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회 임종국상 수상소감]
오래된 회한과 뒤늦은 변명
학술 부문 수상자 김영범

‘임종국 상(賞)’이 있는 줄은 때때로 보도를 접하여 알고 있었지만,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주관한다는 정도 말고는 내용을 거의 모르고 있었습니다. 매년 수상자가 발표되면 관심이 가고 축하의 마음도 자연스레 들었지만, 자신을 결부시켜 생각해본 적은 전혀 없었습니다. 말 그대로 언감생심이었으니까요. 그런데다 멀리 시골에 박혀 산다고 시상식에 와보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던 제가 올해의 학술 부문 수상자로 선정되었다는 연락을 받았을 때, 얼마나 놀라고 당혹스러웠는지 모릅니다. 두렵기조차 하여 감당이 어렵다고 느껴짐에 수상을 고사하고 싶었고, 그 의사를 주관처에 표했다가 면박을 받기도 했습니다.
올해 들어 순전히 개인적인 의미와 이유를 몇 가지 담아내며 출간을 준비하여 두 권의 졸저를 내긴 했습니다. 하지만 그중의 하나가 지목되어 임종국상을 받게 되었음은 정말 뜻밖입니다. 당연히 영광스러울 일이긴 하지만, 그리된 데에 어떤 곡절과 연유가 있는지 정말 모르겠고, 너무도 부끄럽기만 합니다. 이런 심경을 새삼 언표하는 것은 그저 겉치레의 겸양이 아니라 그만한 까닭이 있어서입니다.
돌이켜보면 격동의 시절이던 1988년의 봄인지 가을인지의 어느 날, 임종국 선생님을 천안시 삼룡동의 댁으로 찾아 뻧었습니다. 그때 저는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의 풋내기 연구원이었고, 연구용 도서 구입으로 인연 맺어진 천안 시내의 서점주 겸 사회운동가 김대기 씨의 귀띔을 받고 동행해서였습니다. 나중에 알게 된 바로는 김형이 작고하시기 전의 선생님을 계속해서 5년간 시봉했다는군요. 큰길에서 한참 들어가 외진 들머리에 오도카니 자리 잡은 선생님 댁은 퍽이나 단출해 보이면서 쓸쓸한 분위기였고, 집 앞 텃밭에 수종 미상의 과실수들과 호박넝쿨, 고춧대 등이 보였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처음 뵈었음에도 선생님은 아들뻘밖에 안 되는 연소자를 따뜻하고 친절하게 맞아주시며, 『친일문학론』을 내신 분이라는 선입견 때문에도 무척 어려워할 수밖에 없는 저를 편안하게 해주고자 하셨습니다. 굵으나 낮은 어조에 어딘지 모르게 좀 허허로운 모습이면서 말씀을 많이 하시거나 당부 같은 것을 따로 하지는 않으시더군요. 하지만 제 발로 찾아온 청년 연구자에게 무언가의 기대는 적으나마 갖지 않으셨을까 생각됩니다. 오래 있지는 못하고 물러 나오면서 다음에 다시 와서 뵙겠다고 언약을 드렸는데, 결국은 그 말을 이행하지 못하여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 상면으로 되어버렸습니다. 그게 내내 죄스러웠고, 지금도 회한으로 남습니다.
그때 제가 매일 서울서 통근하는 처지였던 데다 그해 가을에 결혼했고 박사과정도 이수 중이라 이리저리 정신없이 지내다 보니, 다시 찾아뵘을 혼자 자꾸 미루었던 것입니다. 그러다 그만 1989년 가을에 참으로 황망하게도 선생님께서 별세하셨고, 그 비보를 뒤늦게야 듣게 되어 문상도 하지 못하는 비례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얼마 후 1990년 2월에 연구소에서 퇴직하고 개인적 과업과 책무로 계속 쫓기는 몸이 되었음을 이유로(실은 핑계였겠지요?) 선생님 묘소에도 참배하러 가보질 못했으니, 정말 면목이 없습니다.
