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문학으로 제국의 목소리를 대변한 작가 최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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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소 글방 22]

문학으로 제국의 목소리를 대변한 작가 최정희

강은정 선임연구원

1. 시대를 이야기하는 목소리, 어디로 향하는가

2024년 12월 3일 윤석열 정부가 기습적으로 ‘비상계엄’을 선포한 초유의 상황에 맞닥뜨린 날 이후, 광화문 광장과 서울시청 앞을 가득 메웠던 수많은 외침들을 기억한다. 서울의 중심은 상반된 두 진영의 외침이 교차하는 중심지가 되었고, 서로의 목소리가 격렬하게 충돌하는 거대한 선전장이 되었다. 확성기를 통해 터져나오는 날 선 목소리와 영상들, 휘날리는 피켓과 깃발들, 그리고 그 파동에 동요하는 사람들의 표정과 웅웅거리는 분위기 속에서 때로는 감동과 결연함이 휘몰아쳤고, 때로는 알 수 없는 공포와 위압감에 소름이 돋기도 했다. 말과 글은 형체가 없지만 목소리로 발현되어 의미를 가지게 된 순간, 얼마나 강력한 힘을 가질 수 있는지, 그리고 대중은 얼마나 쉽게 동요하고 휩쓸릴 수 있는지를 실시간으로 목격했다.

그 와중에도 성평등, 사회 정의, 인권 등 보편적인 가치를 외치며 불평등한 사회구조의 변화를 쉴 새 없이 쏟아내는 여성들의 목소리와 울림이 유독 눈에 띄었다. 그녀들은 다양한 목소리들과 연대하면서 사회 변화를 적극적으로 요구하고 있었다. 누군가는 이 ‘낯선’ 여성들의 목소리를 시대가 변한 영향으로 설명하기도 하지만, 여성들의 목소리는 늘상 존재했었음을 안다. 다만, 임계치를 넘어선 분노 앞에서 그녀들은 더 이상 주변부를 맴도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이제는 광장의 중심, 그 전면에 나서서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세상을 향해 목소리를 내게 된 것이다.

그 무렵이었던 것 같다. 표현의 자유가 철저히 억압되고 검열받았던 일제강점기, 제한된 정보를 독점해 훨씬 더 우월한 존재로 인식되었을 친일 지식인들의 선전과 선동에 무방비로 노출되었을 과거 조선인들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지금의 우리에게는 다양한 선택지라도 있지만, 암울했던 그 시절의 조선인들에게는 ‘황국신민’이 되라는 강요된 외침만이 사회를 지배하는 유일한 담론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특히나 여성의 사회 진출이 제한적이었던 시절, 극소수에 불과했을 여성 지식인이 대중 앞에서 연설하고 글을 쓰는 행위는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해 사회 분위기와 대중의 인식을 좌우하는 수단으로 작용했을 것임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제야 『친일인명사전』에서 문화예술인이나 지식인의 경우에는 “그들의 사회적 지위가 다소 낮다 하더라도 지식인으로서의 사회적 역할과 책임이라는 점에서 엄격하게 다루었다. 특히 ‘내선일체’와 ‘황국신민화’, ‘대동아성전’ 등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을 합리화하는 주장을 선전함으로써 조선인을 전쟁으로 내몬 책임이 결코 가볍지 않기 때문”이라고 하며 수록 기준을 더 엄격하게 적용했던 이유가 오롯이 이해되었다. 이들의 사회적·도덕적 책임이 그만큼 무겁고 영향력이 컸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주목하게 된 인물이 바로 한국 근현대 문학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는 작가 최정희(崔貞熙, 1912~1990)이다. 친일 여성 문인 하면 대뜸 떠오르는 노천명, 모윤숙 같은 인사들보다는 덜 알려져 있지만, 그녀들과 결을 같이 하며 식민지 조선과 해방 후 문단에서도 적잖은 문학적 명성을 누렸던 소설가 최정희. 그녀도 분명 자신의 자리에서 일관되고 적극적인 자세로 자신의 목소리를 낸 여성이다. 문제는, 그 목소리가 어떤 방향을 향하고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감성적인 문장과 섬세한 여성의 내면 묘사로 사랑받았던 작품들은 그녀를 여성 문단의 선구자로 자리매김하게 했지만, 동시에 일본제국주의에 협력한 대표적인 친일 문인으로서 그들의 이념을 대변하고 확산시키는 도구가 되기를 자처했던 인물로 기록되게도 했다. 그 결과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발간한 『친일인명사전』(2009)과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서 발간한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Ⅳ-18: 친일반민족행위 결정』(2009)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이 글에서 인용하고 있는 모든 작품과 단체활동 내용은 위 자료에 기초한 것으로, 사실 확인 과정을 거쳐 작성했음을 미리 밝힌다. 시대는 다르지만, 말과 글로 대변되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어디로 향했는지, 체제에 어떻게 협력하고 어떻게 저항했는지에 대한 책임의 무게는 같을 것이다. 저울질은 우리의 몫이 아니지만, 사실관계는 확인하고 싶어 시작된 글이다. 최정희는 과연 누구를 향해, 무엇을 외쳤을까?

