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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3·1운동 100년, 덕성 1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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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 덕성100년사 편찬위원회∥출판사: 민연∥출간일:2019.2.11.∥ISBN : 979-89-93741-30-8(03900)∥ 316쪽 ∥판형:152*224(무선) ∥가격:16,000원∥분야: 역사/한국사/한국근현대사


[구매하기] 『3·1운동 100년, 덕성 100년』


■ 책 소개

“남녀평등은 교육평등으로 이루어야 한다”
조선여자교육회부터 덕성여자대학교의 설립까지
여성교육에 매진해온 100년의 시간

3 1운동 정신을 계승한 민족사학 덕성학원은 순전히 여성의 힘으로 세운 여성을 위한 교육기관이다. 소외된 가정부인들을 가르치고자 했던 조선여자교육회의 부인야학강습소에서 근화여학교까지, 여성의 자립을 위한 근화여자실업학교를 거쳐 덕성여자대학교의 설립까지 여성교육으로 세상을 바꾸려 했던 차미리사의 열정과 덕성학원의 발전 과정 그리고 다양한 사료를 통해 촘촘하게 되살려낸 당시 학생들의 생활 모습을 한국사의 흐름과 함께 살펴본다.
이 책이 한 대학의 역사를 아는 것을 넘어 이를 통해 한국의 근현대사는 물론 여성해방의 역사를 바라보는 한 틀로서 읽히기를 기대한다.

■ 차례

서문 _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
책을 읽기 전에 _ 민족사학 덕성 100년을 말한다

1부. 3·1운동과 조선여자교육회의 탄생
들어가며: 민국 100년, 덕성 100년을 맞아 여성 독립운동을 다시 생각한다
1. 한국 근대 여성해방운동이 지향한 것은
2. 조선여자교육회와 여성교육운동 ― 특집 전국의 가정부인들을 찾아서
3. 1920년대 여성 담론과 차미리사의 여성교육론 ― 특집 신여성의 등장
4. 조선여자교육회의 여성 회원들

2부. 야학강습소에서 근화여학교로
들어가며: 정규교육기관으로 승격된 근화여학교
1. 근화여학교의 성장과 함께한 사람들
2. 갑신정변이 준 선물, 안국동 근화여학교 터
3. 근화여학교를 다닌 학생들은 누구?
4. 조선 최초의 여자 사진과
5. 근화여학교 교훈에 담긴 의미 ― 특집 근화의 교표와 교가
6. 엄마는 근화여학교로, 아이는 근화유치원으로
7. 계몽운동의 수단이 된 차미리사의 음악사상
8. 근화연극제와 연극활동
9. 근화가 지은 옷, 근화가 수놓은 미래 ― 특집 전조선 여학교 연합 ‘빠사’ 대회
10. 광주학생운동과 근화의 학생들

3부. 실업교육기관으로 성장한 근화, 덕성여자실업학교
들어가며 : 실업학교로 새롭게 출발한 덕성여자실업학교
1. 여자실업학교의 현황과 근화의 실업교육 정신 ― 특집 1930년대 언론에 비친 근화
2. 근화 학생들이 공부했던 교과서 ― 특집 푸른 제복의 학생들, 근화에서 덕성까지 교복의 변천
3. 졸업 후의 진로는
4. 문자보급운동에 참여한 근화여자실업학교 학생들 ― 특집 일제강점기 학생운동과 근화, 3·1운동에서 농촌계몽운동까지
5. 태평양전쟁과 덕성여자실업학교의 소개(疏開) ― 특집 인터뷰를 통해 본 전시체제기의 학교생활
6. 군국의 어머니, 반도 여성의 책무를 외친 여성교육자들 ― 특집 전시체제기의 입학시험 문제

4부. 해방 이후의 덕성학원
들어가며: 차미리사의 활동과 그녀에 대한 기억
1. 해방 이후 차미리사의 정치·사회 활동 ― 특집 남북협상을 지지하는 108인의 성명서
2. ‘도깨비집’ 운현궁 양관에서 시작된 덕성여자대학교의 첫걸음
3. 차미리사가 사후 반세기 만에 독립유공자가 된 까닭은 ― 특집 덕성의 기념일
4. 한국사 교과서 속의 차미리사와 조선여자교육회

