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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의 기억 전달자들 9편 “빼앗긴 어버이를 그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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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TN 라디오 ‘이동형의 뉴스 정면승부’]
■ 방송: FM 94.5 (18:10~20:00)
■ 방송일: 2019년 5월 10일 (금요일)
■ 대담: 김승은 민족문제연구소 식민지역사박물관 학예실장

[임정 100주년 특집] 9편 “빼앗긴 어버이를 그리며”

◆ 남영주, 고인형>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라고 얼마나 불러보고 싶었는지요. 아버지 오늘은 그토록 불러보고 싶던 아버지를 마음껏 소리쳐 불러보겠습니다. 아버지 얼마나 억울하셨습니까, 아버지 얼마나 괴로우셨습니까. 고향에 두고 온 가족이 얼마나 보고 싶으셨습니까.”

“오라버니, 오빠 사랑하는 오빠. 부모님도 다 버리고 누구를 위해서 여기로 왔습니까. 오빠가 너무너무 보고 싶어요.”

◇ 앵커 이동형(이하 이동형)>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민족문제소와 이동형의 뉴스정면승부가 함께 준비한 특집 코너, ‘100년의 기억, 전달자들.’ 아홉 번째 시간입니다. 오늘 해볼 이야기는 일제의 침략전쟁이 한창이던 시절에 강제로 끌어간 우리 동포들의 이야기입니다. 전쟁터에서, 탄광에서, 또 공사장에서 굶주림과 강제노력에 시달려야 했던 어버이들과 그 어버이를 빼앗긴 유족들의 통한의 삶을 돌아보겠습니다. 도움 말씀 주시기 위해서 민족문제연구소 식민지역사박물관 김승은 학예실장 나오셨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 김승은 민족문제연구소 식민지역사박물관 학예실장(이하 김승은)> 네, 안녕하세요.

◇ 이동형> 시작하면서 유족들의 목소리를 들어봤는데요. 아버지를 찾는, 또 오빠가 보고 싶어서 울부짖는 그런 목소리였는데, 일제의 강제 징용은 피해 당사자뿐만 아니라 가족들에게도 너무나 큰 상처를 준 것 같습니다.

◆ 김승은> 네, 그렇습니다. 당사자뿐만 아니라요. 가족을 바로 해체시키는 과정이었고, 또 그 자식들은 부모를 완전히 잃는, 고아가 되는 과정이나 마찬가지였다고 생각합니다.

◇ 이동형> 강제징용할 때 말 그대로 강제로 끌고 가는 경우도 있을 테고, 아니면 돈을 벌 수 있다고 속여서 데려간 경우도 있겠죠?

◆ 김승은> 그렇죠. 흔히 강제동원 이야기를 할 때 강제성을 어디까지로 볼 것이냐, 이런 것을 가지고 일본 정부가 항상 이야기를 하는데요. 우리가 이것을 항상 강제동원이다, 라고 이야기를 하는 것은 돈이 필요해서 어쩔 수 없이 생명을 잇기 위해서 간 경우도 많았고, 그리고 지원자라고 하는 이름을 붙여서 육군 특별지원병, 이런 이름을 붙이기는 했지만, 그것이 자원이 아니라 거의 거기에 지원한 지원자들이 소작농의 자식들이지, 어느 정도 삶을 유지할 수 있는 정도의 중산층조차도 전혀 지원하지 않았거든요. 그런 과정도 있었고. 군 동원뿐만 아니라 노무 동원 같은 경우도 강제로 지역에 할당을 하거나 그런 경우로 행정력이 동원되어서요.

◇ 이동형> 행정 경쟁을 시켰을 수도 있겠네요?

◆ 김승은> 그렇죠. 행정기관별로 할당량이 주어지기 때문에 강제성을 띠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 이동형> 그래서 중국, 일본, 러시아, 필리핀, 남태평양, 그렇게 해서 끌고 갔는데요. 임금을 주겠다고 해놓고 실질적으로는 주지 않고 장부상에만 기록한 경우도 있을 테고요. 또 식량이 굉장히 부족했다, 이런 이야기도 있던데요?

