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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출신 보훈처장, ‘보수언론’ 입김 반영했나

2012년 2월 13일 885

박승춘 국가보훈처장 심사위 ‘진보인사 배제’ 파문, 보수언론, 친일 독립운동가 서훈 취소 맹비난 , ‘친일인명사전’ 편찬했던 사학자 등 대거 교체 국가보훈처가 올해 독립유공자 서훈 공적심사위원회에서 진보 성향의 역사학계 원로 인사들을 제외한 것은 보수언론들의 공적심사위 때리기와 연결지어 보는 시각이 많다. 또 그 배경에는 보수우익 색깔이 짙은 군 출신 박승춘(사진) 보훈처장이 자리하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지난해 4월 보훈처는 시일야방성대곡으로 유명한 위암 장지연, 윤치영 초대 내무부 장관, 이종욱 전 동국대 이사장 등 19명의 서훈을 취소했다. 한때 독립운동을 했지만 훗날 전향해 적극적인 친일 활동을 펼친 사실이 드러나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이들이었다. 사전에 수록된 독립유공 서훈자 20명 가운데 관련 소송이 진행중이어서 심의가 유보된 김성수 전 <동아일보> 사장을 제외한 모든 이의 서훈이 박탈된 것이다. 서훈 취소 결정 뒤 <조선일보> 등 보수언론은 정부를 맹비난했다. 보훈처 공적심사위도 집중적인 공격 대상이 됐다. 공교롭게도 이번 위원 재위촉에서 제외된 학자들은 공적심사위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맡고 있었다. 이만열 교수가 서훈 등급을 최종 결정하는 2심 위원장을, 윤 전 총장과 서중석 교수는 2심 위원으로 일해왔다. 이준식 교수는 1심 2분과 위원장을 맡아왔다. 공적심사위원회는 1심(33명)과 2심(17명)으로 구성돼 있는데, 1심은 1분과(3·1운동 이전), 2분과(국내 항일), 3분과(해외 항일)로 나뉜다. 공적심사위에 몸담았던 한 관계자는 “서훈 취소 뒤 보수언론이 끈질기게 물고 늘어져 보훈처로서도 부담이 컸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 사학계 원로들 배제는 김성수 서훈 취소를

“보훈처의 유공자 심사위원 교체 몰상식하다”

2012년 2월 13일 592

국가보훈처가 지난달 독립유공자 공적심사위원회에서 이만열 숙명여대 명예교수(전 국사편찬위원장) 등 원로 사학자들을 대거 교체한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바뀐 인사들 중에는 윤경로 전 한성대 총장, 서중석 성균관대 교수, 이준식 연세대 연구교수 등도 포함돼 있다. 독립운동 분야에서 탁월한 연구성과를 인정받는 학자들이다. 이들을 한꺼번에 배제하고 제대로 된 공적심사가 가능할지 근본적인 의문이 든다. 보훈처의 독립유공자 심사 대상 시기는 1895년 을미의병부터 1945년 8·15 광복 때까지다. 오랜 연구를 통해 이 시기 독립운동의 여건과 흐름, 심사 대상자의 구체적인 활동 등을 세세하게 알지 못하면 정확한 공적 평가가 불가능하다. 정부의 어느 자리보다 전문성이 우선시되는 이유다. 그런 점에서 이만열 명예교수 등을 교체한 것은 몰상식의 극치가 아닐 수 없다. 이 명예교수는 독립기념관의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장을 지냈고 한국독립운동사 편찬위원장도 맡았다. <105인 사건과 신민회 연구> 등을 저술한 윤경로 전 총장과 신흥무관학교 기념사업회 공동대표인 서중석 교수 등도 이 분야의 전문성을 새삼 거론할 필요가 없다. ▲박승춘 국가보훈처장 그런데도 보훈처가 이들을 갑작스레 교체한 것은 박승춘 보훈처장의 이념성향 및 행태와 따로 떼놓고 판단하기 어렵다. 맹목적 보수우익 색채의 박 처장이 이념을 잣대로 양식 있는 학자들을 솎아낸 것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 이만열 명예교수 등은 <친일인명사전> 발간을 주도하고, 만주국 장교로 항일세력을 탄압한 고 박정희 대통령을 사전에 올렸다. 또 2010년에는 국방부가 추진한 백선엽 예비역 대장의 명예원수 서훈에 반대해 없던 일로 되돌리기도 했다. 만주국 중위였던

