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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 난무하는 문학상, 영예의 이름인가 검은 수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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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이육사·김동인 기리는 문학상, 친일과 민족의 자존 사이 고민해야…
박몽구 시인, 순천향대 객원교수

결실의 가을이 저물어가고 있다. 농부들은 한해의 결실을 들에서 과수원에서 거둬들이고, 강가에 선 은행나무들은 샛노란 결실을 길손들에게 나눠주며 긴 겨울을 넘길 채비를 하고 있다. 시를 쓰는 사람들 역시 한해의 결실에 바쁜 모습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잡지사 우편함에 쌓이는 시집들을 보면, 제아무리 코로나19가 음험한 병마로 위협한다 하더라도 시인들의 살아있는 정신을 억누를 수는 없는 모양이다.

시인, 소설가들이 심혈을 기울여 펴내는 작품집과 함께 문단의 큰 결실 가운데 하나는 가을 들어 곳곳에서 들려오는 각종 문학상 수상 소식일 것이다. 축하하는 마음과 부러움이 뒤섞인 반응들이 SNS 등을 통하여 퍼지는 걸 보면, 새삼 한 해가 가는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인다.

그런데 올해에는 각종 문학상 주변을 놓고 설왕설래하는 걸 보면서 왠지 축하와 부러움에 머물러서는 안 되리라는 생각이 든다. 최근 들어서는 지방자치단체들이 각종 문학상 만들기에 경쟁적으로 나서면서, 상이 그 본질과는 관계없는 방향으로 흐르는 것을 우려하는 시선도 적지 않다.

지자체들이 앞다투어 문학상을 만들어 시행하는 데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을 것이다. 우선 이를 통해 해당 지역의 정체성을 살리고 문학상 제정의 원점이 되는 문인의 정신을 오늘에 되살려 보려는 의도가 깃들어 있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들 문학상의 제정 시행이 손쉽고도 비용이 적게 드는 지역 홍보 수단이 되고 있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문학상 급증 촉발한 지자체들

요즈음은 지자체마다 도서관 등을 건립하는 데 수백억 원씩 예산을 투입하면서도 정작 거기에 비치할 도서 구입 예산은 조족지혈로 편성하여 문제가 되고 있는 모습을 심심찮게 본다. 심지어 우수문학 도서의 경우에도, 지역 도서관들에서 수준 높은 이론서나 어려운 시집보다 누구나 읽기 쉬운 수필류의 책을 선호한다는 얘기도 들린다. 그리고 출판사마다 각지의 도서관에서 도서 기증을 요청하는 편지들이 쇄도하기도 한다는데, 다 본말이 전도된 일이다.

지자체들이 문학상 제정을 손쉽게 생각하고 그 시행에 신중을 기하지 않는 것도 이 같은 잘못된 인식과 궤를 같이하는 게 아닌가 한다. 실제로 남쪽의 한 지방자치 단체에서는 그 지역 출신의 모 시인이 생전에 그를 내세운 문학상을 제정 시행하더니, 불과 3회째 시상을 한 후 지역 문인들로부터 각종 민원이 끊이지 않자 급기야 상을 폐지하기도 하였다. 이에는 그 지자체의 섣부른 행정도 문제지만, 해당 지역 출신 문인들이 자신들에게는 상이 돌아오지 않고 외지인들에게만 돌아간다며 민원을 제기한 것이 큰 요인이 되었다고 한다. 따지고 보면 문인들의 속 좁은 처신도 문학상의 건전한 발전에 한 저해 요인이 되고 있는 셈이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보면 한국 문학이 수백 개의 문학상을 제정하여 시행할 만큼 질적으로 우수하며, 그 기반이 탄탄한가 자문해 보면 그렇지 못하다는 답이 훨씬 더 많을 것은 자명하다. 상은 그것이 표방하는 바와 내용이 얼마나 일치하는가가 가장 큰 기준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1970년대 모 출판사에서 제정한 ‘만해 문학상’의 첫 수상자 배출 경위는 눈여겨볼 만하다. 필자의 기억으로는 아마 1974년인가 이 상이 제정되었는데, 당시 박정희 유신정권 아래에서 이 상에 값할 만한 수상자들을 찾기 어렵다는 이유로 제정 이후 몇 년 동안 수상자를 내지 못한 걸로 알고 있다. 엄혹한 시절 만해의 정신에 부끄럽지 않게 문학 행위를 하고 있는 문인을 찾기 어려웠던 것이다.

