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위의 국회프락치사건 <결정서>
국회프락치사건은 제헌국회 내 소장파 의원들이 남로당 프락치로 활동했다면서, 노일환, 이문원 등 15명의 의원들을 체포하고, 이중 13명의 의원들에게 3년에서 10년형을 선고한 대한민국 최초의 국제간첩단 사건이다. 이승만 전 대통령은 경찰, 군, 검찰, 재판부까지 국가권력을 총동원해 제헌국회의원 다수를 간첩으로 몰아 ‘제거’하려 한 사건이었다.
이 사건에 대해 진실화해위원회는 2025년 4월 15일 제105차 위원회에서 ‘1949년 국회프락치사건(고 김옥주, 고 김병회)’에 대해 중대한 인권침해 사건으로 결정했다. 특히 <결정서>에는 “헌병대에서 나체로 성기에 전기고문을 가하는 등의 가혹행위로 자백을 받아낸 사실을 밝혀냈다”고 한다.
‘고문에 의한 사건’이라는 사실을 국가기관에서 처음으로 인정한 것이다. 그러면서, 국가는 피해자에게 사과하고, 명예회복을 위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했다.

진화위의 <결정서>는 크게 4가지 사항에 대해 불법 행위가 있었다고 결정했다.
첫째, 제헌국회의원들은 체포 당시 헌병들로부터 영장을 제시받지도 않았고, 범죄사실 등도 사전에 고지받지 않은 상태에서, 헌병대에 끌려가서야 영장을 보았고, 범죄사실도 그때서야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행위는 “범죄사실을 고지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위법 행위라고 결정한 것이다.
둘째, 구속기간의 위법이다. 김옥주, 김병회 의원 등은 1949년 6월 21일 구속되어 7월 11일 송치되었다. 당시 형사소송법에는 수사기간이 10일로 정해져 있고, 1회에 한해 10일간 연장할 수 있어, 최대 20일까지 구속이 가능했지만 1일이 초과하여 송치된 것은 ‘직권 남용’이라는 것이다. 즉, 피의자의 “구속기간을 준수하지 않았다”고 결정했다.
셋째, 형법상 검찰과 경찰 등은 수사할 때 직권을 남용해서 피고인에게 폭행 또는 학대를 할 수 없고, 폭행 등을 할 경우 처벌 받도록 규정되어 있는데, 헌병대는 수사 당시 “전기고문”을 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고 하면서, 이는 당시 형법을 위반했다고 결정한 것이다.
넷째, 당사자만이 아니라, 국회프락치사건 관련 가족들에 대해서도 연좌제가 적용되었다고 결정했다. 김옥주 의원 부인의 경우 1967년부터 경찰에서 보호관찰 카드를 만들어 관리해 왔고, 김옥주 의원 조카의 경우 1963년부터 동향 관찰을 했던 것으로 확인하면서, “후손들에 대한 인권침해”가 있었다는 사실을 명확히 했다.
이외에도 <결정서>에는 국회프락치사건 관계자들이 한국전쟁 당시 ‘월북’했는지 ‘납북’되었는지와 관련해, 일부 자료는 ‘월북’으로 기록되어 있고, 일부 자료는 ‘납북’으로 기록되어 있어, ‘국회프락치사건 관련 국회의원들이 월북했다는 국가기관의 공식적인 자료는 확인할 수 없다’고 보고, ‘자진월북’을 단정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것도 매우 중요한 결정이다.
이러한 결정을 윤석열 정부 제2기 진화위에서 내렸다는 점도 의미가 있다. 2기 진화위가 어떤 과정을 통해 이런 결정을 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보수 정권에서도 이 사건이 수사과정에서부터 위법 행위가 있었고, ‘고문’까지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했으며, 월북으로 단정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앞으로 국회 프락치 사건에 관한 연구나 평가에서 이념적 잣대로 불필요한 논쟁을 하는 데 조금이나마 자유로울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역대 공안사건의 특성상, ‘고문’ 여부, 북한과의 관계, 관련자 사찰 및 연좌제 등이 논란이 된 상황에서, 이런 결정은 이후 다양한 공안사건을 이해하는 데 사례가 될 수 있다. 다만 진화위의 결정에는 이 사건이 어떤 배경에서 발생했는지, 사건의 성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등에 대해서 거의 언급되지 않은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사건 발생 당시 문제점
사실 국회프락치사건은 사건 발생 당시부터 불법이 자행되었고, 고문에 의한 조작사건이라는 점도 수없이 항변했었다. 제헌국회의원들만이 아니라, 국회프락치사건을 담당한 김호익 조사관도 ‘한국에서 최초로 발생한 국제간첩사건'(일명 김호익 수사기록)에서 체포 당시 “구속영장을 제시하지 않았고,” 당사자들은 “왜 체포되었는지 모르고 체포되었다”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재판과정에서도 재판관이 남로당에 입당 여부를 질문했을 때, “고문을 받아 부득이하게 답변했다”고 하거나, “고문을 이기지 못해서 허위 진술한 것”이라고 분명히 진술했었다.