이 책에 참여한 필자들
참고문헌

■ 책 속으로

2020년 창학 100주년을 맞이하는 덕성학원의 연원은 3·1운동이다. 3·1운동은 대한민국의 출발일 뿐만 아니라 덕성의 뿌리이기도 한 것이다. 우리나라에는 400개가량의 대학이 있으며 덕성보다 역사가 오래된 학교도 여럿 있다. 하지만 3·1운동의 정신을 계승해 출범한 교육기관은 덕성이 유일하다. (…) 여성해방의 제일보로 여성교육을 내세우며 창립한 조선여자교육회는 3·1운동 정신을 계승하여 순전히 여성의 힘으로 세운 여성교육기관이었다. 조선여자교육회는 지식, 금전, 권력, 어느 것 하나 가지지 못한 한 여성이 “남녀평등은 교육평등으로 이루어야 한다”는 일념 하나로 세운 자립적·자생적·자각적인 여성교육기관이었다. 16~17쪽

보통교육과 함께 차미리사가 역점을 두었던 교육은 직업을 얻는 데 실질적 도움을 줄 수 있는 실업교육이었다. 그녀는 경제적 무능 상태에 놓여 있었던 여성들이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개척해 나갈 수 있도록 일인일기(一人一技)의 실업교육이 여성교육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의 포부는 조선의 전문학교나 대학교를 설립하여 학사, 박사를 양성하자는 것도 아니오, 그렇다고 안방구석에서 남자의 노리개 노릇할 소위 현모양처를 기르고자 함도 아니라, 실지로 생활상에 필요한 기술을 가르쳐 여자로 하여금 상당한 직업을 가지게 함에 있습니다”라는 차미리사의 말은, “여자의 해방은 여자가 자신의 직업을 가지고 자기의 생활을 스스로 지배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가능”하다는 그녀의 평소 소신에서 나온 것이었다. 차미리사가 근화여학교 내에 양복과, 사진과 등을 설치해 여성의 사회활동을 뒷받침했던 것도 이러한 신념을 실천에 옮긴 결과였다. 60쪽

낙천사는 소설 「상록수」로 널리 알려진 심훈의 큰형인 심우섭이 경영하던 기숙사로 이곳에 지방 출신의 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을 수용했다. 낙천사는 1년간의 준비와 건축을 거쳐 1923년 8월에 준공되었다. (…) 낙천사 건물은 1941년까지 근화여학교, 근화여자실업학교, 덕성여자실업학교의 교사로 사용되어 졸업식 사진마다 배경으로 등장했다. 또한 낙천사와 별도로 60~70명을 수용할 기숙사도 갖추었다. 1925년 3월 보통과와 고등과, 음악과, 영어과 등의 전문부와 재봉과를 두어 재학생의 수가 320명에 이르렀고, 교사는 모두 11명이었다. 이를 바탕으로 1925년 7월 근화여학교는 정식 학교로 인가를 받을 수 있었다. 104~105쪽

근화유치원은 어머니와 자식이 함께 와서 엄마는 이쪽 교실에서, 아이는 저쪽 교실에서 배운 후 수업을 마치면 자녀를 데리고 가도록 만들었다. 학생의 대부분이 가정부인인 것을 감안해 자녀와의 공간적 거리가 가까운 만큼 정서적으로 안정된 상태에서 공부할 수 있는 시스템을 창안한 것이다. 이는 마치 현대의 직장어린이집이 만들어진 맥락과 유사해 보이기도 한다. 어쨌건 이렇게 차미리사는 가정부인, 아이의 어머니였던 자신의 제자들이 처한 현실적 어려움을 정확하게 포착하고 이를 해결할 수 있는 현명한 방법을 창안해내었다. 153쪽

각종학교에서 실업학교로 지정되면서 조선총독부의 각종 공식 발행문서에서 근화여자실업학교의 이름을 쉽게 발견할 수 있게 되었다. 그전에는 신문과 잡지에서 근화여학교에서 개최하는 행사나 학생들의 활동 내용은 볼 수 있었지만 학교의 교육 내용이 어떠했는지는 다루지 않았다. 심지어 교과서를 스스로 만들어 사용했는지 아니면 기존의 교과서를 이용해 수업했는지 여부도 알 수 없다. 오직 공문서에서 그 내용을 확인할 수 있는데 그 첫 기록이 근화여자실업학교가 조선총독부에 발송한 교과서 신청 문서였다. 1935년 2월 26일 근화여자실업학교 교장 차미리사는 조선총독부에 「교과용 도서 사용 인가 신청의 건」이란 공문을 발송했다. 221쪽

