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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민족문제연구소 출범 30년을 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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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제연구소 출범30년을 돌아본다

상임이사 조세열

친일문제 연구의 선구자 임종국 선생의 유지와 반민특위의 정신을 이어받은 민족문제연구소가 2월 27일(일제침략이 시작된 강화도조약 체결일)로 창립 30주년을 맞는다. 그간 연구소는 숱한 고난과 역경을 뚫고 역동하는 조직으로 성장했다. 짧지 않은 세월인 만큼 괄목할만한 성과도 거두었지만 역량이 따라주지 않아 미처 주목하지 못한 아쉬운 부분도 적지 않았다.
  
자화자찬이 될까 조심스러운 면이 없지 않지만 지난 30년간 연구소가 이루어낸 주요성과들을 정리해본다.

자타가 공인하는 최고의 업적은 물론 2009년 11월 8일 『친일인명사전』 발간이다. 연구소 창립부터 치면 18년, 편찬위원회가 발족한 뒤로도 8년의 시간과 각고의 노력을 기울인 끝에, 전3권 2,882쪽 4,389명의 친일파를 수록한 대사전이 빛을 보게 되었다. 여기에 이르기까지 각계각층의 성원과 헌신이 있었다. 대학교수 1만2천여 명의 편찬 지지선언, 단 11일만에 5억여 원의 성금을 모아주고 후원회원으로 가입한 어린이 청소년 대학생 시민들, 진보언론의 대대적인 보도, 아무런 대가 없이 작업에 참여한 편찬위원들과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열정을 바친 상근자들. 그야말로 전 국민적 여망과 시대정신이 만들어 낸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는 기적의 산물이었다. 오랜 기간 소송과 협박에 시달렸으나 『친일인명사전』은 이제 정부기관과 사법부까지 잣대로 삼는 역사의 이정표로 굳건히 자리 잡았다.

민족문제연구소가 많은 어려움을 딛고 2009년 <친일인명사전>을 발간, 그해 11월8일 국민보고대회를 열었다. 강윤중 기자 @ 경향신문 2020.11.24

2008년 집권한 이명박 정권은 실용주의를 택할 것이라는 일반적 예상과 달리 철저하게 퇴행의 길을 걸으며 극우세력과 손을 잡았다. 정권인수위원회의 일성이 과거사청산 중단이었던 데서 드러나듯, 뉴라이트의 역사인식을 고스란히 수용해 정책에 반영하였다. 뉴라이트가 활개치고 공영방송까지 나팔수가 되어 역사왜곡을 본격화한 것도 이때부터였다. 민족문제연구소는 학계와 교육계 시민사회가 참여하는 역사정의실천연대를 조직하고 사무국을 맡아 이에 대응하였다. ‘근현대사 진실 찾기’ 역사다큐 시리즈 제작도 관제언론의 이승만 박정희 미화 등 역사변조에 대한 대응이었다. 700만 여명이 관람한 〈백년전쟁〉은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으며, 이를 둘러싸고 최근까지도 소송이 진행되었으나 모두 연구소의 승소로 끝이 났다. 뒤이은 박근혜 정권 아래서는 아예 역사말살이 벌어졌다. 수준이하의 교학사 판 한국사 교과서 검정 통과와 국정제 기도가 그것이다. 연구소는 역사정의실천연대를 한국사교과서국정화저지네트워크로 확대 개편하고 다시 사무국을 맡아 ‘역사쿠데타’를 저지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으며 완승을 거두었다. 이 과정에서 연구소의 지부들은 지역의 저지운동에서 선봉 역할을 기꺼이 떠맡았다. 박근혜의 아버지에 대한 빗나간 ‘효도’는 결국 촛불혁명을 일으키고 정권의 종말을 앞당기는 단서의 하나가 되었다.

『친일인명사전』 발간에 이어 연구소가 역점사업으로 추진한 과제는 시민역사관 건립이었다. 사전만으로는 올바른 역사인식을 널리 확산시킬 수 없다는 문제의식의 발로였다. 연구소는 오랜 기간 축적된 10만 여점의 문헌과 실물 등 희귀자료를 소장하고 있었다. 구입한 것도 많지만 다수는 강제동원피해자들과 연구소 회원들이 흔쾌히 기증해 준 소중한 자료들이었다. 2011년 건립위원회가 발족하였고 8년의 노력 끝에 2018년 8월 29일 국치기념일에 식민지역사박물관이라는 명칭으로 개관을 보게 되었다.

이번에도 시민과 회원들이 17억 원의 성금으로 역사정의 실현의 길에 힘을 보탰다. 일본의 시민사회와 진보 학계는 ‘일본과 식민지역사박물관을 잇는 모임’을 결성하고 1억여 원의 성금과 방대한 자료를 기증하였으며, 개관 이후에도 연대와 후원을 지속하고 있다. 식민지역사박물관은 차별성 있는 상설전시와 참신한 기획전시, 알찬 시민강좌로 단기간에 일제강점기 전문박물관으로 널리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2015년부터는 서울시 강북구의 위탁으로 독립정신과 민주주의의 성지 수유리 북한산 자락에 위치한 근현대사기념관도 개관 운영 중이다. 동학농민혁명에서 3·1혁명, 사월혁명으로 이어지는 100년간에 걸친 연면한 투쟁의 역사를 담은 기념관은 이제 강북구를 넘어 전국적인 명소로 성가를 드높이고 있다.

