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용산역, 침략군대가 ‘출정’과 ‘귀환’을 반복했던 공간 – 군용철도 경의선과 경원선의 분기점이 용산에서 형성된 까닭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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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비망록 40

이순우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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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급용산」 지도자료에 표시된 왕십리의 원래 위치. 이 지도를 통해 왕십리 마을은 서울도성 광희문과 왕십리정거장의 중간쯤에 있었던 사실을 알 수 있다. (<조선철도여행안내>, 1915)

 

서울 성동구에 있는 왕십리역전광장 한쪽에는 김소월(金素月, 1902~1934)의 흉상과 더불어 “가도가도 왕십리 비가 오네”라는 구절로 잘 알려진 그의 시 <왕십리(往十里)>를 새긴 조형물이 자리하고 있다. 그런데 이 시비를 볼 때마다 한 가지 의구심이 드는 것은 과연 이곳이 김소월이 말하는 왕십리가 맞는가 하는 사항이다.
그가 월간종합잡지 <신천지(新天地)> 제9호에 이 시를 발표한 것이 1923년 8월이었다. 이 점
에 착안하여 그 시절과 가장 근접한 ‘경성부 관련’ 지도자료를 살펴보면, 왕십리역 앞쪽에는 ‘행당리’로 표기된 작은 마을이 있었을 뿐이고 정작 ‘왕십리’는 이곳과 뚝 떨어져 지금의 왕십리 뉴타운 지역 일대에 자리하고 있었던 사실이 확인된다.
여기에서 보듯이 흔히 사람들은 왕십리라고 하면 ‘오리지날’ 왕십리의 위치에 대해서는 잘 인지하지 못한 채 그저 왕십리역이거나 왕십리네거리 언저리를 먼저 떠올리는 것이 보통이다. 따지고 보면 이러한 위치 혼동은 모름지기 ‘왕십리역’ 그 자체에서 비롯된 일인 듯하다. 이 역은 1911년 10월 15일 일제에 의해 경원선(京元線, 용산~의정부 구간)의 운수영업이 처음 개시될 때 뚝도정거장(纛島停車場)이라는 이름을 가졌다가 이내 1914년 4월 11일에 왕십리정거장(往十里停車場)으로 개칭되었다.
단순히 기차역의 소재지로 본다면 ‘행당역’ 정도로 명명되는 것이 맞았을 테지만 지명도가 약한 탓에 공연히 중랑천 건너편에 있는 ‘뚝섬’을 가져다 ‘뚝도역’이라고도 했다가 다시 ‘왕십리역’으로 고치는 과정이 이어졌던 것이다. 그 바람에 이것이 빌미가 되고 또한 많은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이 일대가 자연스레 원래부터 왕십리였던 것처럼 인식되는 현상이 굳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이곳처럼 철도정거장으로 인해 지명왜곡이 심화된 곳이 전국적으로 한둘이 아니지만, 그 가운데 ‘용산역(龍山驛)’의 사례도 결코 빼놓을 수 없다.

 

경인철도합자회사에서 서울과 인천 사이에 정도 리수를 영국 리수로 마련하였는데 서울서 남대문 1리, 남대문서 용산 2리, 용산서 노량 2리, 노량서 오류동 7리, 오류동서 소사 4리, 소사서 부평 3리, 부평서 우각동 6리, 우각동서 유현 1리, 유현서 인천 2리, 도합 27영리로 마련하였더라.

 

 

이것은 <독립신문> 1899년 9월 18일자에 수록된 「경인철도리수」 제하의 기사이다. 여기에서 말하
는 ‘영리(英哩)’는 철도종주국 영국의 거리단위인 ‘마일(mile, 哩)’ 을 한자식으로 표기한 것을 가리킨다. 위의 내용을 통해 경인철도 개통 당시부터 용산역의 존재가 설정되어 있었던 사실을 확인 할 수 있다. 하지만 경인철도는 한강철교의 공사가 지연되는 바람에 1900년 7월 8일에 와서야 전구간이 완전 개통되었으므로 용산역은 이때에 실제 운행이 개시된 셈이다.