1997년부터 2001년까지 전개된 덕성 구성원들의 치열한 학내 민주화 투쟁은 송금선의 아들인 박원국을 덕성학원의 운영에서 완전히 배제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한 과정에서 송금선의 친일행적이 낱낱이 드러나게 되었고, 송금선-박원국 일가에 의해 감추어졌던 차미리사의 행적이 정당하게 재평가받기 시작했다. 3·1운동의 가치와 정신을 계승하여 차미리사의 주도로 설립된 조선여자교육회는 덕성학원의 모태로 공식 인정되었으며, 조선여자교육회 산하 부인야학강습소가 야학을 처음 시작한 1920년 4월 19일은 덕성여자대학교의 창학 기념일로 지정되었다. 또한 2002년 차미리사는 독립유공자로 서훈되었다. 274쪽

■ 지은이

강서영: 이화여자대학교 의류학과 박사과정. 국립대구박물관과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 담인복식미술관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했다.

김경일: 한국학중앙연구원 사회과학부 교수. 서울대학교 사회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주요 저서에 『여성의 근대, 근대의 여성』 『근대의 가족, 근대의 결혼』 『신여성, 개념과 역사』 등이 있다.

김승은: 민족문제연구소 책임연구원. 식민지역사박물관 학예실장.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주요 저서에 『거대한 감옥, 식민지에 살다』(공저), 『군함도, 끝나지 않은 전쟁』(공저) 등이 있다.

김정신: 연세대학교 연구교수. 연세대학교 사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주요 논문에 「16~17세기 조선학계의 중국 사상사 이해와 중국 문헌」 「기축옥사(己丑獄事)와 조선후기 서인(西人) 당론(黨論)의 구성, 전개, 분열」 등이 있다.

박현옥: 덕성100년사 편찬위원회 전임연구원. 중앙대학교에서 교육학 석사, 역사학 석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주요 논문에 「일제하 역사교과서와 식민지 지배 이데올로기: 『보통학교 국사』와 『초등국사』를 중심으로」 「제2차 조선교육령기 사립 중등학교의 정규학교 승격운동과 식민지 근대의 학교 공간」(공저) 등이 있다.

유미: 홍익대학교 공연예술대학원 초빙교수. 런던대학교 로열 센트럴 스쿨 오브 스피치 앤 드라마(University of London, Royal Central School of Speech and Drama) 졸업 후, 국립극단 등 연극과 뮤지컬 보이스 연출로 활동하였으며, 현재 음악극을 제작하는 창작집단 브이(VOICE2)의 대표를 맡고 있다.

은정태: 덕성100년사 편찬위원회 전임연구원.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한국 근대 정치사와 도시사를 공부하고 있다. 주요 저서에 『쟁점 한국사: 근대편』(공저), 『제국과 변경』(공저) 등이 있다.

이경민: 사진아카이브연구소 대표. 중앙대학교에서 「한국 근대 사진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사진사 연구와 근현대 사진아카이브 구축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주요 저서에 『경성, 사진에 박히다』 『제국의 렌즈』 『박정희 시대의 사진표상과 기억의 소환』 등이 있다.

이기훈: 연세대학교 사학과 교수. 국학연구원 부원장. 서울대학교 국사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근대 청년의 문화와 사상, 사회운동을 연구하고 있다. 주요 저서에 『무한경쟁의 수레바퀴』 『근대적 일상과 여가의 탄생』(공저) 등이 있다.

이병례: 순천대학교 인문학술원 연구교수. 성균관대학교 사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식민지 시기 노동사와 일상사를 연구하고 있다. 주요 논문에 「일제하 전시 기술인력 양성정책과 한국인의 대응」 「아시아-태평양전쟁기 ‘산업전사’ 이념의 형상화와 재현」 「1930년대 초반 식민지 조선의 경제공황과 일상의 균열」 등이 있다.

이상의: 인천대학교 기초교육원 초빙교수. 연세대학교 사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일제 말기의 조선인 강제동원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 주요 저서에 『일제하 조선의 노동정책 연구』 『강제동원을 말한다: 일제강점기 조선인 피징용 노무자 미수금 문제』(공저) 등이 있다.