◆ 김승은> 네. 우선은 왜 이렇게 광범한 지역에 끌고 갔는가를 먼저 이야기하면, 우리가 우선은 식민지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식민지민이기 때문에 일제가 침략한 침략지에 광범한 영역까지도 조선인들을 강제로 끌고 갔고요. 그리고 가서는 물론 내선일체라고 하는 이름으로 조선인과 일본인 차별 없이 전쟁에 동원한다고 하는 이름으로 데려갔습니다만, 노동 현장을 보더라도 가장 열악한 지역에 배치를 한다거나 식사량이 굉장히 적다거나 해서 대부분의 생존자들이 남긴 증언들을 보면 가장 큰 고통이 굶주림이었다. 이렇게 증언을 하고 있습니다.

◇ 이동형> 그런데 지금 일본의 아베 총리는 국내 강제동원 대법원 배상 판결 이후에 징용이 아니라 모집에 의한 것이라고 했는데, 오래전부터 일본의 군국주의자들이 주장했던 것 아니겠습니까? 방금 실장님하고 이야기했습니다만, 이것은 말이 안 되는 거였고요. 그러면 여기서 강제징용 피해 당사자들의 증언을 직접 들어보고 오겠습니다.

◆ 생존자 인터뷰> “일본 놈들이 지원자를 모집하는 거야, 30살 넘은 순경들이 나가겠습니다, 하면 죽으러 가는 거니깐. 없어. 지원자가 하나도. 그러니깐 선발해내는 거야. 조선 아이들을. 조선인들 전부 20살이니깐. 팔팔하게 젊은 애들이니까. 조선 애들 죽으려고 손들겠어. 지명해서 너 나와라, 너 나와라 하는 게 다 조선 애들이야. 징병으로 들어간 애들. 우리가 최하로 내려갈 때 55도까지 봤어요. 영하. 상상도 못해요.”

“여름 군복에 여름 내의에. 얼마나 많이 죽었겠어. 얼어 죽고 배고파 죽고. 그래서 가면 죽어. 거기서 살아나오지 못 해. 한 사람도.”

서서 다닐 수가 없어, 전부 엎드려서 다녀야지. 밥을 못 먹어. 진짜로 밥을 못 먹어, 그 안에서. 도착하면 뭘 만드냐면 들어가는 묘지 먼저 만드는 거예요. 거기에 한 사람, 두 사람 들어가는 게 아니라 50명 들어가는 묘지에요. 나 좀 살려다오. 지금 죽지를 않아서 지금 안 죽었는데, 도저히 데리고 갈 가치가 없다는 얘기야. 산 채로 묻는 거예요. 저기서 발 잡고 머리 잡고 둘, 셋 해서 던져. 참 앉아서 많이 울었어, 내가.

“그때가 열일곱 여덟인가 그랬을 거야. ‘난 안가요’ 그랬는데 ‘안가면 안 돼 가야 돼’ 그래서 할 수 없이 간 거지. 영장이 어딨어. 끌려간 거죠.”

“하얼빈 역에서 내려서 잤는데 새벽이 되어서 다시 출발한다고 깨우는데 소련에서는 선전포고를 해서 비행기가 날아와서 폭격을 한 거야, 철길이 파괴돼서 기차가 다니지 못하게 되자 행진해서 북안까지 올라간 거지, 도착해서 입대 수속을 밟았고, 우리가 입던 옷은 다 벗어서 소포로 고향으로 보낸 거지. 그 벗어진 옷을 고향에서 부모님이 받아봤을 때 심정을 가만히 생각할 때 기가 막힌 거지. 나중에 알아보니 그건 고향에 도착 하지도 안했고요. 보통 전쟁을 치른다면 완전 무장을 해야 하지 않습니까, 철모를 쓰고 총을 메고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한국 사람들은 철모도 총도 안주고. 단 가져가는 건 폭약입니다. 폭약을 양쪽에 들고 올라가는 거예요. 탱크를 파괴할 수 있는 자폭 특공대라고 말을 이리 붙이면 되겠지요.”

“GNT 6개를 묶어요. 사람 가슴에 매달아. 6개 뇌관을 다 꽂아놓고 그러고 탱크 오면 몸으로 부딪혀 가지고 탱크를 파괴한다는 거죠. 사람 몸은 가루가 되고 없어. 흔적도 없어지고, 많이 죽었어,”

◇ 이동형> 네, 이병주, 김희종, 이규철 옹, 세 피해자분들의 생생한 증언을 들었는데요. 이분 증언들도 지금 실장님이 이야기한 것과 일치하죠. 모집이라고 해놓고 강제로 끌고 갔다고 하는 것이고, 강제징용, 강제징집. 강제징집 같은 경우는 총알받이로 조선인을 썼다, 이런 생생한 증언이 나왔는데, 지금 이 세 분의 인터뷰가 15, 16년 전에 하신 인터뷰입니다. 지금은 다 고인이 되셨다고요?

