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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전 파리로 간 식민지 청년의 돌아오지 못한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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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투안 리가 말하는 아버지 이용제

1920년 일제 감시 피해 프랑스행
가보지도 않은 대만 국적으로
66년간 고단한 ‘이방인의 삶’ 견뎌

귀향 꿈꾸며 간직해온 낡은 유품들
이봉창 의사 등 독립진영 성명서
‘기미독립선언서’ 새 판본도 눈길

“한국이 둘로 나뉘어 있는 한…
남한 여권도 북한 여권도 싫다”
독립 뒤엔 남북 분단이 발길 막아

뒤늦게 아버지 고국 알게 된 아들
“이곳엔 흔치 않은 노란 은행나무
유난히 좋아한 이유 알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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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중국 상하이를 거쳐 그해 12월 프랑스 파리에 도착한 한국의 유학생들. 파리의 한 사진관에서 도착을 기념해 사진을 찍었다. 맨 뒷줄 오른쪽 셋째가 이용제, 맨 앞줄 왼쪽 셋째가 서영해다.

“봉 쑤와르, 마담. 위, 마되무와젤. 위, 마되무와젤.” 거듭 되뇌어도 낯선 말이었다. 긴 항해로 멀미가 몰려왔다. 청년은 드넓은 바다로 눈길을 돌렸다. 그의 고향엔 추위가 몰아닥칠 11월이지만 인도양은 6월 초여름처럼 후텁지근했다. 조선의 구습과 일본의 압제가 지배하는 조선 땅을 벗어나, 이국의 대양 위에 있다는 사실에 22살 이용제는 잠시나마 가슴이 뛰었다. 3·1운동이 일어난 기미년(1919년) 이듬해의 일이다. 이 항해가 다시 돌아오지 못할 길임을 청년은 미처 알지 못했다.
지난 18일 프랑스 파리 외곽의 도시 부르라렌에서 만난 앙투안(73)은 이용제가 99년 전 불어를 꾹꾹 눌러쓴 수첩을 보여주며 미소를 지었다. “아버지의 첫 불어 실력입니다.” 은발에 은빛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앙투안은 평범한 프랑스인처럼 보이지만 이씨다. 1920년 프랑스에 도착한 이용제는 1936년 현지인인 마들렌 쾨클랭과 결혼해 앙투안을 비롯한 3남3녀를 낳았다.

성장하는 동안 앙투안은 아버지의 삶에 대해 잘 몰랐다. “아버지는 자신을 키워준 그의 작은할아버지나 시베리아에서 벌목 일을 했던 자신의 아버지에 관해 얘기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순서가 뒤죽박죽이니 우리는 이해할 수가 없었어요.” 가족들은 1986년 이용제가 숨진 뒤에야 그에 대해 더 잘 알게 됐다. 한국학 연구자인 프랑스 사회과학고등연구원 알렉상드르 기유모즈 교수가 연구 목적으로 진행한 이용제 인터뷰 녹취록(1983년)을 가족에게 건네면서다. 녹취록에 담긴 이용제의 생애는 고단했다. 무엇보다 그는 자식들이 기억한 것보다 가슴속에 담아둔 이야기가 많은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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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용제가 1920년 11월 중국 상하이에서 프랑스 파리로 향할 때 배 안에서 일기장으로 사용한 수첩. 그는 배에서 만난 한국인에게 기초 프랑스어를 배웠는데, 수첩에 흔적이 남아 있다.

프랑스에서 사람들이 부르는 이용제의 이름은 ‘리롱치’(‘이용제’의 중국식 독음)였다. 1898년에 태어나 66년을 프랑스에서 살았지만 1986년 숨질 때까지 그의 여권상 국적은 대만이었다. 사실상 그는 무국적자나 다름없었다. 중국엔 가보았지만 대만에 대해선 잘 알지 못했다. 이용제에게도 태어나서 자란 고향은 있었다. 가을이면 은행나무의 단풍과 고개 숙인 벼로 평야가 노랗게 물드는 곳, 조선 북동쪽의 함흥 땅이었다.

