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성의 히,스토리] 일제에 충성한 ‘이두황’의 삶

명성황후 민씨가 시해된 1895년 10월 8일(음력 8.20), 경복궁 입구를 지킨 인물이 37세의 이두황이다. 그는 중전을 지키는 쪽이 아니라 시해하는 쪽의 경비 책임자였다.
그런 이두황을 단죄하는 전북 전주시 완산구 중노송동의 친일 단죄비와 안내판이 훼손됐다는 보도가 29일에 나왔다. 단죄비와 안내판이 찌그러져 있고 그 옆의 교통신호 제어기 받침대가 긁혀 있는 사진이 보도되고 있다. 훼손 사실이 민족문제연구소에 제보된 것은 24일이라고 한다.
명성황후 시해 가담하고 일본으로 도피
고종 임금의 전임자인 철종 때 한양에서 태어난 이두황은 24세 때인 1882년에 무과 급제를 하고 훈련원 주부 등을 지낸 뒤 31세 때인 1889년 9월에 흥해군수직을 받았다. 무과 급제 8년 만에 지금의 포항시장이 됐던 것이다.
그렇게 조선왕조의 녹봉을 받으며 승승장구하던 그가 벌인 일이 왕조의 중전 시해에 가담하는 만행이다. 1929년에 발행된 <고(故) 설악 이두황옹 추회록>에 실린 구라타 이츠지로의 ‘추회록(追懷錄)’이 그 상황을 증언한다.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 제4-12권 이두황 편에 인용된 ‘추회록’은 “이두황은 제2대대장으로서 광화문을 경위”했다고 말한다.
이두황이 속한 곳은 훈련대였다. 이 부대에 관해 최문형(1935~2022) 한양대 명예교수의 <명성황후 시해의 진실을 밝힌다>는 “훈련대란 미국의 다이 장군이 육성한 왕실 직속 부대인 시위대와는 달리 일본군 장교가 육성한 군대”라고 설명한다.
을미사변 그날 새벽, 일본군과 조선 훈련대의 광화문 진입은 수월치 않았다. 1882년 임오군란 때 중전 민씨를 탈출시킨 일로 유명한 홍계훈이 그곳에 나타났다. 조선 중전을 시해하려고 달려드는 부대의 앞길을, 중전을 자기 목숨처럼 호위하는 충신이 막아서는 영화 같은 장면이었다. 병력의 많고 적음을 떠나 하필이면 홍계훈이 출현한 것은 일본 입장에서는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홍계훈은 이두황에게 달려들었다. 위 ‘추회록’은 “친로파의 주구인 홍계훈이 단신으로 뚫고 들어와서 검을 빼어 들고 광화문을 경위하고 있는 이두황을 힐책하고 그 경호를 철수하도록 하였다”라고 묘사한다.
위 진상규명보고서에 인용된 <동아 선각지사 기전(記傳)>는 홍계훈이 이두황의 생명을 위협하는 장면을 묘사한다. 흑룡회가 1966년에 펴낸 이 책은 “친로당인 연대장 홍계훈이 와서 검을 뽑아 들고 휘두르며 이두황에게 달려들어 사태가 급박”했다고 기술한다. 이때 이두황을 구한 것이 일본군이다. ‘추회록’은 “일본 사관 모(某)씨가 부하 위병에게 발포를 명령해서 연대장 홍계훈이 사망하였다”라고 알려준다.
홍계훈이 이두황을 위협하다가 쓰러지는 장면은 일본군과 일본 로닌(실직 무사)들의 사기를 충천시켰다. 일본인들은 그 모습을 보고 힘을 얻었다. ‘추회록’은 “이 일순간의 소요야말로 유명한 민비 사건을 돌발시키는 전제가 되었다”고 평했고, <동아 선각지사 기전>은 “그의 죽음을 보고서 우리 지사의 일단은 드디어 대사를 결행하기에 이르렀다”고 평가했다.
명성황후의 보디가드가 쓰러지는 이 현장의 조선군 책임자는 이두황이었다. 이 일로 인해 사건 3개월 뒤인 1896년 1월 7일, 그는 일본으로 도피했다. 음력으로 을미년 11월 20일인 1896년 1월 4일부터 을미의병이 개시됐다. 한국인들이 의병을 조직해 일본과 친일파에 맞서기 시작한 직후에 그가 한국을 떠났던 것이다.
일제의 총애를 받은 친일파

그렇게 도주한 이두황이 귀국한 것은 11년 뒤다. <친일인명사전> 제2권 이두황 편에 따르면 사면 및 귀국 시점이 1907년 8월이고, 위 진상규명보고서에 따르면 사면 시점이 그해 9월이다.
이두황은 자신이 죽이는 데 가담했던 명성황후의 남편이 황제 퇴위조서를 발표(7.18)한 직후에 돌아왔다. 한국이 일본의 영향을 받는 가운데서도 11년간이나 한국을 떠나 있었던 사실은 을미사변 이후로 그의 목숨이 얼마나 위태했는지를 보여준다.