 

17경인철도 개설 초기의 용산역 전경. 허허벌판에 간이역사 하나만 설치되어있는 구조였다. (총독부철도국, <조선철도사> 제1권, 1929)

 

181904년 6월 5일 당고개 평식원(平式院) 도량형제조소(원효로 1가 25번지 옛 용산구청 자리) 앞의 철도교차지점에서 일본군철도대대가 경의선 철로 시운전(試運轉)을 하는 장면이다. 철도선로 아래로는 한강변 용산(지금의 원효로)을 오가는 전차의 모습도 보인다. ⓒ 미국 코넬대학교도서관 소장자료, 「윌러드 스트레이트 컬렉션」

 

19<매일신보> 1920년 12월 20일자에 수록된 경의직통선의 시운전 장면으로, 기차가 막 지나고 있는 곳
은 ‘아현터널’이다. 이때부터 용산역의 경의선 분기점은 용도 폐기되고 남대문정거장은 ‘통과역’으로 전
환되었다.

 

이 당시 용산역이 설치된 지점은 행정구역상으로 ‘한성부 남부 둔지방’에 속했으나 마땅히 명명할 대표지명이 없는 탓에 만초천(蔓草川) 물길 서편에 자리한 ‘용산’이라는 이름을 가져오게 된 것이다. 이러한 사정 때문인지 개통 초기의 용산역 주변에는 민가조차 전혀 보이지 않을 만큼 매우 한적한 풍경을 자아내고 있었고, 그저 눈에 띄는 것이라곤 들판을 가로지르는 단선 철로와 허름한 판잣집 역사 하나가 고작이었다.
그러나 불과 4년 후 러일전쟁을 계기로 일제가 이곳을 군용철도인 경의선(京義線)의 분기점으로 설정하면서 이 지역의 위상은 크게 변하기 시작했다. 1904년 2월 6일 러시아에 대한 선전포고와 더불어 일제의 군부는 장차 대규모 부대가 북만주 일대에 주둔할 것에 대비하여 병력과 군수품 수송을 위한 목적에서 경부철도의 속성건설(速成建設)을 서두르는 한편 경의선을 시급히 건설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에 따라 육군소장 야마네 다케스케(山根武亮)가 이끄는 임시군용철도감부(臨時軍用鐵道監部)를 긴급 편성하여 철도대대와 공병 제1, 제2, 제4, 제6대대와 함께 이들을 한국에 파견하였다.
경의선 철도의 건설과정에 대해서는 조선총독부 철도국에서 펴낸 <조선철도사> 제1권(1929)
274~282쪽에 대략 다음과 같이 서술되어 있다. 여기에 나오는 대한철도회사의 기존 구간은 서북철도국(西北鐵道局) 시절에 ‘협궤식(狹軌式)’을 염두에 두고 착공했던 경의선 구간의 일부를 말한다.
이와 관련하여 일찍이 1902년 5월 8일에는 독립관 앞 광장에서 경의철도 기공식이 거행된 바 있으며, 이 당시에는 ‘한성정거장’에서 용산을 거치지 않고 곧장 마포 동막으로 나가는 것으로 선로부설계획이 잡혀 있었다.

 

 

본선(本線)의 선로선정(線路選定)에 대해서는 전시 긴급의 때이므로 엄밀한 조사를 마칠여유가 없어서 오로지 ‘5만분 1 지도’를 통해 소위 ‘궤상 로케이션(机上 location)’의 방법을 채택하여 대략 도상(圖上)으로 선로방향을 결정하고, 그 후에 전문기사(專門技師)를 파견하여 실측시키는 것으로 했다.
…… 이리하여 용산 개성 간의 측량은 (1904년) 4월 11일까지 완료하고 이시카와 기사(石川 技師) 이하의 측량원은 일단 용산으로 돌아왔다. 본 구간의 선로는 경부철도 용산역에서 분기(分岐)하며, 동막(東幕) 신장리(新場里) 사이는 이미 대한철도회사(大韓鐵道會社)에서 구축했던 노반(路盤)을 그대로 사용하는 것으로 되었지만 교량과 기타 공작물은 전혀없이 토공(土工)의 약 7퍼센트가 마친 것에 지나지 않았다.
본 공사는 기점에서 약 1리(哩, 마일)되는 만리창(萬里倉) 부근에 언덕 지맥이 가로지르고 있어서 약 3천 입평(立坪, 부피단위)의 토석을 절취할 필요가 있었고, 신장리 이북 문산포(汶山浦)를 거쳐 임진강변에 이르는 사이의 여러 곳과 대안(對岸, 강건너)의 구부(丘阜)를 가로지르기 위해 약간 크게 잘라내야 할 것 이외에 대체로 논과 밭으로 이뤄져 작업이 거의 쉬운 것으로 인식되었다.
…… 이렇게 점차 노반공사가 진척되자 철도대대(鐵道大隊)는 5월 19일 마포에서 궤조(軌條, 레일)의 부설을 개시하는 한편 용산으로부터 궤조의 머리를 북쪽을 향해 나아가 6월 5일에는 용산에서 약 1리 사이에 시운전(試運轉)을 실시하였는데, 이것을 본선에 있어서 열차운전의 효시로 한다.
이어서 비교적 곤란했던 만리창의 절취작업도 6월 14일로써 개착을 마치면서 전진을 저지시킬 것도 없이 이 방면의 궤조부설작업을 속행할 수 있었고, 7월 초순에는 용산과 중리동(中里洞) 사이 6리의 시운전을 하기에 이르렀으며, 이후 이곳 기설선에 건축열차를 운전하여 재료의 공급에 힘써 노반공사의 준성에 맞춰 궤조의 부설을 진척시켜 10월 하순에는 드디어 임진강에 도달했다.