그럼에도 ‘고문’ 문제는 처음부터 검사나 재판관 누구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사건의 방향은 이미 정해졌고, 재판의 결론도 미리 내려진 상태에서 형식적으로 법 집행을 한 결과였다. 경찰과 군(헌병대), 검찰 그리고 재판부까지 모두 같은 목적으로 하나가 되어 작동한 결과였다. 그러다 보니, 명백히 불법 행위, ‘고문’에 의한 자백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묵인한 것이다.
1946년 ‘정판사위폐사건’에서 조재천(친일인명사전 등재) 담당검사가 “고문행위와 범죄사실은 별개”라고 한 것처럼, 수사당국이나 법조계도 소장파의원들을 단지 남로당 프락치로 만들기 위해 함께 움직였을 뿐이지, 그들의 진술은 관심도 없었다. 재판에서도 전혀 작용하지 못했다. 결국, 소장파의원들을 간첩으로 만들기 위해 군, 경찰, 검찰, 재판부까지 국가권력이 총동원되어 만들어낸 사건이라고밖에 달리 판단할 수 없었다.
그러다 보니 이 사건은 처음부터 너무나 많은 문제점이 있었다. 사건발생과정에서, 소장파의원들에게 전달했다는 소위 ‘남로당 지령문’의 핵심내용인 외국군(미군) 철수는 1948년부터 제헌국회의원들이 이미 공개적으로 제안한 안이었고, 백범 김구, 김규식 선생 등 민족주의 세력도 지속적으로 주장해 왔던 논리였다. 재판과정에서도, 소장파의원들에게 ‘지령문’을 전달했다는 정재한은 체포된 소장파의원들이나 담당 변호사들이 면담을 여러 번 요청했지만 단 한번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삼자대면도 없이, 본 사건의 재판이 시작되자 1949년 12월 유일한 증인인 정재한은 총살형이 집행되었다.
정재한이 진짜 총살형을 받았는지도 여전히 확인되지 않지만, 당시 제헌국회의원 총 200명 중 무려 15명이 체포된 이 엄청난 사건의 유일한 증인이 아무도 보지 못한 상태에서 사라진 것이다. 재판 이후에도, 1950년 3월, 1심 재판 후 한국전쟁으로 더 이상 재판은 진행되지 못하고 종결 처리되었다. 2심과 3심이 진행되지 않았으면 사건을 미결로 끝낼 수도 있었지만, 이승만 정부는 이 사건을 곧바로 ‘국제간첩단사건’으로 규정하고 반공을 위한 선전물로 활용했다. 그리고 유족들까지 연좌제로 통제한 것이다. 결국 이 사건은 어떻게 보든 ‘사법살인’으로밖에 볼 수 없다.
국회프락치사건은 왜 발생했을까
그렇다면 이승만 정권은 군, 경찰, 검찰, 법원 등 모든 국가권력을 총동원해서 ‘고문’까지 하면서 국회프락치사건을 만든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이를 위해 1949년 남한정국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당시 남한정국을 1949년 ‘국무회의록’을 통해 살펴보면, 1949년 국무회의는 1월 3일부터 12월 31일까지 총 116회 개최되었다. 이승만 정부는 미군철수, 농지개혁 등 다양한 문제로 국회의 압박을 받았다. 이중 반민특위가 와해된 1949년 8월 말까지 친일파청산, 반민특위에 대해 ‘국무회의’에서 보고나 대통령 지시는 무려 31회가 확인된다.