◆ 김승은> 네, 다 돌아가셨고요. 지금 마지막에 증언해주신 분들은 특히 마지막 징병으로 끌려가신 분이에요. 군대에 배속된 것이 45년 8월입니다. 징병제를 실시하고, 두 번째로 끌려가신 분들인데, 이분들은 주로 만주 지역에 배치되었다가 소련군에 의해서 무장해제를 당합니다. 증언 중간에 나오는 게 영하 55도까지 내려갔다고 하는 그 체험은 전쟁이 끝났는데도 일본군으로 소련군에 의해서 포로가 되어서 시베리아에 강제 노역으로 억류당하신 생활, 그때를 회고하신 거고요. 이 시베리아 피해자 같은 경우는 90년대 넘어서까지도 자신들이 소련에 끌려갔다 왔다는 증언을 못하셨어요. 그러다가 자신의 피해를 뒤늦게 밝혔지만 결국에는 돌아가실 때까지 아무런 보상과 아무런 사과를 받지 못하고 돌아가셨죠.

◇ 이동형> 그게 안타까운 거죠. 피해 보상도 못 받았고, 일본으로부터 사과도 듣지 못했다. 그런데 아베 총리는 지금까지 거짓말을 하고 있기 때문에 이게 문제라고 우리가 지적하지 않을 수 없고요. 두 번째 목소리의 주인공인 故 김희종 선생 같은 경우에는 17살에 강제로 끌려갔다고 하는데, 이분도 기막힌 사연이 있다고요?

◆ 김승은> 네, 그렇습니다. 이분은 44년에 사이판에 끌려가셨는데, 끌려가신 다음에 미국의 공습을 받고 미군 포로가 됩니다. 그러고 46년에 귀환을 하게 되시는데요. 일본에 의해서 전후처리 과정에서 사망자로 기록됩니다. 그러다 보니까 일본이 황당하게도 이분을, 살아있는 분을 야스쿠니 신사에 돌아가신 분으로 합사를 시켜놓은 사실을 저희가 2000년대에 발견을 하고, 그리고 야스쿠니 무단 합사 철폐 소송을 하는데, 생존 원고로서 참여를 하게 되시죠.

◇ 이동형> 결과가 어떻게 됐습니까?

◆ 김승은> 패소했습니다. 김희종 어르신 자신에게 일본 사법부가 이야기한 것이 참을 만한 정도의 것이기 때문에 자신들의 종교적 행위라고 하는 것으로 인정되어야 한다고 해서 원고 패소 판결을 했습니다.

◇ 이동형> 이해할 수 없는 판결이네요. 그런데 A급 전범들과 함께 이렇게 야스쿠니 합사된 강제징용 한국인들이 조금 된다면서요?

◆ 김승은> 네, 2만 1600여 명.

◇ 이동형> 2만 명이 넘는다고요?

◆ 김승은> 네, 그렇습니다. 군인 군속 사망자로 일본 정부가 집계하고 있는 숫자인데요. 그러니까 한국인으로서 일제에 의해서 강제로 끌려간 사람들은 끌려갔을 때 일본인이었기 때문에 일본 천황을 위해서 죽은 사람이라고 해서 전혀 유가족들에게 통보도 하지 않은 채 그것도 59년에 무단 합사를 하는 그런 짓을 저질렀습니다.

◇ 이동형> 원치 않는 전쟁에 끌고 갔으면서 다시 한 번 고인을 욕되게 하는 일을 벌였다, 이렇게 볼 수 있겠는데, 김희종 선생과 비슷한 사연을 가진 다른 유족들의 이야기도 들어보겠습니다.

◆ 성우> “큰 오빠는 내가 5살인 1942년 끌려갔어. 어머니는 늘 부엌 선반에 제일 먼저 오빠 밥을 떠놓고 배곯지 말라 빌고 빌었지. 결국 어머닌 화병으로 시름시름 앓다가 1946년에 돌아가셨어. 나는 2003년에야 오빠가 남태평양 뉴기니에서 돌아가신 걸 알았어. 일본은 오빠 유골을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시켰고. 이 씻을 수 없는 고통을 어떻게 보상받을까.”

