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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사랑

『재일조선인단체사전 1895~1945』 일본어판 나와

2025년 3월 28일 247

[초점] 『재일조선인단체사전 1895~1945』 일본어판 나와 106주년 3·1절을 앞두고 연구소가 『재일조선 인단체사전 1895~1945』(이하 사전) 일본어판을 도쿄 유마니쇼보(ゆまに書房) 출판사에서 E-Book으로 출간했다. 연구소는 2007년부터 재일조선인단체를 조사·연구해 지난 2021년 한글판 사전을 펴낸 데 이어 3년 만에 일본어판을 선보이게 된 것이다. 이 사전 E-Book은 대형 서점 배급망을 통해 일본 내 주요 대학과 도서관에 보급되어 재일조선인 사회를 탐구하는 기초 학술자료로 활용된다. 이 사전은 일제하 재일조선인의 조직활동을 처음으로 집대성한 전문서적이다. 일본 내 독립운동단체에서부터 친일단체, 일제의 관제조직에 이르기까지 무려 551개 단체의 연혁과 활동을 망라한 대저작이다. 설립 목적으로는 정치·사회·경제·문화·종교·사상·교육·노동·친목·상조 단체로 구분되며, 실행 주체에 따라서는 청년·학생, 노동자, 여성, 실업자, 임차인 단체 등으로 분류된다. 이렇듯 분야나 성격이 다른 다양한 단체의 다면적인 활동을 1차 자료에 근거하여 수록했다는 점이 이 사전의 가장 큰 특징이라 할 것이다. 즉 재일조선인 사회의 일면을 부조적으로 접근한 것이 아니라, 수많은 단체의 형태로 나타난 재일조선인들의 삶을 다각적이고 입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는 데 이 사전의 효용성이 있다. 2022년에는 대한민국학술원이 주관하는 우수학술도서에 선정되어 이미 그 성과를 객관적으로도 평가받았다. 사전은 한일 시민사회와 연구자·활동가들이 한일공동편찬위원회를 구성해 10년이 훨씬 넘는 기간 동안 공동작업을 진행해 얻은 소중한 결실이다. 일본어판의 첫 장부터 마지막까지 히구치 유이치 전 고려박물관장과 미즈노 나오키 교토대 명예교수의 손길이 미쳤다. 이들과 함께 공동편찬위원장을 맡았던 김광열 광운대 명예교수 또한 민족문제연구소 일본어판 편찬팀에 조언을 아끼지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하고 내정권을 일본에 완전히 넘겨준 정미칠적(丁未七賊)

2025년 3월 28일 2147

[소장자료 톺아보기 68]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하고 내정권을 일본에 완전히 넘겨준 정미칠적(丁未七賊) 일제는 헤이그 특사사건을 빌미로 고종을 강제 폐위하고 1907년 7월 20일 순종을 즉위시켰다. 일제는 한국의 내정을 철저히 지배하기 위해 정미 7조약의 체결을 강요했다. 이완용 친일내각은 각의를 열고 일본측 원안을 그대로 채택해 순종의 재가를 얻은 뒤 이완용이 전권위원이 되어 7월 24일 밤 통감 이토 히로부미의 사택에서 7개 조항의 신협약을 체결 및 조인하였다. 이 조약을 정미 7조약, 한일 신협약, 제3차 한일협약 등으로 다양하게 일컫는다. 그 조문은 다음과 같다. 한일협약 일본정부 및 한국정부는 속히 한국의 부강을 도모하고 한국인의 행복을 증진하려는 목적으로 다음 조관(條款)을 약정함 제1조 한국정부는 시정개선에 대해 통감의 지도를 받을 것 제2조 한국정부의 법령의 제정 및 중요한 행정상 처분은 미리 통감의 승인을 거칠 것 제3조 한국의 사법사무는 보통행정사무와 구별할 것 제4조 한국 고등관리의 임면은 통감의 동의를 얻어 이를 시행할 것 제5조 한국정부는 통감이 추천하는 일본인을 한국관리에 임명할 것 제6조 한국정부는 통감의 동의 없이 외국인을 고용하지 않을 것 제7조 1904년 8월 22일 조인한 한일협약 제1항은 이를 폐지할 것 한편 정미 7조약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규정한 「한일협약 실행에 관한 각서」도 함께 체결되었으나, 공포되지는 않았다. 이 각서에는 재판소와 감옥의 설치를 강제하고,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한다는 실행사항을 담고 있었다. 정미 7조약과 실행 각서의 체결로 국가를 보위하는 군사력을 빼앗기고