 

 

위의 글에 나오는 ‘동막’은 지금의 용강동과 대흥동 지역을 말하며, ‘신장리’는 관련 자료를 살펴본 결과 ‘안양리(安陽里, 지금의 수색역 지역)’를 잘못 표기한 것인 듯하다. 아무튼 이 내용을 보면 일제는 급박한 전쟁상황에서 군용철도를 시급히 완성시킬 수 있는 방법을 선택한 까닭에, 더구나 한반도의 종단철도로서 경부선과 그대로 연계하여 경의선을 완성시키려는 목적에서 철도의 분기점을 새롭게 ‘용산역’에다 설정한 사실을 엿볼 수 있다.
그러한 결과 경부선 상행선로에서 곧장 경의선으로 접속할 수 있는 이점을 얻긴 했으나, 그 대신 서울 쪽에서 개성, 평양, 신의주 등지로 갈 경우 기차가 일단 용산역까지 남하하였다가 거기에서 번거롭게 기관차를 앞뒤로 바꿔달고 다시 경의선으로 빠져 북행(北行)하는 기형적인 철도선로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나중에 이러한 불편을 해소하기 위해 일제는 1920년에 남대문정거장 쪽에서 북서 방향으로 철길을 돌리고 북아현동 골짜기를 가로질러 아현터널과 의령터널을 뚫어 수색역으로 직통하는 선로를 개설하였으며, 신촌정거장이 신설된 것도 이때의 일이다. 이로 인해 남대문정거장(1923년 1월 1일 ‘경성역’으로 개칭)은 그들이 의도한 대로 막다른 ‘종착역’이 아니라 만주대륙으로 가는 길에 꼭 거쳐야 하는 ‘통과역’으로 비로소 자리매김되기 시작했다.
용산역과 철도분기점에 관한 얘기를 하노라면, 동남쪽으로 갈래를 뻗어 한강변을 감아도는 경원선도 빼놓을 수가 없다. 경의선과 마찬가지로 이곳 경원선 역시 1904년 8월 27일에 군용철도로 건설할 방침이 결정되면서 철로부설공사가 착수되기에 이른다. 이때 임시군용철도감부의 노선결정과 측량을 거쳐 이듬해인 1905년 8월 5일 용산 기점에서 3마일 거리까지 공사를 개시하였으나 이내 한강의 대홍수로 인해 제방과 축대가 무너져 내린데다 선로계획구간 내에 외국인 소유 토지의 처리문제가 불거지면서 공사가 계속 지연되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특히 1906년 9월 이후 군용철도 경의선과 마산선이 통감부 철도관리국에 이관되고 임시군용철도감부도 ‘임시철도건설부’라는 이름으로 이곳에 흡수되면서 경원선 개설공사는 사실상 중지되는 상태로 들어갔다. 그 후 호남선(湖南線)을 우선 건설한 다음에 경원선에 전력을 기울여 완공시키자는 주장도 제기된 바 있으나, 서울과 연결되는 간선철도를 구축하려는 일제의 의도에 따라 경술국치 직후 시점인 1910년 10월부터 공사가 본격 재개되었다. 이 당시 경원선 철도의 선로변경과 관련하여 다른 곳으로 분기점을 변경하는 방안이 검토되었으나 결국 용산역으로 다시 귀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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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에 제작된 거의 모든 사진엽서에 등장하는 ‘용산역’ 모습. 이 건물은 1906년 11월에 처음 지어졌으나 이내 불타버리고 동일한 설계도면에 따라 재건축한 것이라고 전해진다.

