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기사

[오마이뉴스] 끝까지 추적한다… 재도전 나서는 친일재산 환수

44

[김종성의 히,스토리] 168명뿐이었던 친일재산 환수… 1기 위원회가 놓친 친일 재벌들의 막대한 재산

▲7일 국회에서 열린 5월 임시국회 제1차 본회의에서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의 국가귀속 등에 관한 특별법안(대안)이 가결되고 있다. ⓒ연합뉴스

친일재산 환수가 다시 시도된다.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를 부활시키는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의 국가귀속 등에 관한 특별법(친일재산귀속법)’이 지난 7일 국회를 통과했다. 시행일이 “공포 후 6개월”이므로 금년 말쯤에는 친일재산 환수의 시즌 2가 본격화할 수 있다.

2005년 12월 29일 제정된 최초의 친일재산귀속법에 근거한 제1기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는 노무현 정부 때인 2006년 7월에 설치됐다가 이명박 정부 때인 2010년에 활동을 종료했다. 제1기 위원회의 백서인 <친일재산 조사, 4년의 발자취>에 따르면, 위원회는 친일파 168명으로부터 총 2359필지의 부동산을 국가에 귀속시키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공적인 활동을 많이 했거나 고위 공직에 있었던 친일파들을 주로 수록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에 등록된 친일파는 4389명이다.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 시리즈에 수록된 친일반민족행위자는 1006명이다. 168명이라는 숫자가 너무 터무니없다는 점은 두 책에 등재된 친일파의 숫자로도 확인된다. 제1기 위원회의 성과는 친일청산을 이루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친일파 대부분은 신념보다는 이익을 좇은 사람들이다. 이들 대다수가 금전적 대가를 받고 부역행위를 했다는 점은 <친일인명사전>과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에 정리된 그들의 경력과 활동에서 잘 드러난다. 여기에 수록된 일반적인 친일파들은 금전적 대가가 수반되는 직책에서 친일행위를 하거나, 아니면 수당이나 원고료 혹은 사례비 등이 지급되는 행위를 매개로 친일을 범했다.

2005년 당시의 친일재산귀속법 제2조 제2호는 “일본제국주의에 협력한 대가로 취득하거나 이를 상속받은 재산 또는 친일재산임을 알면서 유증·증여를 받은 재산”을 친일반민족행위자의 재산으로 규정했다. 따라서 친일행위를 통해 획득한 월급이나 수당·원고료·사례비 등도 친일재산의 범주에 당연히 포함된다. 대부분의 친일파들이 이런 돈을 받았음이 확인되는데도, 168명으로부터만 재산 일부를 환수한 것은 친일문제의 현실과 동떨어진다.

정부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추적할 수 있는

제1기 위원회가 친일재산을 제대로 환수하지 못했다는 점은 대표적인 친일 재벌인 박흥식의 재산이 제외된 사실에서도 드러난다. 위의 168명 중에는 박흥식의 이름이 없다.

그의 재산이 일제강점기에만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그것은 해방 이후에도 남아 있었다. 그 재산은 대한민국 정부의 관할권 아래에도 있었다. 그래서 정부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추적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그것은 환수 대상이 되지 않았다.

1988년 5월 18일 자 <중앙일보>에 실린 ‘화신과 영욕 함께한 박흥식 씨 근황’이라는 특집기사는 “해방 이후 한때 반민특위에 구속됐지만, 화신백화점·화신산업·흥한방적 등을 중심으로 그는 여전히 재계의 선두 자리를 지켜나갔다”고 말한다.

이 기사는 해방 후에도 그가 큰 재산을 유지했다고 한 뒤 그의 부동산 실태를 언급한다. “화신백화점에서 안국동으로 이르는 대부분의 부동산이 그의 소유로 알려졌을 정도였다”고 말한다. 서울 종각역 3번 출구 근처의 ‘바르게 살자’라는 돌비석 밑에 화신백화점 터를 알려주는 표지석이 있다. 여기서부터 안국역 인근까지의 그 많은 부동산 대부분이 그의 소유였다는 것이다.

그가 그런 재산을 오로지 순수한 경영활동으로만 얻었던 것은 아니다. ‘친일 따로, 사업 따로’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의 이윤 축적은 제국주의 침략정책과 밀접히 관련됐다. 일본군에 비행기를 공급할 목적으로 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를 차렸을 정도다.