이야기는 기미년 일어난 3·1운동에서 시작되었다. 3·1운동 초기, 시위군중의 맨 앞에서 운동의 확산에 불을 붙인 이들은 청년층이었다. 일제의 칼끝 역시 이들을 향했다. 그런 탓에 3·1운동 직후 일제의 수배를 피해, 또는 독립운동에 투신하기 위해 국경을 넘는 청년들이 줄을 이었다. 이용제에게도 3·1운동은 탈출의 방아쇠가 되었다. 고향에서 서기로 일하던 그는 친구에게 건네받은 독립선언서를 후배에게 건넸다가 일제의 감시를 받게 됐다. 선언서가 발각된 탓에 후배는 철창에 갇혔다. 조선 땅을 떠날 기회를 보던 이용제에게 친구가 뜻밖의 소식을 전했다. “프랑스에 가자. 상하이까지만 가면 프랑스로 데려다주는 조직이 있대.” 당시 중국과 프랑스 사이엔 중국 학생이 일을 하면서 프랑스 학교에 진학할 수 있게 허가하는 근로장학생 제도인 ‘유법검학회’ 프로그램이 마련돼 있었다. 저우언라이와 덩샤오핑도 1920년 이를 통해 프랑스에 갔다. 외교 인재가 절실하다고 판단했던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상하이로 몰려드는 조선 청년들을 이 프로그램에 적극 투입했다. 이용제를 비롯해 허정(전 대통령 권한대행), 정석해(전 연세대 교수), 김법린(전 문교부 장관), 서영해(대한민국임시정부 주불 특파위원) 등이 1920년 11월7일 중국 여권을 손에 들고 프랑스행 선박 ‘포르토스호’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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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일 프랑스 파리의 자택에서 만난 이용제의 아들 앙투안 리. 아버지와 관련한 자료를 찾고 있는 그의 앞에 독립선언서(1919년)가 놓여 있다.

파리에서 이용제는 생존하는 일에 급급했다. 제철소 노동자, 벽돌공장 인부, 병원 잡역부 등 허드렛일을 전전하며 힘겹게 학업을 이어갔다. 프랑스에 도착하자마자 파리 북쪽 보베에서 학교를 다니고 그 뒤 프랑스에서 독립운동에 투신했던 서영해 등의 삶과는 달랐다. 학업을 마친 뒤 고국에 돌아가 관료나 교수가 된 동무들의 삶과도 달랐다. 그는 함흥에 남은 가족들과 편지를 주고받았지만, 생전에 단 한번도 조선 땅을 밟지 않았다.

“1945년 독립 뒤엔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기대도 했던 것 같아요. 하지만 아버지는 이내 단념했습니다. 분단 때문이지요.” 앙투안은 말했다. 38선 이남도, 이북도 이용제에게는 그리던 고향의 모습이 아니었다. 이승만정권 시절 주불대사 공진항이 “한국 여권을 발급해주겠다”고 하자 이용제는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한국이 둘로 나뉘어 있는 한, 난 남한 여권도, 북한 여권도 가지지 않을 것이네.”

이용제가 남긴 유품을 보면, 누구보다 한국의 독립과 평화를 간절히 바랐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앙투안이 소중히 보관해온 아버지의 낡은 유품들 속엔 1932년 이봉창 의사의 훙커우공원 의거 당시 한국독립당이 낸 성명서 등 독립운동 진영의 성명서들이 곰팡이 하나 없이 보존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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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용제의 유품 중에서 발견된 독립선언서. 천도교 인쇄소 보성사에서 인쇄하고 민족대표 33인이 대표 서명한 독립선언서 원본과 상당히 비슷하나 서체와 일부 표기가 미묘하게 다르다. 지금까지 공식적으로 확인된 적이 없는 판본이다.

언제, 무슨 내용으로 쓰였는지 앙투안은 알 수 없던 낡은 문서들 가운데에는 1919년 3월1일 발표된 민족대표 33인의 독립선언서도 있었다. 3·1운동을 오래 연구해온 박찬승 한양대 교수는 <한겨레>에 “천도교 인쇄소인 보성사에서 인쇄한 ‘원본’과 상당히 유사하지만 서체가 다르고 구두점의 형태 등도 다르다. 국내에 아직 보고되지 않은 판본이어서 좀 더 살펴봐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아버지는 이런 문서들에 관해 설명해준 적이 없었다. 우리말을 연구한 언어학자이면서도 이용제는 자녀들에게 한글을 가르치지 않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머리에 서리가 앉은 뒤에야 앙투안은 아버지와 그의 고국에 대해 배워가고 있다. 왜 아버지가 프랑스에 흔치 않은 은행나무를 유난히 좋아했는지도 앙투안은 나중에야 알게 됐다. 70년 가까이 뿌리 뽑힌 채 살아온 이용제에게, 노란 은행나무는 고국의 산천을 떠올리게 하는 유일한 매개체였음을. 앙투안은 자신의 집 뒤뜰과 노르망디 별장 정원에 은행나무를 한그루씩 심고, 아버지의 유골을 별장 은행나무 아래 묻어주었다.

“아버지는 무엇보다 고향의 풍경과 나무들을 그리워했던 것 같습니다. 슬프게도, 통일이 되어 고향 땅에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은 없었지요.” 이용제를 비롯한 청년들이 진저리를 치며 떠났던 식민지 조선은 이제 간데없다. 그러나 100년이 지났어도 타향살이에 지친 영혼이 마음 편히 돌아가 쉴 ‘평화’로운 고향은 아직 오지 않았다.

글·사진 파리/엄지원 기자 umkija@hani.co.kr

<2019-04-29> 한겨레 

☞기사원문: 100년 전 파리로 간 식민지 청년의 돌아오지 못한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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