日목사가 대사관 ‘위안부 소녀상’ 앞에서…노무라 목사, ‘사죄’ 연주·헌화

2012년 2월 13일 451

  1970년대 ‘청계천 빈민의 성자’였던 일본인 노무라 모토유키(81·야마나시현 베다니교회·사진) 목사가 13일 오전 서울 중학동 주한일본대사관을 찾아 ‘정신대 할머니’ 문제에 대해 사과하지 않고 있는 일본 정부에 항의하고, 대사관 앞 평화비(위안부 소녀상)에 기도와 헌화를 한다. ‘제정구기념사업회’ 등에 따르면 노무라 목사는 12일 경남 통영에서 열린 빈민운동가 고 제정구 전 국회의원 13주기 추모식에 참석한 뒤 13일 서울로 올라와 부인 요리코(79)씨 등 일행과 함께 평화비 앞에서 예배를 드릴 계획이다. 노무라 목사는 방한에 앞서 국민일보로 보낸 이메일을 통해 “주한 일본대사관을 방문, 종군위안부 문제에 대해 일본 정부가 성실히 응할 것을 요청한다면 일본 공안 당국으로부터 비국민, 매국노로 몰린다는 것을 알고 있다”며 “하지만 일본은 하나님의 정의에 반한 종군위안부와 같은 역사적 사실에 대해 깊이 회개해야 옳다”고 밝혔다.그는 이어 “현재 일본은 도쿄지사의 망언 등과 같이 나치스의 히틀러를 방불케 하는 급격한 우익화의 길을 가고 있다”며 “이를 막을 여생이 얼마 남지 않은 ‘할배(할아버지의 경상도 사투리)’지만 ‘위안부 소녀상’ 앞에서 ‘울밑에 선 봉선화’를 플루트로 연주해 위안부 할머니의 아픔을 치유해 달라고 하나님께 호소하겠다”고 덧붙였다. 노무라 목사는 70년 초 고 제 의원과 화성 활빈교회 김종길 장로(당시 청계천 활빈교회 집사) 등과 함께 청계천과 경기도 화성에 빈민자활공동체의 탁아소를 세우는 등 80년대 중반까지 구제사역에 힘썼다. 특히 그는 일본의 조선 침략 역사를 회개하는 일본 목회자와 함께 기도회를 이끄는가 하면 청계천 빈민가

재판 끝났다고 한·일 과거사 마침표 의미는 아냐”

2012년 2월 6일 473

(한국일보, 2012.02.05) 군속재판서 한국 변호 맡은 일본인 변호사 “재판 끝났다고 한·일 과거사 마침표 의미는 아냐”

박근혜 위원장, ‘독재자 박정희’ 맞습니까?

2012년 2월 1일 853

박근혜 위원장, ‘독재자 박정희’ 맞습니까? 김익한 시민역사관 건립위원회 기획단장  2004년 민족문제연구소와 <오마이뉴스>가 함께 진행한 ‘친일인명사전, 네티즌의 힘으로’ 모금을 통해 지난 2009년 11월 9일 친일인명사전을 발간했습니다. 국민들의 참여와 지지 없이는 이룰 수 없었던 일입니다. 이에 민족문제연구소와 <오마이뉴스>는 2004년 모금 8주년을 맞아 당시 모금에 참여해주셨던 그날의 ‘당신’을 찾고자 합니다 . 개발과 독재의 시대에 대한 일방적인 미화가 도를 넘고 있습니다. 기념관이나 동상 건립 등 노골적인 우상화에서부터 다큐멘터리나 드라마 방영 등 우회적인 이미지 조작에 이르기까지 역사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돌리려는 시도가 전방위적으로 자행되고 있습니다.  물론 시각에 따라 한 시대에 대한 해석과 평가에 차이가 존재할 수는 있습니다. 그렇지만 어떤 주장을 하더라도 객관적 사실에 기초해야 하며 최소한의 합리성은 갖추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최근 뉴라이트를 비롯한 보수세력과 어용언론, 그리고 현 정권이 합작하여 추진하고 있는 대대적인 ‘근현대사 다시쓰기’는 역사왜곡이라는 표현이 부족할 만큼 정도가 지나칩니다. 그들은 김구 선생을 테러리스트로 묘사하는 등 독립운동세력을 비하합니다. 일제가 한국근대화의 초석을 놓았다고 강변합니다. 이승만을 건국의 아버지로 박정희를 민족중흥의 지도자로 떠받들면서 친일·독재의 과오는 애써 감추려합니다. 자랑스러운 민주화운동의 역사는 흔적조차 지우려 합니다. 심지어 민주주의 말살, 인권탄압, 장기집권으로 불행한 최후를 맞은 독재자들을 자유민주주의의 수호자인양 포장하기까지 합니다.   긴말이 필요 없습니다. 21세기 대명천지에 ‘역사쿠데타’가 진행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반공만 외치면 만사형통이던 냉전시대, 친미만 외치면 되던 사대굴종의 시대, 돈이면 안 되는 것이 없었던 부정부패의 시대, 그들이 마음 놓고 기득권을 향유했던 그때 그 시절을.   수구세력은 소멸되어가는 ‘특권의 시대’를 연장하고 공고히 하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우선 올해 치러지는 대선에서 승리하는 것이 목표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이승만

