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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치호 영어일기 속엔 美國을 향한 선망 가득"
▲윤치호 일기/김상태 편역/역사비평사 ‘조선이 지금의 야만적 상태에 머무느니 차라리 문명국의 식민지가 되는 게 낫겠다.’ (1890년 5월 18일) 개화파 지식인으로 서재필 이상재 등과 독립협회를 조직했던 윤치호(尹致昊·1865∼1945·사진). 그가 영어로 쓴 일기에 남긴 미국에 대한 선망(羨望)이다. ‘수유연구실+연구 공간 너머’의 윤영실 연구원(서울대 국문과 박사과정 수료)은 논문 ‘미국과 식민지 근대주체 형성의 한 경로:윤치호 일기를 중심으로’에서 한 지식인의 사적(私的) 기록을 통해 미국에 대한 종속적 시각이 내면화하는 과정을 분석했다. 논문은 학술단체협의회 주최로 21일 서울 구로구 항동 성공회대 피츠버그홀에서 열리는 ‘우리 학문 속의 미국: 미국적 학문 패러다임 이식에 관한 비판적 성찰’ 심포지엄에서 발표된다. 몰락한 양반 가문 출신인 윤치호가 과거도 치르지 않고 1883년 초대 주한 미국공사의 통역관 지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영어 실력 때문이었다. 1881년 신사유람단을 따라 일본으로 건너가 네덜란드 영사관 서기관으로부터 4개월간 영어를 배운 것.1888년 미국 유학길에 오른 윤치호는 1889년부터 영어로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윤치호는 1895년 귀국해 독립협회 회장(1898), 대한자강회 회장(1906) 등을 맡아 독립운동과 애국 계몽운동을 주도하면서도 50년이 넘는 기간 중 연간 100여쪽의 영어일기를 썼다. 윤치호가 영어로 일기를 쓴 이유는 △‘자유’ ‘권리’ ‘의회’ 등 서구 시민사회의 산물을 번역할 만한 마땅한 국문이 존재하지 않았고 △국문에는 언문일치나 고백체가 없어 ‘고백적 글쓰기’가 어려웠기 때문. 미국 유학시절 영어일기에는 ‘내 나라의 치욕과 수치스러움에 대한 의식’(1891년 2월 1일) 등 서구인들 앞에 주눅 든
1987년 11월 29일, 그로부터 16년
‘국정원은 김현희 KAL858기 조작 의혹에 대해 공개 답변하라!’는 내용의 기자회견이 11월 3일에 이어 11일에도 열렸다. 우리 기억 속에 ‘북한공작원 마유미’, ‘언니 미안해’와 영화와 유행어가 먼저 떠오르는 이 사건은 당시 수당 당국에 의하면 ‘1987년 11월 29일 북한이 다음 해 열린 서울 올림픽 방해를 목적으로 공작원 김승일과 김현희로 하여금 바그다드에서 서울로 향하던 KAL 858 여객기내에 폭발물을 장치하여 미얀마 인근 안다만 해역에서 실종되어 승무원을 비롯해 중동 건설 노동자가 대부분이었던 무고한 115명의 생명을 앗아간 만행’으로 당시 전세계적인 충격을 안겨주었던 대형 참사였다. 바레인에서 체포된 김현희가 김포공항을 내려선 날은 바로 1987년 12월 15일로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이 맞붙은 군부정권을 평화적 방법으로 교체할 절호의 기회로 여겨졌던 제13대 대통령선거일을 불과 하루 앞둔 날이기도 했다.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점점 잊혀져 가고 있었던 그 16년 세월동안 가족들은 단 한조각 잔해나 유품도 발견하지 않은 이 사건의 진상 규명을 요구하며 회한의 시간을 보내며 사랑하는 남편과 아들과 딸들의 죽음을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 임옥순 회원은 이 사건 가족회를 중심적으로 이끌고 있다. ▲진상규명에 앞장서고 있는 임옥순 회원 ©민족문제연구소 사실 임옥순 회원의 존재를 안 것은 불과 며칠 전이었다. 아주 우연한 기회에 조동걸 관악동작지부장으로부터 임옥순 회원의 소식을 들었다. 전직 수학 교사 출신인 조동걸 지부장이 그녀의 두 딸을 가르친 적이 있었는데 그 때에도 두 분은 서로가 연구소