민족사랑 2025년 3월호

2025년 3월 27일 4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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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규 장군의 역사소설 『독립운동실화 파데강반』

2025년 3월 4일 705

[자료소개] 김학규 장군의 역사소설 『독립운동실화 파데강반』 이번에 소개하는 자료는 광복군 제3지대장을 지낸 백파 김학규 장군이 집필한 역사소설 『독립운동실화(獨立運動實話) 파데강반(江畔)』이다. 한평생 조국광복을 위해 혼신을 다했던 김학규 장군이 이러한 역사소설을 썼다는 점이 놀랍기도 한데, 『한국독립운동인명사전』 등 각종 인명사전에 김장군이 『독립운동실화 파데강반』을 집필했다는 내용이 전혀 기술되지 않은 점이 더 한층 놀라울 따름이다. 그만큼 김학규 장군에 대한 심층적인 학술 연구가 미흡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백파 김학규(1900~1967)는 평안남도 숙천 태생이다. 1919년 겨울 신흥무관학교 속성과를 졸업하고 서로군정서 견습사관으로 유하현 삼원포 일대에서 활동했다. 1920년 경신참변 후 중국 고급학교에서 6년간 수학한 후 동명중학교 교원 및 교장을 지냈다. 1931년 조선혁명군 총사령 양세봉 장군의 참모장, 1935년 민족혁명당 중앙집행위원, 1937년 대한민국임시의정원 중국지역 의원 등을 역임했다. 1940년 광복군 총사령부 참모장 대리, 광복군 제2지대장 겸임, 산동지역 광복군 초모위원장, 1945년 4월 광복군 제3지대장으로 활동했다. 해방 후에도 한국주화대표단 동북총판사처 부처장으로 만주지역 조선동포의 귀환을 위해 힘썼다. 1948년 4월 귀국하여 김구 휘하의 한국독립당 간부로 활약했다. 1949년 6월 한국독립당 조직부장에 취임했다. 그해 6월 26일 김구 선생 피살 사건시 안두희를 한독당에 가입시키고 김구에 소개시켰다는 이유로 김구 살인교사범으로 몰려 징역 15년을 선고받았다. 정작 살인범인 안두희는 이승만 정권의 비호를 받아 이듬해 풀려나 육군 소위로 복직했으나, 김학규 장군은 1960년 4·19 직후 허정 정부에서의 석방 때까지 12년이나 억울한 옥살이를 했다. 1962년 건국훈장

중일전쟁 시기 ‘한국청년’의 항일음악(2)

2025년 3월 4일 546

[연구소 글방 19] 중일전쟁 시기 ‘한국청년’의 항일음악(2) 이명숙 연구실장 광저우(廣州)에서 항전을 모색하던 광복진선의 ‘한국청년’들은 광저우가 일본군에 함락되기 직전 탈출해 1938년 연말, 두 달여 만에 류저우(柳州)에 도착했다. 전장으로 가길 원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류저우에 도착하고 얼마 안 되어 우리 젊은이들은 일을 해야겠다고 서둘렀다. 그때 일이란 일본 침략을 막아내는 것이 최우선이었다. 총 들고 일선에 나가 싸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는 사람은 후방에서라도 항전의식을 고취하고 항전하는 방법을 널리 알리는 것이 매우 중요하므로 우선 이런 일을 자발적으로 시작했다.”(지복영, 『민들레의 비상』, 198쪽) 류저우는 전장과는 상당히 떨어진 후방이었다. 이곳 중국인들은 전장의 현실을 실감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황을 알리고 항전의식을 일깨우려는 항전집회가 유후공원(柳候公園)에서 수시로 열렸다. ‘한국청년’도 이곳에서 중국 청년들을 만나 교류하면서 전시(戰時)의 효과적인 선전 수단이 무엇일지 또 중국인들에게 한인들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어떻게 효과적으로 전할지를 고민하며 행동에 나선 것이다. 청년공작대와 전지공작대의 조직과 연계 ‘한국청년’은 얼마 지나지 않은 1939년 2월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이하 청년공작대)’를 조직했다. 자신들의 정치노선과 행동강령을 검토·논의하는 자리에서 우선 ‘각 당의 청년동지들이 일치결속하여 어떠한 난관이라도 돌파시켜가면서 가장 광명정대하고도 명확한 노선으로 용왕매진하기를 결심’한 자리에서 즉각적으로 결성했으며, 이어 ‘이후의 청년운동은 전부 청년공작대로 집중시킬 뿐만 아니라 단일당 촉성과 통일조직의 완성을 위해서도 적극 분투하기로 결정’했다. 남목청(楠木廳) 사건 발발 등 3당 통합 논의가 무산되는 일련의 사건 속에서 ‘한국청년’의 통일된 모습을