이두황은 명성황후 시해보다 더 큰 중죄를 그로부터 얼마 전에 저질렀다. 일본군과 함께 동학군 토벌에 나선 핵심 인물이 바로 그다. 그는 호남과 호서(충청도)의 동학군을 진압하는 부대의 우선봉장인 양호(兩湖)우선봉장이었다.
그가 남긴 <양호우선봉일기>에는 동학군 부대를 지휘한 조선판 잔다르크가 등장한다. 이소사(李召史)라는 호칭으로 알려진 동학군이다. 현대어로 바꾸면 ‘이 여사’로 알려진 인물이다. 이 여사는 말을 타고 전남 장흥의 동학군을 지휘했다. 장흥 사람들은 이 여사를 신녀로 받들었다.
음력으로 을미년 1월 1일자(양력 1895.1.26.) <양호우선봉일기>에는 진압군에 체포된 이 여사의 고초가 묘사돼 있다. 그는 조사 과정에서 곤장을 맞았다. 어찌나 심하게 맞았는지 살이 썩어 문드러질 정도였다. 그런 상태로 그는 일본군에 인계됐다. 이 일기에서도 나타나듯이, 명성황후 시해 현장에 있었던 이두황은 조선판 잔다르크의 체포·고문과도 관련됐다.
이두황이 일본군을 도와 동학군을 진압한 것은 친일 내각의 명령에 따른 것이었다. 조선 정부의 명령을 받았다고 해서 그 죄과가 희석되지는 않는다. 친일 내각을 지지하는 인물이 아니었다면 양호우선봉장에 임명될 수도 없었다.
이두황은 일본군을 도와 동학군을 진압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일본군을 도와 청나라군과도 싸웠다. 위 진상규명보고서는 “청일전쟁 때에도 자청하여 일본군 제5사단장 노즈 중장을 따라 종군”했다고 알려준다.
청일전쟁은 조선에 대한 청나라의 영향력을 제거할 목적으로 일본이 벌인 도발이다. 이 당시 일본의 조선 침략에 걸림돌이 된 두 개의 힘은 동학군과 청나라군이었다. 이 두 군대에 대한 일본군의 도발을 이두황이 거들었던 것이다.
11년간의 해외 도피를 끝내고 귀국한 이두황은 이토 히로부미의 비호를 받았다. 진상규명보고서는 그가 이토 히로부미의 특별사면을 받은 일을 언급한 뒤 “귀국 직후 이토 통감의 추천을 받아 1907년 10월 중추원 부찬의에 오르고, 1908년 1월 전라북도관찰사에 임명되었다”고 알려준다.
전북은 양호우선봉장의 관할 구역이었다. 이 지역 동학군 토벌을 지휘한 인물이 13년 만에 이곳으로 부임했다. 그의 전북관찰사 부임은 이 지역에 대한 모독이었다. 부임 뒤에 그가 한 일도 동학군 진압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는 관찰사 직함을 갖고 일제의 남한대토벌작전을 거들었다. 위 진상보고서의 설명이다.
“전라북도관찰사로 재직 중이던 1909년 2월, 일본의 한국주차군 남부수비병 증파에 따른 대대본부 숙사 차입 문제와 편의 제공을 남원 군수에게 지시하였다. 1909년 10월 남한대토벌작전 즉 1909년 9월 초부터 10월 30일까지 두 달에 걸쳐 진행된 전라남도와 그 외곽지대의 항일의병부대에 대한 진압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관내로 들어온 한국주차군 보병 제2연대를 위한 연대 위문을 하는 한편, 의병 부대에 대한 재소탕을 앞두고 군수와 면장들에게 의병 자수를 종용하도록 권유하였다.”
이두황은 대한제국의 마지막 전북관찰사다. 동시에, 조선총독부 최초의 전라북도 장관이다. 1914년부터 2년간은 전라북도지방토지조사위원장도 겸했다. 전북 지역 동학군을 진압하고 의병 진압을 지원한 뒤 그곳 토지 수탈에도 관여했던 것이다. 전북에 대한 철저한 학살자·착취자였다.
일본은 이두황에게 한없는 고마움을 표시했다. 1912년에는 한국병합기념장을 수여하고, 1916년에는 훈장(서보장)과 특별상여금을 주고 귀족에 준하는 예우를 제공했다. 일제는 1910년부터 1916년까지 총 8차례에 걸쳐 상금을 하사했다.
한국 강점 직후인 1910년 10월 1일에는 “부지런히 일한 것이 적지 않기에”라는 이유로 상금 5000원을 하사했다. 1911년에 헌병보조원의 초임은 연봉 기준으로 100원이 안 됐다. 일본은 그가 죽기 전날인 1916년 3월 8일에에는 특별상여금 1000원을 지급했다.
그렇게 일본의 사랑을 받으며 전북도장관 재직 중에 죽은 이두황을 단죄하는 비석과 안내문의 제막식이 2016년 광복절 이틀 전에 전북 전주에서 있었다. 이두황이 죽은 지 100년 만에 세워진 그 비석과 안내문이 이번에 훼손됐다.
김종성 기자
<2025-07-31>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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