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약산과 석정, 그리고 육사의 자취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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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유적 답사기]

약산과 석정, 그리고 육사의 자취를 찾아서

최필숙 역사랑톡톡 대표

탕탕탕! 남경으로 떠나는 아침은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의 총에, 박정희가 김재규의 총에 생을 마감한 날이다. 명량해전 승리의 날, 게다가 노태우의 죽음까지 보태진 날이라 착잡함과 약산 김원봉의 길을 따라간다는 기대감이 뒤섞인 새벽! 2시 반에 시작된 준비는 3시 50분 주재석 안향미 부부와의 만남으로 정신을 차리고 동대구 버스 환승센터에서 인천을 향하면서 긴 여정을 시작하였다.

인천제1터미널 F7에서 낯선 또는 조금의 익숙함이 얽힌 분위기 속에서 인사도 없이 각자도생처럼 이곳저곳에서 만남의 장면이 연출되었다. 우리나라와 중국과의 어색한 동거가 1년 이상 지속되었기에 두려움이 앞섰다. 그러나 선열을 찾아가는 비통한, 그러면서 무모한 용기에 힘입어 캐리어를 끌며 출국심사대에 올랐다. 그러나 황선락 어르신의 배려로 너무 빨리 출국하게 되었다. 뒤늦게 도착한 일행에게 미안함이 들 정도였다. 게다가 황선생님은 숙녀에게 뭔가를 대접하는 것은 남자의 특권이라는 말씀과 함께 먼 길을 마다않고 바바나 우유(단지형)를 사주셨다. ‘베풂은 이런 것이야’를 몸소 보여주셔서 첫날부터 좋은 기억이 쌓여간다. 추억이 많은 사람이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 했던가! 그렇게 여행의 추억이 첫 순간부터 만들어졌다.

‘우호’가 무엇인지 고민할 만큼 쉽지 않은 입국심사, 죄인 아닌 죄인처럼 열 손가락의 지문을 등록하고 그것도 모자라 많은 시간과 마음을 들인 후에야 도착한 남경 공항을 다음 일정 을 위해 빨리빨리만 외치며 나섰다.

약속된 남경대도살 기념관 탐방이 어려울 수 있다는 가이드의 안내에도 ‘설마’하며 입구에 도착했으나 그들의 기념관에 나는 참배의 기회를 얻지 못했다. 만인갱의 모습도, 눈만 들면 보이던 30만이라는 숫자도, 12초마다 사람을 죽였다며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에 맞춰 망자의 얼굴을 비추던 레이저의 빛도 허락되지 않았다. 다만 죽은 아이를 안고 처참히 울부짖는 여인만 담 안에서 나를 기억해주었다.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달려간 곳은 금릉대학이다. 여운형이 영문과를 졸업하였고, 3약의 형제들(약산 김원봉, 약수 김두전, 여성 이명건)이 청강하며 대학 입시를 준비하는 곳, 김산이 『아 리랑』에서 두꺼운 영영사전을 들고 다니던 김원봉이 몇 개월 뒤 사전 없이 톨스토이를 읽고 있다고 말한 곳, 1935년 7월 5일 아홉 개의 정당이 대통합을 이루었던 대례당이 있는 곳! 모두의 기대를 받던 그곳도 끝내 발길을 허락하지 않았다.

신흥무관학교 입학을 꿈꾸던 학생들을 미리 면접하던 것처럼 민족해방을 위해 남경으로 오는 젊은이들을 영접하던 구남경역도 시간상 생략하고, 대신 약산과 박차정이 함께 살면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에 입교생을 대접하며 면접하던 교부영 거리를 걷는 행운을 얻었다.