“천안 호두과자의 원조는 기미년 만세시위대(예산 고덕)를 칼로 찌른 일본군 헌병오장 출신이었다”

2025년 2월 26일 964

[3·1절 특집 발굴추적] “천안 호두과자의 원조는 기미년 만세시위대(예산 고덕)를 칼로 찌른 일본군 헌병오장 출신이었다” 이순우 특임연구원 지금에야 비단 고속도로휴게소가 아니더라도 지하철 가판매장만 찾아가도 넘쳐나는 간식거리의 하나이지만, 그 옛날 철도여행이 성행하던 시절에는 ‘경부선 천안역’ 근처를 지나노라면 선물용 꾸러미를 한 아름 안은 채 홍익회 판매원이 ‘천안명물 호두과자[혹은 호도과자]’를 외치며 열차통로를 바삐 지나다니는 광경을 곧잘 보곤 했다.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만큼 대단한 명성을 누리고 있는 ‘호두과자’라고는 하나, 정작 그 유래를 정확히 아는 이는 드물다. 근년에 몇몇 언론매체와 소논문 형태의 글을 통해 『부산일보』 1931년 4월 12일자에 수록된 「시무라(志村)의 쿠루미요캉(くるみ羊かん)」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인용 소개되면서, 이것이 호두과자의 원조를 새롭게 밝혀줄 자료라는 식으로 제법 소개되기는 한 적이 있다. 천안역전(天安驛前) 시무라제과포(志村製菓舖) 주인 시무라 마츠타로(志村松太郞) 씨는 상당한 분투가(奮鬪家)로 연구심(硏究心)이 넘치는 사람이며 천안특산물(天安特産物)인 쿠루미(胡桃, 호도)를 이용 여러 가지의 과자를 만들고 있는데, 과반(過般) 부산(釜山)에서 개최한 전선과자이품평회(全鮮菓子飴品評會)에서 ‘쿠루미야키’는 일등상 금패(一等賞 金牌)에, ‘쿠루미요캉’ 및 ‘신(新)쿠루미’는 모두 이등상 은패(二等賞 銀牌)에 입상(入賞)했던 것으로, 거의 전선적(全鮮的)으로 인정받게 된 것은 시무라 씨의 명예만이 아니라 천안의 명예이다. 이와 관련하여 『경성일보』 1931년 3월 30일자에 수록된 「제1회 전선과자이품평회와 전국식료품전람회 포상수여식(褒賞授與式) 거행」 제하의 기사를 보면, 1등상 금패는 부산 카타야마 토쿠타로(片山德太郞) 외 63점(點)에게 한꺼번에, 그리고 2등상 은패 역시 함흥 고토 야스요시(五島安吉) 외 98점에 대해 일괄하여 주어진 사실이 확인된다. 아무튼 이것이 대략 호두과자의

