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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대통령 권한대행이 된 친일파… 믿기 힘든 기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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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성의 히,스토리] 친일파의 재산 – 백낙준

▲[현충원 안장 친일파] 백낙준 묘지민족을 붙들고 살리기 위해 ‘친일’ 을 택했다는 사람, 백낙준 친일파 백낙준의 묘는 국가유공자1묘역에 자리해 있다. 유공자1묘역은 이승만 대통령 묘소 바로 뒤쪽으로 친일파 김백일과 신응균이 잠든 장군1묘역으로 가는 길목이다. Ⓒ김종훈

대통령 권한대행은 대통령보다 불리한 조건하에서 국정을 이끈다. 대통령보다 현저히 낮은 정통성을 지닌 채 대통령만큼 일을 해야 한다. 개인적 자질과 역량이 어떠하든, 이 같은 정통성의 한계를 벗어나기는 힘들다.

그런 권한대행들 중에 친일파도 있었다. 직무상의 정통성뿐 아니라 민족사적 정통성까지 취약한 상태로 국정을 수행한 사람들이다. 1963년 12월 17일 제3공화국 대통령으로 취임하기 전인 1962년 3월 24일부터 권한대행직을 수행한 박정희와 더불어, 4·19혁명 뒤인 1960년 8월 8일 권행대행이 된 백낙준(1896~1985)이 그런 사례에 해당한다.

대통령 권한대행 백낙준

김동길(1928~2022) 교수를 배출한 인물이 바로 백낙준이다. 1976년 당시, 김동길 전 연세대 교수는 <링컨의 일생> 서문에서 “백낙준으로부터 기독교와 민주주의의 근본을 터득하였다고 자부한다”고 한 뒤 “내가 학부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후에 서양사로 전향하여 링컨 연구에 전념하게 된 것도 따지고 보면 나의 위대한 스승 백낙준의 영향 때문이었다”고 밝혔다.

이승만이 하야 성명을 발표한 다음날인 1960년 4월 27일, 수석 국무위원인 허정 외무부장관이 권한대행이 됐다. 허정의 권한은 6월 15일에 제2공화국 헌법이 시행되면서 종결됐다. 새 헌법 제52조는 권한대행 순위를 참의원의장-민의원의장-국무총리의 순으로 열거했다.

그런데 그때 참의원은 없었다. 1952년 개헌 때 국회를 참의원과 민의원으로 나눴지만, 실제 구성된 것은 민의원뿐이다. 그래서 1960년 6월 15일부터 민의원의장이 권한을 대행했다. 4월 28일 일가족과 함께 자진한 이기붕을 뒤이어 5월 2일 민의원의장이 된 곽상훈이 4·19 정국의 두 번째 대행이 됐다.

그러나 곽상훈은 의장직은 달가워하면서도 대행직은 달가워하지 않았다. 대행직을 유지하면 조만간 실시될 총선에 출마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권한대행을 맡지 않으려고 의장직에서 사퇴했다. 이에 따라 차순위자인 허정 총리가 다시 대행이 됐다. 신헌법 시행 당시의 수석 국무위원이 신임 총리 선출 전까지 총리직을 수행한다는 헌법 부칙에 따라 허정이 총리가 됐고 곽상훈의 사퇴로 인해 또다시 대행이 됐다.

허정의 역할은 7·29 총선으로 참의원과 민의원이 구성되고 8월 8일 무소속 백낙준 의원이 참의원의장이 되면서 종결됐다. 백낙준은 참의원의장이 되면서 대통령권한대행이 됐다. 이로써 대한민국정부 최고위직에 오른 친일파가 됐다. 이 기록은 1963년 12월 17일 깨진다.

백낙준의 권한대행 상태는 국회에서 윤보선이 대통령으로 선출된 1960년 8월 12일까지 계속됐다. 미국이 한·미·일 동맹의 구축을 시도하고 북한·소련·중국이 연대를 모색하던 시기였으므로 이 닷새간의 대한민국을 지키는 것도 당연히 긴박한 일이었다.

하지만 백낙준은 큰 부담을 가질 필요가 없었다. 직전 권한대행인 허정이 계속해서 총리 자격으로 내각제 정부를 이끌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 닷새간의 보도에서는 허정 총리가 행정부를 이끄는 모습이 확인된다. 8월 9일자 <동아일보> 1면 최상단은 허정이 참의원·민의원을 상대로 조속한 법안 심의를 요구하는 건의서를 보낸 일을 보도했고, 11일자 <조선일보> 1면 우중간은 “(허정이) 독립을 선포한 아불리가(阿弗利加)의 신생 챠드공화국을 정식 승인”했다고 보도했다.

내각제 총리가 국정을 이끄는 동안, 백낙준은 비교적 ‘실속’ 있게 시간을 보냈다. 대통령 및 총리 선거를 앞둔 그 시점에 그는 세력 확대에 박차를 가했다. 10일자 <경향신문> 1면 하단은 그를 비롯한 무소속 의원 21명이 9일에 삼우구락부를 결성했으며 11일경에 국회 교섭단체 등록을 하게 될 것이라고 보도했다. 12일자 <조선일보> 1면 중간은 삼우회가 대통령선거 대책을 논의했다고 알려준다.

▲백낙준 전 연세대 총장백낙준 전 연세대 총장 Ⓒ연합뉴스

독립운동하다가 친일파로 맹활약

백낙준은 동학혁명(1894)과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2년 뒤 평북 정주에서 태어났다. 대한제국 멸망 3년 뒤인 1913년에 신성중학교를 졸업한 뒤 중국 신학교로 유학을 갔고, 3·1운동 전년도인 1918년에 미국 유학을 떠나 파크대학·프린스턴신학교·프린스턴대학·예일대학에서 공부했다.

