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 민족문제연구소·식민지역사박물관, ‘민주주의와 깃발’ 전시… 민주주의를 지켜온 깃발의 역사
민족문제연구소와 식민지역사박물관은 5월 16일부터 긴급전시행동 ‘민주주의와 깃발전’을 시작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전시를 위해 깃발을 기증한 사람의 수는 정확히 518명. 개막식은 5월 16일, 계엄을 자신의 온몸으로 막아낸 시민들을 숫자가 대변해 주는 것 같았다.
개막식에는 180여 명의 시민이 함께했다. 건물 외벽에 전시된 다채로운 깃발들, 그리고 사람들의 웃음과 악기 소리가 전시장을 채우며 그날의 현장은 마치 축제와 같았다.
깃발, 저항의 상징이 되다

깃발은 오랜 세월 동안 저항의 상징으로 우리 역사 속에 존재해 왔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의 의로운 깃발에서부터 1987년 6월 항쟁과 노동자 대투쟁에 이르기까지, 깃발이 나부끼는 곳에는 늘 민중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역사를 전진시켰다.
최근의 윤석열 퇴진 촛불집회에서도 깃발은 등장했다. 하지만 과거와는 달랐다. 과거의 깃발이 단체를 대표했다면, 이번 광장에 모인 깃발은 저마다의 사연과 목소리를 담고 있었다.
“이 시국에 내향인이라고 가만히 있을 수 없었어요. 말을 얹어야겠다는 생각에 목소리 대신 깃발을 들고 나왔습니다. (중략). 각자 하고 싶은 말을 저마다 깃발에 담고, 그 모습들이 모여 하나의 목소리가 되었다고 느꼈어요.개인의 목소리가 다수에게 보여지는, 그런 특별한 경험이었다고 생각합니다.” – ‘내향인 입니다’ 깃발 기증자 인터뷰 중에서
감귤포장학과 동문회, 마법소녀 노동조합 부산지부, 누구 때문에 풍비박산이 된 1인가구 연합회 등 저마다의 목소리를 담은 깃발들은 영하 20도를 넘나드는 강추위 속에서 함께 흔들리며 민주주의를 지켜냈다.
“박근혜 퇴진 집회 때는 솔직히 좀 무서웠는데, 윤석열 퇴진 집회에는 사람이 많으니까 오히려 안도감이 들더라고요. 저랑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는 걸 알게 되면서, 그때부터 조금씩 무서움이 사라졌어요.” – ‘작업하다 뛰쳐나온 수공예가 연맹’ 깃발 기증자 인터뷰 중에서
깃발은 저항의 도구인 동시에, 동지애를 확인하는 매개이자 승리를 가능케 한 동력이었다.
더는 지연될 수 없는 민주주의

광장에 나부낀 깃발은 우리가 나아가야 할 민주주의의 이정표였다. 그리고 그 이야기들은 더 이상 ‘나중에’로 미뤄지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박근혜 퇴진 때, 대부분의 사회 문제가 ‘나중에’라는 말로 밀렸고, 결국 8년이 지나도록 해결되지 않았어요. 앞으로는 우리 사회가 조금 더 사람들에게 다정해졌으면 좋겠고, 차별금지법이나 생활동반자법 등 그동안 미뤄왔던 법들을 하루빨리 제정되었으면 합니다.” – ‘빨강은 혁명의 색이다’ 기수 인터뷰 중에서
계엄 이전부터 일상을 위협 받아온 이들은 더는 참지 못하고 거리로 나섰다. 그들은 “더 이상 나중은 없다”고 외쳤다. 해일이 몰려와도 조개를 주워야 한다며, 조개를 줍는 동지들이 손을 맞잡으면 해일도 이겨낼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외쳤다. “우리가 성난 파도가 되자.” 그것이 바로 그들이 말하는 민주주의였다.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깃발의 연대