오만한 식민지근대화론,그 실증적 오류를 파헤치다

2012년 1월 27일 4538

오만한 식민지근대화론, 그 실증적 오류를 파헤치다– 허수열, 일제초기 조선의 농업 : 식민지근대화론의 농업개발론을 비판한다(2011.12, 한길사)- 박수현(연구소 편찬실장)     식민지근대화론이 국내에 소개되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중반 이후였고, 본격적인 논쟁은 1990년대에 들어서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역사학계에서는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이들의 주장을 신선한 충격으로 받아들였다. 식민지근대화론은 역사학계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던 ‘내재적 발전론’과 ‘수탈론’에 반대해 안병직, 이영훈을 중심으로 한 경제사 전공자들이 들고 나온 시각이었다. 이들은 조선사회의 내재적 자본주의화 가능성, 즉 ‘내재적 발전론’을 부정하고 한국 근대는 서구 근대의 수용과 이식을 통해 발전의 계기를 맞았다고 주장한다. 나아가 식민지시기를 ‘수탈론’, 즉 ‘수탈과 저항’의 관점으로만 파악하는 역사학계의 기본 인식을 비판하고, ‘개발’의 측면도 인정해야 한다는 이른바 ‘수탈과 개발’을 강조했다. 식민지근대화론의 대두는 그 근거나 논리의 타당성 여부에 상관없이 그동안 틀에 박힌 연구방법론과 인식론에 안주하던 역사학계에 큰 자극제가 되었고, 특히 식민지시기 연구자들에게는 패러다임의 전환을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이들의 주장은 ‘수탈’을 부정한 것이 아니라 ‘개발’의 측면도 함께 봐야 한다는 것이었고, 한국 자본주의의 발전이라는 큰 틀 속에서 ‘개발’에 한국인도 주체적으로 참여했다는 점을 부각시켜야 한다는 논지였다. 이들 또한 자신들의 주장을 ‘식민지수탈-개발론’으로 칭했다. 하지만 정작 이들의 연구는 통계에 매몰되어 ‘개발’만을 부각하는 편향성을 드러냈으며, 이 또한 일본인자본 위주의 ‘개발’로서 조선인자본의 억제와 차별이라는 본질은 놓치고 있었다. 그 결과 이들의 주장은 처음부터 식민지미화론으로 귀결될 위험성을 내포하고

2011년 연구소 10대 뉴스

2012년 1월 27일 1255

[2011년 연구소 10대 뉴스] 1.연구소 창립 20주년 1991년 2월 27일 창립한 연구소가 어느덧 성년을 맞았다. 연구소는 2월 26일 서울 조계사 안 전통문화예술공연장에서 각계 내빈들이 참석한 가운데 창립 20주년 기념식을 가지고 자축과 결의의 시간을 함께 했다. 전국 각지에서 모인 200여명의 회원들과 김병상 이사장, 임헌영 소장을 비롯한 연구소 이사, 운영위원 등 임직원들은 연구소의 역사정의를 향한 20년간에 걸친 험난한 도정을 돌이켜보고, <친일인명사전>을 발간하여 국민과의 약속을 지켜냈듯이 반드시 ‘시민역사관’ 건립을 완수하여 수구세력의 역사왜곡 책동을 막아내자고 다짐했다.   2.’역사정의실천 시민역사관’ 건립 운동 본격화  친일인명사전의 기적을 역사정의실천 시민역사관으로 이어 가자’는 구호 아래 연구소는 올해 ‘시민역사관’ 건립 운동을 본격화했다. 시민역사관은 ▷친일로 얼룩진 한국근현대사의 진실과 친일청산운동의 역사를 알려내고 ▷뉴라이트가 전파하는 식민지근대화론을 막아내며 ▷반민주독재정권을 찬양하는 이승만·박정희 정통론을 분쇄하는 최선봉에 설 것이다. 건립위원회(위원장 이이화)는 효과적인 사업 추진을 위해 상설 사무국을 설치하고 홍보와 모금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10월 5일 원불교 서울회관에서 열린 ‘친일·독재의 역사청산과 역사왜곡 저지를 위한, 역사정의실천 시민역사관 건립 모금 콘서트’는 600석을 가득 메운 시민들의 뜨거운 열기 속에 성대하게 치러졌다. 연구소는 ‘시민들과 함께 만드는 역사관’이라는 취지를 살려 시민들의 자발적인 유물 기증 운동도 적극 벌여나가고 있다. http://ibuild.tistory.com/   3.장지연 등 친일인명사전 등재자 19명 서훈 취소 … 일부 유족 취소 소송도 잇따라 정부는 4월 5일 김황식 국무총리 주재로 국무회의를 열고 장지연을 비롯한

