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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손으로 안두희를 응징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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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두희에게 ‘정의봉’을 내려친 박기서씨는 1996년 당시 운전기사였다. 그는 ‘김구 선생 암살범이 승승장구하는 현실에 실망하다가’ 직접 책임을 물었다.

경기도 부천시 원미구의 한 오래된 아파트에 택시 운전기사 박기서씨(71)가 살고 있다. 박씨는 35년 전 이 아파트를 분양받았다. 한 번도 이사한 적 없이 부인과 세 자녀를 키우며 가정을 꾸려왔다. 운전을 천직으로 삼아 트럭 및 버스 운전기사 20년, 택시 운전기사 15년을 합쳐 35년 동안 ‘무사고’ 외길을 걷고 있다.

겉보기에 평범한 소시민의 삶을 살아왔다. 정의감만은 남달랐다. 1996년 10월23일 박씨는 운전대 대신 ‘정의봉’을 잡았다. 그는 이날 정의봉을 들고 안두희를 찾아갔다. 육군 포병 소위이자 주한 미군 방첩대(CIC) 요원이었던 안두희는 1949년 6월26일 서울 경교장에서 백범 김구를 암살한 장본인이다. 박씨는 “민족정기를 세우기 위해” 안두희를 정의봉으로 살해했다. 박씨는 곧바로 자수했다.

살인죄 혐의로 구속된 그를 위해 사회 각계 인사 9000명이 ‘박기서 석방대책위원회’를 꾸렸다. 대법원은 “안두희를 살해한 범행의 동기나 목적은 주관적으로는 정당성을 가진다고 하더라도 법질서 전체의 관점에서는 사회적으로 용인될 수 있을 만한 정당성을 가진다고 볼 수 없다”라며 징역 3년형을 확정했다. 박씨는 1년6개월여 복역하다가 김대중 정부 출범 직후인 1998년 대통령 3·1절 특사로 풀려났다.

내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앞두고 박기서씨는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인터뷰를 사양하는 박씨를 설득해 경기도 부천시 자택으로 찾아갔다. 집으로 기자를 들인 것은 처음이라는 박씨는 선반에서 물건 하나를 꺼냈다. 안두희 처단 당시 사용한 정의봉이었다. ‘見利思義 見危授命(견리사의 견위수명:이익을 보거든 정의를 생각하고 위태로움을 보거든 목숨을 바치라)’이라는 한자가 적힌 한지로 감싸 보관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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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기서씨(사진)는 안두희를 응징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역사와 정의와 관련한 책을 닥치는 대로 탐독했다. ⓒ시사IN 신선영

“스물두 살 때부터 좌우명으로 삼아온 안중근 의사의 붓글씨다. 남산 안중근 의사 기념관의 돌에 새겨진 바로 그 글씨다.” 정의봉에는 안두희의 혈흔이 남아 있었다. 박씨는 사건 현장에 정의봉과 주소를 남겨두고 나왔다. “정의봉은 검찰이 법원에 제출한 증거 1호였다.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임시정부기념관이 건립되면 전시할 테니 기증해달라고 해서 보관 중이다.”

1948년 전북 정읍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난 박씨는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주경야독으로 한문을 깨쳤다. 배움의 갈증을 독서로 풀었다. 그는 20대에 안중근 의사의 삶에 빠져들었다. 독실한 천주교 신자인 그는 같은 신자인 도마(토마스) 안중근 의사의 생애를 들여다보고 존경하는 인물로 마음에 새겼다. 30대 때는 운전기사로 생활하면서 틈틈이 <백범일지>를 읽었다. 김구 선생에 대한 존경심만큼 박씨는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실망감도 커져갔다. 암살범 안두희가 이승만 정권 등 역대 정부의 비호 아래 생존해 있는 것을 보고 분노했다.

“나는 정말 보잘것없는 소시민이었다. 나보다 많이 배우고 공직에 있는 사람들이 친일파가 득세하는 나라를 만든 책임이 크다고 생각했다. 그런 현실에 항상 실망하다가 내 손으로 직접 안두희를 처단해 역사적 책임을 물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이때부터 박씨는 역사와 정의와 관련한 책을 닥치는 대로 탐독했다. 또 1987년 안두희를 응징하려다 처벌받은 권중희씨를 만나기도 했다. 권씨가 쓴 <역사의 심판에는 시효가 없다>라는 책을 받아 읽었다. 책을 통해 안두희가 인천시 신흥동의 한 아파트에서 부인과 함께 거주한다는 사실도 파악했다.