31세 때인 1927년에 예일대학 철학박사 학위와 미국북장로회 목사직을 함께 취득한 그는 귀국 뒤 연희전문학교 교수가 되고 이듬해부터 독립운동에서 두각을 보였다. 훗날 친일 전향선언을 하게 될 이광수 등이 참여하는 수양동우회의 간부가 된다.

<친일인명사전> 제2권 백낙준 편은 “1928년 7월부터 수양동우회 의사부원(議事部員)으로 활동하다가 1930년 4월 무렵 동우회로 개편된 후 정인과·이광수 등과 이사를 맡았으며 10월부터 상무이사를 맡았다”고 기술한다. 1929년에는 조선어학회가 중심이 된 조선어사전편찬회의 발기인이 됐다.

중일전쟁 발발을 앞두고 공안정국이 조성된 1937년, 그는 미국으로 건너갔다. 도미한 다음달인 그해 6월, 대표적 공안사건 중 하나인 수양동우회 사건이 터져 이광수·주요한·홍난파 등을 포함한 약 180명이 검거됐다. 국내 독립운동에 타격을 준 이 사건은 운동권 출신 친일파들이 대거 배출되는 계기가 됐다.

미국에 가 있다는 이유로 기소중지처분을 받은 그는 1939년 귀국해 불구속 상태에서 조사를 받았다. 그런 뒤, 이듬해부터 친일파로 맹활약한다. 귀국 뒤 연희전문 교수직을 사임한 그는 1940년부터 목사 직함을 갖고 친일을 했다.

1941년 1월, 조선총독부는 그를 조선예수교장로회 포교자로 허가했다. 기독교 분야의 친일 활동을 ‘명 받았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 제4-7권 백낙준 편은 그의 핵심적 친일행위를 이렇게 요약한다.

“1942년 종교보국을 사명으로 창간된 기독교 신교 각파의 합동 기관지 <기독교신문>의 이사와 편집위원으로 재직하면서 황민화정책과 전쟁협력을 강조하는 지면을 편집하고 직접 설교와 사설을 썼으며, 미·영 타도 좌담회(에) 참석하고 전쟁 협력을 역설하는 기고문을 반복적으로 발표하는 등 사회단체를 통해 일제의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함.”

백낙준의 친일 기고문에는 교육자가 양심상 차마 하기 힘든 발언도 있었다. 1942년 6월 3일자 <기독교신문>에서 그는 “우리 일본의 어린이들은 천황의 적자(赤子)”라고 한 뒤 어린이의 책무를 언급하는 대목에서 “우리 어린이는 국가를 위하여 살고, 또한 필요한 때는 죽으려는 것이니”라고 말했다. 어린이도 일왕과 일본을 위해 죽어야 한다는 글을 다른 데도 아니고 기독교 매체에 실었던 것이다.

그의 친일은 기고나 강연 외에 물질적 헌납의 형태도 띠었다. 1942년에는 조선예수교장로회를 대표해 조선군사령부에 군용차 2대 명목의 헌금을 납부했다. 교인들의 헌금이 일왕에게 전달된 것이다.

백낙준은 침략전쟁 지원을 위한 <기독교신문>의 편집위원뿐 아니라 친일 목적으로 설립된 조선기독교서회의 편집총무로도 일했다. 또 미국과 영국의 타도를 부르짖는 좌담회 석상에 대담자로도 출연했다. 친일 집필 및 편집 활동과 행사 출연 등에서 발생하는 친일재산이 1939년에 교수직을 그만둔 그의 생활 유지에 보탬이 됐으리라 볼 수 있다.

일본을 위해 미·영과 싸우자고 주장했던 그는 1945년 9월 미군이 상륙하자 곧바로 태세를 전환했다. <친일인명사전>은 “1945년 9월 김성수·김활란·유억겸 등과 함께 미군정청 학무국 조선인교육위원에 선임되었다”고 알려준다. 한 달 전만 해도 미·영 타도를 외쳤던 인물이 미국 정부를 위해 일하게 됐던 것이다.

독립운동가 공적 심사위원까지

그렇게 해방정국에 적응한 그는 그 뒤 경성대 교수가 되고 연희대 초대 총장이 됐다. 1950년에는 문교부장관이 되고 1953년에는 다시 연희대 총장이 됐다. 그랬다가 7년 뒤 4·19 국면에 참의원 의원이 되고 참의원의장이 되고 대통령권한대행이 됐다.

이듬해 5·16 쿠데타로 의장직도 잃고 정치 활동도 금지됐지만, 연세대 명예총장으로 복귀한 그는 1968년에는 독립유공자상훈심사회 위원이 되어 독립운동가들의 공적을 평가했다. 일제강점기판 뉴라이트 친일파인 그는 그런 비양심적인 일도 서슴지 않았다. 1970년에는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고 1985년 사망 뒤에는 국립묘지 국가유공자묘역을 차지했다.

백낙준이 대통령권한대행이 된 시점은 국민들의 정치적 열기가 뜨거운 시기였다. 동시에, ‘친일청산=빨갱이’ 논리가 횡행했던 이승만 정권이 무너졌지만 그 잔존 세력이 허정 과도내각하에서 국정을 운영한 바로 직후였다. 또 1949년 반민특위 와해를 계기로 친일청산 역량이 크게 약화돼 있었던 시기다. 그래서 백낙준 같은 친일파가 참의원의장이 되고 대통령 권한대행이 되는데도 우리 사회는 제지하지 못했다.

김종성 기자

<2024-12-23>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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