[기고] 기억을 둘러싼 투쟁
편집자 주 : 한상권(민가협양심수후원회 회장, 덕성여대 역사학과 교수) 선생님의 이 글은 <양심수후원회 소식지>(2011년 7월호)와 <통일뉴스>(07.21)에도 실렸습니다. 전재를 허락해 준 필자와 <통일뉴스>에 감사드립니다. ▲ 역사학계는 2009년 11월 30일 흥사단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친일진상규명작업에 대한 입장을 밝혔다. 한상권 한국사연구회 회장(덕성여대 교수, 왼쪽에서 세 번째)이 발표를 하고 있다. [통일뉴스 자료사진] 한국방송(KBS)이 지난 6월 24일과 25일 이틀간 백선엽(1920∼)을 6·25 전쟁의 영웅으로 미화한 다큐멘터리 ‘전쟁과 군인’을 내보냈다. 이에 앞서 사월혁명회,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전국언론노동조합 등 83개 시민단체로 구성된 ‘친일·독재 찬양방송 저지 비상대책위’는 친일파 백선엽을 구국의 영웅으로 대접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이 방송계획을 즉각 철회하라고 요구하였다. 광복회도 백선엽 다큐 방송이 나가기 하루 전인 지난달 23일 한국방송에 공문을 보내 ‘백선엽-이승만 다큐’ 중단을 요구했다. 광복회는 공문에서 “백선엽은 항일세력을 무력 탄압하는 조선인 특수부대 ‘간도특설대’의 장교로서 일제의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한 친일파”라며, “친일파 백선엽에 대한 찬양 방송은 물론, 오는 8월 15일 광복절에 내보내겠다는 이승만 찬양 다큐의 제작도 당장 중단할 것을 강력히 촉구한다”고 밝혔다. 잇따른 반발에 직면한 한국방송은, “백선엽 다큐는 광복회 정신과도 그 뜻을 같이 한다.”라는 답변서를 광복회에 보내는 것과 함께, 골든타임인 밤 10시부터 1시간씩 KBS 1TV를 통해 이틀간 백선엽 다큐 방영을 강행하였다. 한국방송의 백선엽 다큐 방송을 계기로 ‘기억투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1. 기록은 기억을 지배한다 한국방송이 백선엽을 역사의 이편으로 되살리려는
“KBS 이승만 특집 연기설은 김빼기 수작”
친일파 백선엽의 전쟁영웅만들기에 나섰던 KBS가 오는 8·15를 전후로 이승만 특집을 강행하려다 여론의 거센 반발에 밀려 방영일 연기를 검토하자 독립운동단체를 비롯한 원로들이 ‘꼼수부리기’와 ‘김빼기 수작’을 부리지 말라며 즉각 방송을 중단하라고 촉구했다. 독립운동단체 등 95개 단체로 구성된 ‘친일독재 찬양방송 저지 비상대책위’는 25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규탄 기자회견을 열어 KBS의 이 같은 방송연기 가능성에 대해 “독립운동 열사와 그 후손들, 한국전쟁 100만 명 민간인 학살의 희생자와 유족들, 독재자 이승만을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몰아낸 4.19 혁명 후세들의 준엄한 목소리에 KBS가 잔뜩 겁을 먹은 것”이라고 밝혔다.이들은 “KBS의 ‘방송 연기’ 운운은 국민을 속이려는 ‘기만책’”이라며 “한 발 물러서는 척하며 여론의 관심을 돌려보려는 ‘김 빼기’ 수작에 불과하다. 