▲ 안두희를 응징할 때 사용한 정의봉. ‘견리사의 견위수명’이라는 한자가 적힌 한지로 감싸 보관돼 있다. ⓒ시사IN 신선영

박씨는 거실에 백범 선생이 쓴 ‘양심건국’ 등 여러 붓글씨를 걸어두고 마음을 다잡았다. 실행하기까지 고민을 거듭했다. 평생 책임 있는 가장의 삶에서 벗어난 적이 없는 그로서는 남은 가족의 생계 걱정이 가장 앞섰다. 최소 5년간 감옥살이를 할 것으로 보았다. 그동안 가족이 굶지 않도록 저축을 했다. 화물차를 팔아 자녀들의 학비도 마련해두었다. 실행을 결심한 마지막 순간에는 당시 고등학교 3학년 수험생인 아들이 마음에 걸렸다. “아들이 받을 충격이 가장 걱정됐다. 차일피일 미루다가 안두희가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촉박함에 갈팡질팡했다. 안중근 의사라면 이럴 때 어떻게 했을까 생각해봤다. 대의 앞에 가족에게 닥칠 시련은 조그만 것이니 내가 감수해야지 않을까, 그렇게 마음먹으니 편해졌다.” 안두희를 찾아갈 날짜를 잡고 어머니께 큰절을 올렸다.

“저 큰 손으로 김구 선생님을 쐈구나”

실행 전날까지 박씨는 생업에 몰두했다. 시내버스 막차를 운행한 뒤 차고에 넣고 새벽에 택시를 타고 안두희가 사는 아파트를 찾아갔다. 안두희 부인이 아침 일찍 테니스장에 간다는 사실을 알고 새벽부터 문 앞을 지켰다. 1996년 10월23일 그날따라 안에서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오전 11시가 넘어설 무렵 안두희 부인이 문을 여는 기척이 들렸다. 박씨는 먼저 부인을 작은방에 가뒀다.

박기서씨는 ‘정의봉’을 들고 안두희가 누워 있는 안방으로 향했다. 거실 벽에 걸린 ‘百歲淸福(백세청복)’이라고 쓰인 액자가 눈에 들어왔다. 100살까지 청아하고 한가롭게 복을 누리며 산다는 뜻이었다. 순간 안두희가 쏜 흉탄에 쓰러진 백범 선생이 떠오르며 피가 거꾸로 솟는 느낌이었다고 한다. 안방 문을 열고 들어가자 누워 있던 안두희가 박씨를 쏘아보더니 일어서려 했다. “중풍을 앓고 있었다지만 나를 제압하려고 일어서는데 나보다 키가 훨씬 크고 기골이 장대했다. 저 큰 손으로 김구 선생님을 쐈구나 생각이 스치자 안두희의 팔을 정의봉으로 힘껏 내리쳤다. 거구가 그대로 쓰러지더라.”

박씨는 안두희 곁에 정의봉과 연락처를 남겨두고 안방을 나섰다. 거실에서 냉장고 문을 열고 정신없이 냉수를 들이켜는 박씨 앞에 안두희 부인이 나타났다. “처음에는 벌벌 떨더니 남편만 응징하고 갈 사람이란 걸 눈치챘는지 ‘저도 물 한잔 주세요’라고 하더라. 물을 한 대접 따라 같이 마신 뒤 머리가 백짓장이 된 상태에서 부천성당으로 달려갔다.”

신부를 만난 박씨는 눈물을 흘리며 고해성사를 했다. 신부는 박씨에게 토스트와 우유를 먹인 뒤 경찰에 자수하는 전화를 걸어주었다. “형사들을 데리고 성당으로 찾아온 당시 형사반장은 ‘박기서씨가 맞느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했더니 그는 형사들이 수갑 채우려는 것도 제지하고 그냥 연행하라고 했다.” 박씨가 경찰차를 타고 경찰서에 도착하자 기자들이 포토라인을 만들어 대기하고 있었다.

안두희 집에서 실시된 현장검증 때도 박씨는 얼굴을 가리지 않았다. 소신과 신념에 따른 행동이기에 사건 일체를 자백했다. 수사와 재판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검찰은 1심에서 징역 7년을 구형했다. 인천지법은 “피고인은 일반적인 의미의 흉악범과는 구별된다”라며 살인죄 최소 형량인 징역 5년형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안두희에 대해서도 판결문에 적시했다. “안두희는 김구 선생을 암살하고도 1949년 8월 극형에 처해질 것이라는 일반적인 예상과 달리 종신형을 선고받고 석 달 만에 징역 15년으로 감형되었다. 1950년 6월27일 잔형 집행정지 처분을 받고 다시 군에 복귀하여 소령으로 진급함과 동시에 예편하여 군납회사를 운영하는 등 특별대우를 받았다. 당시 특정 정치 세력의 비호를 받는다는 의혹이 있었고, 그 진상을 규명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으나 혼란스러운 시대 상황 속에 진상이 제대로 규명되지 않았다. 안두희는 단독 범행이라 주장하며 비호 세력에 대해서는 함구로 일관해왔기 때문에 김구 암살 범행에 대한 역사적인 진실이 밝혀지지 않는 등 안두희에 대한 일반 국민들의 분노가 상당한 것도 사실이다.”

