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소 글방 21]
이선홍의 친일 인생은 어떻게 시작됐을까
권시용 선임연구원
도쿄에 박춘금이 있다면 오사카에는 이선홍이 있다.
식민지 시기를 살았던 조선 사람들 가운데 친일파가 있었다. 일본의 식민통치를 긍정하고 거기에 협력하는 데서 삶의 방향을 찾았던 사람들이다. 개중에는 이른바 ‘식민 본국’ 일본에서 이름을 드높인 친일파도 있었으니, 박춘금과 이선홍이 첫손에 꼽힌다. 제주 출신 고권삼은 ????오사카와 조선인????(1938)이란 책에서 “박춘금 씨는 도쿄에서 상애회를 조직하고 이선홍 씨는 오사카에서 조선인협회를 조직했다. 동과 서에서 각각 내선융화(內鮮融和) 운동을 시작했다”고 서술했다. 박춘금과 이선홍 두 사람을 도쿄와 오사카 내선융화 운동의 선구자로 평가한 것이다. 이렇게 도쿄를 무대로 상애회라는 친일단체를 지휘해 일본제국주의자들의 눈에 들려고 애썼던 박춘금이 있다면, 오사카에는 조선인협회를 이끌었던 이선홍이 있었다.
이제 오사카 내선융화 운동의 핵심 인물, 친일파 이선홍의 친일 인생을 따라가 본다. 우선 이선홍의 친일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몇 장면을 살펴보자.
<장면1>
1931년 6월 일본 오사카에 있는 조선인단체인 ‘조선인협회’는 매우 이색적인 사업을 시작했다. 바로 ‘결혼매개소(結婚媒介所)’라는 것이다. “내선융화의 열매는 제2세로부터”라는 구호 아래 조선인과 일본인을 결혼시키자, 진정한 내선융화는 민족 간 결혼에서 비로소 이루어진다는 운동이었다.
<장면2>
1932년 1월 8일 도쿄에서 이봉창 의거가 일어났다. 신년을 맞아 군대를 사열하고 돌아가던 일왕을 향해 청년 이봉창은 폭탄을 던졌다. 조선인이 살아 있다, 부당한 식민통치에 맞서 독립을 위해 뛰고 있다는 사실을 전 세계에 알린 사건이었다. 당시 일본에 살던 친일 인사들은 깜짝 놀랐다. 이 일로 일본인들의 미움을 사고, 그래서 보복이라도 당할까 두려웠다. 이선홍을 중심으로 한 오사카의 ‘조선인협회’는 1월 11일에 간부 30명이 모여 “지금부터 더욱더 충성을 다하고 내선융화하는 천황의 마음에 따라 적성(赤誠)을 다해 황은(皇恩)의 만분의 일이라도 바칠 것을 맹세한다”는 「성명서」를 내고 궁내대신, 내무대신, 경시총감에게 근신하겠다는 뜻을 표했다. 이후에도 여러 차례 조선인을 동원해 오사카성 앞이나 신사(神社)에 가서 요배遙拜 선서식을 하고, 폐회 때는 ‘천황폐하 만세삼창’을 했다. 몇 달 뒤인 4월 29일, 상하이에서 윤봉길의 의거가 일어나자, 이번에도 일본인 피해자에게 위로편지를 보내는 등 민족 독립에 반대한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장면3>
오사카의 조선인 유력자로 입지를 굳힌 이선홍은 1932년, 1936년, 1937년, 1942년 4차례 연달아 일본 중의원 의원 선거에 출마했다. 이때 이선홍이 내건 선거 구호를 확인해 보자. 이선홍은 계속해서 내선융화를 외치고 있으며, 시간이 지날수록 일본에 대한 동화주의적 주장의 농도는 짙어간다.