21세기 ‘빨갱이 식별법’ 황당하군요

2012년 1월 25일 986

21세기 ‘빨갱이 식별법’ 황당하군요 박한용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실장    2004년 민족문제연구소와 <오마이뉴스>가 함께 진행한 ‘친일인명사전, 네티즌의 힘으로’ 모금을 통해 지난 2009년 11월 9일 친일인명사전을 발간했습니다. 국민들의 참여와 지지 없이는 이룰 수 없었던 일입니다. 이에 민족문제연구소와 <오마이뉴스>는 2004년 모금 8주년을 맞아 당시 모금에 참여해주셨던 그날의 ‘당신’을 찾고자 합니다. 앞으로 4회에 걸쳐 이와 관련된 기사를 게재할 예정입니다. 시민 여러분들의 열화와 같은 지지와 성원으로 민족문제연구소가 친일인명사전을 펴낸 지 2년 여가 지났습니다. 친일인명사전 편찬 대장정 18년! 묘하게도 일본의 괴뢰국인 만주국 장교 출신의 독재자 박정희가 장기집권한 기간과 같습니다. 한 시대의 독소를 일부라도 제거하는 데 이렇게 오랜 세월이 필요할 수밖에 없었던 준엄한 현실이 우리를 숙연하게 만듭니다. 비록 우여곡절을 겪긴 하였으나 친일인명사전은 평범한 시민들의 양심과 정의가 만들어 낸 위대한 진실의 기록으로서 역사의 한 페이지에 남을 것입니다. 그러나 역사는 반복되는 걸까요. 사전이 발간된 지 불과 2년, 친일인명사전은 물론 우리 시민사회가 성취한 과거사청산의 성과를 송두리째 무산시키는 거대한 역사범죄가 정권 차원에서 다시 시도되고 있습니다. 2011년 한 해만 하더라도 실로 놀라운 역사조작이 우리 눈앞에서 버젓이 자행되었습니다. KBS는 6·25특집이란 명목으로, 일제강점기 항일독립군을 토벌하고 무고한 민간인들을 잔혹하게 학살하여 살인귀(殺人鬼)부대로 악명을 떨친 간도특설대의 장교 출신 백선엽을 ‘6·25 전쟁영웅’으로 추앙하는 특집 다큐멘터리를 방영했습니다. 그 직후 서울현충원 관계자는 백선엽을 사후에 서울현충원에 안장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민족반역자가 대한민국의 수호천사로 바뀌어 특별대우를 받게 된 것입니다. 독립운동가와 ‘토벌대’ 장교가 죽어서도 이웃하는, 웃지 못할 아이러니가 벌어지고 있는 것이 오늘날 대한민국의 서글픈 자화상입니다. 간도특설대 창설요원으로 부대 해산 때까지 ‘맹활약’한 김백일 또한 6·25 때 10여 만 명의 피난민을 이송한 흥남철수작전의 주역으로 둔갑해 거제포로수용소 유적지에 동상이 세워졌습니다. 정작 선행의 주역인 현봉학 박사를

[전시]사진가 이재갑 회원 “상처 위로 핀 풀꽃”

