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한국군 베트남 참전 60주년에 떠난 ‘몽투투 평화기행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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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행문]

한국군 베트남 참전 60주년에 떠난 ‘몽투투 평화기행단’

김순흥 광주지역위원장

1964년 그날, 젊은이들은 총을 들고 떠났다.
2024년 오늘, 우리는 꽃을 들고 떠났다.
베트남으로.

관광지를 찾아 떠난 여행이 아니다. 휴양차 간 여행도 아니다. 국가폭력의 가해자 입장에서 우리가 저질렀던 참혹한 현장을 찾아 사죄의 목적으로 떠난 여행이다.

일제의 잔혹한 만행을 경험한 우리가, 사죄는커녕 사실조차 인정하지 않는 일본을 향해 가졌던 피해자의 입장을 알기에 꼭 가야 한다고 벼르던 여행이다. 미쓰비시 근로정신대 문제로 30년이 넘게 일본정부를 향해 투쟁하면서 우리에게 사죄하고 있는 나고야의 의인(義人)들처럼, 우리도 이제는 우리가 저지른 것에 대해 반성하고 사죄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떠났다.

첫날(3.21) 바오닌 작가와 만남

하노이에 도착하자마자, 베트남전쟁을 처절하게 그린 소설 <전쟁의 슬픔>의 작가 바오닌 선생의 아파트로 갔다. 아파트 동단위로 경비원과 아파트 입구 현관 경비원이 2중으로 있는 강남 못지않은 고급 아파트였다. 작가의 잘사는 모습에서 전 세계적으로 그 소설이 꽤나 잘 팔렸고 인세가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알 수 있었다.

바오닌은 대장 수술 후 병원에서 요양 중이었는데, 우리를 맞이하기 위해 일찍 퇴원했다고 한다. 사람 만나기를 좋아하고 술도 좋아하는 작가가, 열흘 전에 대장 절제 수술을 한 환자의 몸이라서 자신은 밥도 술도 하지 못하면서도, 반가이 맞아 이야기를 나누고 맛있는 저녁을 차려준다. 큰 사람의 모습이다.

“17살에 동료 500명과 입대하여 6년간 치열하게 싸워 승리했을 때, 살아남은 동료는 5명뿐이었다”고 한다. 전쟁의 악몽을 어떻게 잊었냐고 묻자 “오직 시간만이 해결해 주었다”고 했다.

맛있는 저녁을 먹고 아쉬움을 남긴 채, 하노이에서 서쪽으로 200km쯤 떨어진 산간지방 목쩌우의 소수민족 마을로 갔다. 자연경관이 좋아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된 곳이다. 중국의 소수민족 묘족이 뿌리인 몽족(Hmong)이 베트남에서도 소수민족으로 모여 살고 있는 곳이다. 꼬불꼬불 산골길을 오르락내리락하면서 짐을 가득 싣고 느리게 올라가는 트럭들을 아슬아슬 곡예처럼 추월해가면서 한밤중에 목적지에 도착했다. 어두워서 잘 안 보이는데도 깔끔하게 생긴 민박집(home stay)이다.

이튿날 (3.22) 위령제

오전에는 자연경관과 몽족의 사는 모습을 둘러보았다. 오후에 몽족 제사장이 펼치는 접신 굿판이 있었다. 베트남 전쟁에서 스러진 한국인 영령들을 포함하여 긴 세월의 전쟁기간 동안 스러져간 모든 영혼을 달래기 위해 돼지를 잡아 희생을 올리는 몽족 특유의 위령제다. 군인을 보내 수많은 살상과 희생을 자아낸 가해자의 입장에서 사죄하는 마음으로 함께 하였다.

일제의 만행에 대한 사죄를 요구하는 입장에서 베트남에서 저지른 한국군의 만행도 사죄해야 마땅하다고 보는 사람들이 마련한 이번 평화기행의 가장 중요한 일정 가운데 하나다. 무려 4시간이나 걸렸다. 제사가 끝나고 제사장이 ‘큰 형님’이라는 이름으로 ‘몽투투 평화기행단’의 제사 대표를 맡은 나에게 와서 “희생 영혼과 우리를 연결하려 하니 무척 힘들었다”고 한다. 탈진한 모습이다. 희생된 영령들이 많은 위로를 받았을 것 같다.

 

 

사흗날(3.23) 호치민 영묘

몽족과의 감동을 뒤로 한 채 새벽같이 일어나 ‘호치민 영묘’에 방문 인사를 하기 위해 200km 떨어진 하노이로 다시 돌아왔다. 호치민 영묘가 있는 하노이 바딘 광장, 매우 엄격하게 통제되고 검색도 심하다. 토요일이라서 베트남 모든 학교의 아이들이 모두 체험학습을 온 것처럼 크고 작은 학생들이 와글와글 바글바글하다.

한산한 우리의 현충원과는 대조적이다. 호치민은 자기 시신을 화장하라고 했지만, 정권을 이어받은 사람들이 후세의 귀감이 되는 분이라 영묘에 안치하여 사람들이 볼 수 있게 해놨다.

국적을 떠나, 이념을 떠나 세계적으로 존경받는 베트남의 국부(國父) 호치민. 거창한 칭호를 마다하고 ‘호아저씨’로 불렸던 호치민. 다시금 무덤 속에서 스멀스멀 기어나오는 대한민국의 이승만 ‘국부론’과 비교된다. 가장 큰 건물을 ‘호아저씨’가 쓰도록 배려하는데 “나는 이렇게 큰 집 필요없다”고 사양하여 주석궁으로 쓰게 하고, 조금 더 작은 건물을 드리니 “이것도 너무 크다”고 사양하여 총리에게 주고, 자신은 전기수리공이 쓰는 작고 소박한 공간을 썼다.