깃발은 사회의 가장 낮은 곳으로 향했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다이인(Die-in) 행동, 동덕여대 재학생 연합의 ‘민주동덕에 봄은 오는가’ 연대 집회, 세종호텔 해고노동자, 거제·통영·고성 조선소 하청노동자, 한국옵티칼하이테크 고공농성 현장으로 깃발은 흘러갔다. 그리고 깃발은 ‘말벌동지’가 되어, 연대가 필요한 곳이면 어디든 달려갔다.
“12월 3일 이후 내란 정국이 이어지면서 ‘이런 곳도 있다. 이 동지들은 이런 방식으로 투쟁하더라’하면서 연대가 점차 확장되는 느낌을 받기 시작했어요.
“전장연(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분들이 혜화역에서 몇 년 동안 투쟁하고 있는데, 경찰과 서울교통공사 측에서 계속 사람을 끌어내더라고요. ‘가야겠다’ 싶어서 갔고, 마침 다이인(Die-in) 행동이 예정되어 있어서 같이 참여하게 됐어요.” – ‘범우주 얼룩덜룩이 연합’ 깃발 기증자 인터뷰 중에서
“그냥 달려가서 도움이 될 수 있는 부분에 함께하면 된다는 걸 많이 느꼈어요. 그 이후로는 ‘평등으로 가는 수요일’ 시위에도 나가고, 동덕여대 시위, 전장연 시위에도 참여하게 됐어요. 그 시점(남태령)을 계기로 많은 사람들이 내가 얼마나 당사자성이 있는지 없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냥 가기만 하면 된다는 것을 많이 느낀 것 같아요.” – ‘니네 블랙리스트 우리의 명예시상식 청소년예술가지망생들’ 깃발 기증자 인터뷰 중에서
“한강진에서도 오전에 사람이 줄어들자마자 경찰들이 오더라구요. 그때 옆에 있던 누군가가 ‘가지 마세요’라고 말하더라고요. 그때 ‘역시 나 하나 없어도 괜찮겠지?’보다는 ‘나라도 나가고 싶다’는 생각이 더 강해진 것 같아요. 이건 아마 기수라면, 깃발을 만들고 나가겠다는 그런 실천력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다들 비슷하지 않을까 싶어요.” – ‘케이크만큼 달콤한 탄핵’ 깃발 기증자 인터뷰 중에서
또 다른 기증자는 자신보다 깃발이 먼저였다고 말한다.
“제가 본체가 아닌 거죠. 광장에는 얘(깃발)가 나가야 하니까요. 내가 먼저가 아니라 깃발이 먼저 나가야 하니까, 나는 그냥 대용품일 뿐이었어요. 어느 순간, 나비가 먼저인지 내가 먼저인지 헷갈리는 그런 순간이 온 것 같아요.” – ‘화분안죽이기실천연합’ 깃발 기증자 인터뷰 중에서
다양한 깃발을 들고 나온 이들이 광장을 바꾼 만큼, 광장도 그들을 변화시켰다. ‘내가 나간다고 뭐 바뀌겠어?’에서 ‘나 하나라도 나가자’는 마음으로, 그들은 깃발이 되어 광장을 지켜냈다.
의로운 깃발을 들고 일어났던 동학농민운동처럼, 독립을 되찾고자 자신의 몸을 던졌던 독립군처럼, 해방을 꿈꾸던 민중들의 깃발처럼, 전남도청을 사수하던 광주 시민들처럼, 그들은 ‘나라도 나서자’는 마음으로 나섰다.
1960년 4·19혁명과 1987년 6월 항쟁처럼, 누군가 먼저 앞서 나가면 그들은 옆에서 함께 걸음을 맞췄다. 그들이 만들어낸 민주주의는 내일을 살아갈 누군가의 미래가 되었다. 검붉은 빛을 띠다가 점차 선홍빛으로 물드는, 쉽사리 지워지지 않는 봉숭아물처럼, 그들의 역사는 서서히 우리의 삶과 일상 속으로 스며들 것이다. 그렇게 민주주의는 번져갈 것이다.
긴급전시행동 민주주의와 깃발 |
이 글에 소개된 깃발과 기증자 사연은 식민지역사박물관 1층 기획 전시실과 온라인 전시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전시 안내] [온라인 전시] |
박이랑 기자
<2025-05-30> 오마이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