먼저 고백하자면, ‘인간 최정희’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그녀가 친일의 길을 걷게 된, 혹은 선택하게 된 과정에 어떤 속사정이나 불가피한 상황이 있었는지 그런 복잡한 인생사를 파헤치는 것은 이 글의 관심사가 아니다. 그녀에게도 수없이 펼쳐졌을 굴곡진 사연이라든지, 남편 김동환과의 관계, 그녀의 스승이었던 박희도를 비롯해 친일이라는 같은 궤를 그리며 살았던 모윤숙·노천명과의 인연 같은 개인적인 서사들은 굳이 언급하지 않는다. 때문에 단편적인 몇 가지 사실들만으로 최정희라는 인물의 ‘한때’를 이야기한다는 시도 자체가 불편부당하다 여겨질 수 있다는 점도 알고 있다. 그러나 결코 가볍지 않았던 그 ‘몇 가지’ 사실들을 조합해 보는 것만으로도, 최정희의 친일 행위와 그것이 당시 조선 사회에 미친 영향력에 대해서는 한 번쯤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2. 최정희, 일제의 식민통치 협력을 위한 수단으로 문학적 역량을 소비하다

『친일인명사전』에 따르면, 최정희는 1912년 12월 3일 함경북도 성진에서 태어났다. 1929년 서울 중앙보육학교를 졸업한 후, 1930년부터 1931년까지 일본 도쿄(東京) 미카와(三河) 유치원에서 보모로 일했다. 1931년 귀국 후에는 삼천리사 기자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1934년에는 첫번째 남편인 영화감독 김유영과 함께 카프(KAPF :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 계열의 연극단체 관련 사건, 이른바 ‘신건설사 사건(카프 제2차 검거사건)’에 연루되어 전주형무소에 투옥되었다가 8개월 후인 1935년에 석방되었다. 이후 1936년 6월부터 1937년 7월까지 『조선일보』 출판부와학예부기자를 지냈고, 1942년 5월부터는 경성방송국에서 근무했다.

문단에 데뷔한 것은 1931년 10월호 『삼천리』에 발표한 소설「정당한 스파이」였지만, 최정희 본인이 사실상의 등단작이라고 밝힌 작품은 1937년 4월호 『조광』에 발표한 「흉가」였다. 초기에는 동반자 계열의 작품을 썼으나, 출옥 후에는 여성들의 심리나 운명을 다룬 작품을 주로 발표하며 독자들의 공감을 얻었다고 평가된다.

일제의 침략전쟁이 본격화되고 식민지 조선에도 엄혹한 전시체제가 구축되면서 조선총독부는 문학, 영화, 음악 등 문화예술 영역 또한 침략전쟁을 미화하고 선전하는 데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소설가이자 기자로 활동했던 최정희의 행보에 변화가 감지된 시기도 이러한 총독부 정책과 맞물린다. 그녀의 작품활동과 단체활동이 집중되는 1940년대에 접어들면, ‘신체제하 부인의 역할’, ‘조선문학의 역할’, ‘지원병·군인’, ‘군국(君國)의 어머니’ 등 전쟁을 옹호하고 미화하는 키워드들이 반복적으로 등장하며 전시체제에 협력하는 모습이 점점 더 구체화된 것이다.