그리고 중국에서 가장 큰 공자 사당이 있다는 부자묘 거리, 과거 준비에 몰두했던 학생들이 기거했던 곳에서 부자묘 양 옆에 있는 옛 시장을 점검(?)했다. 왜냐면 이육사가 어머니 회갑연을 위해 구입한 그 앙증맞고 귀여운 비취도장을 찾기 위해서였다. 1941년 1월 『조광』에 발표한 연인기(戀印記) 속 그 비취도장은 『시경』의 빈풍7월이 새겨진 매우 값비싼 물건이었다. 1933년 국내로 들어와 간부학생 생 도를 물색하여 보내는 임무를 띤 육사가 여비를 탕진하자 80원을 구해온 석정 윤세주에게 ‘목숨 다음으로 귀중한 것’으로 준 물건이었다. ‘S에게. 1933.9.10. 증 육사’라 새겨진 비취는 석정과 함께 태항산 자락, 지금은 진기로예열사능원에 잠들어 있을 것이다. 시장에 있는 많은 비취도장 재료를 살피면서 나는 당시의 육사와 석정을 함께 만났다. 그러나 시간이 충분치 않아 비취인은 구하지 못하고 옆 시장에서 귀엽고 앙증맞은 벼루를 구했다. 언젠가 내게도 목숨 다음으로 소중한 물건을 줄 순간이 온다면 나는 비싸지는 않지만 이 벼루를 그 누군가에게 선물할 것이다. 비록 부자묘의 많은 유물들을 보지 못했으나 아쉬움이 없는 남경 옛 시장에서의 첫날 밤은 소중한 시간이었다.

둘째 날, 시작은 호텔과 가까운 천녕사였다. 일곱 번째 찾는 곳이지만 그래도 설렌다. 중국인들의 곱지 않은 시선은 지난여름 답사에서 느꼈던 터라 광복을 위해 투쟁하시다 귀한 목숨을 바치신 선열들에게 술 한 잔 올리는 장소로 이곳 천녕사가 좋을 것 같다는 전날의 합의가 있었기에 한국에서 가져간 제물을 정성 다해 올렸다. 울컥했다. 내가 울면 모두가 울 것 같아 입술을 깨물었다. 그들은 그곳에도 계셨다. 그리고 꾸지람도 없이 보고 계셨다. 국내에 있는 동상 하나도 지키지 못하는 네가 이곳에서 무얼 하고 있냐고 말씀하시는 듯하였다.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는 남경에서 3기생 125명의 전사를 길러냈다. 천녕사는 그 마지막인 3기생이 4년의 사관학교 과정을 6개월만에 끝낸 고되고 힘든, 그러나 용기백배한 기상의 함성이 있는 곳이다. 몇 년 전 날아간 지붕이 그대로인 것이 가슴 아팠으나 여전히 인근 주민의 기도처로 이용되다 보니 정돈된 내부의 모습이 나에게 안도감을 주었다. 그들이 마신 우물, 그들이 내달렸던 훈련터, 그리고 그 들이 더위를 식힌 저수지는 그대로인데 이곳을 들어가는 문은 언제부터인지 쇠창살로 막히었고 자물쇠가 굳게 채워져 내 맘처럼 답답했다. 여중생의 귀여운 글귀도, 몇 년 전에 봤던 충북교육청 글도 사라졌다. 무엇 때문인지 궁금함을 풀기보다 천녕사를 찾겠다는 마음에 8월에 왔을 당시에도 폐쇄된 길 대신 뒷길로 갔다는 김현정님의 말에 그냥 내달렸다. 절박했다. 당시 간부학교 학생들은 나라 찾겠다는 일념으로 고된 훈련을 이겼는데, 이까짓 철망이 무엇이겠는가! 그래서 천령사에 가는 길이 힘들지 않았다. 손에 들린 제물도 무게감이 없었다. 대도살기념관, 남경대학에서 내쫓긴 것처럼 돌아갈 수 없는 곳이다. 이곳은 약산과 석정과 육사가 그리고 율성이, 수많은 넋들이 있는 곳이니 말이다. 내려가는 길목에서 바라본 산과 저수지 어느 것 하나 아프지 않은 곳이 없다.

