고문 증언을 모아 발간한 ‘나의 손발을 묶는다 해도’에 자세히 나와 있다.

이렇게 몇차례 공안기관에 끌려가 받은 고문으로 그의 몸은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1986년부터는 고혈압 및 신경쇠약 등의 심신쇠약 증세를 보여 외출은 전혀 못 하고, 한번 입원하면 1~2주씩 병원에 머물렀다. 결국 경북대 병원에서 ‘고문에 의한 외상 후 증후군’ 진단을 받았다.
20여년 동안 베일에 싸여 있던 그를 2011년 7월에 나는 처음 보았다. 4·9통일평화재단에서 인혁당 재건위 사건 사형수 8인의 유가족 구술사업을 위해 방문한 자리였다. 약 두시간 동안 진행된 그날 구술에서 그는 오로지 남민전에 얽힌 자신의 아픈 이야기만을 했다. 원래 생애사 구술이라는 것이 어린 시절부터 결혼 그리고 남편의 죽음 이후 삶을 이야기하는 것인데, 인터뷰 순서에 맞지 않게 남편과의 단란한 가족 이야기를 하다 말고 갑자기 남민전 이야기로 건너갔다. 그에게는 그것이 가장 아픈 이야기였던 것이다. 그날 인터뷰의 마지막 말은 “생전에 이렇게라도 당시의 아픔을 이야기하고 나니 속이 후련하오”였다.
그는 지난 6월25일 맑은 날 세상을 떠났다. 92살의 나이였다. 1934년생인 그가 1975년 남편이 죽기 전까지 41년은 그나마 아름다운 시절이었다. 그로부터 흐른 51년은 지옥과도 같은 시간이었다. 그는 죽는 날까지 병상 신세를 져야 했다. 그의 시신은 경기 이천 민주화운동기념공원에 먼저 묻혀 있던 남편과 합장되었다.
그는 2007년에 재심을 통해 평생 원하던 남편의 명예회복을 이루었지만, 죽은 남편은 가정으로 돌아오지 못했고, 그의 병마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가 세상을 떠나고 장례식장을 지키던 장남 동훈의 가슴 속에는 부친에 이은 모친의 이 억울한 죽음을 어찌해야 할지 막막함이 가득했다.
이창훈 4·9통일평화재단 사료실장, 사진 이창훈 실장 제공
<2026-07-15> 한겨레
☞기사원문: 생애 구술에서도 오로지 ‘남민전’ 이야기만 하셨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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