이는 전시체제 하에서 문학인이, 특히 여성이 수행해야 할 역할을 주입시키고 여성의 전쟁 동원과 희생을 당연시하고 미화하는 기류를 형성하는데 주효했을 것이다. 당시 조선총독부가 식민지 조선의 여성들에게 요구했던 국민상과 시대적 요구에 어떻게 맞닿아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것으로, 최정희가 문학을 통해 적극적으로 응답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시대적 분위기에 대한 단순한 체제 순응을 넘어, 일제의 전쟁 수행을 위한 선전활동의 중심에서 그녀 자신의 문학적 역량을 적극적으로 이용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물론 이러한 양상의 글쓰기와 말하기가 최정희 작가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친일인명사전』에는 친일 여성문인 3명이 실려 있는데, 시인으로 잘 알려진 모윤숙(毛允淑, 1909~1990)과 노천명(盧天命, 1911~1957) 또한 최정희와 비슷한 행보를 보인다. 그 엄혹한 시대를 살아내야 했던 이들의 작품 중 상당수는 조선총독부에 의해 기획된 작품이라 해도 무방할 정도로 체제 선전의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다. 친일문학에 대한 전문가들의 반복된 지적처럼, ‘당시 상당수의 문화예술인들이 일제의 강압적인 정책 하에서 친일적인 행보를 보일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고 하는 점도 일정 부분 감안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니 당시의 ‘시대적 상황’이란 것을 염두에 두고 최대한 너그러운 마음을 장착하고서, 그녀의 친일작품 중 몇 편만 마주해 보자.

1) 「2월 15일의 밤(二月十五日の夜)」(『신시대』,1942년4월호)은 후방에서의 여성의 역할이 애국반 활동이나 근검, 절약과 같은 생활개조에 한정되어 있더라도 그것이 결국엔 총동원 체제에 협조하는 길이라는 내용이다. 여자의 일터는 가정이라고 생각하는 남편 남준과 애국반 반장이 된 선주 사이의 소소한 갈등을 다루고 있다. 선주는 남편을 설득하기 위해 “잠자리처럼 곱게 나는 비행기가 아름다워 보인 시절도 있었겠지만, 그런 미는 이미 소용없어진 것이 아닐까요? 아름답게 나는 것보다, 불덩어리가 되어 적기를 뒤쫓아가며 싸우는 비행기가 훨씬 아름답다고 생각해요. 그와 마찬가지로 여성의 미도 그렇다고 생각해요.… 하늘을 바라보며 저 하늘을 어떻게 하면 잘 지킬까 하고 생각하는 여자가 훨씬 아름답게 보인다고 생각해요”라고 말한다. 여성의 입장에서 우회적으로 대동아전쟁을 찬양하는 진술이다. 부부간의 갈등은 라디오에서 (소설의 제목인 2월 15일의 밤) 싱가포르 함락 소식이 전해지면서 해소된다. 이 작품을 조선어「2월 15일의 밤(二月十五日の夜)」, 『신시대』, 1942년 4월호로 다시 쓰고, 내용을 추가한 작품이 「장미의 집」(『대동아』1942년 7월호)이다.

2) 「황국의 아들의 어머니에게(御國の子の母に)-半島の徵兵制と文化人(8)」(『경성일보』, 1942년 5월 19일 석간 3면)는 ‘황국’의 아들, 즉 전쟁에 나가 싸우는 군인이나 지원병을 낳고 기른 어머니들에게 자신의 아들이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일을 자랑스럽게 여겨야 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으로, 조선 여성들이 전쟁터에 자식을 바치는 것을 정당화하는 데 초점을 맞춘 것이다. “5월 9일(조선인 징병제 실시일. 실제로는 5월 8일), 이날부터 저는 누가 무어라 해도 위태로운 자세를 취하지 않을 자신을 갖고 있습니다. 조금도 틈이 없이 꽉 차 있기 때문입니다. 구석에서 구석까지 조금의 간격도 불만도 없이 마음이 맑아 있기 때문입니다. 조금도 비틀어짐이 없이 남 앞에서도 친구 앞에서도 황국신민으로서의 신념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의 저는 아이들에게 ‘나, 전쟁에 가서 죽어도 엄마는 울지 않겠나?’고 물었을 때, 당황하지 않고 대답하기로 생각했습니다. … 이제 저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고 잠자코 나라를 위하는 여인이 되겠습니다. 나라의 역사를 만드는 아들의 어머니가 되기 위한 준비를 하겠습니다.” 당시 조선총독부가 강조했던 ‘군국의 어머니’상을 대변하는 목소리라고 할 수 있겠다.