“내선융화 대사업에 대한 진정한 이해”
“조선인도 국회의원(代議士)이든 대신(大臣)이든 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하고 싶다” -이상 1932년 선거 구호
“오사카에서 일하는 동포를 위해 몸을 던져 일하겠다”
“조선 동포가 조금이라도 나아진다는 것은 결국 국가가 그만큼 좋아진다는 것”
“우리에게는 똑같은 야마토의 혼(大和魂)이 있다” -이상 1936년 선거 구호
“조선에 의무교육 실시, 선거법 시행, 내지도항자 장벽 철폐”
“동아민족의 친목융화, 대아시아주의”
“황도정신에 기초한 대아시아주의”
“대륙정책 수행 완성의 열쇠는 일만선(日滿鮮) 세 민족에게 있다” -이상 1937년 선거 구호
이처럼 1930년대 이선홍은 오사카를 무대로 조선인협회라는 단체를 이끌며, 조선인 사회의 지도자 위치에서 내선융화를 주창했으며, 일본 주류 사회에 진입하기 위해 꾸준히 노력했다. 당시 이선홍은 중의원 선거에 출마하며 도야마 미쓰루(頭山滿), 우치다 료헤이(內田良平) 등 일본 우익의 거두들과 긴밀하게 소통하며 이른바 ‘대아시아주의’에 깊숙이 빠져들었다. 일본의 대아시아주의는 아시아 여러 나라가 연대해 서구 열강의 억압에서 벗어나자는 주장에서 시작했지만, 실제로는 만주침략에서 중일전쟁으로 이어지는 일본의 아시아 침략을 합리화하는 구실이 되었다.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이선홍을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결정하는 근거 중 하나로 조선인협회를 이끌며 내선융화를 적극 주도했다는 사실을 들었다. 이렇게 이선홍의 친일 행적을 이야기할 때 항상 얘기되는 것이 조선인협회라는 단체, 그리고 그 단체를 통해 내선융화를 주도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선홍은 언제부터, 어떤 방식으로 내선융화를 입에 달고 살게 된 것일까.
조선인협회와 내선융화
이선홍은 1895년 2월 2일 전라남도 무안에서 태어났다. 목포에서 한두 해 기독교 학교에 다녔다는 얘기가 있다. 일찍 부모를 잃고 숙부 집에 얹혀살던 이선홍이 일본에 건너간 것은 1917년 10월 무렵이었다. 처음 오사카에서는 엿 행상, 인삼 행상을 해서 근근이 생활했는데, 도쿄에 가서 도쿄역 잡일을 하기도 했다. 1920년 오사카에 돌아와 우편국 통신사무원으로 일했다. 곧이어 이선홍은 선인형제회, 조선인협회, 간사이조선인연맹 같은 단체를 만들어 활동했으며, 이때부터 오사카의 조선인들 사이에서 지도적 위치에 올랐다.
이제 이선홍의 친일 인생과 밀접한 내선융화단체인 조선인협회에 대해 알아보자.
1922년 7월 24일, 4백여 명의 조선인이 모인 가운데 조선인협회가 설립됐다. 당시 일본에서 나온 신문은 ‘조선인의 교양에 힘쓰고 품성을 향상하며 일본인과 조선인의 융화를 꾀하려는 것’이라고 조선인협회의 설립 이유를 보도했다.
조선인협회를 설립하던 1922년 말, 오사카에는 3만여 명의 조선인이 살고 있었고, 하루에도 십여 명씩 조선인이 계속 들어오는 상황이었다. 조선인의 일본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넉넉한 집안 형편에 유학 온 일부를 제외하고 조선인 이주자 대부분은 일본 사회의 가장 밑바닥에 자리 잡게 됐다. 살 집을 구하고 일자리를 찾아 생계를 해결해야 했다. 그 어느 것 하나 쉬운 일이 없었다. 일본인들은 여간해서는 집을 빌려주지 않았다. 시끄럽다, 더럽다, 집세를 제대로 내지 않는다는 민족적 편견이 작용했다. 조선인들은 도시 외곽의 빈민가나 공터, 부락민 거주지 등에서 살아야 했다. 요즘 오사카의 코리아타운으로 잘 알려져 관광객들로 붐비는 ‘이쿠노구(生野區)’, ‘쓰루하시(鶴橋)’ 지역이 이때 조선인들이 자리 잡았던 곳이다. 일자리도 한정적이었다. 토목 공사장 노동자, 광산 인부, 날품팔이 등 비숙련 단순 육체노동이 대부분이었다.