말년에 건강상태가 아주 나빠져서 2층을 오르내릴 수 없어 1층으로 숙소를 옮겼다. 어느 해 홍수가 져서 홍강의 수위가 높아져 하노이가 침수될 위기에 놓여있을 때 정치부 위원들이 호치민에게 피신할 것을 권하니 “국민들이 아직 피신을 못했는데 나부터 갈 수는 없다”고 단호하게 거절했다고 한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국민들에게는 거짓말해놓고 먼저 도망간 뒤에 다리를 폭파해버린 독재자 이승만과 비교하는 것조차 부끄럽고 한편으로 부럽기도 하다.

나흗날(3.24) 하미마을 위령탑

베트남 중부지방인 다낭으로 옮겨서 꽝남성 디엔반시 디엔즈엉구 하미마을을 갔다. 베트남전쟁 당시 구정 대공세가 격렬하던 시기인 1968년 2월 22일(음력 1월 24일), 청룡부대의 3개 소대가 하미마을을 세 방향에서 에워싸며 들어와 마을사람을 세 곳에 따로 모아놓고, 장교의 지시에 따라 자동소총과 유탄발사기를 발사하여 30가구 135명이 2시간 만에 학살당했다는 곳이다. 위령비에 적혀있는 135명의 명단에 20~40대의 젊은 남자는 하나도 없고, 모두가 노인, 부녀자, 아이들의 이름뿐이다. 심지어 1968년 1월에 벌어진 일인데, 태어난지 한달도 지나지 않은 1968년생의 이름도 3명이나 보인다(1967 3명; 1966 2명; 1965 8명 등등). 일본군의 난징학살이 떠오를만큼 끔찍하다.

우리 소식을 듣고 하미학살의 피해자이신 쯔엉티투(Trương Thị Thu) 할머니가 아들의 도움을 받아 나와주셨다. 1968년 1월 24일(음력), 학살 당시 수류탄 파편에 오른발을 잃었고 왼쪽 다리, 엉덩이, 허벅지 등에도 부상을 입었다. 한국군에 의해 가족 친척 모두 12명(새언니 2명, 올케 1명, 자녀 2명, 조카 7명)을 잃었는데 당시 딸은 7살, 아들은 4살이었다. 한국군이 집에 불을 지르자 부상당한 몸을 이끌고 3개월 된 셋째딸과 집 밖으로 도망쳐 목숨을 구했는데 이때 딸도 다리에 심한 화상을 입었다. 그는 한쪽 발이 없어 거동이 불편할 뿐만아니라 학살로 부상입은 몸 구석구석에 지금까지도 심한 통증을 호소하고 있다. 몽투투 평화여행에 함께한 우리들이 할머니를 마사지해 드리고 위로해드렸지만 할머니의 잃어버린 인생을 얼마나 보상할 수 있을지…

1951년생으로 하미학살 유가족인 응우옌럽 (Nguyễn Lập)의 집을 찾았다. 하미학살 생존자 팜티호아의 큰아들이다. 학살 당시 응우옌럽(17살)은 다낭에서 머슴살이를, 그의 동생 응우옌티엔(12살)은 호이안에서 남의 집 일을 거들며 살고 있어 화를 면했다. 그러나 마을에 남아있던 남동생 응우옌반펀(11살)과 응우옌티씨(5살)는 목숨을 잃었고 어머니 팜티호아(40살)는 한국군이 던진 수류탄에 두 발목을 잃었다. 전쟁이 끝난 후 응우옌럽은 귀향하여 농사를 짓다 불발탄 사고로 두 눈을 다쳐 실명한다. 동생 응우옌티엔은 호주로 이주했고 그는 어머니가 타계(2013년)할 때까지 함께 살았다. “과거의 원한은 내가 다 짊어지고 갈 거야. 그러니 나 없어도 한국 친구들이 찾아오거든 잘 대해줘”라는 어머니의 유언을 기억하며 그는 자신의 집을 찾는 한국 사람들을 언제나 반갑게 맞이해준다.

닷샛날(3.25) 학살현장과 희생자

모둠별로 나뉘어 여러 군데에 흩어진 학살현장과 희생 자를 찾아가는 날이다. 우리 모둠은 반꾸엇 위령비와 반꾸엇촌 ‘평화로 가는 화해의 길’ 팻말을 둘러보고, 피해자인 쯔엉티쑤옌 할머니와 가족묘를 둘러보았다.

97세인 할머니는 귀도 잘 안 들리고 정신도 흐린데, 가끔 반갑다는 표정을 지으셨다. 1968년 한국군이 마을 사람들을 모두 마당으로 모이라고 해놓고 일을 저질렀다. 가족묘지에 있는 사망일자가 같은 사람이 많다. 한날 지내는 제사, 제주 4·3에서, 한국전쟁에서 많이 있었던 것을 여기서도 본다.

베트남에서 저지른 한국군의 만행과 그 뿌리

일제에 의해 ‘잔학성’과 ‘맹종’의 군인정신으로 훈련되고 길들어진 일본군 찌꺼기들이 중추가 되어 만든 한국군(초대부터 21대까지 육군참모총장의 대다수가 일본군 출신).

이들을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에서 그대로 발휘하다가 뒷날 이들의 일부는 5·18의 선봉부대로도 활약했다.

일제에 의해 길들어진 정신(잔악한 폭력성, 무조건 따르는 맹종성)과 기술(학살, 만행)은 한국의 역사를 망치는 데 그치지 않고 국제화되어 멀리 베트남에까지 와서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에게 씻을 수 없는 아픔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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