3) 「우리도 君國의 어머니: 五月九日」(『半島の光』1942년7월호)는 일본각의에서 조선인 징병제 실시를 결정한 5월 9일(실제로는 5월 8일)을 기념하면서 “5월 9일, 이날 우리 반도에도 징병제도가 실시되었습니다. 다시 말씀한다면 우리 반도 청년들도 병정이 되어 어깨에 총을 메고 나라를 위하여 싸울 수 있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우리의 아들을 훌륭하게 만드는 힘도 우리 손에 있고 그 비결도 방법도 우리 어머니한테 있고, 우리나라 일본을 세계에 빛나게 하는 것도, 우리 국민을 굳세게 자라나게 하는 힘도 우리에게 있습니다. 우리는 아무 소리 말고 오직 우리의 아들을 굳세게 참되기 기르기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라고 군국의 어머니 역할을 강조하며 식민지 조선의 여성들 또한 일본 제국의 ‘군국의 어머니’로서 역할을 다해야 한다고 했다.

4) 「야국초(野菊抄)」(『국민문학』 1942년11월호)는 한때 사랑했지만 자신이 임신한 사실을 알고 떠나가 버린 옛 애인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되어 있다. 여자 주인공 ‘나’가 아들 승일을 데리고 지원병훈련소를 방문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소설에서 훈련소의 하라다 교관은 “반도 청년이 훌륭한 군인이 되려면 우선 무엇보다도 어머니들의 힘이 크다는 겁니다. 역사상 위대한 위인들을 보더라도, 그 배후에는 반드시 어머니의 위대한 힘이 숨어 있는 거니까…”라고 말한다. 부인교화의 차원에서 군국의 어머니상을 강조하는 것이다. 또한 이 소설은 지원병훈련소의 잘 짜여진 일상, 훈련된 지원병들의 모습을 허구의 형식을 빌려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나’와 아들 승일은 지원병들의 절도 있는 생활과 건강함, 열정에 교화되어 제국의 군인이 될 결심을 더욱 다진다. ‘당신’에 의해 ‘작고 가련한 들국화’로 비유됐던 ‘나’는 일본 군인정신에 입각하여 아들을 전쟁터에 보내고 또 아들이 죽어도 결코 울지 않는 강인한 ‘군국의 어머니’가 될 것을 맹세하는 내용이다. 작품 속에 체제 선전의 목적이 교묘하게 녹아들어 있음을 알 수 있다.

5) 「징용열차」(『반도의 빛』 1945년2월호)는 태평양전쟁 이후 본격화 된 남성노동자 징용을미화하고 선동한 작품이다. 강제징용이라는 비극적인 현실을 다루고 있지만, 이러한 징용은 불가피한 것이었고 숭고한 희생이라고 그려졌다. 결혼한 지 8개월 만에 원치 않는 징용열차를 타게 된 병태는 열차 안에서 국민동원총진회(國民動員總進會)에서 파견된 사람들의 연설을 듣게 된다. 이들은 “우리는 이 전쟁을 이기고 나야 한다는 결의를 가집시다. 이기기 위해서 부모도, 형제도, 아내도, 아들도, 딸도, 남편도, 잠깐씩 돌려놓읍시다. 큰 것을 위해 사사로운 것을 버립시다”라고 주장한다. 또 전쟁수행에 앞장설 ‘남자’의 위대한 힘을 찬양하면서 “이제 이 차를 타고 가서 우리를 업신여기고, 우리를 학대하고 우리의 피를 빨아먹으려고 아귀처럼 달려드는 적 아메리카를, 영국을 때려부술 비행기를, 대포를, 군함을 만들 위대한 힘을 가진 남자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이제 가셔서 할 일이 너무 큽니다.”라고 한다. 이에 응징사들은 모두 고무되었고, 병태 역시 비로소 자신이 영미(英米)를 구축(驅逐)하고 동양 민족을 구원할 중대한 사명을 가졌다는 것을 자각하게 된다는 내용이다.

