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시대별곡] “각하 시원하시겠습니다” 발언의 주인공, 이익흥

부고 기사에는 가급적 좋은 이야기가 실린다. 대단히 큰 악행이 아니라면 고인과 유족을 민망하게 할 만한 내용은 담기지 않는다. 그런데 전 내무부장관 이익흥에 관한 부고에는 그런 일화가 소개됐다. 1993년 11월 27일자 <경향신문> 17면은 전날에 그가 국립경찰병원에서 88세를 일기로 사망한 소식을 간략히 전하면서, 이 짧은 기사의 3분의 1 가량을 그런 이야기로 채웠다.
이 기사는 “이씨는 내무장관 시절 이승만 대통령이 방귀를 뀌자 ‘각하 시원하시겠습니다’라고 말한 것으로 알려져 화제가 되기도 했다”고 말한다. 같은 날짜의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도 이 일화만을 소개했다. 한 개인의 88년 인생을 민망한 이야기 하나로 압축한 셈이다.
민망한 이야기
이익흥이 내무부장관일 때인 1956년 8월 1일이었다. 지금은 서울시의회 건물인 국회의사당에서 여야가 충돌했다. 이기붕 민의원의장(국회의장)의 장기 무단결석 등이 원인이었다.
자유당·민주당·진보당추진위원회가 격돌한 그해 5·15 부통령 선거에서, 진보당 박기출의 사퇴에 힘입어 민주당 장면이 자유당 이기붕을 꺾는 이변이 있었다. 뒤이어 6월 8일에 민의원 의장이 된 이기붕은 그 후 무단결근을 이어갔다. 이기붕 측은 ‘몸이 아파서’라고 해명했고, 여론은 부통령 낙선의 충격 때문이라고 해석했다.
결국 민주당은 8월 1일에 이기붕 출석요구 결의안과 사직권고 결의안을 상정했다. 다수당인 자유당은 민주당의 안건들을 무산시키다가 갑자기 추가경정예산안을 전격 상정했다. 이를 저지하기 위해 민주당의 유옥우 의원이 필리버스터를 신청했다. 그는 세 시간 넘게 이런저런 이야기로 시간을 끌었다.
그해의 중복은 7월 22일이고, 말복은 8월 11일이다. 8월 1일은 한창 더울 때였다. 설상가상으로 그날은 국회 냉방시설마저 고장나 있었다. 그달 3일자 <경향신문> 1면에 따르면, 유옥우를 위해 이철승 의원은 달걀과 냉차를 갖다 주고 김영삼 의원은 부채를 건네줬다. 김두한 의원은 용변을 해결하라며 양동이를 대령했다. 그런데 그 한증막 속에서 유옥우의 한마디가 기억에 남을 ‘팬서비스’가 됐다. 여야 의원들은 이 때문에 폭소를 터트리며 잠시나마 더위를 잊었다.
“이익흥 장관은 아첨에 소질이 있는 사람으로 유명한데, 그가 경기도지사로 있을 때 대통령을 모시고 낚시질을 갔다가 대통령께서 방기(放氣)를 뀌시니 이익흥씨는 얼른 일어서면서 ‘각하, 속이 시원하시겠습니다’ 했답니다.”

이익흥은 1953년 11월 23일 경기도지사 직에 취임했다. 문제의 아첨 발언은 그 뒤 지금의 서울 광나루에서 있었다. 이날 국무위원석의 이익흥은 필리버스터를 지켜보다가 갑자기 자기 이야기가 언급되고 여야 할 것 없이 폭소를 터트리자 잠시 뒤 퇴장했다. 이 일이 너무 유명해져 훗날의 부고 기사까지 장식을 하게 됐다.
그런데 부고에 그 내용이 실린 것은 실상은 그를 민망케 만드는 게 아니라 불명예를 감춰주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각하 시원하시겠습니다’ 발언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죄과가 그의 일생에 많았기 때문이다. 그중 하나는 이승만의 3선을 가능케 한 사사오입 개헌에 관여한 일이다.
방귀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죄과
3선 개헌안은 1954년 11월 27일 국회 재적의원 203명의 3분의 2(136명)에 미달하는 135표의 찬성을 얻으며 부결됐다. 이승만 대통령 비서관과 4선 의원을 역임한 박용만의 <제1공화국 경무대 비화>에 따르면, 그날 저녁 이기붕은 자택을 방문한 자유당 조사부장 진승국에게 “부결된 것이니 할 수 없지”라며 “후일에나 다시 부결 안 되도록 힘써야겠소”라는 말로 다음을 기약했다.
그런데 진승국이 떠난 뒤 이익흥이 방문해 “203명의 3분지 2는 135.33″이라며 “사사오입 원칙에 따르면 135표로서 개헌안은 통과된 것입니다”라는 뚱딴지 같은 논리를 폈다. 이익흥은 28일에도 이기붕을 찾아가 똑같은 말을 했다.
바로 그때 이승만이 이기붕을 경무대로 호출해 “개헌안이 통과된 것이래”라며 “통과된 것을 왜 부결이라 했나?”라고 한 뒤 “다시 고쳐 놓아!” 하고 지시했다. 이기붕은 ‘이거 벌써 이 박사께도 통해 놓았군’이라며 혀를 찼다고 위 책은 말한다.