또한, 우리나라가 아닌 외국의 경우지만, 1964년 장 폴 사르트르가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을 때, 그는 1964년 수상자로 선정되자 모든 공적인 훈장과 명예를 거부한다는 원칙을 밝히며 수상을 거절했다. 작가는 어떤 기관이나 제도에 편입되면 안 된다는 소신을 지킨 것이었다. 아울러 “이런 상은 억압받는 이들의 아픔을 함께해 온 파블로 네루다나 러시아의 솔로호프에게 먼저 돌아가야 한다”라고 천명한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문학적 명성이 전 지구촌에 퍼짐은 물론 요즘 화폐 가치로 13억 원에 달하는 상금이 걸린 상을 거부한다는 것은 실로 어려운 일이다. 그는 당시 스웨덴의 한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현 상태에서 노벨상은 객관적으로 서방 블럭 작가나 동방의 반역자들을 위한 영예처럼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노벨상이 중남미에서 가장 위대한 시인의 한 사람인 ‘파블르 네루다’나 충분한 자격이 있는 ‘루이 아라공’에게 주어지지 않음이 그 예다. 또 노벨문학상이 솔로호프에게 수여되기 전에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에게 수여되었다는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소련 작품으로서 노벨상을 탄 것은 단지 해외에서 출판되고 소련에서는 금지된 작품인 <닥터 지바고>뿐이었는데 이는 균형이 잡히지 못한 시상 방법이었다.”

모름지기 깨어 있는 작가라면, 모든 종교적 인종적 편견을 멀리할뿐더러 자신 말고도 더 문학적 사명과 작품의 진정성에 충만한 사람을 돌아보는 게 우선이라는 지적이다. 우리나라 작가들이 이만한 기개를 보여주지 못하고 있는 것은 참으로 유감이다.

표리부동한 문학상의 속출

모두에 밝힌 대로 현재 우리나라에서 시행되고 있는 문학상은 수백 개에 달한다. 이 같은 상을 주관하는 측은 하나같이 때로는 숭고하고 거창한 상의 제정 취지를 내걸고 있지만, 문제는 그 제정 취지와 어긋나는 상이 적지 않다는 데 있다. 이런 양상은 상의 제정에 따르는 재정 여건이 열악한 문학 전문지 등이 제정한 문학상보다 예산 여건이 충분한 지자체나 대형 언론사에서 제정한 상들 쪽에서 빈번하게 드러나고 있다.

올해 들어 문단 내외에서 적잖은 물의를 일으킨 ‘이육사 시문학상’은 일그러진 문학상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한국작가회의 자유실천위에서 나온 성명서에 따르면 ‘2020년 제17회 이육사 시문학상은 친일문인을 기리는 문학상인 팔봉비평문학상을 수상한 문학평론가가 심사위원이었고, 대표적인 친일문학상인 미당문학상 후보를 두 차례나 수락했을 뿐만 아니라 전두환 취임 때 찬양시를 쓴 시인을 기리는 편운문학상을 수상한 시인이 수상자로 선정’되어 수상하였다. 주최 측은 좋은 시를 쓴 시인을 선정하여 시상한 것이 무슨 문제가 되느냐고 강변할지 모르지만, 과연 그 같은 반응은 변명인가 아니면 괴변인가.

