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종로경찰서(鍾路警察署), 다른 경찰서에 비해 빈번하게 청사의 위치를 옮긴 까닭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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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비망록 93]

종로경찰서(鍾路警察署), 반도 민심의 근원을 차단하는 억압기구
다른 경찰서에 비해 빈번하게 청사의 위치를 옮긴 까닭은?

이순우 책임연구원

1945년 8월 15일, 일제 패망 당시의 시점에서 서울 전역에는 창덕궁경찰서(昌德宮警察署), 본정경찰서(本町警察署), 종로경찰서(鍾路警察署), 동대문경찰서(東大門警察署), 서대문경찰서(西大門警察署), 용산경찰서(龍山警察署), 영등포경찰서(永登浦警察署), 성동경찰서(城東警察署), 성북경찰서(城北警察署), 마포경찰서(麻浦警察署) 등 도합 10개의 경찰관서가 촘촘하게 포진하고 있었다. 이들 경찰서의 연혁을 정리하다 보니 한 가지 퍼뜩 눈에 띄는 것이 본정(‘남부’로 개칭), 서대문, 성동, 성북, 마포 등과 같이 해방 이후 한 번도 청사를 옮기지 않고 지금도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 있는 경찰서가 많다는 사실이다.

나머지의 경우도 기껏해야 한두 번 정도 위치 이전이 있었던 것이 확인되지만, 이와는 다르게 좀 예외적인 것이 종로경찰서의 사례이다. 간략하게만 살펴보더라도 종로경찰서는 처음에 탑골공원에 인접한 옛 북부경찰서 청사(1915년 6월)에서 시작하여 일한와사전기회사 사옥(옛 한성전기회사 사옥, 1915년 9월), 공평동의 경성복심법원 청사(1929년 9월)를 거쳐 인사동의 태화여자관(1943년 10월) 자리로 거듭 옮겨 다녔고, 해방 이후 시기에는 공평동 청사(1949년 1월)로 되돌아갔다가 다시 경운동 신축 청사(1957년 3월)로 이전한 것으로 나타난다. 그렇다면 이처럼 빈번한 청사 이동에는 어떤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것일까?

‘악명 높은’ 종로경찰서가 처음 세상에 등장한 것은 헌병경찰제도(憲兵警察制度)로 상징되는 이른바 ‘무단통치(武斷統治)’가 한창 정점을 치닫고 있던 1915년 6월 1일의 일이었다. 이때 북부경찰서는 물론이고 여기에 속한 동대문분서(東大門分署)와 서대문분서(西大門分署)가 한꺼번에 통폐합되면서 종로경찰서가 생겨났고, 이와 함께 기존의 남부경찰서는 본정경찰서로 개칭되는 한편 용산경찰서가 폐지되면서 이곳은 용산헌병분대(龍山憲兵分隊)의 관할로 넘겨지는 등의 변화가 있었다.

종로경찰서(옛 중부경찰서 및 북부경찰서)의 편제 및 공간 변동 연혁

그 이후 1920년 1월 29일에 이르러 종로경찰서에서 다시 분리되어 동대문경찰서와 서대문경찰서가 각각 신설되었으며, 이 당시에 재편된 종로경찰서의 관할구역은 일제 패망 때까지도 그대로 유지되었다. 종로경찰서라고 하면 아무래도 조선인 집결지역의 중심적인 활동공간을 담당한다는 점이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로 인해 일제의 식민통치자들로서는 가장 촉각을 곤두세우는 지역이라고 하면 단연 이곳을 손꼽기 마련이었던 것이다.

『동아일보』 1929년 9월 4일자에는 「종로서타령(鍾路署打鈴) (1) 혈색(血色)의 적벽양옥(赤壁洋屋), 특색(特色)은 탑상괘종(塔上掛鐘), 옛날 옛적엔 집으로도 내노라고 내 앞에 아니 떠는 놈은 없었나니, 염라청사(閻羅廳舍)의 기춘추(幾春秋)」 제하의 연재기사가 남아 있는데, 이를 통해 그 당시 조선 민중의 눈에 비친 종로경찰서에 대한 인상이 어떠했는지를 잘 엿볼 수 있다.

…… 이리하여 조선은 경찰정치라고도 하고 서장정치라고 부르기에까지 조선경찰은 최대한 위력을 가지고 민중에게 호랑이와 같이 임하였다.
경찰서가 많다. 그중에도 조선 사람에게는 종로경찰서에 대한 인상이 어느 방면으로 보더라도 가장 뿌리 깊이 박혀 있다. 조선의 중앙수도인 서울에서도 한복판인 종로 큰 거리에 위치하고 있는 까닭으로 아까 말한 바와 같이 가장 높은 시계탑이 솟은 까닭으로도 그러하려니와 그보다도 종로서는 지금까지 발휘한 기능이 조선의 무수한 모든 경찰서보다도 몇 곱, 몇 십 곱, 몇 백 곱 더한 까닭으로도 그러하니 조선경찰의 특색이 실로 이 종로경찰서에 뭉쳐있으매 종로경찰서는 조선경찰서의 대표적 전형이다.
그런데 이 종로경찰서가 인연 깊은 이 집을 버리고 멀지 않은 재판소 자리로 이사한다. 금 4일부터 이삿짐을 나른다 하니 아마 며칠 안 돼 아주 집을 비어놓고 말 터이다. 그러면 이 집은 어떻게 되려는고? 북부의 십만 주민을 쥐락펴락하며 수없이 많이 그 앞을 지나가는 사람은 눈물을 자아내고 진저리를 치게 하며 혹은 원한의 초점되던 이 집, 폭탄의 세례까지 받던 이 집의 엉키고 엉킨 지나간 날의 이야기는 과연 어떠한고?