1946년 3월 20일 자 <조선일보> 기사 ‘박흥식 공판’에 따르면, 3월 19일 공판 때 재판장이 비행기회사를 설립한 동기를 묻자, 그는 “당시 조선총독부와 조선군 당국에서 징병제 실시에 대한 기념사업으로 전쟁 수행에 불가결인 비행기 제작회사를 만들 터이니 사장으로 취임하여 달라고 누차 권유”해서 부득이 취임했다고 답변했다.

남이 만든 회사에 고용 사장으로 들어간 것처럼 말했지만, 실상은 달랐다. <친일인명사전> 제2권 박흥식 편은 “1944년 2월 전투기를 제조할 목적으로 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의 설립위원장을 맡아 그해 8월 자본금 5000만 원으로 회사 설립인가를 받고 자금을 공모하여 10월 설립과 함께 사장에 취임했다”고 알려준다. 사장 취임 이전부터 설립위원장을 맡아 창립을 주도했던 것이다.

그는 자기가 만들 비행기가 “전쟁 수행에 불가결”임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것이 그의 법정 발언에서 나타났다. 이는 그가 제국주의와의 정경유착을 통해 거부를 축적했음을 증명한다. 그래서 그의 재산은 명확한 환수 대상이다. 그런 재산이 해방 뒤에도 상당했는데, 하나도 환수하지 않았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잘못된 역사 바로잡을 기회 남아 있다

일제강점기에 금광왕으로 불렸던 친일파 최창학의 재산도 해방 이후에 남아 있었다. 해방 뒤에 그가 독립운동가들과 제휴할 목적으로 벌인 것 중 하나는 백범 김구에게 경교장(죽첨장)이라는 부동산을 빌려준 일이다.

최창학은 백만장자도 아닌 천만장자로 불렸다. <친일인명사전> 제3권 최창학 편은 “1938년에는 자신 소유의 광산을 니혼광업주식회사에 650만 원에 팔아 일명 천만장자로 성장했다”고 말한다.

박흥식처럼 최창학도 자기 재산이 친일행위의 결과물임을 그 자신의 입으로 시인했다. 위 사전에 따르면, 1938년에 그는 “오늘날 약간의 돈을 모은 것도 국가의 원조”라며 국가에 대한 감사를 표시했다. 자신의 천만장자 재산을 ‘약간의 돈’으로 겸손하게 표현하면서 국가의 원조 덕에 이런 재산을 모았다고 사의를 표했던 것이다. 정경유착을 했음을 인정한 셈이다.

그는 1933년에 기관총 1정을 일제에 헌납했다. 1934년에는 기관총 2정 값을 현금으로 기부했다. 1935년에는 국방 경비용 화물차 3대를 헌납했다. 1937년에는 애국비행기 1대를 헌납했다. 이 외에 소방서·파출소·경찰서 신축비도 과감히 쾌척했다.

이 같은 기부행위를 언급하면서 나온 것이 “약간의 돈을 모은 것도 국가의 원조”였다는 발언이다. 그는 “국가를 위하는 운동에 이 돈을 쓰는 것은 대단치 않은 일”이라고 덧붙였다. 재산 형성이 일제의 한국 지배와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면 그렇게 많은 돈을 기부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재산 형성이 국가의 원조 덕분이라고 말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최창학은 그렇게 모은 재산을 해방 이후에도 유지했다. 8·15는 그의 재산 유지에 나쁜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 그래서 황해도 출신인 김구에게 서울 거처도 마련해줄 수 있었다.

1949년 8월 30일 자 <조선일보>는 광업계의 원로급 지도자 다섯 명 중에서 첫 번째로 최창학을 거론했다. 그의 재산이 상당하지 않았다면 재계에서 이런 대우를 받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가 1955년에 세상이 떠들썩할 정도의 세무조사를 받고 구속된 사실 역시 그의 재산이 해방 이후에도 상당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그런 그의 이름 역시 귀속대상자 명단에 들어가지 않았다. 이 정도 되는 사람들의 재산을 제대로 다루지 못했다는 것은 제1기 위원회가 충분히 일할 기회를 얻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일제의 지배는 사라지고 친일파들은 모두 죽었지만, 그들의 후손과 재산은 아직 남아 있다. 그래서 친일 문제는 과거가 아닌 현재의 문제다. 그들이 재산을 다 잃었다면 모르겠지만 후손들이 상당한 재산을 보유하고 있으므로,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을 기회는 아직 남아 있다. 제2기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가 이제 그 책무를 떠안게 됐다.

김종성 기자

<2026-05-11>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끝까지 추적한다… 재도전 나서는 친일재산 환수


NO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