이 상 제정의 정신적 근간이 되고 있는 이육사 시인은 어떤 사람인가? 그는 일제 강점기에 끝까지 민족의 양심을 지키며 죽음으로써 일제에 항거한 시인이 아닌가. 경북 안동(安東) 출생인 그는 조부에게서 한학을 배우고 대구 교남(嶠南)학교에서 수학하였지만, 일제의 폭압 정치로 고향에서 살 수 없어 중국 본토와 만주 등지를 떠돌며 독립운동을 벌이다 절명한 사람이다. 그는 1925년 독립운동단체인 의열단(義烈團)에 가입하였고, 1927년 귀국했으나 장진홍(張鎭弘)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연루되어 대구형무소에서 3년간 옥고를 치렀다. 그때의 수인번호 264를 따서 호를 ‘육사’라고 지었다. 출옥 후 1937년 윤곤강(尹崑崗)·김광균(金光均) 등과 함께 동인지 <자오선(子午線)>을 발간, 그 무렵 유명한 <청포도(靑葡萄)>를 비롯하여 <교목(喬木)>, <절정(絶頂)>, <광야(曠野)> 등을 발표했다. 1943년 중국으로 갔다가 귀국, 이해 6월에 동대문경찰서 형사에게 체포되어 베이징으로 압송, 이듬해 베이징 감옥에서 옥사한 일제하 가장 실천적인 삶을 꾸린 지사가 아닌가. 그런 분을 기리는 문학상에 친일의 검은 그림자가 드리운 사람들이 심사위원을 하고, 미당문학상 후보에 여러 번 이름을 올린 사람이 기왕의 여러 차례 수상에 이어 아직 잉크도 마르지 않아 또다시 상을 타는 것은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이육사 시문학상을 둘러싼 여러 문제들이 불거지자, “‘이육사 문학관’ 측은 ‘이육사 시문학상’ 운영의 주체가 아니다. 상의 운영은 ‘이육사 시문학상 운영위원회’가 주관하며, 제1회부터 제17회에 이르는 지금까지, 이 위원회는 ‘이육사시문학상’ 시행 기관인 ‘TBC문화재단’에서 독자적으로 구성해 운영하고 있다. ‘이육사 시문학상’ 심사위원회를 구성하고 그에 따라 문학상 수상자를 결정하는 것은 이 운영위원회와 심사위원회의 고유한 권한이다”라고 해명에 나서기도 했다. 하지만 항일 투사 시인 이육사의 정신을 기리는 이육사 문학관이 시상식 공간을 제공하고, 상의 운영에 대하여 바른말을 아꼈다고 해서 책임을 면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한국작가회의 자유실천위원회 성명서는 “그동안 일부 ‘이육사 시문학상’ 수상자나 심사자들의 면면을 보면 부끄럽기 그지없다. 그들의 상당수가 미당문학상, 팔봉비평문학상 등 친일문인을 기리는 문학상을 수상하였거나 심사자였다. 친일문학상 후보자도 상당했고, 박정희를 찬양한 시인도 있었다. 그 이름을 일일이 거명할 수 없을 정도로 상황이 매우 심각하기에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 친일문학상 수상자나 심사자가 ‘이육사 시문학상’뿐만 아니라 이육사문학관에서 시행하는 각종 행사에도 대거 초대되었다. 학술토론회, 낭독회, 문학학교, 문학강연회 등의 행사에 초대되어 어린 학생을 비롯해 수많은 독자들과 함께 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고 비판하고 있다. 이 상을 제정한 지방의 유력 언론사에만 책임을 돌릴 게 아니라, 작게는 한국 문단 나아가서는 우리 사회 전체가 ‘이육사’라는 거대한 정신의 거봉을 앞에 내세우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진지하게 고민할 때이다.

친일과 민족의 자존 사이에서

최근 언론에 두 문학상의 수상자가 발표되었다. 두 문학상의 수상자는 놀랍게도 같은 사람이다. 보도에 따르면, 김숨 작가는 장편소설 <떠도는 땅>으로 <조선일보>가 주최하는 제51회 동인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데 이어 <부산일보>가 선정하는 제37회 요산 김정한문학상 수상자에도 이름을 올려 문단 내외에 물의를 일으켰다.

김동인은 일제가 패망하던 날 아침에도 조선총독부를 찾아가 ‘시국에 공헌할 새로운 작가단’ 구성을 자신에게 일임해 주면, 일왕에게 백배의 충성할 것을 맹세했다고 한다. 그는 일제 기관지 매일신보에 내선일체와 황민화를 주장하는 글을 여러 차례 기고했고 일제의 징병에 조선 청년들이 자원할 것을 독려하는 글도 실었다. 그는 창씨개명과 함께 ‘황군 위문 작가단’ 활동도 한 대표적인 훼절 친일지식인이다. 반면에 요산 김정한 선생은 일제 치하에서도 일체 친일 행위를 하지 않았음은 물론 이승만에서 박정희의 유신 독재에 이르는 시절 불굴의 정신으로 반대 목소리를 내면서 부산을 올곧게 지킨 지사형 작가가 아닌가. 특히 김정한 선생의 작품들 곳곳에는 일제에 항거한 기층 민중의 뼈아픈 삶이 아로새겨져 있는데, 친일의 거두를 기리는 상을 받은 사람이 다시 비교도 하기 어려운 상을 수상하다니 문인 정신이라곤 털끝도 찾아볼 수 없는 치졸한 처신이다.