친일문제, 일제하강제동원, 한국전쟁전후민간인학살 등 과거사진상규명이 시대적 과제로 떠오른 데는 연구소의 역할이 적지 않았다. 진상규명이 학문적 전문적 영역이었다면 이에 기초한 입법과 청산 운동은 실천운동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박정희기념관반대운동, 친일문인기념문학상 등 친일파 기념사업 철폐운동, 강제동원 소송지원, 야스쿠니신사 조선인 합사 철폐운동, 전범기업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반대운동, 민간인학살희생자 유해발굴 등 지속적인 시민운동의 전개는 전 국민적 관심과 여론의 지지를 받았으며 이는 일부 분야의 특별법 제정이라는 최종의 성과로 이어졌다.

민간과 별개로 국가의 과거청산은 당연한 책무의 이행이라는 점에서 ‘나라다운 나라’의 선결 과제임에 틀림없다. 너무도 늦은 감이 있고 미흡한 부분이 없지 않았지만 여러 과거사 관련 특별법의 제정과 정부 위원회의 발족은 거대한 역사의 진전이었다고 평가할 만하다. 최근에는 과거사 청산이 전문분야와 지방자치단체, 교육현장 등 전방위로 확산되고 있어 미래세대를 생각하면 더더욱 다행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민족문제연구소는 독립운동의 위상 복원에도 앞장섰다. 신흥무관학교는 일제강점기 최대의 독립군 양성 기지로 그 교관과 생도들이 봉오동·청산리 전투 등 초기 독립전쟁의 주력을 이루었을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임시정부와 한국광복군, 의열단 등 여러 독립운동단체의 지도자를 배출한 무장항일투쟁의 금자탑이었다. 그럼에도 사실상 잊혀진 독립운동이었던 신흥무관학교의 활약을 되살리기 위해 설립 100주년을 맞은 2011년 기념사업회 발족을 주도하였으며 사무국을 맡아 신흥무관학교가 남긴 불멸의 공적을 알리는 데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3·1운동은 전 민족적 항일운동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그 역사적 함의는 훨씬 크다. 우리 민족사에 비로소 민주공화정을 대세로 확립시켰으며, 여성과 천민들이 대거 변혁운동의 주역으로 현실참여에 나섰다. 나아가 전면적인 항일무장투쟁의 기폭제가 되었고, 지역과 종교, 신분과 계급, 좌우의 이념을 뛰어넘어 민족협동전선의 시원을 이루었다. 연구소는 3·1운동 95주년이던 2014년 3·1혁명기념사업회를 조직하고 사무국을 맡았으며 〈제국에서 민국으로〉 심포지엄을 시작으로 정명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학술연구와 실천운동을 병행하는 특유의 도전을 계속해 왔다. 민주화운동 시기 많은 연구단체들이 같은 지향을 가지고 활동했지만 오늘날 성공적으로 이를 체화시킨 단체는 드문 형편이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사회참여에 못지않게 학술부문에서도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전시 교육 등 무수한 일상적인 사업부문은 논외로 하더라도, 『일제하전시체제기정책자료총서』 전 98권과 『일제협력단체사전』 『식민통치기구사전』 『재일조선인단체사전(근간)』 등 사전류, 『친일파 99인』 『청산하지 못한 역사』 『군함도, 끝나지 않은 전쟁』 『거리에서 국정교과서를 묻다』 등 대중서 발간과 같은 결실들을 거둬왔다. 논문집 등 연구서 발간이 저조하지만 이는 남들이 회피하는 ‘공장’을 돌리고 있는 연구소의 불가피한 현실에서 기인하는 바, 실정을 헤아려 주길 바랄 뿐이다.

지난 30년간 민족문제연구소는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 많은 일을 해왔다. 그래서 어떤 분은 ‘모든 문제 연구소’라고 애정 어린 지적까지 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연구소는 반드시 해야 하지만 다른 단체에서 주목하지 않은 일들을 주로 감당하는 편이었다. 앞으로도 역사와 현실이 우리를 불러내면 기꺼이 궂은일도 떠맡을 작정이다.

1991년 2월 27일, 소장 사무국장 연구원 둘 총원 네명으로 11평 좁은 방에서 첫발을 내디뎠던 민족문제연구소가 이제 상근자만 40명(근현대사기념관 파견 6명 포함)인 거대 조직으로 성장했다. 이 과정에서 한편으로는 갖가지 탄압과 협박, 각종의 음해와 비방에 시달려 온 것도 사실이다. 이 모든 어려움을 견뎌내고 오늘에 이른 데에는 무엇보다 회원들(현재 1만2천여 명)의 한결같은 지지가 큰 힘이 되었다. 학계와 시민사회에도 갚을 수 없는 많은 빚을 졌다. 성심을 담아 감사드리며 앞으로도 변함없이 역사와 사회 정의 실현에 최선을 다함으로써 이에 보답하고자 한다.

* 향후의 과제와 전망에 대해서는 하반기 학술회의를 거쳐 별도의 글을 싣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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