2심에서 다시 징역 3년으로 감형된 박씨는 1997년 11월 대법원에서 최종 징역 3년형이 확정됐다. 이듬해 3·1절 특사로 풀려났다. “1년6개월여 감옥 생활을 하는 동안 정말 많은 국민이 위로와 격려 편지를 보내주셨다. 당시 리영희 한양대 교수도 격려하는 엽서를 보내주셨다. 그 인연으로 출소 후 생전에 매년 명절 때 찾아뵈었다.”

박씨는 출소한 뒤 운전기사로 돌아갔다. “사람들이 나를 공인처럼 대하니까 옛날보다 언행이 매우 조심스러웠다. 여기저기서 초청 강연 요청도 많이 왔지만 운전 쉬는 날 아니면 절대 안 갔다.” 그가 가입한 사회단체는 딱 하나, 민족문제연구소다.

생업에 바쁜 가운데도 박씨는 틈틈이 백범 선생이 묻힌 효창공원 위상 찾기 운동에 참여했다. 서울 용산구 효창공원에는 백범 김구, 윤봉길 의사 묘와 안중근 의사 가묘 등 독립운동가 8인의 묘가 조성돼 있다. 박기서씨와 그의 동지들은 효창공원이 국가가 관리하는 공원으로 격상되기를 바랐다. 최근 그 결실이 이뤄졌다. 국가보훈처는 내년 3·1 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계기로 효창공원에 ‘독립운동기념공원’을 조성하기로 했다. “정통성 없는 쿠데타로 지금까지 집권해온 세력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건국 정신을 부정하고 이승만 건국절을 주장하는데 참으로 부끄럽고 불행한 역사다.”

장준하 선생의 사망 당시 목격자 만나 설득

안두희를 처단한 뒤 소시민의 삶으로 돌아왔지만 박씨의 정의감은 여전했다. 그는 백범 김구의 비서였던 장준하의 최후를 목격한 중앙정보부 협력자 김 아무개씨를 추적했다. 광복군 출신으로 박정희 유신 독재 반대운동을 주도한 장준하 선생은 1975년 8월17일 경기도 포천 약사봉에서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 박정희 정권은 장준하 선생이 등산을 갔다가 실족 추락사했다고 발표했지만, 타살 의혹이 끊이지 않았다. 1기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장 선생이 죽음에 이르기까지 중앙정보부의 사찰과, 당시 유일한 목격자 김 아무개씨가 중앙정보부 협력자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하지만 국정원 등 정보기관이 조사를 거부해 진상 규명 불능 결정을 내렸다. 2기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도 같은 결론을 냈다. 2012년 묘 이장 과정에서 장준하 선생의 두개골 부위가 지름 6~7㎝ 크기 원형으로 함몰돼 있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추락 직전 둔기로 가격당해 숨졌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박기서씨는 당시 현장 목격자를 자처한 김 아무개씨에게 주목했다. 김씨는 1975년 당시 ‘장준하 선생이 하산 도중 잡은 소나무가 휘면서 추락했다’고 진술한 장본인이다. 그런데 그 김씨가 2003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 출석해 “장준하 선생이 추락하는 것을 내가 못 본 것은 사실이지만, 다만 내가 나무를 잡고 내려왔기에 선생도 그러셨을 거라 생각했다”라고 진술했다. 장준하 선생의 마지막 순간에 대한 진술이 일관되지 않았다. 박기서씨는 충남 당진에 살고 있던 김씨를 수차례 찾아가 진실을 밝히라고 요구했다. “일요일이나 쉬는 날 택시를 몰고 당진까지 찾아갔다. ‘장준하 선생이 소나무 가지를 잡고 추락하는 걸 당신이 봤다고 하는데 세월도 흐르고 했으니 진실을 얘기해달라’고 찾아다녔지만 계속 회피하더라.”

그는 지난해에도 김씨를 찾아가 설득했다. “아홉 번째 찾아갔다. 당신 나이가 여든 살이 넘었는데 얼마나 살겠냐. 당신이 믿고 따른 박정희 딸 박근혜도 감옥에 갔다. 이제는 진실을 밝혀달라고 했는데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김씨는 박씨와 만난 뒤 병원으로 옮겨졌고, 투병 한 달 만인 지난해 9월 뇌출혈로 사망했다. 김씨 가족은 박기서씨를 고소했다. 경찰은 김씨의 뇌출혈과 박기서씨 만남 간에는 인과관계가 없다며 무혐의 처분했다.

청년들이 <백범일지>를 읽으면 한국 역사를 꿰뚫어볼 수 있게 될 거라고 강조한 박기서씨는 내년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에 거는 기대가 크다. “효창공원이 제대로 성역이 되려면 리모델링이 아니라 대대적으로 바뀌어야 한다. 문재인 대통령이 촛불 국민들의 뜻을 받들어 이행한다고 한 만큼 제대로 성역화가 이뤄질 것으로 기대한다.”

정희상 기자 minju518@sisain.co.kr

<2018-09-11> 시사인

☞기사원문: “내 손으로 안두희를 응징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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