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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리영희 선생 ‘대화’ 쓴 임헌영 선생, 이번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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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유성호 한양대 교수와의 대화록 ‘문학의 길 역사의 광장’

<친일인명사전>을 펴낸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직을 18년째 맡아 온 원로 문학평론가 임헌영 선생이 후배 비평가인 유성호 한양대 교수와의 대화록 <문학의 길 역사의 광장>을 지난 9월 펴냈다. ‘대화록’의 형식을 빌었지만, 732쪽의 양장본에 묵직이 담긴 것은 임헌영의 성장사와 실천적 삶이니, 이 책은 유 교수의 말대로 “‘자연인 임헌영’의 생애를 충실하게 관통하는 자전적 기록”이라 해도 무방하다.

대화록의 형식을 빌린 자전적 기록

▲ 문학의 길 역사의 광장(임헌영·유성호 대담), 한길사,2021 ⓒ 한길사

명색이 문학도였지만, 비평 쪽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아서 나는 그간 임헌영 선생의 이름을 문예비평이 아니라, 1970년대 민주화운동 저항사에서 간간이 발견하는 데 그쳤다. 그는 1966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하여 1974년 유신체제 긴급조치 시기에 문학인 사건으로 투옥됐고, 월간 <다리>와 <한길문학> 등 잡지의 편집주간으로 일하다가 1979년부터 ‘남민전 사건’으로 4년간 복역했기 때문이다.

1941년생인 그는 책머리(<문학의 길 역사의 광장>으로 초대하며)에서 자기 처지에서 내세울 게 있다면 “우리 시대의 참스승을 찾아 빈 수레를 끌고 폭풍의 언덕길을 마다 않은 채 덜컹대며 헤매면서도 가졌던 황홀감”이라고 이야기한다. 그가 이 책에 등장시킨 이를 죄다 “인생의 스승들”이라며 “그 가르침에 힘입어 저는 비록 제대로 목청이 터지지 못한 변성기의 울음일망정 그들 틈에 끼어 시대의 아픔을 울며 새 세상을 위해 피와 눈물을 흘려왔다”고 고백하는 이유다.

역사의 격랑을 피하지 않고 맞서 온 그의 이력은 그 ‘피와 눈물’이 한갓진 수사가 아님을 방증한다. 그는 남들이 상아탑에서 논문 쓰느라고 바쁠 때 “민주화와 통일운동의 현장을 떠돌며” 협소한 문학인의 구실에 머물지 않고 시대의 부름에 응했다. 그것은 그가 선망하는 빅토르 위고가 “인류의 집단적 걸음걸이”라고 명명한 ‘진보’에 대한 굳건한 믿음 때문이었다.

내가 그를 새롭게 만난 것은 민족문제연구소가 기획 제작한 역사 다큐 <백년전쟁>을 두고 벌어진 텔레비전 방송 토론에서다. 에두르지 않고, 본질과 핵심에 집중한 논리로, 조곤조곤 상대방을 제압해 버리는 그의 내공은 발군이었다. 나는 그의 논리가 오랜 세월 벼려 온 실천적 삶으로 체화한 것이라는 걸 어렴풋하게나마 깨달을 수 있었다.

경북 의성에서 태어난 그가 해방과 6·25전쟁을 겪으며 ‘멸문지화’를 입었을 때 그는 아홉 살이었다. 10·1항쟁으로 고초를 당하던 숙부를 구하려 동분서주하던 부친은 숙부와 함께 희생되었고, 초등교사였던 막내 삼촌은 의성공업중학 4학년이던 그의 맏형과 함께 북행했다. 비슷한 시기에 북으로 간 당숙까지 집안의 장정 다섯이 한꺼번에 사라지면서 그는 홀로 남은 모친을 도와 남은 가족을 돌봐야 하는 맏이가 되었다.