일본에 건너온 조선인들에게 쏟아지는 민족차별은 그들의 기본적 삶을 속박하는 가장 큰 굴레였다. 그래서 조선인협회가 포커스를 맞춘 것은 ‘차별철폐’였고, 내세운 구호는 ‘내선융화’였다. 어떤 활동을 했는지 알아보자.
두 가지 방향이었다. 우선 조선인들이 더 몰려오는 것을 막았다. 조선인협회는 부산과 시모노세키에 “목적도 갈 곳도 없이 일본에 오지 마라”는 경고 팻말을 내걸었다. 일본에 건너온 조선인들이 3분의 1은 일도 얻지 못하고 곤란한 지경이다, 굶으며 비참한 처지에 놓여 있다는 내용이었다. 새로 들어오려는 사람들을 말리고 경고하는 의미도 있고, 조선인들이 더 들어오게 되면 먼저 들어온 이들의 삶이 더욱 어려워질 것을 염려하는 내심도 있었다.
다음으로 오사카의 조선인들을 대상으로 구호사업을 벌였다. 가장 먼저 발표한 것이 ‘조선촌’ 설치 계획이었다. 조선인들이 많이 모여 사는 곳에 조선인협회의 지부를 두고 그곳을 조선촌으로 만들겠다는 생각이었다. 이때 조선인협회는 ‘조선인 구제는 일본인에게 맡길 수는 없고, 조선인이 단결해 스스로 세력을 넓혀 갈 필요가 있다, 필요하면 행정당국과 싸움도 부득이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3백여 명의 조선인이 사는 오이마자토(大今里)라는 곳에 첫 ‘조선촌’을 설치했다. 그리고 이런 조선촌을 19개나 만들 계획이었다.
일본에 건너온 조선인들에게 급한 것은 일자리였다. 조선인협회는 오사카 철도역과 항구에 직업소개소를 만들었다. 날마다 들어오는 노동자들, 직업이 없어 서성거리는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소개했다. 직업이 없고 돈이 없는 이들에게 밥과 묵을 곳을 제공했다. 이를 위해 1923년 6월 니시노다(西野田) 오히라키정(大開町)에 양옥집 25동을 빌려 공동숙박소를 열었다. 여기에는 약 750명을 수용했다고 한다. 조선인협회는 오사카와 부산을 잇는 정기선을 마련할 계획도 있었고, 오사카부 당국의 지원을 받아 공동숙박소와 학교, 병원을 더 설치한다는 장대한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실행에 이르지는 못했다.
조선인협회는 조선인 차별에 항의하기도 했다. 1923년 3월, 소학교 교사가 조선인 학생을 차별한 사건이 일어나자 조선인협회는 여기에 강력 항의했다. 직접적인 사과는 받지 못했지만, 이듬해 4월 오사카부는 관할 학교들에 “제국 신민의 일부에게 차별적이고 모욕적인 언동을 하는 악습을 아직 근절하지 못해 유감”이란 공문을 보냈다. 조선인협회의 항의에 따른 결과였다.
이선홍이 경찰에게 폭행당한 일도 있었다. 1924년 2월 전기 검사원이 경찰을 데리고 와 이선홍의 집을 함부로 검사한 일이 있자, 이선홍이 그 파출소를 찾아가 항의했다. 이때 경찰들이 이선홍을 폭행한 것이다. 조선인협회 회장으로 나름 조선인 사회의 리더 역할을 하며 일제당국과도 소통하던 이선홍인데, 그런 이선홍도 일개 파출소 경찰에게 집단 폭행당하는 것이 현실이었다. 조선인협회는 이 사건을 조선인 차별 문제를 이슈화할 기회로 삼았다. 그런데 조선인협회의 접근법이 좀 미묘했다. 폭행자 처벌이나 당국의 사과가 아닌, 경찰당국에 ‘내선융화 강연회’를 개최하라고 요구한 것이다. 조선인협회는 일제당국과 일본인들의 조선인에 대한 인식을 개선하는 것이 내선융화의 과제이며, 그것이 조선인 차별을 해결하는 길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처럼 조선인협회는 일본인의 조선인 차별을 없애 조선인의 생활 안정을 추구했다. 이를 위해 조선인협회는 항일이 아닌 일제당국과의 교섭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조선인협회 설립 행사에는 조선총독부, 오사카부와 오사카시 관계자가 내빈으로 참석했다. 또 조선인협회가 각종 사업을 벌이는 데는 오사카 행정 및 경찰 당국의 협조와 지원이 필수적이었으므로, 그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려 애썼다.