정말이지 MB특보 출신다운 ‘꼼수’가 아닐 수 없다”고 비판했다. 이들은 △간도특설대 출신 친일파 백선엽 영웅 방송 사죄 △학살 독재자 이승만의 5부작 특집 제작을 즉각 중단 등 이들의 2가지 요구사항에 대해 “어느 하나라도 충족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절대 물러나지 않을 것”이라며 “김인규 사장은 치졸한 말장난으로 독립선열 후손들을 능멸하는 행위를 즉각 중단하라”고 촉구했다.이들은 “여전히 반성할 줄 모르는 KBS는 더 이상 공영방송이 아니라고 확신한다”며 지난 17일 명동에 이어 25일부터 청계광장에서 열리는 김인규 사장 퇴진서명식과 독립열사 후손들의 1인시위 개시를 선언했다. 앞서 명동에서 1인시위에 나섰던 이들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 선생의 증손자, 반민특위 위원장을
조두남기념관 재개관 여부, ‘시민위’ 논란
*민족문제연구소는 이미 지난 8월 마산시의 제안으로 현지공동조사단에 참여하였다. 그리고, 공동조사단의 결론은 조두남의 친일혐의가 짙다는 것으로 모아졌다. 우리는 공동조사단의 결론을 마산시가 즉각 수용할 것을 촉구한다. 그리고, 시민위원회의 결론과 관계없이 조두남기념관 재개관에 적극 반대한다. 역사는 다수결이나 협상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조두남기념관 재개관 여부, ‘시민위’ 논란 마산시 “시민여론 수렴 차원”… 희망연대 “또 무슨 위원회냐” 기사전송 기사프린트 윤성효(cjnews) 기자 ▲ 개관 뒤 곧바로 폐쇄된 조두남 기념관(왼쪽)과 마산시청. ⓒ2003 오마이뉴스 윤성효 마산시가 친일혐의를 받고있는 조두남의 기념관 재개관 여부를 자체적으로 판단하지 않고 ‘시민위원회’를 신설해 결정하기로 했다.하지만 이에대해 일부에서는 “마산시가 시민여론을 수렴한다면서 시간끌기만 하고, 결과적으로 기념관을 그대로 두기 위한 술책이 아니냐”고 비판하고 나섰다.‘조두남 기념관 관련 친일의혹 공동조사단'(단장 황일두 마산시의원)은 지난 7월 18일부터 23일까지 중국 연변에서 조사를 벌인 뒤, 8월 28일 발표문을 통해 “조두남은 친일 혐의가 짙다”는 결론을 내린 바 있다.△마산시 계획 마산시는 20일 ‘시민위원회’ 구성과 운영 계획을 밝혔다. 마산시는 “명망있는 각계 각층의 대표들로 구성된 시민위원회의 운영을 통해 시민들이 공감할 수 있는 합리적인 방안을 도출하기로 했다”고 밝혔다.마산시는 시민위원회의 운영기간은 별도로 정하지 않았으며, 조두남기념관의 재개관 여부와 명칭, 앞으로 운영방안 등에 대해 논의한 뒤 결정하기로 했다. 시민위원회 위원은 모두 16명으로 구성되었으며, 20일 오후 3시 시청에서 회의를 열기로 했다.시민위원 명단은 다음과 같다.남부희(경남대 사학과 겸임교수) 이지우(경남대 사학과 교수) 김복근(경남시조시인협회장) 이성모(경남시사랑문화인협의회장) 고승하(작곡가) 전정자(전 창원대 음대 교수) 목진숙(경남신문
[제안] "평화를 위한 제대 군인회 만들자"
표명렬 회원은 11월 15일 파병반대비상국민행동이 시청 앞에서 주관한 집회에 연사로 등단하여, 파병을 주장하는 재향군인회의 모습을 비판하며, [평화를 사랑하는 제대군인회] 건설을 제안했다. 연구소는 표 회원의 제안에 적극 동참할 예정이다. 예비역 준장 표명렬씨 ▶예비역 준장 표명렬씨. [사진 – 통일뉴스 김규종기자]『개혁이 혁명보다 어렵다』는 책의 저자이기도 한 표명렬 예비역 준장은 무대를 내려와 기자들의 질문에 “육사를 나온 장군출신들이 머리 속이 굳어져서 조선일보가 시키는 대로 그저 따라하고 있다”며 “이런 모습이 답답하다”고 말했다. “베트남 전에서는 주민들이 적대적이지 않고 무관심 했던데 반해 이라크는 적대적이어서 정말 위험한 상황”이며 “파병하게 되면 오지에서 빠져나오질 못할 것이다”고 우려했다. 