「징용열차」를 제외하고는 1940년대 그녀의 소설 속 여성 주인공들은 대부분 젊은 여성으로, 전시체제하의 가정생활을 합리화하고 개조하는데 앞장서거나, ‘군국의 어머니’로서의 역할을 자발적이고 적극적으로 수행하는 존재로 그려진다. 1940년대, 일제의 침략전쟁이 본격화되고 조선 사회 전반에 ‘총력전’ 체제가 확산되던 시기에 쓰여진 이 여성들의 이야기를 단순히 시대적 분위기를 충실하게 반영한 것이었다고만 이야기할 수 있을까? 그렇다기에는 이 소설을 읽을 조선의 여성들에게 주입되는 제국의 논리가 너무나 뚜렷하게 보이는 것이 아닐까?

최정희는 작품 속 여주인공들의 입을 빌려, 그리고 문학이라는 형식을 빌려 식민지 권력과 문학의 상관관계를 여실히 드러냈다. 이를 통해 일제의 의도대로 조선인들의 전시동원을 정당화하는 선전 도구로 활용했다. 더욱이 이러한 활동은 일시적이거나 즉흥적인 것이 아니라 연속적이고 체계적 양상을 보인다.

최정희는 자신이 가진 강력한 문장의 힘으로 ‘제국의 목소리’를 대신해 조선인들에게 황국신민으로서의 의무를 강요하고, 일본의 전쟁 수행에 대한 지지를 호소했다. 이만하면 그녀가 외부의 강압에 못 이겨 어쩔 수 없었던 선택의 결과로 글을 쓴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그녀 스스로가 일본제국주의의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을 지지하고 정당화하는 구조에 협력하기를 ‘선택’해 적극적으로 글을 썼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강요된 선택’과 ‘자발적 협력’ 사이 어딘가에서 그녀의 자리를 찾아야 하는지 고민할 필요가 있을까? 이 ‘몇 편’의 작품만 보더라도, 그녀는 이미 경계선을 넘었다.

3. 펜으로는 친일문학을 써 내려가면서, 입으로는 전쟁을 외치다

최정희의 친일 행적은 단순히 문학작품을 쓰는 것에만 그치지 않았다. 그녀는 여러 친일단체에서 활동하면서 낭독회, 좌담회, 강연회 등에 참석했다. 때로는 거리를 누비며 조선인, 특히 ‘여성’들을 대상으로 일제의 침략전쟁에 협력하기를 촉구하며 친일행위에 깊숙이 관여했다. 이런 면에서, 최정희는 펜으로는 일제의 문화정책에 적극 협력하는 문학인이었고, 입으로는 총후보국(銃後報國)에서 전력을 다할 것을 외치는 선동가이기도 했다.

최정희는 ‘총동원체제하에서 문필보국(文筆報國)’한다는 취지 아래 조직된 조선총독부의 외곽단체인 조선문인협회에서 1941년부터 1942년까지 간사로 활동했는데, 그 이전에도 이 단체에서 주최하는 활동에 참여하면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1939년 12월 부민관에서 개최한 ‘문예(文藝)의 밤’과 1940년 2월 평양에서 개최한 문예강연대회에서 낭독회를 가진 것이 그 예이다. 이외에도, 1940년 10월 육군 ‘문사(文士)부대 육군지원병훈련소 1일 입소’ 행사에 참가한 후 쓴 소감기 「진실로 이기라」(『삼천리』, 1940년 12월호)에서는 조선인 지원병이 ‘한 사람의 병사’가 되기에 충분하다고 평가하며 지원병 제도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다. 1941년 7월에는 ‘용산 호국신사 어조영지(龍山 護國神社 御造營地)’ 근로봉사에 몸소 참여하기도 했다.

1941년 11월에는 ‘국민문학의 공작정담회’에 참석해 “우리들한테도 총을 잡는 그러한 마음의 준비가 없어선 안 될 것 같아. 그런 마음이 아니고는 국민문학도 국책(國策)문학도 안 써질 것 같으니까…일본인이 되려는 그 생각 그 생활을 그리는 데 있지요. 속일 수 없는 일본인이 되리라는 생각을 문학화하여야겠지요. 문학은 어디까지나 정직한 것이니까요”라고 했다. 스스로 황국신민이 되어야겠다는 의지를 다짐한 것으로, 또 이것을 문학작품에 담아야 한다는 의지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이기도 하다.