식민지역사박물관, 회원과 시민대상의 긴급특강 <계엄과 폭력의 역사> 열어

2025년 3월 4일 302

[초점] 식민지역사박물관, 회원과 시민대상의 긴급특강 <계엄과 폭력의 역사> 열어 식민지역사박물관은 회원 및 일반 시민을 대상으로 긴급특강 〈계엄과 폭력의 역사〉를 2월 8일부터 매주 토요일 오후 1시부터 진행하고 있다. 삼일절을 제외하고 3월 15일까지 총 4강과 특별대담으로 진행된다. 이번 특강은 2024년 12월 3일에 있었던 비상계엄 사태의 역사적 기원과 한국 현대사에서 반복된 계엄, 이를 무기로 한 국가폭력의 역사를 되짚어 보고자 했다. 첫 강의는 강성현 성공회대 교수가 ‘계엄의 탄생과 12·3 비상계엄 이후’라는 주제로 한국에서 계엄이 형성된 초기 과정과 그 정치적, 사회적 의미를 꼼꼼히 다루었다. 여순사건과 제주4·3사건에서 선포된 계엄과, 그 이후 제정된 계엄법, 한국전쟁 이후 독재의 수단으로 이용된 계엄까지 전반적인 계엄의 역사를 배울 수 있었다. 참석자들이 비상계엄이 가지는 한국적 특징, 그 이면에 있는 법의 폭력성까지 종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는 소감을 남겼다. 두 번째 강의는 권혁은 서울대규장각한국학연구원 선임연구원이 ‘독재의 무기, 계엄과 시위 탄압의 시스템’이라는 주제로 2시간을 가득 채웠다. 군부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부 때부터 12·3 비상계엄까지 군이 어떻게 계엄에 개입하고 동원되었는지 다루었다. 40명이 넘는 수강생들은 계엄법 안에 폭력성이 내포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계엄법이 없어질 때까지 국민의 한 사람으로 지켜봐야겠다는 후기를 남겨주었다. 질 때까지 국민의 한 사람으로 지켜봐야겠다는 후기를 남겨주었다. 두 강좌 모두 참석자가 50명 내외로 현재 상황에 대한 높은 관심도를 체감할 수 있었다. 강의가

시민이 만든 광장의 이야기를 박물관으로 – ‘당신의 민주주의를 기증받습니다’ 캠페인

2025년 3월 4일 223

[초점] 시민이 만든 광장의 이야기를 박물관으로 – ‘당신의 민주주의를 기증받습니다’ 캠페인 민족문제연구소‧식민지역사박물관은 12·3 비상계엄 후 윤석열 탄핵을 위해 민주주의의 광장으로 나온 시민들의 역사를 기록하고 기억하기 위해 “민주주의와 깃발” 기획전시를 준비하고 있다. 이를 위해 ‘당신의 민주주의를 기증받습니다’라는 이름으로 광장에서 민주주의 역사를 새로 써가는 시민의 이야기를 모으고 시위용품을 기증받는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민주주의의 회복을 열망하며 광장에 모인 수많은 시민의 목소리는 사회대개혁과 연대의 회복이 필요한 오늘날 우리 사회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2016년 광장이 우리에게 민주주의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었다면, 2025년 광장은 사회대개혁과 연대의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 윤석열 탄핵을 외치는 다양한 시민들은 장애인 이동권을 보장하라는 목소리를 비롯하여 모든 차별에 대한 반대를 호소하는 소수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트랙터를 끌고 서울로 올라온 농민들과 손을 마주 잡았다. 연대의 물결이 넘쳐흐르는 광장에서 만난 시민들은 연구소와 박물관의 캠페인에도 흔쾌히 참여해주고 있다. 한 시민은 ‘이번에 집회를 나오면서 모르던 문제들을 많이 알게 되었다. 그래서 이번 주에는 본 대회 말고 다른 노동자 집회에도 참석해 보려고 한다.’라고 말했다. 2024년 12월 3일 밤, 무너진 민주주의를 보면서 자신의 무관심을 자책하고 그동안 함께하지 못한 부채감에 매주 광장을 지키는 시민들은 ‘나’의 일상을 넘어 ‘우리’의 일상을 지키고 있다. 매주 연구소 활동가들은 민주주의의 광장에서 시민들을 만나고 있다. 이번 캠페인은 윤석열이 탄핵당할 때까지 계속될 예정이다. 자신이 지닌 가장 소중한