“아버지가 일본 현지에서 해군 군속을 끌려가셨을 때 나는 어머니 뱃속에 있었어, 아버지가 내 이름을 지어 편지로 보내주셨대, 돌아오지 않는 아버지를 애타게 찾았지만 소식을 알 수 없었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55년이 지나서야 아버지가 타고 있던 배가 침몰했다는 기록을 보았어, 차가운 바다에서 죽어갔을 아버지를 생각하면 억장이 무너져 내려. 게다가 야스쿠니에 합사되어 있다니 나는 지금도 재판투쟁을 하고 있어.”

◇ 이동형> 유족들의 이야기, 저희가 성우 목소리로 재연해서 들려드렸는데요. 마지막 이야기한 나는 지금도 재판투쟁을 하고 있다. 이게 1944년 해군 군속으로 동원됐다가 북태평양에서 배가 침몰해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故 동선홍 선생의 아들, 동정남 씨의 이야기였는데, 지금 유족들이 계속해서 빼달라고 요구하고 있는데, 일본이 이것을 거부하는 것은 뭡니까? 아까처럼 참을 만하니까, 종교적인 문제니까, 이런 겁니까?

◆ 김승은> 야스쿠니 신사의 논리가 저희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데요. 이들이 이야기하는 것은 저희가 흔히 방송이나 언론에서 자주 실수를 하는 게 위패가 있다고 생각하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거기가 마치 우리의 사당과 같은 역할을 한다고 해서요. 그런 것이 아니라 그들의 이야기로는 신이 한 군데로 합사가 되어서 한 덩어리가 되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중에서 어느 한 명도 분리시킬 수가 없다. 그러니까 자기가 세워놓은 논리가 해체될 수 없기 때문에 이것은 재판을 해도 야스쿠니 신사나 일본 정부는 유족들이 참으라고 하는 태도로 일관하고 있는 상황이죠.

◇ 이동형> 종교가 법과 같이 되어 있는 것 같은 생각도 드네요. 법은 따로 되어 있어야 하는데요.

◆ 김승은> 그렇습니다. 종교 분리를 패전 이후에 명확하게 하고, 종교가 정치에 이용되지 않도록 야스쿠니 신사도 사설 법인화했음에도 불구하고 야스쿠니 신사가 59년에 조선인의 사망자 명부를 합사시켜놓았다는 것은 사망자 명부를 야스쿠니 신사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후생성에서 전달을 해줬겠죠. 그러니까 일본 정부도 개입하고 있는 것이고, 여전히 유족들에게도 이런 민족적, 인격권을 침해하는 가해를, 폭력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 이동형> 지난 3.1절을 앞두고 강제징용 희생자의 유골 74위가 국내로 송환되는 일이 있었는데, 아직도 고국에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분들이 많은 텐데요. 구체적인 숫자가 확인되고 있습니까?

◆ 김승은> 쉽지 않은 것이 일단 너무 광범위한 곳으로 끌려갔고, 거기가 대부분 전쟁터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정부는 끊임없이 자신들의 전자사 유골을 찾는 일을 어마어마한 예산을 들여서 조사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반드시 조선인이 있거든요. 그런데 조선인 유골에 대해서는 따로 조사하려고 하는 노력도 하고 있지 않고, 유족들의 요구도 무시하고 있고, 또 노무자의 경우에는 개인 기업에 끌려갔기 때문에 기업별 사업장에서 어떻게 사망자 관리가 되어 있는지 전모를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사실은 정부 차원에서, 국가 차원에서 해야 하는 일이고, 개별 사업장에 개별적으로 사망자 명부가 기록되어 있고, 보관되어 있는 곳이 주변 사찰이나 이런 곳을 통해서 전수조사가 일본의 시민들에 의해서, 70년대부터 꾸준히 조사되고, 그 기록을 남겨서 그 일부들이 확인되고 있는 상황이고, 그중에서 일부 확인된 유골들을 우리가 송환하고 있는 그런 상황인 거죠.

◇ 이동형> 우리 외교 당국의 노력도 절실할 것 같아 보이고요. 또 다른 유족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시죠.