1941년 11월에 참석했던 ‘내선작가간담회’는 ‘임전체제(臨戰體制)가 더욱더 강화되어 가는 때에, 작가의 마음가짐도 역시 그에 대응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어’ 국민문학의 건설에 대한 정당한 방향과 구체적인 방법 문제에 대한 주제를 다룬 것이었다. 또 1942년 6월에 참석했던 ‘일본 군인이 되는 마음가짐’을 듣는 좌담회는 징병제 실시를 당하여 지도자적 입장에서 먼저 자신들이 군인정신의 진수를 파악한 후에 미래의 제국 군인이 되어야 할 반도 청소년을 올바르게 지도해 가려는 의도에서 개최된 것이었다. 그 사이 1941년 12월에는 ‘결전문화대강연회(決戰文化大講演會)’에서 시를 낭독했는데, ‘시국적작품(時局的作品)’을 조선어로 낭독하게 해 전 조선 민중에게 호소하려는 것이었다.

그녀는 문학이라는 본업을 넘어, 전시체제 강화를 위한 단체에서도 활동하며 친일 행보를 이어간다. 1941년 9월 7일, 임전대책협력회(臨戰對策協力會)의 채권봉공대원(일명 채권가두유격대, 本町隊 편입)에 참가해 일제의 전쟁비용 조달을 목적으로 하는 1원짜리 꼬마채권을 팔았다. 이것은 ‘애국운동은 이름보다도 실천이 귀하다’는 임전대책협력회의 운동방침을 선전하는 것으로 민중들에게 자발적인 애국지성을 발휘하도록 지도하는 동시에 저축보국운동에 협력 하라는 취지를 대중에게 인식시키기 위해 실행되었다.

더 나아가 임전태세의 정비·강화를 목적으로 국민총력조선연맹의 지도로 임전대책협력회와 흥아보국단을 통합해 1941년 9월 조선임전보국단(朝鮮臨戰報國團)을 조직할 때 발기인(경성)으로 참여한 뒤 10월부터 1942년 10월까지 평의원으로 활동했고, 1941년 12월에는 전시생활부원의 직책도 맡았다. 조선임전보국단 주최로 개최된 다양한 행사에도 참여했는데 여성들을 대상으로 한 행사에서 그녀의 역할은 두드러졌다. 1941년 12월 27일 ‘전시하 생활쇄신운동 및 군수자재헌납운동협력의 부인대회’와 같은 날 행해진 ‘부인결전대연설회’에 연사로 참여해 「군국(君國)의 어머니」라는 주제로 강연을 했다. 이 강연에서는, 연약한 마음의 소유자인 자신이 요새 와서 “불이래도 삼키고 내쏘는 탄환이래도 능히 받을만한 용기와 자신과 신념을 가지려고 노력”을 하게 되었는데 그 동기는 “지나사변(支那事變)에 있는 것도 아니고 일미영전(日米英戰)에 있는 것도 아니고 어머니의 가르침도 아니고 어느 스승의 타이름도 아닙니다. 제 아이올시다. 국민학교 3학년에 다니는 열 살 먹은 아이올시다”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전쟁에 나가 죽으면 엄마는 울 것이냐는 아이의 질문에 “엄만 네가 전쟁에 가서 죽는다면 춤을 추겠어”라고 답했다는 놀라운 발언을 하기도 했다. 아들을 키우고 있었던 엄마 최정희가 하는 말을 들은 청중들의 반응은 어떠했을까?

이후로도 그녀의 단체 활동은 계속되어, 1942년 2월 조선임전보국단부인대 군복수리 근로에 동참하고, 5월에는 ‘군국의 어머니 좌담회’에 참석해 징병제에 대한 조선의 어머니들의 결심과 각오를 다지는 데 일조하기도 했다. 이 좌담회는 이제는 아들을 낳으면 국가에 바치겠다는 결심을 하며 「군인의 어머니」 된 영예를 늘 자랑하는 의지로서 나아가야 할 것이라는 각오를 수립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전시체제에 협력하기를 선택했던 그녀는 어쩌면 자신의 말과 글의 힘에 잠식되어, 그 스스로도 제 말에 설득되어 버린 것은 아닐까?

일제는 그들이 바라마지 않는 이상적인 ‘어머니상’을 최정희라는 매개체를 통해 손쉽게 조선 여성들에게 내면화시킬 수 있었다. 그녀가 의도했든 하지 않았든, 일본의 징병제 도입을 선전하고, 조선 여성들이 그 체제에 스스로 복무하도록 설득하는 데 앞장선 문화정치인의 역할을 수행한 셈이다. 그 결과, 일본제국주의의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에 협력한 대표적 문인으로 최정희를 손꼽는 데 주저하는 이는 없을 것이다.