김희원 경기동북지부장을 추모하며

2025년 2월 28일 490

[추모사] 김희원 경기동북지부장을 추모하며 방학진 기획실장 독립운동가 중 후손이 확인되지 않아 훈장을 전수하지 못한 경우는 현재 18,162명 중 7,278명(40%)에 이른다. 역사에 이름 석자만 남겼을 뿐 훈장을 받아서 보관할 후손조차 없는 독립운동가들이 이렇게나 많다. 34년 전 민족문제연구소가 창립되자 당시 후원회원으로 참여한 시민들은 스스로를 ‘21세기 독립군’이라 자처하며 연구소 활동에 물심양면으로 힘을 보탰다.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 연구소를 위해 헌신한 많은 분들이 유명을 달리하고 계시지만 제한된 민족사랑 지면 관계로 일일이 그분들의 노고를 남기지 못해 늘 안타깝고 죄송했다. 멀지 않은 시기(어쩌면 창립 35주년이 되는 내년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에 ‘역사정의 실현’이라는 추상적 기치를 『친일인명사전』 편찬과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이라는 구체적 현실로 만들어낸 연구소 후원회원들의 성원을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 상근자로서 최소한의 도리라고 늘 생각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지난 1월 23일 73세를 일기로 별세한 김희원 경기동북지부장에 대해 짧게나마 쓰고자 한다. 김희원 지부장은 1952년 서울 사대문 안에서 부유한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님은 해방 직후 이화여대 약학과를 졸업하고 다시 서울여자의과대학(현 고려대 의대)을 졸업하고 의사로 활동했다. 어릴 적 기억으로는 어머니의 이대 약학과 1년 후배인 손명순(김영삼 전 대통령 부인) 여사가 집에 찾아오거나 장택상 씨 집안과도 교류했다고 한다. 집이 서울 시내 한복판이었지만 한국전쟁 중에도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생활을 했던 것은 아마도 부모님 덕분이었을 것이다. 대학 입학 후에는 공부보다는 음악다방 DJ 같은 자유로운 생활에 몰두하다 부모님의

‘역사의 증인’ 일본제철 강제동원 피해자 이춘식 할아버님의 명복을 빕니다

2025년 2월 28일 317

[추모사] ‘역사의 증인’ 일본제철 강제동원 피해자 이춘식 할아버님의 명복을 빕니다 김영환 대외협력실장 일본제철 강제동원 피해자 이춘식 할아버님께서 2025년 1월 27일(월) 오전 8시 57분 향년 102세를 일기로 별세하셨습니다. 이춘식 할아버님은 1924년 전라남도 나주군 평동면 용동리에서 태어나 17세에 일본 이와테현 일본제철 가마이시제철소에 끌려가 강제노동의 고통을 당하였습니다. 현지에서 다시 일본군에 징집되어 고베의 연합군 포로수용소에 배치되었습니다. 열악한 노동환경과 공습의 위험을 이겨내고 고베에서 해방을 맞았습니다. 해방을 맞아 끌려간 모든 조선의 청년들이 서둘러 고향을 찾기 위해 애쓰고 있을 때 청년 이춘식은 해야 할 일이 있었습니다. 쇳물을 다루는 위험한 제철소에서 가장 고통스러웠던 배고픔, 다반사로 일어나던 사고, 전쟁 말기 미군의 극심한 공습을 피해 죽을 고비를 넘기며 살아남은 자신이 강제로 노동한 것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받아야 했습니다. 효고(兵庫)현 고베에서 이와테(岩手)현 가마이시까지 1,000㎞가 넘는 머나먼 길, 전쟁의 폐허로 교통수단도 제대로 없었을 당시에 청년 이춘식은 자신의 인권과 존엄을 다시 찾기 위해 길을 떠났습니다. 이춘식 할아버님은 2005년 서울중앙지법에 일본제철을 상대로 제소한 손해배상소송에 원고로 참여하여 전범 기업의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는 투쟁에 앞장섰습니다. 해방 뒤 73년이 지난 2018년 10월 30일, 한국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가해 기업 일본제철을 상대로 제기한 소송에서 피해자들의 역사적인 승소 판결을 확정했습니다. 법정에서 판결을 직접 들은 이춘식 할아버님은 소감을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기쁨이 아니라 눈물이 나오고, 마음이 아프고 슬프다.”라며 뜻밖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