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연구 80주년을 향해/너머] ③ 김동윤 / ‘해방기 제주 통일독립 항쟁’ 연구를 위하여
2028년이면 제주4.3은 80주년을 맞는다. 기나긴 야만의 시간을 지나, 특별법 제정과 희생자 보상까지 성사되는 등 많은 진전을 이뤄냈다. 그러나 그것에 안주해서는 안 된다는 의견에 힘이 실리고 있다. 지난 2월 5일부터 6일까지 열린 제주대학교 일반대학원 4.3융합전공 제5회 학술대회 ‘4.3연구, 80주년을 향해/너머’는 4.3 연구의 2기를 여는 자리로 평가받을 만큼, 유의미한 내용들이 공유됐다. [제주의소리]는 독자들과 함께 4.3 80주년 이후를 함께 고민하고자, 4.3융합전공과 함께 제5회 학술대회 기조발제문을 순차적으로 연재한다. [편집자 주]
4. 해방기 제주 항쟁의 의의와 4.3의 재구성
그렇다면 1948년 4월 3일의 무장봉기는 무의미하다는 것인가. 무의미한 것은 물론 아니지만, 상대적으로 그 의미는 축소될 수밖에 없고,41) 반면에 5.10단선을 분쇄했다는 통일독립 항쟁의 의미가 더욱 부각되어야 마땅하다는 것이다. 4.3 봉기는 그러한 일련의 흐름 속에서 제주 남로당이 나름의 사정에 따라 이행한 것임을 유념해야 한다.
오히려 이에 앞서 일제 말기의 상황에서 이어지는 해방기 제주도민의 상황, 특히 1947년 3.1절 기념식 집회로 폭발된 제주도민의 거대한 움직임을 충분히 고려해야 하며, 그것이 남북협상운동을 만나면서 5.10단선 반대 투쟁으로 꽃피었음을 분명히 인식하는 것이 올바른 역사인식이라는 판단이다.
3.1절 기념식으로 분출된 혼연일체의 열정과 더불어 제주도의 해방기 통일독립 항쟁에서 특히 두드러진 성과는 5.10단선 거부라고 할 수 있다. 단선 반대 열기가 여타 지역보다도 뜨거웠고,42) 결국 가시적인 결실을 이루어냈다는 것이다. 5.10단선에는 제주도의 총 유권자 중에서 42,234명이 등록하지 않았고,43) 선거인 중에서는 31,819명이 투표하지 않았다(표44) 참조). 총 유권자 127,751명 가운데 74,053명, 즉 제주도 유권자의 57%가 5.10단선에 참여하지 않은 셈이다. 특히 남한 200개 선거구 중 제주도의 2개 선거구만 무효화했음은 아주 중요한 사실이다.45)

제주도는 단선반대운동을 성공시킨 유일한 지역이다. 이는 전국적으로 전개된 남북협상운동의 가장 커다란 성과로 평가되어야 마땅하다. 바로 이 점이 ‘통일독립’을 내세운 해방기 제주 항쟁의 뚜렷한 의의라는 것이다. 이는 또한 “단순히 2개 선거구 파탄의 의미를 넘어 2차 세계대전 후 미국이 추구해 왔던 대한정책의 완벽한 실패를 보여주는 가장 상징적인 의미”46)를 지니는 것으로서, 제주도의 지역적인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세계사적인 의의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정리하자면, 해방기 제주항쟁은 1947년 3월 1일에 제주도 전역에서 폭발된 통일독립의 의지가 미군정에 의해 탄압되면서 도민들이 지속적으로 저항하다가 남북협상운동과 맞물려 마침내 5.10단선을 거부해낸 역사이다(나는 이를 ‘해방기 제주 통일독립 항쟁’으로 명명한다.). 그 와중에 제주 남로당이 4.3 무장봉기를 일으켰고 공권력은 공산폭동을 진압한다는 명분 아래 수많은 인명을 희생시킨 것이다. 따라서 그 범위가 매우 넓어서 그 성격 규정에 어려움이 있는 4.3에 대해서는 이제 새로운 관점에서 다층적으로 구분해서 인식할 필요가 있다. 아래의 ‘그림’은 그러한 관점에서 4.3을 재구성한 것이다.