4. 시대를 막론하고 부여잡아야 할, 목소리의 책임을 요구한다

해방 이후 그녀는 단 한 번도 자신의 친일 행적을 해명하거나 사과하지 않고 침묵으로 일관했다. 한국전쟁 시기 최정희는 공군 종군작가단 ‘창공구락부’에서 활동하며 ‘또 다른 전선’에 있었다. 이후에도 왕성하게 작품활동을 이어가며, 『천맥』(1948)과 『풍류잡히는 마을』(1949), 장편소설로 『녹색의 문』(1954)·『끝없는 낭만』(1958)·『인간사』(1964) 등을 꾸준히 써냈다. 각종 문학상을 수상하고, 1969년 한국여류문학인회 회장, 1970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과 소설가협회 대표위원 등을 지냈다. 1970년 8월에는 국민훈장 모란장도 받았다. 1990년 12월 21일 사망하기까지 그녀는 여전히 ‘한국 여성문학의 상징’으로 문단의 중심에 있었다. 제국주의 침략전쟁에 협력했던 작가가, 어떻게 해방 이후에도 아무런 반성과 사과, 해명도 없이 문단의 중심에서 명예를 누릴 수 있었던 것일까를 파헤치고 싶기도 하지만, 이 또한 이 글에서 다룰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다만, 우리는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그녀의 글과 목소리는 누구를 위한 것이었을까? 최정희는 분명 문학인으로서 훌륭한 작품을 남겼다. 하지만, 1930년대 후반부터 해방될 때까지의 시기로만 한정해서 보자면, 식민지 권력에 협조해 “아들을 기꺼이 전장으로 보내자”, “여성은 군국의 어머니가 되어야 한다”, “황국신민으로서 여성의 책임을 다하자”는 목소리를 줄기차게 냈다. 그녀의 목소리에서 강조되는 여성들의 모습은 단순한 시대상의 반영을 넘어선 것이었다. 그것은 당대 지식인이자 작가로서 그녀가 식민지 권력에 어떻게 반응했으며, 자신의 문학적 능력을 어떠한 방향으로 활용했는지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일제강점기를 살아가면서 그녀 스스로가 식민통치를 정당화하는 구조에 협력하기로 한 ‘선택’은 지극히 개인적인 선택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녀의 선택이 자신에게 주어진 재능을 이용해 식민지 권력의 부당함을 정당화하고, 전시상황에서 그들의 논리를 대변해 조선의 청년들로 하여금 전쟁에 동원되는 것을 영광스러운 행위로 받아들이도록 하고, 조선의 어머니들로 하여금 ‘군국의 어머니’가 되길 주저하지 않도록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그녀의 글과 목소리를 통해 식민지 백성이면서 동시에 제국의 일원으로서 어떤 식으로든 전쟁에 기여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모순된 정체성을 무의식적으로 내면화시키도록 했다면, 우리는 그녀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어야 한다. 제국주의 정책을 실현시키기 위한 도구가 되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당신의 ‘선택’이 조선 사회에 미쳤을 파급효과는, 어떤 변명으로도 희석될 수 없어 그 역사적 무게를 가늠할 수조차도 없다고 말이다.

시대를 막론하고 말과 글에는 강력한 힘이 있어, 때로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무기로 작용하기도 한다. 따라서 목소리를 내는 목적과 방향이 무엇이든, 그로 인해 바뀔 수도 있는 세상에 대한 도덕적·역사적 책임을 온전히 떠안을 수 있는 성숙한 우리가 되기를 바란다. 지난겨울과 올봄, 서울 한복판에서 외쳤던 우리들의 목소리도 마찬가지이다. 이 외침은 누구에게 무엇을 말하기 위한 것이었고, 또 얼마만큼의 무게를 가졌던 것일까? 그 무게를 스스로 감당해낼 줄 아는 지성인이 많은 세상에서 함께 살아가기를 바란다. 수많은 목소리가 뒤엉킨 가운데서도 휩쓸리지 않고,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분별할 수 있는 깨어있는 우리가 되기를 바란다.

[참고문헌]
민족문제연구소, 2009, 『친일인명사전-최정희』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2009,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제4권 제18호
임종국 저, 이건제 교주, 2013, 『친일문학론』, 민족문제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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