그로부터 10여 년 후인 2000년대의 어느 해인가, 『친일인명사전』 만들기 작업에 협력, 동참해달라는 민족문제연구소의 요청을 전화로 받았습니다. 그 일이야말로 선생님의 유지를 그대로 이으면서 현실화시켜 내려는 집체적 결의와 노력으로 시동된 것이지요. 그런데도 저는 정중히 사절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 깜냥을 제가 잘 아는지라, 주어질 인명 항목을 책임지고 정확히 그리고 철저하게 써낼 만큼 일제강점기의 숱한 인물들에 대한 공부가 깊지를 못했고 아는 게 짧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도 그렇게 사절했음이 내내 마음에 걸려 부담으로 남았고, 드디어 『친일인명사전』이 당당하게 간행되어 나왔을 때 다른 누구 못지않게 반갑고 기뻐했으나 자괴감도 그만큼 컸더랬습니다.
요컨대 저는 임종국 선생의 드높은 뜻을 잘 이해하여 만분의 일이라도 받아서 이어드리기는커녕, 그분의 발치에도 닿지 못할 먼 지점에만 있으면서 그걸로 족해 하고 안일하게 살아온 것입니다. 많은 분이 자기희생을 감내하며 혼신의 노력을 기울여 온 친일(잔재)청산운동과 그 부속 활동들에 마음으로는 적극 지지하고 약간의 후원을 해보기는 했지만 나서서 적극 동행하진 못해 왔습니다. 용기가 부족하고 태만해서였음을 자인합니다. 그러니 저는 임종국 상의 수상자 될 자격이 없는 것인즉, 부끄럽고 송구스러운 심정을 어찌 주체할 수 있겠습니까.
정운현 씨 저작의 『임종국 평전』을 이번에 다시 읽으면서 선생님의 고단했던 전반기의 생애와 그런 중에 문득 품으셨던 당신만의 꿈과 그걸 이루어내기 위해 심혈을 기울이며 고투하신 행로와 그것들의 결정체인 독특한 인간상, 이 모든 것이 19년 전에 처음 읽었을 때와는 또 다르게 훨씬 더 큰 감동으로 가슴에 와 박힙니다. 가정에서는 상당히 괴팍하달까 이해하기 어려운 면모도 보이셨지만, 사회적 개인으로서는 스스로 일구어내고픈 세계에 대한 이상과 신념이 확실하며 끝까지 그것을 지켜 실천해내려 하시던 모습이 눈물겹습니다. 어쩌면 저도 그렇게 살고 싶었던 것이지만, 대부분 그러질 못해 왔으니 더하여 반성과 자책이 큽니다.
한때 제가 제주 4·3사건을 비롯한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의 진상규명 운동단체와 정부 위원회에도 참여하긴 했으나, 돌이켜보면 소박한 문제의식과 알량한 정의감이 약간 발동한 정도 이상은 못되었던 것 같습니다. 역시 운동보다는 공부가 내 적성이고 체질인가 보다 싶어 그쪽과 점점 멀어지고 책상머리에 붙어 앉아 있게 되었습니다. 한때는 망탈리떼사와 집합기억 연구의 긴요성을 설파하며 그 패러다임 도입에 앞장서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정작 저 자 신은 의욕만큼의 연구성과를 별로 내지는 못하였고, 자기 능력의 한계를 자꾸 절감할 뿐이었습니다.
겨우 붙잡은 게 스승 덕분에 들어섰던 독립운동 공부였고, 원래의 전공분야 방법론을 접목시켜 사회학적으로 접근해보려 애썼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어설픈 시도로 그쳤을 뿐이지, 제대로 된 ‘역사사회학’은 해내질 못했음이 분명합니다. 그런데도 이번의 졸저에 『독립운동의 역사사회학』이라는 거창한 제목을 붙여놨으니, 만용이라면 만용이고 얼마간의 뻔뻔함도 곁들여 있는 것 같습니다.