◆ 성우> “내 아버지는 1942년 나이 37에 홋카이도로 징용가셨어. 그 후 1년도 안되어 도착한 아버지의 첫 편지가 사망통지서였어. 72년 만에 아버지 사망 기록을 확인했더니, 영양실조였대. 억장이 무너져 내려.”

“나는 해방이 되어도 기쁘지 않았어. 아버지가 돌아오지 못했거든. 얼마 후 아버지 전사통지서가 도착했고, 어머닌 충격으로 돌아가셨어. 부모님 없이 굶기를 밥 먹듯 했던 동생도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어. 아버지가 끌려가고 4년, 나는 고아가 되었어. 내 나이 11살이었어.”

“아버지는 사할린으로 징용되셨어. 어머닌 아버지를 기다리다 병을 얻어 돌아가셨지. 나는 고아가 되었어. 그리운 아버지 뼛조각이라도 발견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사할린에 억류돼 고국으로 돌아갈 수 없는 한국인들은 바다를 보면서 절벽에서 스스로 몸을 던졌다고 해.”

◇ 이동형> 피해보신 분들이 이렇게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이 지금까지 사과는커녕 보상도 안 하고 있는 이유가 65년 6월 박정희 정부 당시에 했던 청구권 협정. 그러니까 일본이 한국 정부에 무상 3억, 차관 2억, 이렇게 해서 5억 달러에 대한 것에 모든 게 포함됐으니까 그때 한 번 배상을 했기 때문에 또 줄 필요가 없다, 이 논리를 계속 구사하는 거죠?

◆ 김승은> 네, 그렇습니다. 오늘 소개된 여러 유족들과 생존자들의 증언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당장 유골 문제, 사망자 확인 문제도 다루지 않았고요. 그리고 패전 이후에 사할린에 억류되신 분들, 그리고 시베리아로 끌려가신 분들, 그리고 히로시마, 나가사키에서 원폭 피해를 당하신 분들, 그리고 일본군 위안분 피해자 할머니들. 이런 분들의 피해들은 전혀 한일 청구권 협정에서 다뤄지지 않은 피해 사실들입니다.

◇ 이동형> 완전히 빠졌었죠.

◆ 김승은> 완전 빠졌고, 그리고 이 내용들이 한일 양국 정부에서 이미 알고 있었고, 그리고 한일 협정이 체결되는 그 순간부터도 유골문제, 사할린 억류자 문제, 원폭 피해자 문제, 이런 것들은 이미 한일 양국 정부가 협상을 진행하고 있었거든요. 그런 사실을 보더라도 청구권 협정으로 다 해결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일본 정부가 그때부터 알고 있었다는 것이죠.

◇ 이동형> 계속 이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만, 많은 우리 피해자분들에게는 돈이 거의 돌아가지 않았기 때문에 이 부분에 과연 일본이 계속 이렇게 주장하는 게 맞는지 의문입니다. 오늘 짧은 시간이었습니다만, 강제징용 피해자들, 또 유족들의 아픔을 이야기해봤는데요.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빼앗긴 어버이를 그리며’라는 전시회를 하고 있다고 하는데, 이거는 어떤 내용으로 하시는 겁니까?

◆ 김승은> 오늘 짧게나마 소개해드렸던 유족과 그리고 생존자의 증언 내용을 바탕으로 해서 강제징용의 피해가 당대 본인에게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가족에게도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내용으로 지금 식민지역사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특별전을 5월 8일부터 시작했습니다. 앞으로 두 달 간 진행되니까 많이 와서 강제동원의 실상, 그리고 지금도 우리가 무엇을 해결해야 하는지, 그 내용에 관심을 쏟아주시기 바랍니다.

◇ 이동형> 식민지역사박물관이 어디에 위치한 거죠?

◆ 김승은> 숙명여대에 있습니다. 숙명여대 바로 옆에 청파동에 있습니다.

◇ 이동형> 5월 8일부터 두 달 간. 관심이 있는 분들 한 번 찾아가서 전시회 관람해보기를 부탁드리고요. ‘100년의 기억, 전달자들. 빼앗긴 어버이를 그리며.’ 오늘은 민족문제연구소 식민지역사박물관 김승은 학예실장과 함께했습니다. 오늘 이야기 고맙습니다.

◆ 김승은> 감사합니다.

<2019-03-28> YTN 

☞기사원문: 100년의 기억 전달자들 <9편 “빼앗긴 어버이를 그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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