그리고 조금 더 세월이 흘러 『매일신보』 1943년 10월 1일자에 수록된 「총후치안확보(銃後治安確保) 철석(鐵石), 부내(府內) 신진서장(新進署長)들의 역량(力量)에 기대(期待)」 제하의 기사를 보면, 이 당시 조선인으로서는 최초이자 유일한 종로경찰서장의 자리에 오른 도경시(道警視) 윤종화[尹鍾華, 창씨명은 ‘이사카 카즈오(伊坂和夫)’]의 부임 소감이 남아 있다. 여기에 등장하는 “종로는 반도의 중추지대이며 반도민심의 동향을 결정하는 근원지”라는 말은 그 자체로 종로경찰서의 위상을 단적으로 엿볼 수 있는 표현 이 아닌가 한다. 또한 종로는 때로 “조선사상계(朝鮮思想界)의 중심타(中心舵)”라고 일컬어지며, 각 사상단체(思想團體)를 감시해야 하는 탓에 종로경찰서는 그 어느 곳보다도 이른바 ‘고등계 형사(高等係 刑事)’의 구성비율이 높았던 곳이기도 했다.

이와 관련하여 『동아일보』 1926년 5월 14일자에 수록된 「종로서(鍾路署) 비밀서류(秘密書類), 매일발수(每日發受) 3백 통(通), 비밀문서가 갑자기 늘어서 하루에 평균 3백 통이 내왕, 시절(時節) 만난 경찰(警察)의 활동(活動)」 제하의 기사는 경성의 중심 경찰서인 ‘종로경찰서’가 취급하는 고등계 관련 비밀정보의 수효가 일본인의 중심거리에 자리한 ‘본정경찰서’의 그것에 비해 3배가량이나 많다는 사실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요사이 경기도 경찰부 고등과를 위시하여 시내 각 경찰서 고등계는 순종효황제(純宗孝皇帝) 국장과 및 조선박람회(朝鮮博覽會) 개회 등으로 지방 사람들의 상경이 많아졌으며 또는 그에 따라 각처로부터 모여드는 고비정보(高秘情報)가 부쩍 늘고 또는 무슨 비밀한 계획이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눈코 뜰 새 없이 주야를 불명불휴의 상태로 분망하게 지내는 중이라는데 경성의 중심경찰서인 종로서 고등계에서는 계원을 증원한 것은 물론이요, 동 고등에서 취급하는 정보의 수효는 본래부터 시내에서는 가장 비밀서류가 많다는 본정서보다도 약 3배가량이나 되는 터이었섰지만은 국상 이래로는 아직 통계를 꾸며보지 아니하였으므로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으나 약 3할 이상 증가되었을 듯하여 매일 타처로부터 오는 고비서류의 수효가 150벌가량이나 되며 동서로부터 발송하는 서류수효도 약 150벌가량 되어 매일 동서에서 취급하는 서류만 해도 약 3백 벌가량씩은 된다더라.

종로경찰서의 청사 이전과 관련하여 한 가지 흥미로운 대목은 특이하게도 일제패망기에 이르러 종전의 태화여자관(泰和女子館, 옛 인사동 명월관 지점 자리)을 사용하던 시절도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1941년 12월 29일 조선총독부 고시 제286호 「적산관리법시행령(敵産管理法施行令) 제1조의 규정에 의한 적국(敵國)」을 통해 “미국(米國, 필리핀연방 및 영지 전체를 포함)과 영국(英國, 인도 및 해외영토를 포함)”이 그 대상국으로 지정되면서 이곳의 시설 일체가 이른바 ‘적산(敵産)’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경성일보』 1942년 8월 1일자에 「갱생(更生)하는 적성(敵性), 태화관(泰和館)이 종로서(鍾路署)의 신청사(新廳舍)로, 금추(今秋) 11월경 이전(移轉)」 제하의 기사는 태화여자관 건물이 느닷없이 종로경찰서로 변신하게 되는 배경적 요인에 대해 이러한 설명을 달아놓고 있다.