그러나 아래 현장은 또다시 현실이다. 중국공안과 출입국 직원까지 동원된 이후에야 떠날 수 있었다. 4년 전 이곳에 왔을 때와는 너무 달라 다른 곳에 온 듯하다. 많은 말들이 목구멍을 타고 올라온다. 꾹 눌러 보지만 쉽지 않다. 엿같은 나라꼴이다. 혼자 내뱉었다.

1932년부터 중일전쟁이 일어난 1937년까지의 시기는 폭풍전야 같은 날들이었을 것이다. 언제 터질지 모를 전쟁에 대비해야 하고, 분열된 독립운동 노선을 통합해야 하는 순간! 그 순간들 속에서도 일상은 이어졌을 것이고, 밀양에 거주하던 석정의 아내 하소악도 이곳 남경에 1937년 4월에 왔다. 하소악이 모셔야 하는 어르신이 몇이었을까? 전쟁의 소식이 들린 날, 석정은 아내를 데리고 이곳 묘오율원 정원에서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부끄러운 달이 구름 속에 잠시 모습을 감추었을 때 서로의 눈을 응시하며 사랑을 확인하지 않았을까? 그들의 로맨스를 그려주고 싶었다. 83명의 젊은이들이 성자분교로 떠나기 위해 대기하던 긴장감보다 석정 부부를 위해 이곳을 아름답게 기억하고 싶은 것은 나 혼자였을까!

창 너머 바라본 현무호는 검은 물인지 제대로 확인조차 불가했다. 다만 김영범 교수님께서 알려주신 약산과 육사의 담판(?) 장소!

육사는 시인이다. 세상에 대한 치부를 드러내어 의문을 제기하는 문학인이다. 그래서 사람으로 하여금 관심을 갖게 하고 함께 투쟁의 길로 나서도록 하는 사람이다. 그런 그에게 만주로 가라는 약산의 명령은 부당했을 것이다. 이육사는 학교장의 말을 거역하고 국내로 가겠다 하였다. 약산은 이런 이육사의 무례함이 걱정이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현무호 배에서 그들은 속내를 드러내며 이야기하였을 것이다. 둘의 화해를 석정이 시키지 않았을까 엉뚱 한 상상력이 생기는 순간이었다.

늦은 점심 식사 후 남경역에서 무한으로 가는 고속열차에 오르기 위해 또 검열대에 올랐다. 짐만 오른 게 아니라 내 모든 것이 들려 올려진 기분이다. 이들은 무엇이 그리 두려운 것 인가! 무한으로 향하는 풍경 속 농촌은 괴기하다. 불 하나 켜지지 않은 집은 중경으로 가는 길에서도 만났다. 저 집들은 누가 살기에 밤에 불도 없을까? 다들 좋아하는 아파트에 거주하는 것인가? 의문이 일지만 답답할 정도는 아니다.

셋째 날, 무한은 새로운 가이드와 함께 주로 시내를 걸어다녔다. 여황피로 거리는 역사 거리로 조성되어 1860년 서양의 중국 침략 이후 모습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이곳에서 약산 김원봉이 민족혁명당 식구들과 거주했던 승리가 15번지 찾기, 그리고 조선의용대 창설 3일 뒤 열렸던 축하연 장소인 당시 YMCA 건물, 그리고 무한판사처를 찾아 걸으며 중일전쟁 이후 어떤 투쟁을 어떻게 벌여야 할지 고민했던 약산과 석정을 찾아다녔다.

