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김희원 경기동북지부장을 추모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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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사]

김희원 경기동북지부장을 추모하며

방학진 기획실장

독립운동가 중 후손이 확인되지 않아 훈장을 전수하지 못한 경우는 현재 18,162명 중 7,278명(40%)에 이른다. 역사에 이름 석자만 남겼을 뿐 훈장을 받아서 보관할 후손조차 없는 독립운동가들이 이렇게나 많다. 34년 전 민족문제연구소가 창립되자 당시 후원회원으로 참여한 시민들은 스스로를 ‘21세기 독립군’이라 자처하며 연구소 활동에 물심양면으로 힘을 보탰다.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 연구소를 위해 헌신한 많은 분들이 유명을 달리하고 계시지만 제한된 민족사랑 지면 관계로 일일이 그분들의 노고를 남기지 못해 늘 안타깝고 죄송했다. 멀지 않은 시기(어쩌면 창립 35주년이 되는 내년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에 ‘역사정의 실현’이라는 추상적 기치를 『친일인명사전』 편찬과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이라는 구체적 현실로 만들어낸 연구소 후원회원들의 성원을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 상근자로서 최소한의 도리라고 늘 생각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지난 1월 23일 73세를 일기로 별세한 김희원 경기동북지부장에 대해 짧게나마 쓰고자 한다.

김희원 지부장은 1952년 서울 사대문 안에서 부유한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님은 해방 직후 이화여대 약학과를 졸업하고 다시 서울여자의과대학(현 고려대 의대)을 졸업하고 의사로 활동했다. 어릴 적 기억으로는 어머니의 이대 약학과 1년 후배인 손명순(김영삼 전 대통령 부인) 여사가 집에 찾아오거나 장택상 씨 집안과도 교류했다고 한다. 집이 서울 시내 한복판이었지만 한국전쟁 중에도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생활을 했던 것은 아마도 부모님 덕분이었을 것이다. 대학 입학 후에는 공부보다는 음악다방 DJ 같은 자유로운 생활에 몰두하다 부모님의 강권으로 해군에 ‘강제 입대’했다. 제대 후에도 자유병은 치유되지 않아 답답한 한국을 떠나고 싶어했다. 당시에는 해외여행은 물론 여권 발급조차 어려운 시기였기에 오랫동안 해외에 나가는 방법을 궁리한 끝에 찾은 결론은 항공사 승무원이 되는 길이었다. 요즘은 서울-파리 노선이 하루에도 수십 편이지만, 당시에는 파리에 도착하면 다음 비행기가 오는 일주일을 온전히 파리에서 머물러야 했다. 김희원은 그것이 좋았다. 그래서 대한항공의 취항 도시 곳곳을 마음껏 누빌 수 있었다. 그러다 같은 회사 동료와 만나 결혼해 미국에 정착했다. 미국에서도 네덜란드 국영 항공사 KLM에 스카우트되어 풍족한 생활을 영위했고 이후 개인 사업으로 전업했다. 김 지부장은 1996년에 한국에 돌아왔다. 당시 한국은 전원주택 붐이 일던 시기였기에 김 지부장은 미국의 정통 통나무집 시공업체의 한국 지점인 애스퍼라인 코리아 대표가 된 것이다. 이후 IMF로 인해 사업적으로 크게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미국에서 직수입한 통나무로 양평군 연수리에 자신만의 통나무집을 지어 정착했다.

여기까지가 김희원 지부장의 인생 전반기라면 그의 인생 후반기이자 황금기는 2002년 노사모 가입, 2004년 민족문제연구소 가입부터이다. 2004년 친일인명사전 편찬 국민모금 소식을 접하고 곧바로 후원회원으로 가입한 이후 그는 거의 모든 연구소 행사에 참여했다. 또한 많은 수의 구리, 남양주, 가평, 양평 노사모 회원을 연구소 후원회원으로 가입시켰다. 기록을 보니 김희원 지부장이 가입시킨 후원회원은 약 170명이나 된다. 따라서 그가 민족문제연구소 경기동북지부장을 맡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2011년 양평에 몽양여운형기념관이 개관되자 김 지부장은 몽양아카데미에도 적극 참여하고 후원자들을 서로 연결했으며 2014년 세월호 참사 이후 만들어진 양평 ‘바람개비들이 꿈꾸는 세상(바꿈세)’에도 역시 열정적으로 참여했다. 특히 2009년 노무현 대통령 서거 후 만들어진 노무현시민학교의 초대 동창회장을 맡아 노무현 1주기 추모음악회에서 합창단을 조직해 무대에 섰는데 그에게 있어 가장 가슴 뭉클한 경험이었다고 한다.

2019년 간암 수술 이후 다른 곳으로 암이 전이하면서 통원치료를 받았지만 자신의 운명을 예견한 듯 작년 5월 연명치료 거부 사전 의향서를 작성하였다. 올해 2월 1일 서울 충무로 공간 채비에서는 100명이 넘는 분들이 참여한 가운데 민족문제연구소 경기동북지부, 노무현시민학교 총동창회 공동 주관으로 김희원 지부장을 기억하는 추모행사가 열렸다. 전시된 고인의 유품 중 많은 것이 연구소 관련 회의자료, 자료집, 도록, 도서, 기념품, 깃발 등이었다. 임헌영 소장, 이재정 전 교육감, 김정섭 전 공주시장 등이 고인을 추억하는 말씀을 나눴다.

지난해 12월 26일 고대구로병원에서 양평 자택으로 오는 승용차 안에서 힘겨운 와중에도 김희원 지부장은 하루빨리 윤석열을 체포하고 다음 정부에서는 반드시 ‘반민족청’(반민족행위자 수사기관)을 신설해야 한다고 여러 차례 이야기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아! 민족문제연구소. 아직 해방되지 않았다고 정부가 주는 훈장을 거절한 고 조문기 이사장 그리고 나라를 팔아먹고 동족을 죽인 친일파들이 득세한 세상에 삐뚤어진 나라와 역사를 바로 알리겠다고 이 나라와 민족을 위해 박봉에도 굽히지 않고 일하는 이들을 난 지금도 만주벌판에서 총 맞아 죽고, 얼어죽고, 굶어죽은 우리 선조들과 같은 독립군이라 부르고 싶다. 민족문제연구소여, 영원하라!” – 2012년 5월 30일 고인의 페이스북에서

“내 인생을 바꿔논 책(『친일문학론』). 미친 듯이 세계가 좁다고 설치고 돌아다니던 내가 80년초 이 책을 읽고 경악했다. 교과서에 실린 서정주, 노천명 등 거의 대부분의 글이 악질 친일파의 글이란 사실은 큰 충격이었고 우리 근현대사에서 친일파의 뜻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게 해준 책이다.”- 2017년 6월 18일 고인의 페이스북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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