표명렬씨는 “저처럼 파병을 반대하는 예비역 장성들이 있지만 같이 하자고 했을 때 왕따당할까봐 같이 못하는 상황이다”고 전하기도 했다. “평화를 위한 제대 군인회 만들자” ▲ 예비역 준장 표명렬(65)씨. ⓒ오마이뉴스 권우성 이날 국민대회에서는 “평화를 위한 제대 군인회를 만들자”는 제안을 한 예비역 준장 표명렬(65)씨가 참자들의 눈길을 끌었다. 65년부터 1년간 베트남 전쟁에 소총중대 중위로 참가해 전쟁의 참혹함을 경험했다는 표씨는 각계발언에서 위와 같이 말하며 “방위 출신도 방위산업체출신도 얼마든지 참여할 수 있다”고 동참을 호소했다. 표씨는 이후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군인회를 위해 민중연대와 함께 목적, 구상, 앞으로의 일정에 대해 준비중”이라며 “이는 온라인 상으로 시작해 촛불시위처럼 조금씩 그 불씨를 살려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표씨는 “스페인이 독재자 프랑코로부터 민주화됐을 때 가장 먼저 한 작업이 군대개혁이었다”며 “우리나라
KBS 시사기획 10
일제 시대, 같은 시대였지만 다른 두 삶이 있었다.친일의 길과 항일의 길.일제로부터 귀족 작위와 은사금을 받은 조선귀족들의 삶은 윤택했고,그 후손들도 조상의 후광을 입어 좋은 교육을 받고 양지에서 살고 있다.하지만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온 재산을 내던지고 자식들의 목숨까지 나라에 바쳤던 독립 운동가들은 머나먼 이국 땅에서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고,후손들의 고통은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친일의 길을 걸었던 사람들과 항일의 길을 걸었던 사람들의 과거와 후손들의 현재를 병치해 보여줌으로써 대한민국의 과제는 무엇인지 알아본다. 친일 재산 귀속, 그 후 친일재산조사위원회가 친일 행위자의 재산을 국고 귀속한지도 어느덧 5년이 지났다.친일재산조사위원회는 친일 행위자 160여 명의 재산을 국가에 귀속시켰지만,대부분의 후손들이 반성하지 않고 소송 대열에 뛰어들어, 친일재산조사위원회가 해체된 지금도 60여 건의 소송이 진행 중이다.친일 재산 환수법 자체가 위헌이라며 위헌 소원을 낸 후손도 다수이다.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가 한 행동에 대해 후손이 얼마만큼의 책임을 져야 하는가에 대한 사회적 합의는 미완의 과제로 남아 있다. ‘한일합방의 공으로’ 지난 5월 박병대 대법관 후보자 인사청문회에서 쟁점으로 부각된 것은 친일 재산 문제였다.박병대 대법관은 고등법원 판사 시절, 친일 행위자 이해승의 후손이 국가에 귀속된 재산을 돌려달라고 제기한 소송에서 이해승이 친일한 것은 맞지만,한일합방 이전에 친일한 증거는 찾을 수 없었다며 국가는 이해승 후손에게 재산을 돌려주라고 판결했다.관련법이 ‘한일합방의 공으로 작위를 받은 자’의 재산을 환수하도록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이에 대해 이해승이 일제로부터 작위와 은사금을 받은 친일 행위자인데도
친일파 김연수의 ‘秀堂門’ 현판