4.3특별법에서 규정하는 ‘제주4.3사건’은 1947년 3월 1일 발포사건부터 1948년 4월 3일의 봉기를 거쳐 한라산 금족령이 해제되는 1954년 9월 21일까지로 7년 7개월의 장기간이다. 이 가운데 제주도민의 통일독립 염원을 확고히 표출한 1947년의 3.1절 기념식부터 1948년 8월의 정부수립 때까지의 약 16개월 기간을 ‘해방기 제주 통일독립 항쟁’으로 새롭게 독자적으로 규정할 수 있는데, 그 중심에는 남북협상운동의 흐름 속에서 5.10단독선거에 따른 선거인 등록과 투표 참여를 거부해낸 제주도민의 뚜렷한 성과가 있었다. ‘제주 남로당 반미통일 투쟁’은 1948년 4.3 무장봉기로부터 1949년 6월 이덕구 사령관 사망으로 산부대가 사실상 소멸되던 시기까지다. ‘제주 통일독립 항쟁’과 ‘제주 남로당 반미통일 투쟁’은 100일 정도 그 기간이 겹치는 반면, 그보다 훨씬 긴 21개월(앞의 11개월, 뒤의 10개월) 동안은 별개의 시기로 구별된다. ‘해방기 제주 통일독립 항쟁’은 ‘제주 남로당 반미통일 투쟁’과 관련은 있지만 동일한 성격과 흐름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울러 ‘해방기 제주 통일독립 항쟁’은 ‘미군정 탄압 시기’와 병행하는 것이며, 정부수립 이후인 ‘본격적 국가폭력 시기’와는 겹치지 않음으로써 그에 대한 ‘반란’이란 공박은 아예 성립될 수 없게 된다.
5. ‘해방기 제주 통일독립 항쟁’의 비남로당계 항쟁주체를 위하여
해방기 제주도민의 생각이나 신념은 남로당의 그것과 그대로 일치하지는 않았다. “남로당은 좌파적인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수립’을 지향했겠지만, 제주도민은 ‘통일된 민주정부’를 원했던 것”인바, “이러한 염원과 지향이 배합되어 ‘미국 점령정책의 최종적 귀결이었던 5.10단독선거’가 거부”47)되었음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이는 “항쟁의 주체는 어디까지나 미·소로부터 벗어나 남북의 협상을 통해 단선을 막아냄으로써 통일독립국가를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던 이들”48)이라는 관점과 상통한다.
그렇다면 남로당계가 아니면서 항쟁의 주체였던 이들은 누구인가? 앞서 언급했듯, 제주도의 인민위원회와 민전에서 활동했던 지식인 중에는 남로당계로 분류되기 어려운 이들이 적지 않다. 중도파나 온건좌파 혹은 온건우파 정도로 분류될 수 있는 민족주의자들이다. 개중에서 특히 제주도에서 간행된 ‘제주신보’의 주역들은 남북협상운동에 적극 관심을 가졌던 세력들로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제주신보’는 남북협상운동을 지속적으로 크게 보도하였고, 중도파에 대한 관심도 많았기 때문이다.49) 중도파나 온건좌파 혹은 온건우파로 분류될 수 있는 이들은 민족주의자로서 확고한 탈식민화의 신념을 바탕으로 각자의 위치에서 통일독립 의지를 실천했다. 그 대표적인 인물로는 박경훈50)을 꼽을 수 있다. 1947년 3.1절 기념행사와 관련이 깊고 제주 민전의장과 제주신보사 대표로 활동하는 가운데 남북협상운동에 많은 관심을 가지면서 통일독립을 위한 활동을 전개했던 인물로 판단된다는 것이다.
제주도는 좌·우익 진영으로 분리돼 있다. 그러나 많은 지성 있는 지도자나 대중은 어느 당파의 편도 들고 있지 않다. 좌익에게 명백한 문젯거리는 없으며, 소위 좌익이라 불리는 자들의 대부분은 공산주의자가 아니다. (…) 주목되는 것은 제주도의 좌익은 반미적이 아니며 최근의 테러 사태는 우익에 의해 선동된 것이다.51)
미군정에서는 이처럼 제주도가 좌·우익 진영으로 나뉘어 있다고 하면서도 많은 지식인이나 대중들은 특정 당파에 휩쓸리지 않고 있고, 좌익으로 불리는 이들도 공산주의자가 아니라고 인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비남로당계 항쟁 주체와 관련하여 매우 의미 있는 언급이 아닐 수 없다.
지금까지 항쟁주체의 문제를 중심으로 과연 제주 남로당이 주도한 4.3 봉기가 해방기 제주항쟁의 전부인가, 하는 문제 인식을 바탕으로 도전적인 고찰을 시도해 보았다. 그 결과 남로당 중심의 봉기에만 초점을 맞추는 관점에는 심각한 오류가 있을 수 있고, 비남로당계 도민들에 의한 통일독립 항쟁임에 그 의의를 두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결론을 얻게 되었다. 그래서 1947년 3.1절 기념행사에서부터 5.10단선 반대운동을 거쳐 1948년 8월 정부수립 때까지 약 1년 반 동안을 ‘해방기 제주 통일독립 항쟁’으로 명명하였다. 이 항쟁으로 인해 제주도는 다수가 선거인 등록을 거부하고 투표에 불참함으로써 5.10단선을 거부한 성과를 거둔 남한 유일의 지역이 되었다. 따라서 제주 통일독립 항쟁이야말로 해방기 우리나라의 통일독립운동에서 가장 빛나는 성과로 자리매김하기에 충분하다. 이 항쟁이야말로 “미국과 소련에 반대하면서 통일독립을 성취하려고 하였던 것으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지구상에서 일어난 탈식민화 운동의 첫 자리에 놓이는 세계사적 의미를 갖는 운동”52)인 것이다.
우리는 최근 ‘촛불 혁명’과 ‘빛의 혁명’을 통해 시민들의 강력한 힘을 경험한 바 있다. 그런데 우리는 그 과정에서 특정 정치세력이 이끌었다고 볼 수 없는데도 수많은 시민들이 격하게 뭉치는 엄청난 위력을 확인하였다. ‘촛불 혁명’과 ‘빛의 혁명’이 더불어민주당이라는 특정 정당이 주도한 게 아니라 온 국민의 뜨거운 역량이 결집된 것이듯, ‘해방기 제주 통일독립 항쟁’도 남로당이라는 특정 세력이 주도한 게 아니라 도민들의 축적된 열망이 분출된 결과로 인식함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겠는가. 기존의 프레임을 과감히 깨지 않으면 4.3 연구의 갱신은 이루기 어렵다. [끝]

김동윤 기자
<2026-03-08> 제주의소리
☞기사원문: 반란 프레임 깨는 4.3의 새 이름 ‘해방기 제주 통일독립 항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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