조선인이 독립을 하든 멸망을 당하든 …
이선홍의 조선인협회 활동을 자세히 들여다본 계기는 간사이조선인연맹의 창립 선언문을 읽을 때였다. 1920년대 초, 일본에 건너간 조선인들이 당했을 차별의 고통, 거기에서 비롯된 반감이 잘 드러나는 것이 간사이조선인연맹의 창립 <선언>이다. 간사이조선인연맹은 이선홍이 주도해 1922년 12월 조선인협회와 노진회, 공제회 등 오사카, 교토, 고베 지역 20개 단체가 모여 만든 연맹이다. 그 창립 선언문의 한 대목을 읽어보자.
손도 발도 잡아 뜯긴 거미나 게처럼, 모든 인간적 무장이 강제로 해제당하고 잡아 뜯겼는데도, 걸어라 일해라 스스로 먹어라 하고 채찍질 당해온 형제여. 언제까지 우리는 손발을 뜯긴 채로 스스로 걷고 스스로 구하고 스스로 일하고, 그리고 먹을 수 있을 것인가. (중략)
융희 4년, 즉 메이지 43년, 일본과 조선이 합병됐다. 그러나 그것은 이른바 높은 사람들이나 부르주아 계급의 합병이었다. 우리 평민이며 무산자들에게는 아무런 고마운 것도 없었음은 물론 우리와 일본인의 합병은 아니었던 것이다. 애당초 우리는 조선인이 독립을 하든 멸망을 당하든 관계하거나 고려할 필요도 없다. 조선이 독립한다고 해도 우리 무산민이 행복을 기대하기에는 너무나 쓰라린 경험을 많이 가지고 있다.
이 선언을 ‘독립 반대’로 읽어야 할까. 선언문은 “우리는 이리하여 인간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것이다. (중략) 전국에 산재하는 우리 동포여 단결하라”라는 말로 끝을 맺는다. 이어진 <강령>에는 “우리는 조선 독립 정치적 운동과 교섭 없이 전념으로 인류의 완전한 행복을 위해 맹진한다”는 조항도 있다.
그동안 간사이조선인연맹에 대해서는 선언문과 강령에 보이는 이런 문구에 더해, 연맹을 주도한 이선홍의 친일 협력 행적이 맞물려 조선 독립을 부정한 친일단체로 단정했다. 그렇지만 “조선인이 독립을 하든 멸망을 당하든” 상관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심정을 깊이 이해해 볼 필요가 있다. 이런 말을 한다고 다 친일파일까? 조선의 가장 밑바닥을 산 사람들, 도망치듯 일본에 건너와 여전히 가장 밑바닥을 전전하는 사람들이, ‘조선이 독립한다고 우리에게 행복이 찾아올까’라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을까? 조선에서 살았지만 같은 민족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 독립운동에 나선 사람들도 독립한 뒤에 올 세상에 대해서는 각자 다른 생각을 품고 있었으니까. 이선홍도 이선홍이지만 조선인협회나 간사이조선인연맹에 가담했던 다수의 조선인들 에게 감정이입해 보는 계기였다.
이런 선언문이 나온 데는 일본 ‘수평사(水平社)’의 협력과 지원이 있었다. 수평사는 학대받고 차별받는 일본의 ‘부락민’에 대한 차별을 철폐하려는 운동단체다. 실제 간사이조선인연맹 ‘창립 선언문과 강령, 결의문’을 작성할 때는 수평사의 기모토 본진(木本凡人)의 직접적 영향이 있었다. 일본의 부락민과 피식민 조선인은 차별받고 멸시받는 존재로서 서로를 공감하고 연대하려는 마음이 절로 일어났을 것이다.