‘역사사회학’이라 하면 종래 ‘역사적 사회학’ (Historical Sociology)의 의미로 이해되고 그렇게 쓰여들 왔습니다. 역사자료를 가져다 활용하여 사회학 이론을 새로 만들어내거나 기존 이론을 검증하고 수정-재구성도 함에 목표를 두는 지적 활동인 것입니다. 그 작업은 아시다시피 마르크스나 베버 같은 천재적 선조들의 범례를 따르면서도 현대의 엄격한 이론적 규준을 충족하려면 국가간·지역간 비교연구와 장기통시적 고찰 등의 방대한 작업을 요하지요. 그래서 어느 일개인의 힘으로는 감당하기가 무척 어렵고, 많은 인원과 큰 규모의 연구비가 동원되는 협동연구를 필요로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지라 말의 본래적 의미에서의 역사사회학은 서양의 몇몇 뛰어난 학자와 그 팀이 일구어 도달해낸 약간의 성취만 있지, 국내에서는 비전이고 목표일 뿐 실제적 성과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고 하겠습니다.
근래 들어 역사사회학은 ‘역사의 사회학’ (Sociology of History)의 의미로도 쓰이면서 새로운 접근법이 모색되고 있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이것은 역사 쓰기와 그 산물에 대한 사회학적 해부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역사적 사회학에서는 ‘역사’가 ‘과거의 사실’인 것에 가깝다면, 역사의 사회학의 ‘역사’는 과거사를 써내는 행위이자 그 결과물이라는 함의를 가집니다. 졸저에서도 ‘역사사회학’은 역사적 사회학이 아니라 역사의 사회학에 가까운 것임을 말씀드리려다 보니 다소 번설이 되어버렸군요. 아무튼 그런 견지에서 졸저로 선보인 제 작업은 의열단과 의열투쟁, 신채호 사상, 조선의용대에 관한 그동안의 ‘(쓰인)역사’를 다시 검토하고 사회학적 접근의 특장점인 ‘장막 걷어내기’(debunking) 방법을 원용하면서 이유 있는 이의도 제기해봄이었습니다. 생전의 임종국 선생님도 “역사는 꾸며서도 과장해서도 안 되며 진실만을 밝혀 혼의 양식으로 삼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지요.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다만 무엇에 의지해 어떠한 방법으로 진실을 밝혀낼 것인가의 문제가 남는데, 선생님은 기본적인 문제의식을 받쳐줄 원자료를 최대한 찾아내고 기록을 중시하는 실증의 원칙을 존중하고 거기에 충실하려 하셨던 듯합니다. 그와 같은 태세에 저 또한 깊이 공명하고 지지하는 바입니다.
처음에 학문의 길을 사회학으로 내디뎠던 제가 어쩌다 역사학의 영역으로 틈입한 셈이 되었습니다. 볼 만한 것은 별로 없지만 그래도 약간의 연구성과 덕에 역사학계에서 이름 석자 정도는 알아봐 주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사회학계에서는 거의 잊힌 이름이 되어버렸을 겁니다. 그렇다고 역사학계에서 환영받는 존재는 아닌 듯합니다. 외려 불편해하는 기색을 수차 느끼기도 했습니다. 개개 연구자와 그 선학들이 해놓은 작업과 성과에 자꾸 시비 걸고 딴소리 하는 형국이 되고 있어서일 겁니다. 이번에 심사위원들께서 어쩌면 그 점을 관용하고 역설적으로 어여삐 보아주신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드는군요. 사회학자도 아니고 역사학자도 아닌, 중간에 끼어 경계선 언저리에서 버둥거리는 존재가 좀 이채로워 보였을지도요. 아무튼 여러모로 고심하셨을 심사위원님들과 벅차게 큰 상을 소생에게 허여해주신 임종국상 운영위원회에 깊이 감사할 뿐입니다.
사회학과 역사학을 아우르며 한국학의 최고 경지에 우뚝 서 계신 스승 신용하 선생님의 학문 자세와 눈부신 성취를 이후에도 늘 마음에 두고 새기면서 그 발치에라도 혹여 가닿아 볼 수 있도록 분발하고 면려하렵니다. 또한 그 결과가 임종국 선생님의 뜻과 발자취에 조금이라도 부합하는 것이 된다면 참으로 다행이겠고, 아무쪼록 그리될 수 있게끔 더욱 마음을 가다듬으렵니다.
수상을 축하해주시는 모든 분께도 마음 깊이 감사하오며, 건승과 행운이 함께하길 기원합니다. 다가오는 2026년에는 우리 모두 역사(적/의) 정의를 더욱 올곧게 세우고 현양할 수 있기를 또한 기구합니다. 저도 미력이나마 보탤 것을 약속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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