양자강물에 손 한 번 담그지 않고 가기에는 아쉬워 송경령 거주지 방문 직전에 한양과 한구, 우한이 보이는 안개인지 스모그인지 모를 그 강가에서 흐릿한 건물을 배경으로 한 컷! 그리고 손 담그기! 맑지 못한 물이 맘에 걸리긴 하지만 그래도 좋다! 그리고 송경령의 집. 대만과 중국의 이념논쟁에 이용하기 가장 적합한 장소, 손문의 아내 송경령은 중화인민공화국 편이었고 그녀의 집은 문화재로 보존중, 그리고 수많은 탐방객 속에 수정상(수정으로 만들어진 흉상)으로 빛을 삼키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방문하기로 했던 황학루를 차창에 두고 찾은 곳은 우한 호북총공회! 중일전쟁 이후 성자분교에서 훈련받은 학생들이 잠시 머물렀던 대공중학교, 이 자리는 신해혁명이 시작된 곳이며 조선의용대 창설지로 알려져 있다. 아직도 노조 간부를 교육하는 학교로 남아 있었다. 다만 조선의용대 창설 기념사진을 촬영한 곳을 찾지 못했다. 그러나 그 사진을 촬영한 요리스 이벤스를 무한판사처에서 만날 수 있었다. 중국 베트남 등을 돌며 다큐 제작에 힘을 쏟은 그의 사진을 본 뒤 인터넷 검색을 통해 알게 된 정보는 이번 답사에서 얻은 소중한 보너스였다.

무한에서 중경을 향한 고속철도! 한국의 SRT라 하는 것이 맞겠다. 정차역도 많지만 속도도 그리 높지 않았다. 그러나 긴 시간만큼 많은 이야기들이 오갔고 나의 뇌는 무게가 더해졌다. 내일 아침에는 그 무게로 인해 고개를 들지 못할지도 모르겠다. 밤늦게 도착한 호텔에서는 함께 밤을 지내온 현정, 은정님께 죄송한 맘이 들게 했다. 좁은 공간에 놓인 어린이용 간이침대! 언니답지 못한 자신을 탓하며 이불 속에 얼른 숨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 또한 소중한 교훈이다. 다음 답사에는 이런 실수를 하지 않으리라!

넷째 날, 광복군 제1지대 본부터를 찾아갔으나, 흔적만 남은 그곳은 늦게 찾아온 나를 향한 회한이었다. 약산 부부가 살았다고 알려진 곳으로 가던 중 중국인의 안내로 약간은 엉뚱한 곳을 갔지만, 역시 현정님의 안내로 조선의용대 가족들의 거주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남모르게 몇 자 담벼락에 글을 썼다. 어쩌면 아픈 박차정을 위해 하소악이 아침저녁으로 밥을 해 나르지 않았을까? 나는 계속 쓸데없는 상상을 하며 위에 나 있는 계단 사진을 찍기 위해 다시 달려가는 수고를 해야 했다. 그러나 그 수고가 무색하지 않게 다리 아래에 지역민이 그려놓은 대불단 거리의 모습을 볼 수 있었고, 푸른 대문이 있는 약간 후미진 골목에 약산 부부가 살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남편을 보내고 이곳에 있던 하소악이 남편 죽음 소식도 이곳에서 들었을런지도 모른다. 그녀의 황망한 걸음 앞에 하동진이 서고, 뒤에는 어린 아들 남선이 함께하였을 것이다.

더 머물고 싶으나 언제나 문제는 시간! 그 시간에 쫓겨 조선의용대가 처음 중경에서 머물렀던 장강 항구에 있는 정원에 들어섰다. 그곳에서 ‘왜 대불단으로 거주지를 이동했는지 알 수 없으나 남의 나라에서 떠돌이 신세인 그들이 그래도 당당히 주인 행세를 하였을 것이야! 그래야 밀양 남자지’ 생각하며 경제적 어려움, 일본군 침략에 대비한 안전성 등등 머릿속에 별별 생각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찾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 상하이와는 비교가 안될 만큼의 크기에 놀랐다. 당시의 모습 그대로인가? 각 부서별 사무실까지 겸비한 정부, 위엄까지 느껴졌다. 언제나 그렇듯 가지 말라는 곳을 가보는 묘미는 이곳에서도 최고! 그러나 이곳에서 국무회의를 주관하던 김구 주석이 마지막 내린 결정이 무엇이었는지 사람들의 궁금증을 자아내는 곳, 그 대문에서 사람들이 사진을 찍고 있다.