두 상의 수상자 소설가 김숨은 여성을 유린한 반인륜적 범죄 피해자인 위안부 할머니의 이야기를 감동적으로 작품화한 보기 드문 작가라는 점에서 납득이 어렵다. 김숨은 <조선일보> 수상 인터뷰에서 <떠도는 땅>의 집필 동기에 대해 “역사에 대한 특별한 의무감 때문이라기보다는 작가로서 인간에 대한 이야기를 쓰려고 했다”라고 말했다. 전적으로 동의한다. 위안부 할머니나 강제이주열차를 탄 우리 동포 모두 일제의 가증스러운 탄압으로 떠도는 삶을 살지 않을 수 없었다. 피나는 역사를 놓치지 않는 김 작가의 주목에 놀라면서도, 그가 그 작품으로 친일문인을 기리는 문학상 수상을 수락했다는 점에 우리는 더욱 실망하지 않을 수 없다.

동인 문학상은 보수 진영에 선 대표적인 언론사인 <조선일보>가 시상하는 상이면서, 거액의 상금을 내 거는 등 자칭 가장 권위 있는 상임을 자부한다고 한다. 일제 하 <조선일보>가 벽초 홍명희의 <임꺽정>을 연재하고 민족지의 역할을 한 것을 생각하면, 이 신문사는 하루 빨리 친일의 거두 김동인을 기리는 문학상 폐지에 나서야 할 것이다. 문인들 또한 언론의 영향력과 상금의 유혹에서 벗어나 올곧은 비판 정신을 되찾아야 마땅하다.

몇 해 전에는 5.18 광주민주화운동 정신의 현현을 내건 ‘5.18문학상’에 그 정신과는 전혀 부합되지 않는 시작 활동을 해온 시인이 수상자로 선정되었다가, 문단은 물론 사회 각계에서 비판 여론이 크게 인 적이 있다. 당시에는 수상자로 선정된 사람이 망설임 없이 수상을 포기하면서 겨우 봉합된 적이 있다. 이 상의 경우에는 그 뒤에도 뚜렷한 궤적을 긋지 못한 채 작품성을 평가받은 이들이 수상자로 선정 시상되고 있다. 하지만 모두에 밝혔듯 만해나 5.18의 경우에는 그 이름에 값하는 문학 행위를 하기가 참으로 어렵다. 따라서 지자체나 유력 단체 및 언론사들은 앞다투어 상을 만들고 뚜렷한 궤적을 그리지 못한 채 실망을 안겨주기보다, 지금부터라도 진지하게 그 취지를 살리는 길은 무엇인지 고민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1960년대부터 박정희 군사정권의 독재에 온몸으로 저항해온 대표적인 시인 가운데 하나인 조태일 선생을 기리는 문학상의 경우에도, 상의 취지와 어긋나게 운영되고 있다는 지적이 잇따르고 있다.

특히 최근 우리 문단에서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고 있는 문인들을 두고도 뜻있는 비판이 잇따르고 있다. 어떤 문인은 불과 몇 년 사이에 10여 개의 문학상을 거머쥐는 등 양식을 의심하게 만드는 일이 적지 않다. 특히 수상자로 선정된 상 사이에 제정 취지나 정신의 공통성을 찾기 어려운 마당에, 이른바 유명세에 편승하여 특정 문인들에게 상이 계속 주어지고 있고 해당 문인들 또한 아무런 자기 정제나 작품성의 향상 없이 상을 연거푸 받는 풍토는 매우 큰 문제이다.

양적 팽창에도 불구하고 한국 문학이 국제 무대에서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는 데에는 가히 전성시대라 할 만큼 범람하고 있는 문학상의 남발도 한몫을 톡톡히 하고 있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차제에 한 문학상을 수상한 이들이 다음 상에 도전하려면 객관적으로 인정할 만한 작품성의 향상 등이 반드시 동반되어야 한다는 묵시적 약속도 필요하리라 본다. 나아가 제도적으로 문학상을 탄 문인들에게는 적어도 5년 이내에 다른 상을 수여하지 않는다는 사회적 약속도 필요한 시점이다.

아무튼 문학상이 개인의 영예라는 좁은 울타리에서 벗어나 한국 문단 전체에 신선한 자극을 선사하면서 우리 문학을 한 단계 비약시키는 지렛대가 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그러기 위해서는 제정 취지에 맞게 문학상이 운영됨은 물론, 작품성과 공정성 그리고 무엇보다도 살아 있는 문인 정신이 함께 해야 할 것이다.

* 박몽구 한양대 국문과 대학원 졸업. 문학박사. 1977년 <월간 대화> 등단. 시집 <황학동 키드의 환생>, <단단한 허공> 등 있음. 순천향대, 추계예술대 객원교수.

<2020-12-10> 프레시안 

☞기사원문: 난무하는 문학상, 영예의 이름인가 검은 수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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