이준식: 독립기념관 관장. 연세대학교에서 한국사회사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연세대학교 연구교수,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 상임위원, 성균관대학교 초청교수,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 근현대사기념관 관장 등을 역임했다.

장신: 한국교원대학교 한국근대교육사연구센터 특별연구원. 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조선총독부의 사상전향 정책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 주요 논문에 「미우라 히로유키의 조선사 인식과 『조선반도사』」 「유교청년 이유립과 환단고기」, 주요 저서에 『제국 일본의 역사학과 ‘조선’』(공저) 등이 있다.

정요근: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부교수. 서울대학교 국사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덕성여자대학교 사학과에서 전임강사, 조교수, 부교수를 역임했다. 역사 지리에 기초한 디지털 역사학에 관심을 갖고 있으며, 중·고등학교 역사교육에 관한 몇 편의 글을 썼다.

조미은: 성균관대학교 초빙교수. 성균관대학교 사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특별시시사편찬위원회 연구원을 지냈고,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에서 근무했다. 주요 저서에 『조선시대 서울 사람들』(공저) 『재조선 일본인 학교와 학생』 등이 있다.

조윤영: 호서대학교 강사.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음악학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 근대 음악사를 연구하고 있다. 주요 논문에 「조선인 중심의 음악회장, 경성(京城) 기독교청년회관」 「왜 식민지조선 음악가들은 관현악단을 만들고자 했는가: 경성방송(JODK)관현악단의 출현과 그 의의」 「식민지조선 음악단체 중앙악우회(中央樂友會) 정체성 연구」 등이 있다.

한상권: 덕성100년사 편찬위원회 위원장. 덕성여자대학교 사학과 교수. 서울대학교 국사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부위원장, 덕성여자대학교 차미리사연구소 소장, 한국역사연구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주요 저서에 『차미리사 평전』 『거리에서 국정교과서를 묻다』(공저) 등이 있다.

한해정: 덕성여자대학교 사학과 강사. 고려대학교 사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덕성100년사 편찬위원회 전임연구원을 지냈다. 주요 논문에 「베를린(Berlin) 시립도서관의 초기역사」 「1차 세계대전에 관한 독일-프랑스 공동 역사교과서 분석」 주요 저서에 『도시화와 사회갈등의 역사』(공저) 등이 있다.

홍정완: 연세대학교 근대한국학연구소 HK연구교수. 연세대학교 사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식민지와 분단, 전쟁을 겪으며 전개되었던 한국 근현대사를 ‘사상사’의 관점에서 해명하고자 연구하고 있다. 주요 논문에 「정부수립 전후 한국 정치학계의 학문동향과 이념 지형」, 주요 저서에 『함께 움직이는 거울, ‘아시아’』(공저) 등이 있다.

■ 기획·편집 : 덕성100년 편찬위원회

2020년 창학 100년을 맞는 덕성학원의 역사를 편찬하기 위해 2017년 11월에 덕성100년사 편찬위원회를 설립하였다. 덕성100년사 편찬위원회는 3·1운동 정신을 계승한 민족사학 덕성의 정통성을 확립하여 구성원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이를 통해 덕성의 미래 비전을 제시하고자 한다.

■ 출판사 리뷰

“남녀평등은 교육평등으로 이루어야 한다”

1920년 조선여자교육회에서 2020년 덕성여자대학교까지
창학 100주년을 맞이하는 덕성학원의 역사와
그 속에 살아 숨쉬는 사람들의 생생한 이야기

민족사학 덕성 창학 100주년,
여성교육을 위해 노력해온 100년의 시간

2020년은 덕성학원이 창학 100주년을 맞는 해이다. 1920년 설립된 조선여자교육회가 바로 덕성학원의 뿌리이다. 조선여자교육회의 설립자이자 덕성학원의 설립자인 차미리사가 2002년 독립유공자로 포상됨으로써 덕성학원은 3·1운동 정신을 계승하여 설립된 민족사학임이 공식적으로 인정되었다. 조선여자교육회는 부인야학강습소를 열어 당시 대다수가 문맹이었던 가정부인들을 불러모아 가르쳤고, 여성해방과 권익 신장을 위한 여성교육에 매진한, 순전히 ‘여성의 힘’으로 세운 ‘여성을 위한’ 자립적‧자생적‧자각적인 여성교육기관이었다. 이는 현재까지 이어져 덕성여자대학교 역시 여성을 위한 교육기관으로서 그 이념을 이어가고 있다.