다음 찾은 곳이 내게는 제일 의미 있었다. 광복군 사령부가 복원되어 처음 개방한 곳, ‘미원’이라는 식당이 있던 곳을 2018년에 복원하였다는 이곳에는 많은 유물 자료(?)가 있었다. 평소 약산 김원봉의 글씨체에 익숙했던 내게 보였던 이체증명서! 김약산이라는 서명과 함께 쓰여진 그의 주소는 대불단 151호, 1941년 10월 9일이라는 날짜까지 새겨진 이소민의 영수증 주소는 대불단 123호, 이시영은 1943년 에 중화민국한테 임시정부 재무부의 이름으로 영수증을 써주었다. 그 흔적을 둘러볼 당시에는 알지 못하고 약산의 글씨만 집중하여 촬영만 한 잘못을 저질렀다. 차에서 사진 확인 중 알게 된 사실로 인해 되돌아가고픈 맘이 들 정도였다. 가이드에게 그곳에 전시된 또 다른 영수증 및 자료를 촬영해 보내달라 부탁하며 그의 답을 기다릴 셈이다.

광복군 사령부를 나와 해방탑 거리에서 만난 또 하나의 사실! 1945년 당시 항전전승기념탑이 1950년 인민해방탑으로 회칠 후 새롭게 화장한 모습에 역사의 새로운 장면을 만났다. 승자에 의해 진실이 숨겨질 수 있다는 사실! 그곳에서 제대로 읽지 못한 한자(해방탑보행가)는 두고두고 글귀 아래 귀신처럼 몸체없이 발만 있던 그 많은 발과 함께 기억하게 될 것이다.

마지막 밤을 장식한 유람선 승선! 1941년 1월 1일 이곳 조천문에서 민생호를 타고 팔로군이 있는 태항산으로 이동한 조선의용대 화북지대, 물론 화북지대라는 이름은 그들이 이동을 완료한 7월에 붙여진 이름이지만, 그 부대의 지휘관은 박효삼 지대장, 정치위원 윤세주! 금년에는 화북을, 명년에는 만주를, 그 다음 해에는 조선을 접수하겠다며 떠난 석정은 평생의 동지이자 친구, 연인이자 동반자였던 약산 과 이 조천문에서 헤어졌다. 영원히 만날 수 없는 별리의 자리가 이곳이지만, 새롭게 펼쳐친 가릉강과 양자강 주변의 자본주의에 빠져 그들을 잊고 있었다. 휘어진 건물, 그 건물의 이름도 모르면서 떠나는 석정과 박효삼, 그를 보내는 약산과 하소악의 마음을 놓쳐버린 멍청한 나! 이렇게 답사의 마지막 장이 넘어갔다.

작은 에피소드와 쟁쟁한 답사단원의 이력은 의열단이 가장 많이 활동한 100년 전 1923년처럼 내게는 소중한 추억을 선사했다. 이것이 내 삶의 자양분이 될 것임을 믿고 또 다른 답사에서 만나 함께 아파하고 슬퍼하며 다짐하는 순간이 오길 간절히 바란다. 모두에게 감사와 사랑과 존경을 보내며 답사의 피로까지 없어질까 아쉬워 눈뜨자마자 글을 쓴다.

돌아오는 마지막 날은 결혼기념일이다. 35년간 살아온 나에게 며느리가 보낸 케이크와 남편이 준비한 케이크가 배달되었다. 케이크처럼 부드럽고 달콤하게 살았다면 좋았을까? 준비된 레드 와인과 찢어놓은 송이의 부자연스러움이 중경 시내 한복판에 세워진 ‘애플 타워’처럼 사회주의를 표방한 중국의 모습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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