또 간사이조선인연맹에는 최선명이란 아나키스트의 역할이 있었다. 아나키즘은 국가권력이나 자본에 의한 지배와 일체의 계급을 거부하고 개인의 자유의지와 사회적 평등을 지향한다. 최선명은 아나키스트로서 일본 수평사와 조선의 형평운동을 매개하는 역할을 했다. 수평사와 간사이조선인연맹이 힘을 모아 조선인, 특히 상애회로부터 제주 출신 조선인이 받는 차별을 규탄하는 운동을 펼쳐나갔다. 흥미로운 사건도 있었다. 1924년 미국에서 일본인도 유색인종이라고 미국 이민을 전면 금지하자 일본 수평사는 전국대회를 열어 미국의 유색인 차별, 일본 내부의 부락 차별, 일본인의 조선인 차별에 대한 반성을 촉구했다. 간사이조선인연맹도 이 대회에 ‘우리는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일본의 모멸을 받는데, 일본인 당신들도 유색인종이란 이유로 미국에게 배척을 받았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차별받고 배척받는 심정을 이제 알겠느냐, 하는 뜻이 담겼다고 생각한다.
맺음말
이 글을 쓰며 친일파를 옹호한다는 오해를 살까 봐 걱정했다. 계속 고민한 것은 친일이라는 것이 어느 한순간 결심하는 것인지, 서서히 물들어가는 것인지였다. 마치 ‘사랑이란 게 처음부터 풍덩 빠지는 줄로만 알았지, 이렇게 서서히 물들어 버릴 수 있는 것인 줄 몰랐어’라는 영화 속 대사처럼, 이선홍의 친일은 서서히 물들어갔다고 생각한다. 내선융화를 입에 달고 산 사람이지만, 처음 오사카에서 활동을 시작할 때 이선홍이 외친 내선융화는 차별받고 고통받는 조선인들의 삶을 개선해 보려는 구호였다고 생각한다. 또 그 과정에서 자신의 사회적, 경제적 지위도 높여보자는 욕망의 표현이었던 것 같다.
그렇지만 이선홍을 둘러싼 환경은 그리 우호적이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일본 행정 당국, 경찰 당국은 조선인들의 집단 활동을 곱게 보지 않았다. 그것이 내선융화를 외치는 일일지라도. 거기다 점점 늘어난 오사카 조선인 사회에서 아나키즘의 기세는 쇠락하고 볼셰비즘의 영향력이 크게 자라났다. 볼셰비즘 계열의 조선인 노동단체가 성장할수록 이선홍 세력은 위축되었다. 그러는 동안 이선홍이 외치는 내선융화의 의미는 차츰 조선인과 일본인의 실질적인 민족 결합으로 바뀌었고, 이선홍 자신은 일제 권력에 가까이 다가가고 있었다.
이선홍은 일본 중의원 선거에 줄기차게 나갔지만, 네 번 모두 떨어졌다. 1937년 선거에서는 도쿄의 박춘금이 7,915표를 받아 당선됐는데, 오사카의 이선홍은 10,009표를 받았는데도 낙선하고 말았다. 『오사카와 조선인』에서 고권삼은 ‘박춘금 보다 표를 더 획득했는데도 낙선했으니 이선홍의 운이 참 안 좋다’며 안타까워했다.
이렇게 중의원 선거에 줄기차게 나가며 권력을 쫓아가는 동안 이선홍의 친일협력은 점점 짙어져 갔다. 1930년 후반부터는 일본이 벌인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하는 행태를 보였다. 1938년에는 조선에 지원병제도를 실시해서 감사하다는 뜻을 표하며 메이지 일왕의 무덤(桃山御陵)에 참배했다. 1941년 12월에는 오사카협화협력회를 결성하고 위원장을 맡았다. 오사카협화협력회는 침략전쟁에 재일조선인을 동원하고 조선인에게 황민화 정책을 실시하려는 조직으로서, 오사카의 조선인 청년 3천 명을 모아 ‘성전완수대강연회’를 개최했다.
이선홍은 1944년 9월 12일 병으로 사망했다. 향년 50세였다.
[참고문헌]
고권삼, 『오사카와 조선인(大阪と半島人)』, 1938
『친일인명사전』(민족문제연구소, 2009)
『재일조선인단체사전1895~1945』(민족문제연구소, 2021)
塚崎昌之, 「1920年代, 大阪における內鮮融和時代の開始と內容の再檢討」, 『재일조선인사연구』37,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