멀리 한국시대(韓國時代)부터 동양침략(東洋侵略)의 근거로서 독아(毒牙)를 휘두르고 있던 전선 각지(全鮮 各地)에 산재(散在)한 미영계(米英系)의 교회(敎會), 회사(會社), 점포(店鋪)는 전쟁의 봉화(烽火)와 더불어 우리나라의 손에 관리되어지도록 되어 생산공장(生産工場) 혹은 황민수련도장(皇民修鍊道場)으로 충당되어지고 있는데, 여기에 또 한 가지 오랜 기간 미국이 그리스도교회 사교기관(社交機關)이라는 미명(美名)하에 숨어 음모(陰謀)와 책략(策略)의 근거지(根據地)로 있던 인사정(仁寺町) 태화관(泰和館)이 얄궂게도 대동아전(大東亞戰) 아래 반도 심장가(半島 心臟街)의 치안확보에 매진하는 종로경찰서의 청사에 대신할 곳으로 결정, 금추(今秋) 11월경에 이전을 보는 것으로 되었다.
종로서는 시국(時局)의 진전(進展)과 더불어 사무(事務)도 팽창(膨脹)하여 현 청사로서는 좁은 것도 있고 또한 오래되어 개축(改築)하기로 결정하여 3년 전 마츠오카 서장(松岡署長, 현 나진부윤) 시대로부터 준비를 진행하고 있는데, 자재관계(資材關係)에서 실현곤란시(實現困難視)되고 있는 가운데 때마침 대동아전에 봉착, 얄궂게도 관내(管內)의 적성재산(敵性財産)이던 태화관을 이용하는 것으로 되었던 것이다.
종로서의 신청사는 화신(和信)의 안쪽, 견지정(堅志町)의 전차통(電車通)에서 자동차도 통하는 교통지편(交通至便)한 장소이며, 2천여 평(坪)의 부지(敷地)에 화강암건(花崗岩建) 3계(階, 층), 지하실도 있고, 화려한 대강당(大講堂), 스팀의 설비도 되어 있다고 하는 아메리카 독득(獨得)의 화미(華美)를 다한 근대적 건물, 지금까지 이런저런 박안(薄顔)의 느낌이 있던 종로서였었지만, 이 췌택(贅澤, 사치)한 건물을 입수하여 저들이 남겨놓은 설비를 활용하여 총후치안(銃後治安)의 사무를 보는 것처럼 된 고마움, 바로 성전(聖戰)이 준 증물(贈物)이나 다름이 없다.

하지만 일제의 패망과 더불어 이 건물의 원래 주인이던 미국감리교회가 즉각 되돌아왔으므로 필연적으로 청사반환의 문제가 불거지게 되었다. 실제로 해방이 되자마자 미군정 시기에 서울종로경찰서 청사에 대해서는 거듭 명도령(明渡令)이 내려진 바 있었으나 예전 종로경찰서 자리에는 하필 미군이 주둔하고 있던 까닭에 결국 종로경찰서는 한동안 오갈 데가 없는 신세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이러한 상태에서 태화여자관 건물이 반환되고 종로경찰서가 공평동에 자리한 옛 청사로 되돌아 온 것은 1949년 1월 15일의 일이었다. 이로부터 8년가량의 세월이 흐른 다음, 종로경찰서는 다시 경운동 신축청사(통칭 ‘안국동 청사’)로 자리를 옮기는 과정이 이어지는데 이곳이 바로 지금의 경찰서 청사가 들어서 있는 그 장소이다. 이와 동시에 직전까지 종로경찰서로 사용되던 옛 경성복심법원 청사는 박흥식 소유의 화신산업(和信産業)으로 넘어가면서 곧바로 철거되어 사라지고 말았다.

이상에서 보듯이 종로경찰서가 빈번하게 청사의 위치를 옮겨 다닌 것은 무엇보다도 조선인의 독립운동과 관련하여 제일선에서 사상동향을 탐지하고 이를 차단하는 대표적인 억압기구인 까닭에 특히 ‘고등계’를 중심으로 한 지속적인 인력충원과 기능확대가 만들어낸 결과물이 아닌가도 싶다. 더구나 전시체제기에 맞물려 전반적인 사회통제의 확대에 따라 경찰 조직 자체가 비대화하면서 그 결과로 만성적인 공간부족상황이 지속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지하철 1호선 종각역 8번 출구로 올라가면 장안빌딩(종로 2가 8번지) 앞에서 ‘김상옥 의거터(金相玉 義擧址)’ 표석을 마주할 수 있는데, 드물게 남아 있는 이러한 흔적을 통해 한때 이곳이 종로경찰서가 있던 자리였음을 겨우 짐작케 한다. 이것을 제외하고는 이러한 내력을 지닌 종로경찰서가 특정한 시기에 어느 장소에 터를 잡고 있었던 것인지를 파악할 수 있는 장치가 전혀 없는 것이 사실이다. 폭압적인 식민통치기구들이 자리했던 공간들도 결코 망각되어서는 안 되는 곳이니만큼 이를 드러내어 그 존재와 내력을 알리는 장치는 지금에라도 서둘러 마련될 필요가 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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