1946년 어느 봄날, 그는 큰누나와 함께 아버지를 따라 의성읍에서 집으로 돌아오던 날을 기억한다. 그를 태우고 가던 아버지는 힘든 오르막길에선 그를 내리고 자전거를 끌고 갔다. 누나가 “아버지 힘드시니 타라고 해도 타지 마라”라고 일렀지만, 그는 내리막길에서 다시 자전거에 올랐다. 그게 걷는 게 싫어서가 아니라 “어버지와의 밀착감이 좋아서”였을 거라고 그는 회고한다.

아홉 살 때 겪은 ‘멸문지화’의 가족사

훗날 아버지가 다시 돌아오지 않게 되었을 때 그는 왜 그때 누나 말대로 혼자 걸어가겠다고 말하지 못했는가를 두고두고 후회했다고 한다. 전쟁과 분단으로 아버지를 잃어야 했던 아들의 회한은 그런 자책의 감정을 통해 아버지를 그리워하고 되살리려 한 것일까.

▲ 내 서가에서 찾은, 임헌영의 글이 실린 한길사 간 <해방 전후사의 인식> 2·3권과 그가 편집위원으로 참여한 월간 <한길문학> 특별기획으로 펴낸 <남북한 문학사 연표> ⓒ 장호철

그는 안동사범학교를 나와 초등학교에서 근무하면서 3·15 부정선거와 사월혁명을 겪는다. 사월혁명 뒤 교원노조가 깃발을 올렸지만, “연좌제로 일체의 사회 활동에 제동을 걸어두는데 익숙해서” 그는 5·16 뒤의 여파를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61년 학교를 떠나 상경, 공부를 이어가며 문학평론가로 등단한 뒤, 대학 강사와 신문· 잡지 기자, 출판 기획자로 고단하게 살아가면서도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외면하지 않았다. 부양해야 할 모친과 동생들이 있었으므로 몸을 사릴 수도 있었지만, 그는 주어진 자기 몫을 다했다.

1971년, 임헌영은 <경향신문>에서 월간 <다리>로 옮겼고, 1974년 1월 ‘문인 61인 개헌 지지 성명’에 참여했다. 유신 정권은 1·8 긴급조치를 선포한 뒤 이들을 연행하여 이른바 ‘문인 간첩단 사건’을 만들었다. 재일교포 교양 월간지 <한양>에 글을 쓰고 발행인과 만난 것 등의 혐의로 그는 이호철, 정을병, 김우종, 장백일 등과 함께 구속되었다.

‘국립대학’에서 만났던 인생의 큰 스승들

같은 해 6월에 집행유예로 석방되었지만, 그는 사회적인 모든 직책과 활동을 깡그리 박탈당하고 ‘요시찰 인물’로 살아야 했다. 그가 ‘관제 빨갱이’에서 복권된 것은 1998년이었고, 사건 발생 44년 뒤인 2018년에 비로소 무죄를 선고받을 수 있었다.

출옥 후 번역으로 돈벌이를 하다가 그는 출판사에 들어가 진보적 관점의 ‘한국문학대전집’을 내기도 했으나 역사는 그를 출판 기획자로 살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유신독재 말기인 1979년, ‘남민전’ 사건으로 그는 다시 투옥되었다. 비합법 지하조직인 남조선민족해방전선 준비위원회의 하부조직인 ‘한국민주투쟁국민위원회’에 가입해 활동하던 그는 5년 형을 선고받고 광주와 대구교도소에서 복역했다.

교도소를 그는 ‘국립대학’으로 즐겨 표현하는데, 그것은 건달과 잡범들이 흔히 말하는 ‘학교’가 구체화 된 공간이다. 그는 두 차례에 걸친 수형 생활에서 통일운동가 김낙중, 홍남순 변호사, 송기숙 교수, 다산연구가 박석무 등을 만나 교유했다.