▲전주 종합운동장 정문과 그 위에 걸린 김연수의 현판 ©민족문제연구소 전주 종합경기장 정문 일주문에는 친일파의 공적을 기념하는 현판 ‘秀堂門’이 버젓이 걸려있어 시민들의 비난을 사고 있다.수당문은 제44회 전국체육대회(1963년)때 삼양사 회장으로 있던 김연수가 낸 성금으로 세운 것으로, 그의 공적을 기념하기 위해 김연수의 호를 따 ‘수당문’이라고 새겨 현판을 걸었다고 알려진다. 수당 김연수(金秊秀, 1896~1979)는 전북 고부(현 고창군)의 만석꾼인 김경주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1921년 교토제국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하여 기업 활동을 시작했다. 형 인촌 김성수와 업무 분담을 통하여 토지와 자본을 증대시켜 대지주로 성장하게 된다. 그는 1936년에 경기도 관선의원과 조선산업경제조사회 위원, 1937년에는 경기도 애국기 헌납 기성회 발기, 1939년 만주국 명예총영사, 1940년 중추원 참의가 되고 이듬해에는 일왕으로부터 견수포장(絹嫂褒章)을 수여 받았다. 1937년 일제가 중국을 침략한 직후 2만원(지금의 2억원)을 국방헌금으로 바친 이래 1943년까지 바친 국방헌금 총계가 80만원을 넘었다. 특히 1944년에는 자본금 5,000만원의 조선항공 공업회사를 설립함으로써 일제의 침략전쟁산업에 지대한 공헌을 했고 친일 정치활동을 통해 일제의 전쟁협력 행위를 적극적으로 하게 된다. 1942년 1월 14일, ‘일억일심’이라는 연두 소감을 매일신보에 기고하여 조선의 민중들에게 전시체제에 협력하라고 강요한다. 그리고 조선임전보국단에 참여하여 자발적으로 황민화 운동 실천에 앞장선다. 1944년에는 이광수, 최남선, 등과 함께 ‘일본권세대(日本勸世隊)’에 참여하여 일본 유학생들에게 학병을 권유하는 유세 활동으로 유명했다. 메이지대학에서 “조선의 학도들이 입대하여 죽어야 황국신민이 될 수 있고, 그래야 조선인이 ‘신운명’을 개척할 수 있다”고 연설했다.
임종국 선생 14주기 추모식 열려
“친일인명사전을 선생님 영전에… “ [의를 좇는 사람 (3)]-친일 연구 선구자 임종국 선생 기사전송 기사프린트 박도(parkdo) 기자 ▲ 14주기 추모제가 열렸던 천안공원 묘역의 ‘나주 임종국지묘’ ⓒ2003 박도 2003년 11월 9일 오후 2시 정각, 천안공원 묘원에서 민족문제연구소 충남지부 주관으로 나주 임종국 선생 14주기 추모식이 있었다. 겨울을 재촉하는 가을비가 잠시 멈춘 공원 묘원 식장에는 민족문제연구소 임헌영 소장을 비롯한 전국 각지의 회원, 광복회원과 민족문학작가회의 고문 이기형 시인, 비전향 장기수 정순택옹, 정신대 황금주님 등 100여 참배객이 모인 가운데 추모식이 엄숙히 열렸다. 민족문제연구소 방학진 사무국장과 동 연구소 충남지부 전재진씨의 공동 사회로 고인 약력 소개, 고인 육성 듣기, 추모 말씀, 살풀이 춤, 헌화·헌주 순으로 추모제가 진행되었다. ▲ 임종국 선생 14주기 추모제에 참석한 참배객들이 고인을 기리고 있다. ⓒ2003 박도 고인의 육성 녹음은 돌아가시기 전, 기독교방송에서 임헌영 문학평론가와 대담한 테이프로, 당신이 친일 연구를 하게 된 배경 설명이었다. 1945년 임종국 선생이 중학교 3학년 때 해방이 찾아왔다. 그때 일본군은 물러가면서 20년 후 다시 조선에 온다고 했는데 정말 꼭 20년 뒤인 1965년 한일회담이 성사되었다. 임 선생은 이를 보고 일본의 재침을 경계하고자 친일 연구를 하게 되었다고 했다.임헌영 소장은 즉석 추모사를 통해 “임종국 선생의 정신을 받들어 민족문제연구소가 창설되었으며 오늘의 이 난세는 해방 후 친일파를 청산하지 못한데 그 원인이 있습니다”고 역설하면서,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추진 중인 친일인명사전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