 

21용산역전 광장 남쪽에 자리한 총독부 철도국 청사 모습. (총독부철도국, <조선철도사> 제1권, 1929)

 

221912년 여름에 발행한 한강 홍수로 인해 침수된 용산역 일대 전경. 오른쪽 너머로 멀리 보이는 건물이 용산역 역사이다.(개인소장 엽서자료)

 

231932년 5월 1일 용산역을 통해 ‘귀환’하는 용산주둔 일본군대의 모습. 이들은 1931년 9월 19일 만주사변의 발발 다음날 관동군 증원(增援)을 목적으로 급거 파견되었다가 8개월 만에 되돌아왔다. (<만주사변출동기념사진첩(용산보병 제78연대)>

 

이러한 과정을 거쳐 용산역은 경의선과 더불어 경원선의 분기점으로 설정됨에 따라 그야말로 철도운행의 요충지라는 위상을 차지하게 되었다. 더구나 1906년 이후 용산 일대에 대규모 일본군 병영지가 조성되면서 용산역 일대는 그 배후공간이 되는 동시에 병력수송의 통로로 변신하였다. 이 시기에 용산역은 역사 개축이 시도되어 1906년 11월 목조 3층 건물이 완공되었으나 이내 화재로 소실되는 바람에 동일한 설계에 따라 재건축하였다. 이때 신축된 용산역 역사는 일제강점기의 엽서자료에서 흔하게 포착되는 바로 그 모습이다.
이와 함께 1906년 3월 30일 ‘경부철도매수법’에 따라 경부철도주식회사에 소속된 경인선과 경부선 철도가 일본정부 소유로 전환되자 이를 관리하기 위한 기구로 그해 7월 1일에 ‘통감부철도관리국(統監府 鐵道管理局)’이 신설된 바 있다. 이때 철도관리국 청사는 일단 남대문 밖에 있던 ‘구 경부철도주식회사 경성지점’ 자리로 정했다가, 1908년 11월 11일 용산역 앞 신설청사로 이전했다.
그 후 통감부 철도청(1909년 6월), 일본철도원 한국철도관리국(1909년 12월), 일본철도원 조선철도관리국(1910년 9월), 총독부 철도국(1910년 10월)의 순서로 기구편제가 바뀌었으나 청사는 종전 그대로 사용되었다. 일제강점기로 접어든 이후에는 1917년 7월부터 1925년 3월까지 남만주철도회사에 위탁하여 운영됨에 따라 이 회사의 경성관리국이 종전의 철도국 청사를 사용했다가 1925년 4월 이후 총독부 철도국 편제로 복귀하는 과정이 이어졌다. 일제 패망 직전인 1943년 12월에는 이른바 ‘결전행정체제’의 구축을 위한 총독부 기구개정에 따라 철도, 해사(海事), 항공, 세관 분야를 망라한 교통국(交通局)으로 확대 개편되었다.
이러한 변화의 결과로 용산역은 자연스레 철도행정의 중심지로 변모하였다. 이와 함께 이 주변에 대규모 철도국 관사촌과 더불어 철도병원, 철도구락부, 철도원양성소, 철도공원, 철도운동장과 같은 철도 관련 시설이나 공간이 두루 포진하게 된 것도 동일한 맥락에서 비롯된 일이었다.
용산역과 관련한 다소 이색적인 풍경을 하나 소개하자면, 용산역전 광장이 곧잘 장례식 영결식장으로 사용되었다는 점이다. 서울에 거주하는 사람이 지방에 묘소를 정하는 경우에 기차를 이용하여 이동하게 되는데, 이때는 대개 경성역보다는 용산역을 택하여 운구의 통로로 활용하곤 했다.
예를 들어, 1926년에 죽은 이완용 같은 경우에도 그해 2월 18일 용산역 광장에서 조선총독참석 하에 성대한 영결식을 치르고 특별열차 편으로 호남선 강경역(江景驛)을 경유하여 장지(葬地)인 전라북도 익산군 낭산면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일제강점기의 용산역이라면 무엇보다도 일본군대가 벌인 침략전쟁 때마다 대규모 병력(용산주둔 보병 제78연대 및 제79연대)이 ‘출정’과 ‘귀환’을 반복했던 공간이라는 점도 꼭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와 아울러 전시체제기 강제동원의 대상이 됐던 무수한 조선인 청년들이 일본이나 남양지역, 그리고 중국 등지로 끌려가야 했던 출발지가 된 공간도 바로 이곳 용산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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