2012년 1월 20일 933

■ 전  시  개  요   ○ 전 시 명 : 이재갑 <상처 위로 핀 풀꽃>-강제징용된 조선인의 흔적을 중심으로○ 주    최 : 평화박물관 space99  ○ 기    간 : 2012. 1. 11(수)∼2012. 2. 10(금) 월요일 휴관 11:00-19:00○ 장    소 : space99 (서울 종로구 견지동 99-1)○ 전시부문 : 사진      한국을 대표하는 다큐멘터리 사진가 이재갑의 개인전이 2011년 8월 대구 전시에 이어 2012년 1월 11일 서울에서 개막된다. <상처 위로 핀 풀꽃>은 1996년부터 지금까지 일본과 한국을 수차례 오가며 카메라에 담은 한국 속의 일본문화와 일본으로 강제 연행된 조선인의 흔적을 모아낸 사진전이다. ■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끈질기게 기록한 16년다큐멘터리 사진가 이재갑의 작업 중 한축은 역사 속의 희생자들의 흔적과 한(恨)에 대한 기록이다. 우리 근대사에서 한국전쟁과 더불어 아직까지도 그 아픔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라면 바로 일제 35년일 것이다. 작가가 16년전 한국 속에 남아있는 일제의 흔적과 그 속에서 영위되고 있는 우리 민족의 삶, 그 부조화에 주목하며 시작한 작업은 현해탄을 건너 후쿠오카, 오사카, 나가사키, 히로시마, 오키나와 등 일본전역을 아우르며 더 너른 층위로 확산되었다.   ■ 기억되지 않는 역사는 반복된다. 사진가 이재갑의 사진기는 흐르는 시간의 자취와 변해가는 사물의 형태에 대한 관찰을 넘어 우리의 기억 속에서 희미해져가는 불과 한세기 전의 역사, 유령처럼 떠도는 식민지의 잔영을 다시 우리 앞에 불러낸다. 사라져가는 것들, 그것이 되새기고 싶지

일본서 더 잘나가는 ‘친일파 명단’, 참담하다

2012년 1월 18일 1261

일본서 더 잘나가는 ‘친일파 명단’, 참담하다 방학진 민족문제연구소 사무국장  2004년 민족문제연구소와 <오마이뉴스>가 함께 진행한 ‘친일인명사전, 네티즌의 힘으로’ 모금을 통해 지난 2009년 11월 9일 친일인명사전을 발간했습니다. 국민들의 참여와 지지 없이는 이룰 수 없었던 일입니다. 이에 민족문제연구소와 <오마이뉴스>는 2004년 모금 8주년을 맞아 당시 모금에 참여해주셨던 그날의 ‘당신’을 찾고자 합니다. 앞으로 4회에 걸쳐 이와 관련된 기사를 게재할 예정입니다. <친일인명사전>의 연원을 이야기하자면 반드시 짚어야 할 역사적 사건이 둘 있습니다. 1949년 6월 6일 백주대낮에 친일경찰들에 의해 무장해제를 당하고 무릎을 꿇어야 했던 ‘반민특위 습격사건’과 바로 20일 뒤에 일어난 ‘백범 암살사건’이 그것입니다.   이 사건들은 친일세력이 민족주의세력을 국가운영에서 배제하고 일제시기의 기득권을 완전히 회복하게 되는 전기가 되었습니다. 이후 이 땅에서 ‘친일청산’은 더 이상 민족적 과제가 아니라 ‘빨갱이의 농간’이요 ‘국론분열 행위’로 간주되고 말았습니다. 이제 친일청산을 외치는 일은 가시밭길을 넘어 목숨을 거는 위험천만한 체제도전이 되고 만 것입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소설가 조정래 선생은 친일문제 연구에 평생을 바친 고 임종국 선생과 관련해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했습니다. “임종국 선생은 그때 모든 사회진출이 차단되어 천안에서 밥을 굶듯이 심한 가난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그분은 해방 이후 모든 지식인이 친일파에 대한 연구나 언급을 철저하게 기피하고 있을 때 오직 혼자서 펜을 들었고, <친일문학론>이라는 책을 내놓았습니다. 그런데 그 보복은 가혹하고 잔혹했습니다. 친일파가 모든 분야에서 득세하는 세상에서 그분은 굶어 죽을 수밖에 없도록 철저하게 사회 진출을 차단 당했습니다.   생활고에 시달리는 그분의 비참한 모습은 친일파에게 도전한 사람이 어떻게 되는지를 보여주는 모델 케이스이기도 했습니다. 그 공포에 질렸음인지 친일파를 문제 삼는 지식인은 그 후로 단 한 명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아사지경에 빠진 고난 속에서도 친일파 연구를 포기하기는커녕 오히려