이승만 정부 입장에서는 미군철수, 농지개혁 등 어느 문제보다도 반민특위의 친일파 청산 문제가 절대적 요인으로 작용했다. 특히 노덕술의 체포나 정부 내 친일파 청산 요구는 이승만을 ‘대노’하게 만들었다. 국무회의에서 이승만은 노덕술의 체포 = “불법 체포”라고 단정하고, 노덕술을 체포한 반민특위 위원들의 체포를 내무부에 지시하기도 하고, 노덕술 석방이나 정부 내 친일파청산 대책 마련을 국무총리나 내무부 등에 지시하기도 했다.
당시 반민특위의 활동은 민족적 차원에서는 해방 이후부터 논란이 된 친일파들을 척결하고 민족정기를 바로 잡는 일이었지만, 이승만 정부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수족을 잘라내고, 자신의 정체성을 흔드는 정권붕괴의 서곡과 같았다. 그러다 보니 이승만 정부는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유지하기 위해 개별적 반대운동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보고 남한정국을 일거에 바꾸려고 하였다. 그것이 반민특위습격사건(6.6), 국회프락치사건(6.21), 백범김구 암살(6.26) 등 이승만정부의 ‘6월 총공세’였다. 6월 총공세는 이승만 정권이 ‘수세’에서 ‘공세’로 바뀌는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리고 국회프락치사건은 이런 일련의 사건 중 핵심 사건이었다.
국회프락치사건이 본격화되기 전부터 친일파청산=공산주의=남로당프락치라는 논리는 곳곳에서 나오고 있었다. 국회프락치사건을 수사하고 있던 김호일도, “반민법을 강력하게 발동하면 대한민국의 모든 일이 지장이 있을 것”이라고 하면서, “이것을 노리고 반민특위는 남로당 지령에 움직이고 있다”고 보았다.
1949년 5월 18일 제1차 국회프락치사건으로 이문원 등 3인의 의원이 체포되었을 때도, 이승만정부는 반공국민대회를 개최한다면서, 300~400명의 시위대가 반민특위 사무실에 와서 “공산주의자들이 이 안에 있다” “반민특위내 공산주의자들을 숙청하자”고 하거나, 반민특위 사무실을 공격하기도 했다. 반민특위 습격사건 직후에도 체포된 반민특위 직원들에게 내무부차관 장경근은 “반민특위는 빨갱이 소굴”이다, “너희들은 언제부터 남로당에 가입했느냐”고 몰아세우기도 했다. 장경근은 일제강점기 친일 판사 출신으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인물이었다.
이런 가운데, 1949년 6월 16일 소장파의원들에게 남로당 <지령문>을 전달했다는 정재한을 체포하면서 제헌국회 소장파의원들과 본 사건이 본격적으로 연결되었다. 소위 국회프락치사건이 본격적으로 작동된 것이다. 이후 반공정국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고, 친일파청산활동도 급속히 위축되었다. 어떤 의미에서 이 과정을 거치면서 적극적으로 친일파청산을 주장하던 소장파의원들이 제거된 것이다.
1949년 이승만 정부의 ‘6월 총공세’의 공통점은 모두 친일파와 무관하지 않았다는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국회프락치사건에 구속된 대다수의 의원들은 친일파청산에 매우 적극적인 인물이거나 반민특위에 참여한 위원들이었고, 국회프락치사건을 조사하고 구속한 경찰, 군, 검찰, 법원 관계자는 대부분 친일혐의자들이었다.
국회프락치사건을 내사한 최운하 사찰과장은 일제강점기 경찰 출신이었고, 전봉덕 헌병사령관은 일제강점기 경시까지 올라간 대표적 친일경찰로, 경기도 경찰청 보안과장 출신이었다. 담당검사 오제도는 일제말기 신의주지방법원 검사국에서 근무했었고, 담당판사 사광욱은 일제말기 판사출신이었다. 이들 중 최운하 사찰과장은 반민특위에 체포되었고, 전봉덕 헌병사령관은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인물이다.
결국, 국회프락치사건 이후 남한 정국은 반공정국이 확산되고, 반민특위는 해체되었다. 그리고 친일파들은 단 한 명도 처벌하지 못했다. 반민특위의 친일파 청산 요구에 이승만정부는 국가권력을 총동원해서 ‘역공’을 준비했고, 그중 하나가 국회프락치사건이었다. 최근 윤석열이 1949년과 같이 자신의 목적을 위해 12.3계엄을 선포하고, 국회의원들을 ‘수거’하려 한 것처럼, 이승만정권은 친일파청산을 저지하기 위해 국가권력이 판사들까지 총동원해서 제헌국회의원들을 ‘수거’하고 남한정국을 장악하려 한 것이다.