이익흥은 부결 당일 저녁에 서울대 수학과 초대 주임교수인 최윤식도 찾았다. 최윤식 앞에서 지나가는 말로 203의 3분지 2를 사사오입하면 얼마가 되느냐고 묻자, 최윤식은 별 생각 없이 135라고 답했다. 이익흥은 이를 근거로 ‘최윤식 교수도 사사오입 개헌에 찬성했다’는 식의 논리를 퍼트렸다. 사사오입 논리에 기반한 3선 개헌은 민주주의 파괴였다. 이익흥은 이런 일로도 각하를 시원하게 해줬다.
그는 제1공화국판 가덕도 테러 사건에도 관련됐다. 유옥우의 필리버스터 때문에 망신을 당한 다음달인 1956년 9월 28일의 명동 테러에도 가담한 인물이다.
그해 부통령선거에서 이기붕에게 통한의 패배를 안긴 장면은 그날 서울 명동 시공관의 민주당 전당대회장에서 테러를 당했다. 그는 김상붕이라는 인물이 쏜 총알에 왼손을 맞았다. 김상붕은 저격 직후에 민주당 거물인 조병옥을 거명하면서 “조병옥 박사 만세”를 외쳤다. 이 저격이 민주당의 내분에 의한 일인 것처럼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검찰 수사로 밝혀진 바에 의하면, 범행을 사주한 것은 김종원 내무부 치안국장 등이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이익흥은 사퇴 압력을 받았다. 10월 2일자 <조선일보> 1면에 따르면, 자유당 소속인 최병국(1906~1973) 의원도 경찰의 부통령 경호 실패에 대한 책임을 지고 내무부장관이 사퇴해야 한다고 국회 대정부질의를 통해 촉구했다. 이를 무시하며 버티던 이익흥은 국회에서 내무부장관 불신임결의안이 두 차례나 상정된 뒤인 1957년 2월 4일에 경질됐다.
그런데 4·19혁명 뒤에 새로운 사실이 밝혀졌다. 1960년 5월 18일자 <경향신문> 3면은 이날 오전 서울지검에 출석한 김종원 전 치안국장이 폭로한 내용을 보도했다. 괄호 속 내용은 원문 그대로다.
“이날 김씨는 장 전 부통령 저격은 임(임흥순)씨와 이(이익흥)씨와의 모의에서 이루어진 것이며, 하수자 김(김상봉)에게 권총을 수교한 사람은 당시의 성동서장 김(김용학)이라고 폭로하였다.”
살인미수 혐의로 기소된 이익흥은 1961년 7월 13일 대법원에서 무기징역 선고를 받았다. 그러나 판결 2개월 전에 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 군사정권은 1963년에 5·16 제2주년을 기념해 그를 풀어줬다.
평북 선천에서 태어나 평양제2중학 및 마쓰야마고등학교와 규슈제국대학 법과를 졸업한 이익흥은 일제치하에서 평북 박천경찰서장 등을 역임했다. 1948년 9월 22일 시행된 반민족행위처벌법(반민법) 제4조 제5호는 “군, 경찰의 관리로서 악질적인 행위로 민족에게 해를 가한 자”를 반민족행위자로 규정했다. 이 조문에 의하면, 경찰서장을 지냈더라도 악질행위가 없었으면 친일파로 처벌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이익흥의 판단은 달랐다. 1977년 6월 27일자 <경향신문> ‘비화 한 세대 (157): 반민특위 (11)’에 따르면, 친일청산을 위한 국회 반민특위가 가동되자마자 그는 신속히 행동했다.
“반민특위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일제 경찰 출신이 대부분 그대로 남아 있던 경찰의 동요는 컸다. 정부수립과 함께 반민법의 제정이 국회에서 논의될 때부터 이들은 차차 자위책을 세우기 시작, 2관구 청장을 지낸 이익흥, 서울 시내 서장급 간부들인 윤우경·김정채·전봉덕 등 일제 경찰 출신들이 대거 헌병대로 자원해 들어가버렸다. 반민특위로서도 군(軍)만은 어떻게 건드릴 수 없다는 계산에서였다. 당시의 헌병사령관 원용덕은 이들을 모두 영관급으로 받아들여 재빨리 피난처를 제공하는 대신, 막강한 수사력을 갖게 되어 후에 군뿐 아니라 정계 막후에서 실력을 행사하는 데 이들의 충성을 이용하게 된다.”
이익흥이 경찰에 복귀한 것은 한국전쟁 발발 직후다. 혼란한 상황 속에서 경찰로 돌아갔던 것이다. 그의 이름은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나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에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모든 친일파가 이런 문헌들에 다 수록된 것은 아니므로, 친일파 처벌을 피해 군대로 도피한 이익흥이 친일파로 규정되지 않은 것은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다.
1963년에 풀려난 이익흥은 그 뒤로도 이 땅의 지도층으로 살았다. 원효여객 사장, 서울수산 이사가 됐고, 박정희 정권 말기에는 평화통일정책자문회 상임위원이 됐다. 그렇게 살다가 88세를 일기로 눈을 감은 직후에는 과거의 죄악들은 감춰진 채 ‘각하 시원하시겠습니다’ 발언만이 그의 부고 기사를 채웠다.
이승만 정권은 이익흥처럼 약점 많은 친일파들을 중용했다. 이는 이승만 주변에 간신배나 아첨꾼이 유난히 많았던 이유를 설명하는 한 가지 배경이다.
김종성
<2026-02-24>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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