덕성 100년의 역사는 쉽지 않았다. 일제의 탄압과 여전히 나아지지 않는 여성 인권, 학교 운영에 있어 경제적 문제 등 말로 다 할 수 없는 갖은 어려움 속에서도 끝까지 여성교육이라는 목표를 놓지 않고 노력해온 시간이었다. 차미리사는 여성들이 왜 교육을 받아야 하고, 어떤 교육을 받아야 하는지 냉철하고 정확한 판단으로 여성교육의 최일선에서 수많은 ‘조선 최초’를 만들어내며 고군분투했다.

총 19명의 필자가 참여해 100년의 시간을 담은 이 책은 단순히 한 학교의 역사가 아닌 한국 근현대사의 일면이며 여성해방운동의 기록이기도 하다. 이것이 바로 덕성 100년의 역사가 남다른 의미를 지니는 지점일 것이다.

조선여자교육회에서 덕성여자대학교까지
덕성의 발전 과정을 오롯이 복원하다

《3‧1운동 100년, 덕성 100년》은 크게 네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1부에서는 3‧1운동이 벌어진 다음해인 1920년 조선여자교육회의 설립과 부인야학강습회, 전조선 순회강연단 등의 활동 시기를 다루었다. 2부에서는 근화여학교를 세운 이후 여성교육의 발전 과정과 그 속에서 추진한 사진과, 양복과, 음악과 등의 맞춤형 실업교육, 근화의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추진한 연극제와 음악회, 시대의 아픔을 함께한 광주학생 동조시위 등을 다루었다. 3부에서는 1935년 근화여학교가 근화여자실업학교로 새롭게 시작해 어떤 내용의 실업교육이 이루어졌는지를 꼼꼼하게 복원했다. 당시에 근화/덕성의 학생들이 공부한 교과서와 취업을 위한 교육 등도 자세히 살폈다. 또한 태평양전쟁으로 인한 소개(疏開)와 당시의 여성 교육자들의 친일 행위 등을 들여다봄으로써 그 안에서 덕성의 위치를 확인했다. 4부에서는 해방 후의 덕성학원을 다루며 해방 이후에 차미리사의 행적을 추적하고 1950년 덕성여자대학교가 출범한 시기부터 민주화운동을 통한 설립자 차미리사의 복권까지 덕성 구성원들의 학교를 살리기 위한 노력을 담았다.

학교의 역사 속에 담긴
다양하고 특별한 이야기들

학교는 스스로 성장하지 않는다. 몇 년에 어떤 학교가 설립되었다는 것만으로는 그 시간의 의미를 설명할 수 없다. 덕성 100년의 역사 속에는 학교의 교육 과정은 물론 건물 확보, 행정, 운영비용 마련, 학교 행사 등 다양한 부문에서 각개의 노력을 한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차미리사의 조언자이자 사업 파트너였던 윤치호나 조선여자교육회에 야학교실을 내준 종다리교회의 차재명 목사, 낙천사 매입에 큰돈을 낸 의사 김상용 등 차미리사의 곁에는 남성 조력자들도 많이 있었다. 하지만 더욱 많은 여성들이 그녀의 곁에서 학교의 성장에 물심양면 참여했다. 설립자 차미리사를 비롯해 조선여자교육회를 함께 했던 김선, 방신영, 순회강연 등에서 청중을 사로잡았던 유각경, 허정숙, 김원주 같은 여성 인사들, 성해방을 주창한 화가 나혜석, 최초의 여성 사진가 이홍경, 재봉과 선생으로 실업교육을 이끈 문경자, 근화유치원의 보모이자 ‘참새 삼봉이’의 작가인 전영숙, 근화 학교 학생으로 다양한 행사에서 무용을 선보이며 학교 기부금 모금에 힘쓴 조원숙과 이리다, 광주학생 동조시위에 참가했다 구속된 김금남, 김귀인복, 전연봉 등의 다양한 여성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당시의 시대상황을 떠올려보면 남성이 아닌 여성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자신의 재능을 뽐내고, 언론기사의 기록으로 남아 있다는 것은 매우 귀중한 일이다. 이런 사람들의 이름과 행적을 기억하고 기리는 것은 남아 있는 사람들의 몫일 것이다.