무엇을 해야 할까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먼저, 국회프락치사건에 대한 관련 자료의 조사와 본격적인 연구이다. 해방 후 한동안 친일파문제가 학계의 연구대상이 되지 못했던 것처럼, 정부수립 후 수십 년간 ‘간첩’, ‘프락치’라는 단어는 금기시되었고, 공안사건을 연구하는 것 자체가 같은 부류로 평가받기도 했다. 이후 1980년대 사회 민주화가 확대되면서 일부 연구가 시작되었지만, 체계적인 연구는 거의 없었다.
이런 상태에서 국회프락치사건을 객관적으로 복원하기 위해서 본 사건의 기본적인 사항(발생원인, 관계자 분석, 사건과 재판의 전개과정, 한국전쟁 이후 행적 등)부터 사건의 여러 의혹들을 하나씩 제대로 분석해야 한다. 이를 위해 관련자료에 대한 체계적 조사와 분석, DB화 등도 필요하다. 현재는 기본적으로 알려진 자료마저도 제대로 분석하지 못하고 있지만, 한국전쟁 후 잃어버린 국회프락치사건 자료를 모두 조사해서, 유족들과 연구자들에게 제공되어야 한다. 이것은 향후 다양한 공안사건에 관한 연구와 대응 방안을 찾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그리고 재심 요청도 해야 한다. 이번 결정은 체포된 15명, 실형을 받은 13명 중 2명만이 대상이었다(이외에 변호사도 포함). 따라서 나머지 분들의 유족들도 모두 찾아 가급적 함께 재심 요청을 해야 한다. 누가 어떻게 재심을 추진하느냐도 중요하겠지만, 재심을 할 경우 모두 힘을 합쳐 승소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재심은 가족들이나 후손들에게 명예회복과 피해보상을 위한 길이지만, 비슷한 공안사건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론을 모색하는 것이고, 더 나아가 조작된 공안사건의 합리적 이해를 위한 한국사회의 근현대 역사 인식의 지평을 넓혀주는 기능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공안사건을 만든 국가기관, 경찰, 군, 검찰, 법원 등의 공개 사과와 그 각 기관의 교육기관을 통해 자신들의 잘못된 역사를 지속적으로 교육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더 나아가 왜곡된 조사, 기소, 판결을 했던 경찰, 군인, 검찰, 판사들에게도 적절한 조치를 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도 마련해야 한다. 공안사건이 발생하면 당사자와 가족들은 수십 년간 너무도 큰 고통을 당하면서 살게 되었지만, 가해자들은 오히려 부와 명예를 획득했다. 심지어 검찰총장, 대법원장으로도 올라가기도 했다. 이게 친일파들의 형태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시간이 지나 이런 사건들이 조작사건으로 판명 나도 매번 그들에게는 아무런 제재도 하지 못하고 끝내서는 안 된다. 사건을 조작하거나 잘못된 행위를 했던 사람들이 최소한 직접적인 사과는 당연하고, 잘못한 행위에 대한 합당한 조치가 취해질 수 있도록 법적 제도적 장치도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만 한국사회에서 왜곡된 특권층을 더 이상 양산하지 않는 환경을 만들 것이고, 경찰, 검찰, 판사들도 조사나 기소, 재판을 현재보다는 좀 더 책임있고, 신중하게 하는 사회문화도 만들어 질 것이다.
이강수 박사
<참고 문헌>
이강수,『친일파와 반민특위』, 보리, 2023
김호익, 『한국에서 최초로 발생한 국제간첩단사건(일명 김호익 수사일기』1950, 38사.
그레고리 헨더슨, 「국회프락치사건 공판기록」(영문), 『국회프락치사건 재판기록』(김정기, 한울, 2008) 『국무회의록』 1949년판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민족문제연구소 소식지에도 실립니다. 이 글은 이강수 박사(반민특위기념사업회 학술위원장)가 진실화해위원회의 국회프락치사건 <결정서>에 대한 분석을 담은 기고문을 민족문제연구소에 보내온 것입니다.
<2025-06-04> 오마이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