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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전범이 된 조선청년’ 한맺힌 65년 투쟁 빈손으로 떠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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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신이의 발자취] ‘마지막 비시급 전범’ 이학래 회장 별세

‘한국인 BC급 전범’ 피해자 고 이학래 동진회 회장의 2013년 11월 모습. 뒷쪽 사진 맨뒷줄 오른쪽에서 둘째가 ‘전범’ 수감 시절의 이 회장이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17살 때 ‘콰이강의 다리’ 포로감시원
일제 패망뒤 연합군 재판 ‘사형선고’
전후 일본 국적 박탈해 보훈도 제외

55년 70여명 동진회 결성 ‘보상’ 요구
65년 ‘한·일협정’ 구실로 ‘창구’ 닫아
91년부터 법정 투쟁 99년 최종 패소
지난해까지 의회 상대로 ‘입법’ 촉구

“슬픈 소식을 전해야겠습니다.” ‘마지막 조선인 비·시(B·C)급 전범’ 이학래 동진회 회장의 죽음을 알리는 부고는 짤막한 문장으로 시작하고 있었다. 자이니치(재일동포)들이 집단 거주하는 오사카 이카이노에서 ‘샛바람 문고’를 운영하는 후지이 고노스케는 28일 페이스북을 통해 이 회장이 이날 오후 숨졌다고 밝혔다. 향년 96.

“이학래상이 지난 26일 자택에서 넘어져 머리를 부딪히고 다리가 부러져 병원으로 이송됐지만, 치료의 보람도 없이 28일 오후 2시10분 숨졌습니다. 학래상은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먼저 숨진 동료들을 생각하고 (비시급 전범들을 구제하기 위한) 입법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아베 신조 정권이 힘으로 입법화를 가로막았습니다.”

후지이의 설명대로, 조선인 비시급 전범 이학래의 일생은 부당한 일본 국가권력을 상대로 한 투쟁으로 점철된 삶이었다. 1925년 전라남도 보성에서 3남매의 첫째로 태어난 그는 1942년 봄 면장에게서 갑작스런 호출을 받았다. “‘남방 포로감시원’을 모집하는데, 자네가 가소!” 근무 기간은 2년, 한 달 월급은 50원이라고 했다. 17살 소년은 2년만 고생하면 징용과 머잖아 시행될 징집을 면할 수 있다는 생각에 지원서를 제출했다. 1942년 8월19일 부산에서 동남아시아로 향하는 배에 올랐다. 그로부터 3년 뒤 일제가 패망하면서 연합국 포로를 학대한 죄로 오스트레일리아 군사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게 되는 고통스런 삶이 시작된 순간이었다.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동남아시아 전선에서 파죽지세의 승리를 거듭했다. 일본 정부는 이 과정에서 발생한 수십만명에 이르는 연합군 포로를 감시하기 위해 조선인 청년들(3012명)을 동원했다. 이학래가 배치된 타이에서 일본군은 충분한 식량·의약품·의복도 지급하지 않은 채 포로들에게 혹독한 노동을 강요했다. 영화 <콰이강의 다리>(1957)로 유명해진 태면철도(타이~미안마를 잇는 철도)를 건설하는 작업이었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에 철로를 내는 난공사가 이어진 탓에 수많은 포로들이 목숨을 잃었다. 이 과정에서 포로감시원 이학래는 일본군 공병대가 요구하는 노역 인원을 맞추려다 오스트레일리아 군의관 어네스트 던롭 중령과 자주 마찰을 빚었다. 전쟁이 끝난 뒤 ‘전범’이란 무시무시한 낙인이 찍히게 된 이유다. 일본이 일으킨 전쟁의 최말단에서 그처럼 ‘도구’로 사용됐던 조선인 포로감시원 129명은 연합군의 전범재판에서 포로학대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이 가운데 14명은 사형판결을 받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는 가까스로 감형된 탓에 죽음을 면했지만, 곧바로 사회의 냉혹한 시선과 마주해야 했다. 조국은 이들을 ‘친일파’라 매도했고, 일본은 ‘전범’이라 멸시했다. 1952년 4월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의 발효로 일본 국적이 박탈되자, 일본 정부는 이들을 원호법·은급법 등의 적용 대상에서 제외시켰다. 이 과정에서 허영(1955년)·양월성(1956년) 등 두 명이 생활고를 이기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했다.

막다른 골목에 몰린 조선인 비시급 전범 70여명은 1955년 4월 자치 모임인 동진회를 결성해 일본 정부를 상대로 원호와 보상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1965년 6월 한-일 협정이 체결되자 일본 정부는 한-일 간의 모든 문제는 해결됐다며 대화 창구를 닫아버리고 만다. 이 회장은 “전범일 땐 일본인이고, 보상할 땐 조선인이라 하느냐”며 가슴을 쳤다.

이 회장과 동료들은 법정 투쟁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1991년 11월12일 도쿄 지방재판소에 제기한 소송은 무려 5년을 끌었다. 1996년 9월9일 판결에서 재판부는 보상의 필요성은 인정하면서도 “이는 국가의 입법 정책에 속하는 문제”라며 원고들의 소를 기각했다. 이 기조는 고등재판소 판결(1998년 7월13일)과 최고재판소 판결(1999년 12월20일)까지 이어졌다. 좌절이 이어질 때마다 이 회장은 “같은 어려움을 당했던 동무들은 모두 죽었다. 가장 젊은 나만 살아 남았다”며 마음을 굳게 다잡았다.

짧게나마 문제 해결의 빛이 보인 것은 야당이던 일본 민주당이 2008년 5월 피해자 한 사람당 300만엔의 보상금을 지급하는 법안을 만든 뒤였다. 사실 택시업으로 성공한 이 회장에게 돈이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예상대로 법안은 대다수 의원들의 무관심 탓에 폐기됐고, 여당이 된 민주당은 이들의 고통에 더 이상 귀 기울이지 않았다.

고 이학래 회장이 2013년 11월 서울역사박물관에 전시된 1951년 촬영 아우트램 형무소 구금 전범 사진 앞에서 자신의 얼굴을 가리키고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한-일 국교정상화 50돌을 맞은 2015년 4월 일본 국회에서 만난 기자에게 구순의 이 회장은 “올해엔 꼭 이 문제가 해결됐으면 좋겠다”고 울먹이듯 말했다. 2017년에는 <전범이 된 조선청년>(민족문제연구소 펴냄) 회고록를 통해 “일본 정부는 자신의 부조리를 시정하고, 입법을 촉구하는 사법부의 견해를 진지하게 받아들여 입법 조치를 조속히 강구”하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그는 지난해 2월 도쿄도 니시도쿄에서 열린 강연회에 참석해 다시금 입법을 촉구했지만 코로나19 사태 등으로 정기국회에 관련 법안이 제출되지도 못했다.

그렇게 한-일 관계가 최악의 수준으로 악화되며 허무하게 세월은 흘렀고, 그는 끝내 한을 풀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

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

<2021-03-29> 한겨레

☞기사원문: ‘전범이 된 조선청년’ 한맺힌 65년 투쟁 빈손으로 떠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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