또한 학교의 이름과 성격의 변천에는 이와 관련된 학교의 터가 있었다. 처음 야학을 시작했던 서울 종로구 도렴동의 종다리교회와 염정동의 새문안 교회, 청진동 회관과 이후 안국동 37번지의 낙천사 이전, 운니동의 운현궁 양관 매입과 쌍문동캠퍼스 시대까지 그간의 학교 건물에 관한 역사도 살펴볼 수 있다. 매입과 이전의 역사뿐 아니라 터를 옮겨야만 했던 이유와 시대적 상황, 터에 관한 역사까지 풍부한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더불어 덕성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바로 ‘실업교육’이다. 차미리사는 “여성이 자신의 직업을 가지고 자립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여성해방이 가능하”다는 신념으로 근화여학교 시절부터 이미 사진과, 음악과, 재봉과, 기예과 등 다양한 특별과 설치를 통해 여성이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고자 했다. 음악교사나 음악가까지도 신여성이 가질 수 있는 직업의 직군으로 보았다. 이런 ‘빵 문제를 해결하는’ 실업교육 정신은 근화여자실업학교로까지 이어져 주산과 타자 실습은 물론 당시에 유행하던 ‘○○ 걸’이 되기 위한 교육으로까지 이어졌다. 또 하나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근화유치원의 설립이다. 이는 차미리사가 여성의 처지를 얼마나 깊이 헤아리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이다. 현대의 직장어린이집과 유사한 취지에서 시작한 근화유치원의 운영은 어려운 와중에도 10년을 이어가며 여성들의 자기계발을 도왔다.

학교의 역사를 한국 근현대사의 흐름과 함께 살펴본다

이 책의 특징은 그저 학교의 역사만을 나열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모든 역사는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1920년부터 2020년까지 덕성 100년의 역사에는 한국 근현대사의 아픔과 성장이 고스란히 녹아들어 있다. 차미리사가 여성교육에 관심을 갖고 매진한 배경에 당시 여성을 남성의 소유물이나 노예로 취급했던 역사가 있으며, 근화의 구성원들이 순회강연과 음악회, 연극제를 연 이유 중 하나는 조선총독부가 조선인이 세운 사립학교에는 일체 지원을 하지 않아 스스로 학교 운영 자금을 모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여성교육자들은 신현모양처론, 성해방론, 여성교육론 등 여성담론을 주창하며 시대를 선도했고, 근화의 학생들은 새로운 학문을 배우면서 점차 세상에 눈을 떠갔다. 광주에서 한일 학생들 간의 충돌로 인해 일어난 광주학생운동이 전국으로 번질 때 근화의 학생들도 이에 참여하여 열띤 시위를 벌였고, 조선인 스스로 자립하기 위해 신문사 등에서 벌인 문자보급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자신이 배운 것을 아낌없이 나누었다. 차미리사가 실업학교로의 과감한 결단을 한 이유에는 당시 여성들이 기초교육만 받고 학교를 졸업하면 다시 가정으로 돌아가야만 하는 현실이 있었다. 태평양전쟁으로 대도시 중심의 소개가 이루어질 때 덕성의 교직원과 학생들 역시 쌀과 칠판 등을 싣고 경기도 광주의 퇴촌으로 가야 했다. 전시체제하에서 덕성의 학생들은 군의봉제 작업이나 징병을 위한 국민등록정리사업에 동원되기도 했다. 시험문제와 교가는 일본어였다.

해방 이후 친일청산 작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여파는 차미리사 이후에 덕성여자실업학교 교장을 맡은 송금선 일가가 이후 덕성학원을 사유화‧세습화하는 단초가 되었다. 하지만 현대사의 흐름을 바꾼 민주화운동의 분위기 속에서 덕성의 구성원들은 끈질긴 민주화투쟁을 통해 비리사학‧부패사학에서 ‘민족사학’으로 덕성을 바꾸어내는 데 성공했다. 이 모든 것이 한국의 굴곡진 근현대사와 함께였다. 이렇듯 근현대사를 관통하며 서술한 덕성학원의 역사는 읽는 이들로 하여금 생생한 현장성을 느끼게 할 것이다.

이 책이 한 대학의 역사를 아는 것을 넘어 이를 통해 한국의 역사, 여성해방의 역사를 바라보는 한 틀로서 읽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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