“내부에는 용광로 같은 투사의 결기를 새기면서도” “그걸 내색하지 않는 원숙한 인간미”와 “담대함, 겸손, 강철 같은 인내심을 지닌” 비전향 장기수 서승·김석형·박판수 선생 등을 만나 교류했다. 이들이 모두 ‘인생의 큰 스승’이었음을 두말할 나위가 없다(책 뒤에 붙인, 23쪽에 이르는 ‘인명·주요 항목과 사건’ 찾아보기에서 이들을 찾아볼 수 있다).

1983년 8·15에 특별사면으로 석방된 그는 1985년 박원순과 함께 근현대사를 연구하는 연구소가 필요하다는 데 공감하고 역사문제연구소를 설립했다. 그것은 비평가 임헌영이 문인의 지위에 연연하지 않고 자신의 활동 반경을 사회적으로 확대하는 시발점이었다.

비역사학자 중심으로 만들어졌지만, 역사문제연구소는 현대사 연구 외에도 역사의 대중화를 위한 학술강연을 이어가면서 1987년 계간 <역사비평>을 창간하는 기염을 토했다. 그는 또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회가 만들어진 2001년에 부소장으로 민족문제연구소(아래 민문연)에 참가하여, 2003년부터 소장직을 맡고 있다.

▲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이 2004년 6월 18일 공청회에서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특별법 개정안 초안의 제24조 1항을 거론하며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 남소연

<친일인명사전> 발간은 학술연구와 실천 운동을 병행하며 성장한 민문연의 활약 가운데 가장 독보적인 성취다. 우리 사회 일각의 반발과 방해를 딛고 간행된 <친일인명사전>은 공정성과 객관성을 담보한 ‘식민지 부역’의 역사를 기록했다. 사전에 오른 이들의 후손이 제기한 소송에서 모두 승리한 민문연은 친일 부역자를 판별하는 기관으로 인정받기에 이르렀다.

문학으로 성찰한 역사… 비극의 가족사는 진행 중

임헌영은 자신이 선택한 ‘문학의 길’에서 자주 ‘역사의 광장’을 만났다. 역사와 시대의 진보에 대한 굳건한 믿음이 역사의 격랑으로 그를 추동했다. 그는 70~80년대 민주화운동과 ‘국가 폭력’을 겪으면서 역사의 의미를 거듭 성찰하며 문학적 지평을 넓혀갔다.

“나는 문학으로 역사를 성찰하고 역사를 문학으로 조명한다”라고 한 그의 말은 단순한 수사가 아니다. 732쪽의 지면에 담긴 역사와 문학에 대한 해박하고 담대한 이론과 실천은 이 책이 단순한 회고록이나 문학적 자서전의 자리에 머물 수 없게 하기 때문이다.

한편, 아버지와 형을 포함한 장정 다섯이 사라진 1950년의 비극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그가 42년간 모셨던 어머니의 버킷 리스트는 단 두 가지, 부친의 유해를 찾아 모시는 것과 북으로 간 맏이를 만나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버지 유해는커녕 돌아가신 날조차 알지 못했고, 2006년 이산가족 상봉 때 금강산으로 간 어머니는 맏형이 낳은 남매를 만났으나 이미 그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이루지 못한 소망을 안고 어머니는 이듬해 96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수십 년 동안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 싸워왔지만, 그는 여전히 분단의 역사, 그 불확실한 평화의 광장에 서 있다. 그러나 지난해 그간 써온 소설론 중 주로 정치문제와 민족운동사를 다룬 작가와 작품들만 선정한 평론집 <한국소설, 정치를 통매하다>(소명출판, 2020)로 수상한 임화문학예술상은 선생의 오랜 투쟁에 대한 위로가 될지도 모르겠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기자의 개인 블로그 ‘이 풍진 세상에’(https://qq9447.tistory.com/)에도 싣습니다.

<2021-12-29>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리영희 선생 ‘대화’ 쓴 임헌영 선생, 이번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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